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교류의 장이 필요하다. 예전에 동구를 돌아보면서 그중 가장 독재가 심하다는 루마니아에 가봤는데, 북한(독재)의 10분의 일도 안된다.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추대될 때, 원래는 지방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여 성대하게 치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방 사람들 모아놓으면 서로 말을 전한다. 그 지역에서는 몇 명이나 굶어죽었느냐고 서로 물어보지 않겠는가. 그래서 못했다. 미국에서 북한에 삐라를 뿌리고 방송을 한다고 하는데, 다 시기상조다. 본격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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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궁금해했다 김정일과 사이가 나빠져서 달아났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래부터 황장엽과 김정일이 리론이 맞지않아 김정일이 제거를 하려고 햇다는 사람 별의별 소문이 다돌았다
그러나 ,,그보다더 황선생의 일가친척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숙청이 진행되였다
그와 평소 가깝던사람들은 물론이고..얼굴도 모르는 사돈의 8촌까지 행불이 되였다
내가 그때 알고있던 한친구가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의 정치지도원이였는데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약혼식안하기를 잘햇다,어제밤에 나와 연애하던 여자네가 없어졌다
그런데 그여자네가 글쎄 황장엽이네하고 10촌인가 11촌인가 된다누만.황장엽이 중앙당비서할때 얼굴도 모르고 친척인지도 몰랐는데 이번에 황장엽이 남조선에 달아난다음에 문건을 보니 글쎄 먼친척이라는구만 그래서 정치범으로 숙청됬대..잘했지 그여자하고 했으면 큰일날번했네....
황선생이 남한행으로 북한에 남은 그들의 일가친척은 모조리 숙청되버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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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黃長燁씨가 한국으로 탈출할 때 金正日이 金日成대학 창립 50돌을 맞아 연설을 한 연설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문건을 보면 金正日이 「지금 인민군대도 굶어 죽고 있는데 당 간부들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연설을 했어요. 또 黃長燁씨도 북한에서는 상당한 고위층이었는데 그분이 1996~1997년 겨울에 자신이 살던 당 간부 아파트에도 난방과 전기가 끊겼다고 합니다.
『북한 電力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장군(金正日)이 묶는 초대소는 그 지역 발전소에서 특별 送電을 해 줄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었는데도 저녁 식사 도중 자주 전기가 나가 별장 내부 발전기를 돌리는 등 야단이 난 적이 많았습니다』
―1996년 당시 주민들이 식량난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 嚴正女는 한 달에 한 번 쌀을 배급받으면 반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지방에 사는 처가에 갔다 주곤 했어요』
후지모토氏는 198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에 체류한 시기를 제외하면 13년 정도를 북한에 살다 ......................
―부인 嚴正女씨와 결혼한 후 몰래 처가를 방문했을 때 초라한 그들의 살림살이에 충격을 받은 사실을 증언하셨습니다. 처가를 방문하기 전에는 북한의 실상을 접
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처가에는 여섯 식구가 사는데도 방이 한 칸밖에 없었습니다. 처가에 가기 전까지 북한 사람들의 집은 간 적이 없었어요. 그때 북한의 일반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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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창리의 청년 염소목장은 『목초지 조성과 염소 사육을 강화하라』는 金正日의 교시(1996년 8월)로 시작됐다. 위대한 지도자의 교시는 철저하게 시행돼 『전국적으로 지난 3년 동안 염소 마릿수는 4배로 늘어났으며 수십만 정보의 풀밭이 조성됐다』(노동신문 1999년 8월19일자)고 한다.
金씨가 전하는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의 현실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청년 염소목장」에는 56개의 分場(분장)이 있다.
함흥市에 있는 56개 농장과 기업소·병원들이 각각 한 개의 分場을 운영하고 있다. 56개 사업소가 1997년부터 상창리의 청년 염소목장에 사서 올려 보낸 염소는 1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농장에서 현재 키우고 있는 염소는 6000마리 정도에 불과하다. 매년 줄어드는 염소들을 보충하기 위해 함흥市의 농장과 기업소·병원들은 매년 봄이 되면 염소를 사서 산으로 올려 보내야 한다.
