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강. 세상을 이기게 하는 권세 (요 19:7-13)
요 19:7-1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인간은 집단생활을 합니다.
집단과 집단이 만나면 반드시 힘으로서 우열(優劣)을 가리게 됩니다.
이걸 정치 행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동물이라 함은 힘의 원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칙으로 다스려진다고 하지요.
다수결이란? 사람의 수로 의사결정권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사람의 수(數)는 곧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는 힘이고 그 힘은 곧 사람의 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집단이고 사람의 숫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자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세상이 경계가 무너지고 말았어요.
세상에서의 정치적인 일들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통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도 사람의 수(數)에서 힘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사람의 수를 동원하여서 예수를 죽이라고 하고 있어요.
빌라도는 사람의 수를 동원하여서 일으키는 민란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권세 이야기가 나옵니다.
권세(權勢)란? 사람의 숫자로 저울추가 기울어졌다는 말이에요.
저울추가 기울어졌다 함은 힘이 한 쪽으로 쏠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숫자로 힘이 한 쪽으로 쏠린 것은 권세라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사람의 수가 곧 권세이고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권세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권세는 사람의 숫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의 숫자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곧 사람에게서 나온 권세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권세가 아니면 어디서 나온 권세일까요?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권세를 몰라요.
그래서 오늘은 사람에게 없는 권세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이 권세가 도대체 어떤 권세이길래 예수님이 죽음도 불사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게 하는 그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권세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왜? 힘을 축적할까요?
이는 힘이 곧 자기를 지켜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만 뜨면 본능적으로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이게 바벨탑 사건으로 잘 나타났습니다.
바벨탑이 뭔가요?
인간이 흩어짐을 면하고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탑을 쌓은 것입니다.
탑은 인간의 힘을 상징하고 있어요.
왜? 탑을 쌓습니까?
이는 그 그늘에서 보호 받고자 함입니다.
급기야 그 탑을 하늘에까지 침노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곧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인간이 힘을 가지면 그 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 죄인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어리석음이에요.
인간들은 사람의 수가 힘이 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힘만 생기면 하나님을 배도(背道)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요.
배도(背道)란? 쉬운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걸 멀리서 찾지 마시고 우리 자신들에게서 찾아보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멀리 합니까?
힘이 없을 때인가요?
아니면 힘이 있을 때인가요?
힘이 있을 때입니다.
힘이 없을 땐 하나님과 가까이 하다가도 힘만 생기면 떠나잖아요.
쉬운 말로 돈 많고 건강하면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돈 떨어지고 병들면 하나님을 찾잖아요.
백수로 살 때는 교회에 진을 치고 살다가도 직장을 얻으면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바빠서 못 온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힘을 축적하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인간의 힘은 숫자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리고 인간이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시겠지요.
인간을 흩어 버리는 일을 하겠지요.
그래요.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흩어 버리는 것은 곧 힘을 허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왜? 인간들의 힘을 허무실까요?
이는 인간들이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인간이 힘을 가지면 반드시 타락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거에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루 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거에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일컬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않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자기가 의지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힘은 곧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지 않아요.
힘을 주지 않고 도리어 힘을 빼앗아 가시는 일을 벌리십니다.
이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너무도 잘 보여 주셨어요.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하는지 아세요.
힘을 가졌을 때에요.
먹고 배부를 때에요.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16-1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 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를 하나 지어서 부르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노래가 참 의미심장해요.
어떤 노래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배도(背道)한다는 노래에요.
먹고 배가 부르면 배도한다는 말은 곧 힘을 가지면 배도한다는 말이에요.
어떤 식으로 배도하는가 하면 이방신을 섬기는 것으로 배도해요.
그 땅에 들어가면 이방신을 음란히 섬긴다고 하지요.
여기서 음란히 섬긴다는 말은 간음한다는 말이에요.
간음이란? 다른 남편을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왜? 다른 남편을 따라갈까요?
잘 해주기 때문입니다.
잘 해주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아요.
그런데 그 다른 남편이 어떤 남편인가요?
그 땅에 신(神)이에요.
가나안 민족들이 섬기는 신(神)을 말해요.
가나안 신은 땅에 신이에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신이에요.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신이에요.
그리하여 땅에 주소지를 두고 살게 만들어요.
이름하여 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뱀을 저주해 버리지요.
