생원[生員] 과 진사[進士]
생원 [生員]
요약
조선시대 생원과(生員科)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
본문
생원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본래 국립 중앙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의 감생(監生)을 이르던 말이었으나, 송(宋)나라 이후에는 주현학(州縣學)의 지방 생도를 생원이라 하여 감생과 구분하는 말로 쓰였다.
고려에서도 지방 주현학의 출신을 생원이라 하였는데, 이들이 치르던 시(試)·부(賦)·경의(經義)의 시험을 승보시(陞補試) 또는 생원시(生員試)라 하여 합격자를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과거제도를 두면서 소과(小科)를 생원과와 진사과(進士科)로 나누고 생원시험에는 명경과(明經科)를 택하게 하여 오경의(五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을 짓게 하였다. 이들의 시험은 3년에 한 번, 1차시험인 초시(初試)는 상식년(上式年:寅·申·巳·亥年)의 가을에 시행하여 전국에서 1,500명을 뽑고, 2차시험인 복시(覆試)는 이듬해 식년(式年:子·卯·午·酉年) 봄에 시행하여 여기에서 생원·진사 각 100명씩을 뽑았다.
이로써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 및 하급 관원으로 입사(入仕)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으며, 대과(大科:文科)를 지망하는 예비적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험은 양반 자격시험의 성격을 띠며 합격된 생원은 선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본래는 출세의 관문인 문과는 생원·진사시를 거쳐야만 치를 수 있었으나, 과거제도가 문벌 양반의 출세도구로 이용되어 이를 거치지 않고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생원·진사는 합격자의 수가 많기 때문에 문벌 양반에게 밀려 문과 합격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는 지방 양반들의 신분적 지위를 재확인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사정 아래 놓여 있던 생원·진사들은 스스로를 소성(小成)이라 하여 만족하고,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지방 사회의 지배자로 지방 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생원과 진사의 비중은 그 시험에 따라 변하였는데 고려에서는 진사시를 중시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반대로 생원시를 중시하여 한때 진사시를 폐지한 적도 있으나 단종 때 부활되면서부터는 진사시가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진사가 통속적으로는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화되어 구별 없이 생원도 진사라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생원은 나이 많은 선비를 부르는 말로 변하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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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원 [生員 ] | 네이버 백과사전
진사 [進士]
요약
조선시대 진사시(進士試:製述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준 칭호.
본문
원래 중국 수(隋)나라에서 비롯되어 당나라 때는 수재(秀才:정치학) ·명경(明經:儒學)보다 특히 진사(문학)가 존중되어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려에서도 958년(광종 9)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1차시험에 합격한 자를 상공(上貢:중앙)진사 ·향공(鄕貢:지방)진사 ·빈공(賓貢:외국인)진사라 하였고, 2차시험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하였는데, 이들의 시험과목은 시(詩) ·부(賦) ·송(頌) 및 시무책(時務策) 등이었다.
조선 초에는 문과(文科:大科)의 예비시험인 소과(小科)에 생원시(生員試)만 실시해 오다가, 1438년(세종 20) 진사시도 설치, 문예(文藝:詩 ·賦 ·頌 ·策)로써 시험하여 합격한 100명에게 진사의 칭호와 백패(白牌:합격증)를 주고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였다. 한편,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참봉 ·훈도 ·오위장 등 종9품직을 제수받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때는 진사가, 조선 전기에는 생원이 우위(優位)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시 진사가 우위에 있었고, 문과를 단념한 진사는 지방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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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進士)[Jinsa, a Confucian who has only passed the first civil examination]
개설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거시험이었던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을 양대업(兩大業)이라고 하였고, 제술업은 진사과(進士科)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과(文科)에 해당하는 진사과와 조선시대의 소과에 해당하는 진사시는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진사는 진사시에 합격한 대상자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으며, 대과(大科: 文科)에 응시할 자격을 가진다.
내용
고려 귀족이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조선 건국 직후 즉위 교서를 통해 태조는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혁파하였다(1392). 그러나 하루아침에 진사시를 없애기는 어려워 태조 2년에도 감시(監試: 進士試)를 실시하여 99명을 선발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는 복구되었으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6년 만인 세종 26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그 뒤 1453년(단종 원년)에 복구되어, 과거제도가 철폐되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조선 초기 약 60년간 진사시는 실시되지 못한 셈이다.
진사와 생원(生員)과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는 진사시가 없이 생원시만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며, 실제 진사시가 생긴 초기에는 성균관에서 좌차(座次: 좌석의 차례)가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유학자들은 사장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장 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가 중시되는 경향이었다.