6000마리쯤 되는 염소들을 기르기 위해, 1000여 명이 산골에서 염소를 돌보고, 염소의 겨울 먹이를 확보하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다. 사람보다 더 잘 먹이지만 염소는 계속 죽어 나간다.
지난 6년간 이 목장에서 한 해에 6000~7000마리의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이 염소목장에서 죽어 나간 염소는 4만 마리 안팎으로 추산된다. 「노는 풀밭에 염소를 키워 고기와 젖을 먹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염소의 대학살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金柄淘씨 같은 최말단 목장원이 『염소 목장은 전혀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도, 염소목장이 과연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인지 검토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수령의 명령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취재에 나섰던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金女有成(김유성) 기자는 『정말 惡意(악의)를 가지고 주민을 괴롭히려고 작정을 해도 이렇게 괴롭히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은 金正日과 북한 체제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위대한 지도자 金正日은 끊임없이 「현지 지도」에 나서서 시시콜콜 터무니없는 지시를 쏟아 내고, 그 지시는 주민들의 생활을 더욱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람 잡는 金正日의 현지지도
金正日은 2001년 5월24일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을 현지 지도했다.
金正日은 이날 새벽 6시 목장 초입에 있는 「류정分場」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염소목장을 안내하는 대형 전경도가 서 있다. 130마리 정도의 염소를 키우고 있는 金柄淘씨를 비롯한 「류정分場」의 일꾼과 가족은 새벽 5시쯤 모두 창고에 갇혔다. 56개 분장에 있는 다른 일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도자 동지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밤새 트럭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넓은 농장 전체에 호위 군관들을 깔아 놓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새벽 5시쯤 다 대피를 시켰다. 우리는 아침 9시30분쯤 창고에서 풀려 났다. 지도자 동지가 현지지도를 세시간 동안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일주일 뒤 함흥市 市黨(시당) 책임비서 리영태가 목장을 직접 찾아와 지도자 동지의 현지지도 내용을 목장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명했다. 金柄淘씨의 기억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현지 지도하신 내용을 설명하겠다. 『염소목장을 잘 꾸렸다. 꾸린 사람은 다 애국자들이다. 염소 젖이 하루에 5t이 나온다는데 10t 생산되는 때 다시 오겠다. 다른 염소목장들은 세계적으로 다 도와주는데,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만은 내가 직접 도와주겠다. 다른 곳에서는 훈장을 주고 했는데, 여기는 훈장은 그만두고 돈을 100만 달러 선물하겠다. 매 세대마다 칼라 텔레비도 한 대씩 선물하겠다』>
金正日은 통 크게 농장원들에게 「돈 벼락」을 내렸다.
목장의 당 비서가 며칠 뒤 리영태에게서 100만 달러(한화 12억원)를 받아오는 자리에는 농장원 100명이 따라갔다. 리영태는 큰 종이 상자에 든 시퍼런 달러를 농장원들에게 직접 보여 주었다. 金正日이 내려 보낸 「칠보산 칼라 TV」는 모두 205대, 金柄淘씨가 일하는 류정 분장에는 5대가 배정됐다.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칠보산 칼라 TV」의 가격은 북한 화폐로 7만원. 목장원들이 7년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고가품이다. 지도자 동지가 무상으로 선물한 것이지만, 목장원들은 소유권이 없다. 사고 팔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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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염소목장」 건설은 1997년 4월경 시작됐다.
함흥시의 중요 농장·공장·기업소 56개소가 하나씩 「分場(분장)」 건설 책임을 맡았다. 류정농장에서 일하던 金柄淘씨는 『목장 건설하는 데 가면 배급이 나온다』는 소리에 이끌려 가겠다고 자원했다.
草地(초지)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천의산과 황봉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냈다. 황봉 꼭대기에만 나무가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金柄淘씨는 『비가 오면 산 골짜기로 비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지금까지는 무사했지만, 비가 오면 염소집이 무사할지 모르겠다』고 걱정이었다.
류정分場에서 일하는 전직 류정농장 노동자는 모두 네 가구 16명이다.
류정농장에서 파견 나온 20代 청년 7명이 이들의 일을 돕고 있다. 가을에는 50명 정도의 류정농장원들이 한 달 정도 지원을 나와서 염소들의 겨울용 목초를 마련한다.