그리곤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합니다.
종신토록이란 말은 흙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벰에게 흙을 준 것입니다.
이 흙을 성경은 육이라고 하는데 육은 곧 이 세상을 상징해요.
그러니 마귀는 이 세상 신인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실 때 찾아와서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에게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어요.
누가복음 4장을 볼까요.
눅 4: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가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천하만국의 권세를 주겠다고 하지요.
누구에게 준다고 합니까?
자기에게 절하는 자에게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마귀의 말을 잘 들어야 해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신을 섬긴 것도 가나안 땅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고 싶어서에요.
가나안에서 살려면 가나안 신(神)을 잘 섬겨야 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가나안 신(神)은 땅에 복을 주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도하는 노래를 지어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는 너희가 이렇게 배도 할 것이라고 하는 배도의 노래를 지어주면 무슨 말이냐?
우리는 절대로 배도하지 않겠습니다!
난 하나님을 배도 안 할거야! 라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서 모세의 예언대로 배도하고 말아요.
하나님을 떠나고 가나안 신을 섬기고 말았어요.
이 말은 곧 인간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우상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름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 몸뚱이를 이길 장사는 없어요.
인간에게 있어 몸뚱이는 신(神)이에요.
누구든지 내 몸뚱이 편하게 해 주는 신이 참 신이에요.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결국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힘을 가졌을 때 행복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돈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어요.
암튼 인간은 본능적으로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곧 신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 있어 신(神)은 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자기 배를 위하여 하나님을 배도하고 언약을 어겼듯이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배를 위하여 이용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어요.
빌립보서 3장입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이 여러 번 말한다고 하지요.
우리 같으면 여러 번 말하면 들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안 들어요.
안 들으니까 여러 번 말하는 겁니다.
이건 말을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 쳐 먹는 종자란 말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과 같아요.
저희 신은 뭐라고 하나요?
배(腹)라고 하지요.
즉 자기 몸뚱이란 말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의 삶에 의미란 말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삶에 의미인 자들을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짐승이라고 해요.
인간의 존재 목적은 먹고 사는데 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가 찾아 와서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준다고 하자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존재 목적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상실해 버렸어요.
왜? 사는지를 잊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자기 몸뚱이 챙기는 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여 산다고 한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몸뚱이를 챙길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신을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뚱이를 챙기는 것을 땅에 일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자기 몸뚱이를 챙길 수밖에 없는가 하면 우리의 본질이 땅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몸뚱이가 흙에서 났기 때문입니다.
흙에서 난 몸은 흙에 것으로 살아가요.
우리 몸은 흙을 이기지 못해요.
이렇게 되면 결국 바울의 이러한 말씀이 곧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바울의 이러한 고발을 통해서 여전히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짓을 하고 말아요.
이게 우리 육신의 한계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한계를 잘 알면 그대로 두면 되잖아요.
그래 너희들은 그런 인간이지 하고 방치 하면 되잖아요.
너희 몸뚱이를 챙기고 살아라! 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가만 두지 않고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왜? 몸뚱이를 챙기고자 하느냐고 간섭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기뻐하세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라고 한단 말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 상하고 통회하는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살 수가 없을 때 하나님을 가까이서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봅시다.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하였어요.
자신의 연약함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족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몸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성경학자들 중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사람들은 눈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들은 간질병이라고 해요.
물론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능욕당하고 궁핍과 핍박 받고 곤란을 당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어요.
하지만 자기 육체에 사단의 가시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 몸에 질병으로 볼 수가 있어요.
어떤 문헌에는 바울이 간질병으로 고생 했다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간질병으로 보고 싶어요.
그럼 간질병으로 이해하고 설명을 합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요?각양의 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좇아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린 사람 아닙니까!
바울은 예수님과 방불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본인 스스로는 간질병을 안고 살았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창피한 일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그럴 것이 아닙니까?
남에 병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기 병이나 좀 고치라고 비아냥거리지 않겠어요.
그러지 않아도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폄훼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그런데 말도 어눌하면서 한 번씩 지랄병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얼마나 쪽팔리겠어요.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기 몸 좀 고쳐달라고 합니다.