진사시는 생원시와 마찬가지로 향시(鄕試)와 복시(覆試)로 구분되는데, 향시는 각 지방에서, 복시는 예조(禮曹)에서 실시되었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은 복시인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100명의 진사가 선발되었다. 진사시의 초시에는 중앙의 한성시와 지방의 향시가 있었는데, 한성시에서 200명, 향시에서 500명이 선발되었고, 예조가 실시하는 복시에서 100명이 합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가 162회, 수시로 실시된 증광시(增廣試)가 67회로 모두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 진사시는 210회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배출 인원은 23,776명이었고, 현재 방목(榜目)이 남아있는 진사는 20,974(생원은 19,675)명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는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가는 것이 당시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과 급제에 실패하는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무직의 사류(士類)로 남아있는 진사들도 있었다. 생원과 진사를 합해 약 6.4%만이 문과에 합격하고, 93.6%가량은 백패(白牌)만 가진 채 살았던 것이다. 스스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은 진사들도 마찬가지로 백패만 가진 채 무직의 사류였다. 이는 학교시험을 단계적으로 거쳐 최종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학교제와 과거제가 일원화되지 않고 별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진사시를 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여, 조선 후기 이후에는 진사의 자격만을 따기 위해 진사시를 본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하여 진사시를 합격한 사람 가운데 일부만이 대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음관(蔭官)으로 관직을 받는 경우도 극히 소수였으며, 받는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10~20년씩을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었다. 관직이라 해도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해당되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가문의 배경이 약한 경우는 무직의 진사로만 남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변천사림파(士林派)가 등장한 이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는 대체적으로 생원보다 높아졌다. 19세기 이후 생원과 진사를 비교해보면 생원보다 진사가 훨씬 많았다. 한말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대개 늙은 유생들을 생원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오히려 진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유생들은 생원보다는 진사가 되기를 원했고, 진사를 보다 격이 높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생원시와 진사시는 그 실시 횟수와 뽑는 인원도 늘어나, 진사시에 100명이 훨씬 넘게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진사시의 합격자는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생원시의 합격자는 지방 출신이 많은 것도 특징이었다. 생원·진사가 아니어도 문과에 직접 응시할 수 있었는데도 진사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응시한 까닭은 진사는 유학자로서의 자격을 국가로부터 확인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진사는 즉각 관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사족으로서의 일정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진사는 무직의 사류였지만 면역의 특전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참봉이나 교도 등의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고, 지방사회에서 여러 가지 기구를 조직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교와 서원 유생의 명부[儒案, 靑衿錄]를 장악하고 향촌을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섰다. 따라서 진사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의미를 넘어 지방사회에서 유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활용되었다. 진사의 자격으로 지방민의 교화에 나서고, 백성에 대한 통제를 거들었으며, 그 밖에도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시설의 관리와 이용, 수령 등의 진퇴 등의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때로는 지방의 유력자로 지방관과 결탁하여 이권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해도 진사가 되고자 하였으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진사는 더욱 양산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태학지(太學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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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과거제도(韓國의 科擧制度)』(이성무, 집문당(集文堂), 1994)
『조선후기신분직역변동연구(朝鮮後期身分職役變動硏究)』(이준구, 일조각(一潮閣), 1992)
「15세기(世紀) 사마방목분석(司馬榜目分析)」(최진옥,『청계사학(淸溪史學)』5, 1988)
『고려과거제도사연구(高麗科擧制度史硏究)』(허흥식, 일조각(一潮閣), 1981)
『이조생원진사시(李朝生員進士試)의 연구(硏究)』(송준호, 국회도서관, 1970)
「이조사마시고(李朝司馬試考)」(조좌호,『성균관대학교논문집(成均館大學校論文集)』14·16, 1969·1971)
「사마시(司馬試)의 출신(出身)과 방회(榜會)의 의의(意義)」(이홍렬,『사학연구(史學硏究)』21, 1969)
진사백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사가 어느정도 직책인지요?
진사(進士)
고려·조선시대 진사과(進士科;製述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도를 처음으로 실시,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를 뽑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때에 따라 시험 과목과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진사는 생원과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 또는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에서 각각 100명이 배출되었다.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700명을 뽑아, 서울에서 2차시험인 복시를 보게 하여 100명을 뽑았다.
그뒤 경기의 향시를 폐지하고 한성시를 두 곳으로 나누어서 보게 하였다. 이렇게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1438년(세종 20)부터는 그 합격증서로 백패(白牌)를 주었다.