이들이 키우는 염소는 130마리. 염소를 방목 내보낼 때, 방목을 끝내고 들어올 때 뜨거운 물과 함께 옥수수를 50g씩 먹인다. 무도 썰어서 넣어 주고, 시래기와 쌀겨도 먹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잘 사는 사람도 그렇게 먹지 못했고, 지금도 우리 염소보다 잘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金柄淘씨의 하루 세 끼 메뉴는 똑같다.
옥수수밥에 무 절임. 그나마 죽을 먹지 않으면 형편이 괜찮은 쪽에 낀다.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하지만, 식량 사정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염소가 하도 죽어 나가 정신이 없다
이 목장의 염소들은 목초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6월에 가장 많은 젖을 생산해 낸다. 약 5t(5000kg)이다. 金正日이 현지 지도하러 왔을 때 『한 달에 5t을 생산한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를 한 근거다.
젖짜기는 6월부터 시작해서 여름 석 달이 피크다. 풀잎이 거세지는 9월부터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11월이면 젖을 짜기가 어렵다. 젖 생산이 1년에 6개월만 가능한 것이다.
金柄淘씨는 『사람보다 잘 먹이는데도 염소가 형편없이 죽어 나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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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分場」 지원을 담당한 류정농장에서는 매년 30~40마리의 염소를 사서 보낸다. 지금까지 6년간 사올린 염소가 250마리쯤 된다고 한다. 이 염소들은 대부분 암놈이다. 매년 새끼를 60~70마리씩 낳는데도 현재 보유한 염소수는 130마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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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柄淘씨 부부의 월급을 합치면 2000원, 이 중에서 200원이 「염소 사는 돈」으로 적립된다.
金씨 부부는 그외에 「식량대」로 1400원, 「집세·전기세·TV사용료」로 130원을 낸다. 金씨 부부의 손에 들어오는 돈은 230원에 불과하다. 낡은 고무와 천을 이어 놓은 중국産 신발 한 켤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튼튼한 한국産 신발은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장마당에서 한국産 신발을 구경하기 어려웠으나, 지난 3월쯤 「장마당이 있어서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았다. 어느 물건이 어디서 나왔는지 출처를 캐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온 후 함흥市의 장마당에 한국 물품이 나타났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생산한 TV, 파이롯트 만년필, 전자 손목시계가 고가에 팔리고 있다.
金柄淘씨 가족의 숨을 그나마 터 주는 것은 200평 정도의 텃밭이다.
당국에서 30평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벽지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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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로 생산되는 시점에 하루에 염소 한 마리가 1kg 정도의 젖을 생산한다는 얘기잖아요. 6개월 정도 젖을 짠다니까, 한 마리당 연간 젖 생산량이 180kg 정도입니다.
서구 낙농국가의 경우 염소 한 마리당 1년 평균 생산량이 1000kg입니다.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는 1500kg을 넘어 섭니다.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의 젖 생산량은 서구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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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염소목장에 미래는 있는 걸까? 丁교수의 대답이다.
『한 마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金正日이 100만 달러를 갖다 준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염소들에게 풀이라도 마음껏 먹게 해주면 염소들이 떼죽음을 하는 일은 안 생길 텐데, 제가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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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 난 체제를 어떻게 보장해 주나?
강연 후 토론시간에 한 학생이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 주고, 북한은 核을 포기하는 것이 北核문제의 해결 방안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기자는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의 비극을 학생들에게 자세히 들려 줬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함흥시 청년 염소목장에서는 염소가 떼죽음을 하고, 목장원은 염소보다 못 먹고 삽니다. 염소의 젖 생산량이 서구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염소목장을 그대로 계속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이 목장을 때려 치우고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청년 염소목장은 북한 체제의 축소판입니다.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 준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 파탄 난 체제가 계속되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많은 학생들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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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폐지가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반면 이러한 흐름의 그늘 밑에서 역사의 시계를 완전히 반대로 돌려놓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다. 북한의 공개처형은 “탈북인치고 북한에서 공개처형 장면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로 그 실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세상에 사형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아직도 많지만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하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몇 개 아랍국가와 중국, 아프리카 오지의 미개국가, 그리고 북한뿐이다. 특히 북한의 공개처형에 대한 증언은 그 잔혹함이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끔찍하다. 몇 가지 증언을 통해 살펴보자.