세 번 씩이나 기도했다는 말은 그만큼 바울에게는 큰 문제였고 절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능력은 너의 약한데서 온전해진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능력은 바울의 연약함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약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 곧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증거란 말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바울이 잘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잘 났으면 사람들이 바울이 하는 일을 바울이 잘나서 한 일이라고 생각 할 것이 아니냐! 란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네가 못나면 못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께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하고 있어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네가 잘 나면 날 의지 하겠느냐!
네가 못 나야지 날 의지 할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약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너에게 머물게 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깨닫고 아~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구나!
내가 능욕당하고 궁핍하고 핍박당할 때가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때라는 것을 알고 도리어 자신의 연약함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늘 하는 기도에요.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를 강하게 해 달라고 하잖아요.
힘을 달라고 하잖아요.
그럼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응답하세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울을 대하듯이 대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우리의 거울이고 자화상(自畵像)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 정말 이럴 겁니까?날 이렇게 힘들게 할 겁니까?
이 힘든 것을 좀 거두어 가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 그럽니다.
야 이놈아!
너의 연약함이 곧 내 능력이 너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네가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강하면 하나님을 찾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이 없고 약할 그 때가 곧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때이므로 그 때가 가장 강할 때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인간은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어요.
이로 보건데 인간에게 힘은 곧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단초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도리어 힘을 빼앗아 가시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안고 사는 일평생을 이러한 역설적 간섭하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가치로 살지 않는 방식으로 간섭을 당하게 되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 역설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합니까?
이는 우리에게 힘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힘 없음이 곧 복(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힘 없음을 복이라 여기지 않아요.
힘 있음을 복이라고 하지!
목사들도 힘을 가지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로 신앙생활 하는지 아셔야 해요.
자기 식으로 신앙생활 고 있음을 고발당하여야 해요.
그리하여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自覺) 할수록 하루 하루 이렇게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가 나오게 되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힘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눈만 뜨면 우리 힘을 빼앗아가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야곱의 얍복 강 사건이에요.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약삭빠르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을 박살내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하시는 일을 하세요.
야곱은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이지만!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우상과 싸우는 자에요.
성도를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가나안 신(神)인 우상과 싸워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가나안 신이 있어요.
우리 몸은 땅을 지향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겨요.
세상에 유익을 구하는 수단으로 섬긴단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가나안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몸뚱이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정과 욕심을 날마다 죽이는 싸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과는 반대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땅에 기운을 받고 땅에서 붙박이처럼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땅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땅에서 빼내는 식으로 간섭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살아 갈 곳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이 조상이라 함은 우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것이 곧 우리를 다루시고 있는 모습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간섭하십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이란? 근거를 말해요.
우리가 의지할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할 근거를 허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의지할 것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약속의 땅은 믿음이 없으면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말씀을 쫓아갔다고 합니다.
말씀을 쫓아갔다는 말은 약속을 믿고 갔다는 말도 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말씀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말씀이 주체가 되어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셨듯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힘으로 삼고 의지 하던 곳으로부터 빼내십니다.
이걸 언약으로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원래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의 본토 친척 아비집인 셈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우리는 우리의 힘이 있었어요.
이름하여 행위라는 힘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우리의 행위를 힘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율법 신앙에서는 행위가 많으면 힘을 많이 갖게 되고 행위가 없으면 힘을 가지지 못해요.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는 행위는 곧 힘이에요.
이게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힘으로 삼고 살았어요.
율법 지킴이 많으면 그만큼 발언권이 세지고 교회 안에서 힘을 행사하게 되어 있어요.
상대적으로 율법 지킴이 없는 자들은 그 앞에 주눅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주눅 듦을 면하기 위하여 우리는 율법 아래서는 경쟁하듯이 행위라는 힘을 축척하기에 열심이었어요.
힘이 하나 둘씩 쌓여져 가는 재미로 살았어요.
이 모습이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 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행위를 힘으로 삼고 살던 율법 아래서 행위가 힘이 되지 않는 은혜 안으로 빼내주신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고 약속이 있는 곳으로 빼내 주셨어요.
어떤 약속이 있는 곳인가 하면 새 언약이라는 약속이 있는 곳이에요.
우리 행위로 의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의가 거저 주어지는 곳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 행위가 힘으로 행사 할 수가 없어요.
오직 은혜가 왕 노릇해요.
그러니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힘을 축척하고자 하지 않아요.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의 행위는 힘이 되지 않아요.