이들은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그 전과는 달리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가 생원보다 높았고, 특히 후기에 과거가 권문세가의 농락을 받게 되자 지방의 과거 응시자들은 거의가 진사 합격에만 뜻을 두어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
한편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자 생원도 진사 칭호를 사용하였다.
■ 과거제도
■ 초시 : 각도 감영에서 행하는 향시나 중아에서 행하는 생진과 초시를 조홀강이라 한다. 이 조홀강에 급제하면 조홀첩을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 생진과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다. 이 조홀강을 초시라 하며 여기에 급제하면 이초시·김초시 라고 불러준다.
■ 생진과 : 각 지방에서 조홀강에 급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4년 만에 한번씩 과거를 보이는데, 4년 1시를 식년시라고 하며 子(자)·午(오)·卯(묘)·酉(유)년에 시행하는 것이다.
생원과 - 경서를 암송하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뜻을 물어본다. 시험관은 응시자를 불러 시험을 보아 그 공부 정도를 通(통)·略(약)·祖(조)·不通(불통)의 네 가지로 나누어 通은 2점, 略은 1점, 祖는 반점, 不通(불통)은 0점으로 하여 총 14점 반 이상에 달하는 자를 급제로 했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을 이생원 김생원이라 했다.
진사과 - 제술과 라고도 한다. 본과 시험에 시험관이 제목을 내고 시를 짓게 하여 시간을 엄수토록 명한다. 응모자들은 각자 준비된 필묵으로 시를 지어내면 시험관들은 그 시를 모아서 우선 글만 잘 지었으면 上上, 上中, 上下, 二上, 二中, 二下, 三上, 三中, 下下 아홉 단계로 정한 뒤 上上은 9점 ~ 下下는 1점으로 등분하여 채점한다. 대개 二下(4점)까지를 택하여 급제로 정했다. 이 시험에 들은 사람을 최진사, 장진사라 했다.
** 생진과 급제자에게는 그 증서를 백패 즉 백지에다 써서 준다.
■ 대과 : 지방에서 생진과와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으로 대과 즉 문과에 응시하려는 사람은 성균관에 입학을 허가하였다. 4년에 한번씩 생진과를 통해 배출된 100명의 생원과 진사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방식 : 제1차 시험 초장 - 경서암송, 제2차 시험 중장 - 서부, 제 3차 시험 - 전시(이 전시 결과 - 33명의 등급을 갑·을·병 3등급으로 나누어 선발) ** 대과에 급제하면 그 증서를 홍패 즉 홍색지에 써 주었음.
3년마다 한 번씩 식년(式年 : 子·卯·午·酉年)에 실시되며, 초시(初詩) · 복시(覆詩) · 전시(殿詩)의 3단계가 있다. 초시에서는 서울·지방에서 270명, 복시에서는 28명을 뽑았으며, 마지막 전시에서는 이들 28명으르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의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전시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라는 합격증서를 주고「출신(出身)」이라고 불렀다.
홍패 : 붉은 바탕의 종이에 합격자의 성적·등급·성명 등을 먹으로 썼다.
백패 : 흰 종이에 관명(官名) · 성명 · 과별(科別 : 생원 · 진사 · 잡과 등) 성적등급(成積等級)이 적혀 있는데, 생원은 동편에 진사는 서편에 줄지어 서서 국왕에게 사배(四排)를 올린 뒤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출처 naver 지식 답변 drg87
진사, 생원이 무엇인가요? sak****
re: 진사와 생원 ecips
#1
생원은 생원시(고려시기에는 승보시陞補試), 진사는 진사시(고려시기에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통해서 선발되며, 소과 맞습니다.
이들은 이후 성균관에 입학해서 대과를 준비하게 됩니다만, 일부에서는 대과 준비없이도 종9품의 일부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습니다.
#2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등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창작의 재능을 각각 보게됩니다.
법제적으로 생원과 진사는 동일합니다만, 조선초기에는 생원이 약간더 우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진사시가 조선초기에는 없었고, 진사시가 생긱이후에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300일 동안 앉는 자리의 순서가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기로 넘어오면서, 글쓰는 능력 즉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어 사회적 존경에 있어서는 진사가 좀더 우월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생원, 진사의 시험을 일종의 소과로 본다면 (이건 의견이 분분해서 요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들 응시자중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고령자(70~80대도 있었다네요)가 많아, 평균연령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즉 이 말은 시험 붙기가 어려웠다고 봐야겠지요.
출처 naver 지식 [출처] 생원[生員] 과 진사[進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