1984년에 13호 관리소 동포지구 운수직장 수리공 27세의 정치범이 경비대 짚차 580131호를 타고 도주하였다. 두만강에 차를 쳐넣고 중국으로 넘어 갔으나 일주일만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에 이관되었다. 악에 바친 관리소장은 김일성의 권위를 훼손시켰다고 쇠줄로 코를 꿰고 발뒤축에 대못을 박아 정치범들을 동원하여 돌로 때려죽이게 했다. (안명철 著, 그들이 울고 있다 中)
일단 공개처형의 죄목을 살펴보면 이 정도의 행위를 갖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인가 생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간, 살인 등의 중대 범죄를 저지른 경우도 있지만 위의 경우처럼 짚차를 훔쳐 달아났다든지, 두부콩 2kg을 훔쳤다든지, 강냉이 도적질 3번에 60kg을 훔쳤다든지, 공장 물건을 빼돌렸다든지, 남한 노래를 흥얼거렸다든지 하는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본보기’로 공개처형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재수 없이 걸리면 죽는’ 것이다.
1995년 식량난 이후에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매 구역, 군, 로동자구마다 분기에 한 번씩 지역주민들을 모아 놓고 주민들을 각성교양 시킨다는 명목 하에 시범 케이스로 사람들을 2∼4명씩 공개처형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산법에 의하면 북한 전역에 걸쳐 3달에 한 번씩 442개 장소에서 평균 1326명이 공개총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보가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1960년대 종파를 숙청한다 하면서 무리로 처형할 때에는 짐승들도 낯을 붉힐 정도로 잔인하게 망치나 도끼로 까 죽였는 바 그때 당시 참여했던 한 증언자는 하루 20∼30여 명을 죽였다고 했다. 북한에서 공개처형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총살형을 실시했다. 사형수(북한에서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격수를 사형수로 칭함) 3명이 나와 총탄 3발씩 발사한다. 1980년대에 와서는 총살형에서 공개 교수형으로 발전시켰으며, 1980년대 중후반에는 돌사제(돌로 까 죽이는 형)를 강건군사학교 사격장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형식상의 재판도 없이 비공개로 예심기간 중에 사형한다는 것은 보위부나 보안성 내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로 되어있다. (NKchosun.com 탈북인과의 대화 게시판 中)
마치 개 두 마리를 달아맨 듯이 두 사람의 목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둘 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한 명은 이미 죽어버렸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다른 한 명은 아직도 꿈틀거렸다. 그의 바지가랑이 밑으로는 오줌이 지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현기증이 나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의식과 무의식이 오락가락하면서 노랑물을 토해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 정신이 들었다. “1반 독신자들부터 시작해서 교수대 앞을 통과하여 각기 마을로 돌아간다. 각자 발 밑에 있는 돌을 하나씩 집어 교수대 앞을 지날 때 죽은 놈들에게 던져라.” 소장이 직접 나와 명령을 하였다. (강철환 著, 수용소의 노래 中)
공개처형은 주로 총살로 이루어지지만 교수형, 화형, 그리고 위에서 볼 수 있듯 돌로 쳐죽이는 등 극히 반인륜적인 방식도 동원된다. 정치범의 경우 이미 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시체를 꺼내 다시 한번 죽이는 부관참시도 행해진다.
일반적인 총살은 나무 기둥에 사람을 묶어 놓고 소총으로 쏴 죽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공개처형장에 끌려온 사람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김정일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막으려는 것이다. 재갈 물린 입에 돌을 쑤셔박고 머리, 가슴, 다리에 차례대로 총을 쏜다. 머리를 먼저 쏘는 것은 ‘썩은 생각을 날려 버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잔인한 처형장면을 빠르면 어린 시절 어른들 틈에 끼어, 늦어도 성인이 된 이후 의무적으로 보아야 한다. 지난 호 Keys에 실렸던 조선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관희의 경우 평양의 중심거리인 ‘통일거리’의 한 언덕 위에서 2만∼3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17명과 함께 총살되었고, 70년대 북한 최고의 미녀 영화배우였던 우인희는 재일교포와 간통했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예술인 앞에서 공개처형 되었다.