새 언약 안에서는 자기 행위를 힘으로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살 수가 없어요.
자기 신앙의 열심을 자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아요.
새 언약 안에서의 힘은 은혜에요.
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느냐가 곧 힘이에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는 행위를 힘으로 행사하지 않아요.
자기 안에서 자기 행위가 힘이 되는 자는 아직까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자기 안에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사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법과 은혜는 두 힘이에요.
법이 왕 노릇하느냐?
아니면 은혜가 왕 노릇하느냐?
우리는 평생 이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 안에서 우리 행위를 힘으로 삼으라 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으로 삼으라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병기라고 한 것입니다.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한 겁니다.
불의(不義)란? 인간의 행함을 힘으로 삼는 것이고!
의(義)란? 하나님의 은혜를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자랑되어지면 불의에 병기로 사용 되어지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자랑되어지면 의에 병기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와 불의가 우리 몸을 주장을 한다는 것은 곧 권세란 말입니다.
그러니 법과 은혜는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권세가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야~ 임마 웃기지 마라!
네가 모르는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빌라도는 세상 권세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금 세상의 힘으로 예수님을 재판하는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합니다.
빌라도야! 네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데 인간들이 행사하는 권세는 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이건 빌라도가 동의하건 하지 않건 중요치 않아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너는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 인줄 알지만 실상은 네가 보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바로 빌라도 네가 보지 못하는 그 세상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두 세상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세상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믿어지지도 않아요.
빌라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을 역사라고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란?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인 묵시는 이 세상에서 보면 감추어져 있는 세상입니다.
감추어져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묵시는 없는 세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묵시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묵시는 보이는 이 세상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역사가 보이지 않는 묵시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 주십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곳이 실상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좇아가게 되어 있고,
세상이 보이면 세상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 권세가 보이면 세상 권세가 두려워요.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세상 권세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말처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이면 세상 권세가 두렵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자는 세상 권세가 두려울 이유가 없어요.
두려움이란? 내가 인정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쉬운 말로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귀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귀신에 대하여 살아 있을 때는 귀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요.
그러나 귀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귀신이 두렵지가 않아요.
바울이 그랬어요.
그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제물들은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것들이에요.
즉 우상에게 고사를 지내고 시장에 유통이 되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든지 감사하고 먹었어요.
그러자 어떤 이들이 그건 우상의 제물인데 그걸 먹는 것은 곧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신은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에게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바울은 우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겐 그냥 고기일 뿐이란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고기를 먹는 것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으로 비춰진다고 한다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는 우상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으니 나는 비록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기꺼이 그 사람을 위하여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은 우상을 인정하지만 바울처럼 우상에 대하여 죽어 있는 사람은 우상은 없는 것이 되어요.
내가 우상을 인정하면 우상은 신이 되고 내가 우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이 아닌 겁니다.
이 세상 권세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눈에는 세상 권세는 권세가 아니에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권세를 가지고 협박을 해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어요.
빌라도가 행사하는 권세도 하나님께로 난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가 지금 나에게 행사하는 그 권세는 너의 권세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세란 이와 같아요.
내가 권세를 인정하면 그 권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요.
그럼 권세에 굴복하게 되어요.
그리고는 나도 그 권세를 추구하게 되어요.
왜냐하면! 자기 눈에는 권세가 힘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면 잡아야 해요.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를 권세로 보지 않아요.
빌라도가 행사하는 권세가 다 하늘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권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의 출처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권세도 살리는 권세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빌라도에게 네가 나를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나를 죽이고 살리는 그 권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너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분은 하나님이지!
빌라도 네가 아니란 것입니다.
빌라도 너도 너를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어요.
빌라도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 있어요.
세상 권세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둘은 서로 살아가는 가치관이 달라요.
이걸 우리 삶에 적용해 보세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것을 얻고자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지향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사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의 삶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하늘나라가 있다고 떠들어도 땅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땅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땅에 것을 추구해요.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세상 것을 좇아가게 되어요.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태어났어요.
세상에 길들여져 왔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세상 권세를 갖고자 좇아가고 있어요.
왜냐하면! 세상 권세가 자기에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요.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힘이었어요.
그래서 제자들끼리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웠어요.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서 세상에서의 힘을 얻고자 한 것이라는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허구를 깨트리는 일을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봅시다.
마 18:1-3=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 속에 제자들의 가치관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목적이 질문 속에 배여 있어요.
제자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 차지할까 라는 것이었어요.
이는 예수님을 권세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서 얻어질 권세가 좋았던 것입니다.
결국 더 높은 권세를 얻고자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입니다.
이러한 꼼수가 결국엔 제자들끼리 누가 더 높으냐 라는 것으로 경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제자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실존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우리 모습이 그대로 제자들 속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다름을 이야기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세워 놓고 천국과 세상의 다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이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란? 세상 권세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세상 권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권세에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높고 낮음에 관심이 없어요.
높고 낮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모르면 탐 할 일이 없어요.
탐한다는 것은 그만큼 안다는 말입니다.
권세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권세를 탐내는 것입니다.
왜? 권세를 탐냅니까?
이는 권세를 가지고 자기 유익을 도모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권세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자기 유익이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나의 것으로 사는 곳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고 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기 때문에 내 독자적인 권세를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러므로 천국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권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세상을 오래 산만큼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아요.
세상을 산 세월만큼 세상에서의 권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아요.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있어요.
그러므로 어른들은 권력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이는 그 만큼 세상에서의 성공이 주는 권력의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공부하라고 달달 볶는 것입니다.
실제 아이들은 세상 성공에 관심이 없어요.
그냥 놀고 싶어 해요.
이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엇인지 또 그 성공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모르니 성공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없는 겁니다.
성공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은 부모들이 가지고 있어요.
부모는 성공이 주는 힘에 가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불철주야를 안 가리고 공부하라고 달달 볶아 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힘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안다는 말입니다.
힘에 대하여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 높아지고자 경쟁하는 것입니다.
힘은 알수록 더 갖고 싶어져요.
힘에 맛 들여진 자는 힘을 마약처럼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른의 세계는 항상 우열이 있고 서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하지 못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의 세계는 먹고 먹히는 정글이에요.
지옥이에요.
어른은 두 사람만 만나도 힘에 의하여 서열화 하고 우열화 해요.
그러니 어른의 세계는 항상 다툼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경쟁이 있고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힘을 목말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서열이나 우열이 없어요.
평화가 있어요.
힘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너와 나를 구별하고 나누지 않고 사이좋게 노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천국을 일컬어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함이 없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논다고 하지요.
이는 힘의 법칙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계가 바로 어린아이들 세계에요.
그런데 어른들이 이러한 사이를 꼭 갈라놓잖아요.
부자 집 아들과 가난 한 집 아들로 갈라놓고!
배운 집 아이와 못 배운 집 아이로 갈라놓고 있잖아요.
이 시대 교회로 말하면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갈라놓잖아요.
누가 갈라놓나요?
목사나 장로들이 갈라놓아요.
속된 말로 교회에서 높은 직분 자들이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차별을 한단 말입니다.
교회이면 교회이지 큰 교회가 있고 작은 교회가 있지 않아요.
성경을 보세요.
어디에 큰 교회가 있고 어디에 작은 교회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에요.
천국엔 힘이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천국을 모형하고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사람의 수로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하지 않겠지요.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 한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에요.
육적 판단이란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갈라놓는가요?
어른들이에요.
즉 교회를 힘의 가치로 세우는 자들이에요.
어른들이 세상의 조건으로 아이들 간에도 담을 쌓아 버려요.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조차도 세상적인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차별해서 어린 아이들을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갑니다.
결국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고 점차 힘에 법칙으로 길들여져 가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은 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란 것을 절실히 깨달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하여 잘 아는 어른들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이는 일을 하시는 거에요.
세상에 대하여 아는 옛 사람을 죽이고 세상에 대하여 모르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새 사람으로 거듭이 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창조가 됩니다.
그러자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대하여 어린 아이들이 된 겁니다.
세상 권세에 대하여 어린 아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높아지고자 경쟁하지도 않고 세상 권세자들이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가치관이 바뀌어요.
세상 가치관은 죽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게 되어요.
가치관이 물질적 사관에서 영적 사관으로 바뀌어요.
그럼 세상적인 가치 기준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이야기를 할게요.
전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때는 교회에 성도가 적은 것을 수치로 여겼어요.
목사에겐 성도의 숫자가 곧 그 사람의 몸값이잖아요.
적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그래요.