숱한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가족들을 맨 앞에 앉히고 처형
처음 총살하는 것을 구경하는지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총살현장인 한천동에 있는 시내 기본 장마당 옆 한천강가로 갔다. 정 아주머니 말이 이 자리가 김책시의 공개총살장이라며 옛날에도 여러 번 이곳에서 공개총살이 진행되었다고 하였다. 강변 자갈밭에는 이미 나무 기둥 4개가 박혀 있었다. 가물어 강바닥이 다 드러나 광장이나 마찬가지인 총살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바닥과 강뚝을 뒤덮었다.
이윽고 시안전부 쪽에서 수인차(풍친 승리58 화물차)로 실어 온 죄인들을 안전원들이 도살장에 끌고 나가는 돼지처럼 질질 끌고 가서(죄인들이 너무 맞아서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며 입에는 자갈을 물려 말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기둥에다가 다리, 허리, 가슴 부위를 묶어놓고 공개재판을 시작하였다. 재판이라는 것이 재판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발표하는데, 유치원시절부터 아이들을 때리고 사탕 빼앗아 먹은 걸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 같지도 않은 죄행을 발표하면서 마감에 자본주의 사상에 물 젖어 사회주의를 허물어뜨리려는 김창호를 시범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식으로 4명의 소위 죄행에 대하여 혼자서 지껄여 대더니 12명의 사격수들에게 사격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첫 총성이 울리자 피가 튕기면서 4명의 죄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구었다. 자본주의 사상으로 대갈통이 썩었다며 머리를 쏜 것이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에 사방에서 부녀자들의 쇠된 비명소리가 터졌다. 연이어 울린 총성으로 죄수들을 묶었던 가슴, 허리, 다리 부위에 매여졌던 밧줄들이 차례로 끊기며 바닥에 깔아 놓았던 가마니 위에 쓰러졌다. 안전원들이 그 시체를 깔아 놓았던 가마니로 둘둘 말아 차에 싣더니 인파 속을 헤가르며 떠나갔다. 맨 앞자리에서 자식들의 처참한 총살과정을 지켜본 부모들과 일가 친척, 친우들, 주민들의 가슴속에 무엇이 꿈틀거리는지 모르고…. (NKchosun.com 탈북인과의 대화 게시판 中)
공개처형은 또한 처형당하는 사람의 가족들을 맨 앞에 앉혀 놓고 진행된다. 이러한 행위는 반인륜을 넘어 ‘인간성에 대한 테러’라 할 수 있다. 제 자식의 머리가 총알에 날아가고, 제 부모의 목에 오랏줄이 감기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개처형을 어떻게 하는지 당신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는 탈북인의 따가운 한마디는, 그러한 체제에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탈북자 증언의 진실성’을 운운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만든다. 개명한 21세기에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소개되니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택시를 타고 5만원이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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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소연이 오누이의 육성 證言(증언)에는 북한의 실상을 짐작하게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석탄을 메지 않으면 집에 땔 것이 없고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에너지 위기)
『우리 집에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어머니 혼자 있으니 먹을 게 없어서 모두 굶어죽었습니다』(노인층의 사망률이 가장 높다)
『병원엔 약이 없고, 棺(관)이 있어야 어머니를 내가는데 관 짜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물자 부족)
『풀 계속 먹어서 몸이랑 발이랑 부어서 다 죽었습니다』(사망 직전의 공통현상)
『꽃 제비를 꼬여서 집에 데려가 죽인답니다. 칼로 베서 시장에 국수꾸미로 얹어 판답니다』(이런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맥이 없으니까 아이를 학교에 보낼 생각을 안 합니다. 아이들이 데리러 와도 누워서 말 한 마디 안 합니다. 그래서 이젠 데리러도 안 갑니다』(배가 고파서 학교에도 안 나가는 학생들이 많아 사실상 교육도 마비상태)
『김진혁이란 아이는 똑똑하단 말입니다. 똑똑해도 먹을 게 없다보니 어떻게 합니까. 먹을 게 없으니 머리 쓸 힘도 없었습니다』(식량난은 북한 주민들의 열등화를 초래하고 있다)
『통통 붓다가 움직이지 못하니 덤치려 해도 덤치지 못하고 일하려 해도 일할 수 없고 심부름하재도 심부름할 수 없고 주워먹는 일밖에 못한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구 죽습니다』(어린이 거지들의 죽어가는 과정.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체력이 떨어지거나 병들면 죽는다. 임철·소연이는 서로 돌봐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걔네 둘 죽은 걸 어른들이 한 마대에 넣어 가지고 내갔습니다. 돼지새끼 두 마리 넣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영화에서 본,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시체 치우는 장면과 비슷하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신 다음 나도 딱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불쌍한 걔도 죽게 됐습니다』(극한상황에서 피어나는 피붙이 사이의 정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