목사님들이 교회 부흥을 외치는 것도 복음 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숫자가 곧 자기 몸값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몇 명 모입니까? 라고 물으면 과장해서 말했어요.
예를 들어서 10명이 모이면 50명이 모인다고 했어요.
이는 만나는 사람들 간에는 사람의 숫자가 곧 힘으로 작동을 하기 때문에 과장해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노회에 가면 목사님들이 묻는 첫 마디가 교회 부흥 되었느냐 에요.
물량적 가치 기준을 제시한단 말입니다.
노회에서는 교인의 숫자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져요.
과거엔 선 후배라는 기수로 정하여졌지만 이제는 교인의 숫자로 정해져요.
그래서 교회가 크면 감투도 쉽게 쓰게 되고 교회가 작으면 감투도 못쓰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마다 교인 숫자 부풀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까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의 숫자는 자랑거리나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의 숫자에 관심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엔 숫자 적음을 수치로 여겼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예전처럼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그래서 지금은 누가 물으면 뻥 튀기 할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몇 명 모인다고 해요.
복음을 알게 되니 이러한 사소한 것들로부터도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세상으로부터 자유에요.
세상 적 가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러나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어요.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 하실까 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하는 말이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면 끝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기 때문에 사람의 판단은 중요치가 않아요.
그러니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믿고 사는 자들 입장에선 초라한 성도들의 모습은 수치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의지하고 사느냐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세상을 의식하게 되고 세상이 작아 보이면 세상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요.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죽음이 두려우면 죽음이 권세로 작동을 해요.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죽음이 권세가 되지 않아요.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에는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어요.
세상 권세를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음에 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부활의 권세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건 마치 모세가 바로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아요.
예전엔 모세는 바로 왕의 권세가 제일 큰 권세인줄 알고 두려워서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바로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앞에 당당히 서서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당시에 유대교나 로마의 권세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였어요.
그래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세상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죽음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자신들을 붙잡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세상 권세가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있으니까 그들 앞에서 우리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본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당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일 테면 죽여라 했어요.
이러한 모습이 마치 세상 사람들 눈에는 술 취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서 저 놈들이 겁 대가리가 없는 것을 보니까 새 술 취하였다고 조롱을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빌라도의 눈에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다고 큰 소리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새 술에 취한 제자들처럼 빌라도의 권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말해 줍니다.
빌라도야! 넌 지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너 보다 더 큰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전혀 다른 권세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그 하나님의 권세를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결국 그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예수님 앞에 빌라도를 세워 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빌라도가 행사하는 세상 권력은 허상이라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 이 두 권세로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두 권세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에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뱀의 후손으로 서 있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죽음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예수를 겁박하는데 예수님은 부활이라는 권세로 응수하는 겁니다.
부활의 권세로 죽음에 권세를 깨트리고 계신 것입니다.
뱀은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겁박해 왔어요.
죽음을 가지고 사람들 위에서 왕 노릇했어요.
그래서 죽음에 좇기는 모든 인간들은 뱀의 권세에 굴복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 뱀의 권세 앞에 서 있는 겁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뱀의 권세에 도전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도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요.
이는 죽음의 권세가 깨어진 것을 말해요.
마귀는 죽음이라는 권세로 인간들을 다스렸는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아래 있던 자기 백성들을 다 끄집어내십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으로 주어진 것이에요.
구원이란? 죄와 사망으로부터 빠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원을 얻은 성도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사망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온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구원이 지식이고 관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 믿는 것을 삶으로 사는 것이에요.
구원을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고 사는 거에요.
세상적 가치로부터 자유하고 사는 것이에요.
제가 복음을 모를 때와 복음을 알고 난 후의 극명한 차이점은 예전엔 죽음을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세상이 가벼워 보여요.
세상에서의 실패와 세상에서의 가치와 세상에서의 판단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바로 왕의 권세에 꼼짝도 못했어요.
바로의 권세가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에 일평생 바로 왕에 비위를 맞추며 살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권세를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가 바로 히브리인들이에요.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에서는 세상 권세를 믿고 살잖아요.
하나님보다 보이는 힘을 더 의지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서 바로의 권세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신을 벌하였다고 하는 이유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구약의 히브리인들처럼 빌라도의 권세만 보고 있을 뿐 하나님의 권세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내서 빌라도의 권세보다 더 강한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출애굽 시대 때 바로 왕 앞에 선 모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라는 세상 권세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가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살고 있었어요.
이건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는 것과 동일해요.
그런데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를 믿고 살았어요.
왕의 명을 거역하였어요.
그러자 왕이 자신의 권세로 이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극렬한 풀무불 속에 집어넣습니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풀무불은 세상 권세의 최고의 무기와 같아요.
마치 마귀가 사망이라는 무기로 사람들 위에 왕 노릇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막상 불 속에 들어가 보니 불로도 태울 수 없는 권세자가 거닐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음을 이기신 분의 권세를 믿었기 때문에 세상 왕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과 같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서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권세를 겁내지 않고 굴복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불로도 태울 수 없는 분과 함께 동행하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어져야 해요.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요.
사도 요한이 그럽니다.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했어요.
무얼 믿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마 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누가 너희를 옥에 가두고 죽음에 넘겨준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몸을 죽이는 권세라면 예수님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보내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에요.
그러니 제자들에게 몸을 멸하는 빌라도가 휘두르는 세상 권세자들인 총독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권세가 세상 권세 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보다 많은 권세를 얻어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교회를 다녀도 보이는 권세에 굴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은 보았어요.
그래서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하니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용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어요.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과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 바 됨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 죽고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합니다.
이는 참새도 기르시는 분이 자기 자녀들을 더 잘 기르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새보다 더 귀히 다스리고 계세요.
그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현상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하면 지금 “내 환경이 왜? 모양이냐? 라고 원망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내게 허락 하셨을까? 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겐 의미 없는 일이 없어요.
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과적으로 다 좋은 것이란 말입니다.
설령 죽인다 할지라도 좋은 일이에요.
그러니 어떤 사건을 보지 말고 왜? 이런 사건을 일으키셨을까 를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8장을 봅시다.
왕상 8:37-39=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고 기도를 합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백성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어요.
이 백성들이 보리밭에 깜부기 하나만 생겨도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시고!
곡식밭에 메뚜기 한 마리가 뛰거나 황충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일으키셨는지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무슨 재앙을 만나거나 무슨 질병에 걸리더라도 그것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임을 볼 수 있는 눈들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안목을 가지셔야 해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구데타를 일으켜서 피신을 갈 때에 비류 시므이가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 할 때 신하들이 저 놈을 단칼에 목을 베어서 왕에게 갖다 바치겠다고 하자 그냥 두라고 하였어요.
다윗은 시므이의 배후에서 일을 하고 게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 놈을 시켜서 나를 책망하고 있다고 신하들을 말린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안목을 우리가 가져야 할 안목이에요.
저도 미약하지만 이러한 안목이 있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조금 떠졌어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안목이 조금 열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뜻을 구해요.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기도하면 깨달음을 주세요.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이 믿어져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기고 살리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아프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세요.
여호와는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세요.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세요.
이게 믿어지면 범사가 감사케 되어요.
죽이면 아! 하나님 보시기에 죽여야지만 하는가 보다! 라고 하게 되고!
살리면 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는가 보다! 라고 하게 되어요.
또한 부자이면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면 되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면 되고!
아프면 아픈 대로 나으면 나은 대로 감사하면서 살면 되어요.
출세하고 성공하면 출세한 자로 살면 되어요.
예전 같으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죄악시 하였어요.
또한 실패하면 그것도 저주라고 보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어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으로 보여져요.
사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 뜻이에요.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성도에게 적용이 되어지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운명 안에서 다스리고 계세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권세만 보지 말고 보이는 권세를 다스리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힘든 것도 잠깐이에요.
이 또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환경으로 인하여 낙망하지 말고 그 환경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이겨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도록 눈을 여시고 귀를 열어 주시옵소서. 세상만 보지 말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기고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출처는 http://blog.daum.net/cross114
카페 사람끼리 논쟁 하지 마셔요.. 우리가 성령님이 아닌데.. 영적인 것을 깨닳게 해줄수도 없는 노릇이고..
곰곰히 생각 해보니.. 결국에는 자기 의견 관철시키려고 하는것과..자존심 싸움 밖에 안되더군요.. 나부터 회개하고
논쟁이나 의견 접으니..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것을 각인된 사람에게.. 영적인 문제를 어찌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택하신 백성이면 성령님이 깨닳게 해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