『고생이란 고생 다 겪어봤습니다』(이것이 10세 된 어린이의 말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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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과 일본의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최근 북한 부유층을 중심으로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 남한의 인기 드라마가 암암리에 비디오 CD 등을 통해 보급되면서 신세대들이 이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들의 옷차림, 헤어스타일, 심지어 머리 염색까지 따라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이러한 `자본주의 문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주요 거리와 외화상점. 외화식당 등에서 신세대들을 상대로 복장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부유층 신세대들이 몰려 패션 유행을 선도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평양외국어대학과 평양음악무용대학 등에 가면 남한 드라마 패션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가벼운 머리 염색을 한 경우도 종종 눈에 띤다.
특히 이들은 남한 드라마 주인공들의 다양하고 개성있는 패션을 누가 더 완벽하게 모방했는지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비공개 모임에서는 남한 패션이 첫째가는 화제라고 한다.
소식통들은 남한 드라마의 유입이 북한에 확산되는 컴퓨터 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전했다.
과거에는 해외 출장자들과 방문객 등을 통해 남한이나 서방의 영화,드라마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유통됐으나 북한 당국이 세관에서 원천적으로 압수할 수 있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한 드라마를 담은 비디오 CD를 일반 CD로 위장 반입한 후 이를 복사해 유통 시키는 경우가 늘고 있어 세관이 속수무책인 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문물은 우리로 치면 국정원에 상응하는 국가안전보위부의 단속 대상이며 적발되면 수용소행도 감수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단속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단속 대상이 주로 고위층 자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세대와 달리 신세대 보위원들은 "별것도 아닌데 사람을 잡아 뭘 하느냐"며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 모른 척 넘어간다고 한다.
2003-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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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매트릭스’ ‘인디애나존스’ ‘007’시리즈 ‘터미네이터’ 등 헐리우드 영화와 ‘가을동화’ ‘겨울연가’ ‘태조왕건’과 같은 남한의 인기 TV드라마들이 시기는 한 박자 뒤지지만 북한에서도 똑같이 유행하고 있다. 주요 고객도 소수 권력층이나 부유한 상류층에서 점차 대중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인기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수백, 수천 개로 복사돼 북한전역으로 소리없이 팔려나가고 있다.
이처럼 비디오테이프의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북한내부의 VTR보급률이 종전에 비해 높아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VTR을 녹화기라고 부른다. TV나 VTR은 워낙 비싸기 때문에 1990년대 초만해도 고위간부나 북송교포, 외화벌이 종사자 등만이 이런 것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량난 이후 장사가 일반화돼 목돈을 쥐게 된 사람이 늘어나고, DVD풀레이어의 등장으로 VTR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면서 일본ㆍ중국산 중고제품들이 비교적 헐값에 북한으로 반입돼 중상류층 가정에도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평양, 함북 청진, 함남 함흥, 평북 신의주 등 대도시의 왠만큼 사는 가정에서는 대개 TV나 VTR만을 보유하고 있다. 차라리 밥을 한 끼 굶더라도 TV나 VTR만은 반드시 갖겠다는 는 심리가 확산된 결과이기도 하다. 아직은 일부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DVD를 가지고 있는 집들이 생겨나고 있다.
북한에서 비디오물이 유입되는 주요 경로는 북-중 국경이다. 이외에도 북한-일본을 왕래하는 화객선 만경봉호나 외국을 방문하는 외교관ㆍ무역관계자들을 통해 몰래 유입되기도 한다.
북한과 오랫동안 밀수를 하고 있는 재중동포 이석한(가명)씨는 이미 수년 전부터 남한의 뮤직비디오나, 사극, 연속극, 홍콩 무협영화, 헐리우드 영화 등을 복사해 북한으로 팔아넘겨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어 수년 전부터 비교적 높은 값에 넘겨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양강도 혜산시에 주둔하고 있는 국경경비대의 한 소대장은 「장군의 아들」을 부대원들에게 보여주고 영화를 흉내낸 격술(태권도) 훈련을 시키다 체포되기도 했다. 최근 남한에서 방영된 TV사극 「태조왕건」도 북한 주민들이 많이 찾는 테이프라고 한다.
비디오테이프 값은 한 질에 작게는 5달러에서 많게는 수십달러까지 천차만별이다. 특히 도색비디도 원본은 100달러를 호가하기도 한다. 100달러면 암시장 시세로 북한돈 8만원. 일반 노동자 평균 월급이 2500원 정도이니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국경 세관에서 근무했던 한 탈북자에 따르면, 최근 북-중 국경세관에서 밀수품으로 가장 많이 적발되는 것이 비디오와 라디오, 소고기라고 한다. 북한에서 소는 역축으로만 쓰이고 육식으로 쓸 수 없게 돼 있어 밀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비디오테이프는 여가나 문화생활이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와 은밀한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어 그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다. 그러다보니 장사꾼들이 상당한 위험부담에 불구하고 높은 수익때문에 테이프장사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의 비디오열기가 높아지자 신의주, 청진, 함흥, 원산 등 큰 도시에는 민간인들이 가정집을 비디오방으로 개조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회원처럼 확보해 놓고 돈을 받고 영화를 보여주는 상행위까지 하고 있다고 인민보안성(경찰) 출신의 한 탈북자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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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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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생활
심양 서탑 상황
- 심양 서탑쪽에 탈북자들이 많았다. 서탑에서는 많은 탈북 여성들이 동거생활로 피신하고 있었다. 주로 중국인 사장들인데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장이라도 그런데 붙어 가지고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중국인 사장들이 탈북 여성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인건비가 싸고 또 돈을 안 줘도 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장들 중에도 탈북자들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걸리면 법적 제재를 받는다는 걸 아니까 쉽게 나서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모습이 상당히 마음이 아팠다.
대부분 여자들은 식당업이던가 아니면 역전 같은데 나가 민박집에 손님을 채워주고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로 지낸다. 그런데 20대는 좀 괜찮은데 30-40대 여자들은 더 처참하다. 20대들은 그래도 일자리 찾기가 쉬운데 나이든 여자들은 어렵다. 나이든 여인들 중에는 걸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사람들과 경찰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잡아가지는 않았다.
연변 일대 상황
- 연변쪽과 송강, 무송 쪽을 돌아보니 보통 20대 북한 아가씨들이 애 두 셋이 있는 40-50대 중국의 홀아비하고 사는데 농촌에 가서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게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지금 한국이나 어디를 가봐도 20대라고 하면 한참 멋도 부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는데, 어떤 여자는 몸이 만삭이 되어 가지고 농사일을 하고 있고 고된 노동으로 손도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북한에서보다 사는 게 낫다"고 하는데...... 그 여자들은 한국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연길에 나가보니 웬만한 노래방이나 술집에는 거의 북한 여자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술집에서 성노리개로 있으면서도 월급도 없이 연변사투리의 수모를 받아가면서 살고 있었다. 딸 같은 애들이 천대를 받으며 사는 것을 볼 때 처음에는 무척 가슴이 아팠으나 많이 만나다 보니 마지막에는 동정이 분노로 변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여자들한테는 아무 죄도 없었지만 막 귀쌈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들한테 말했다.
"가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같으면 나하고 함께 가자."
그래서 그런 애들 10여 명을 심양에 있는 한 조선족 마을에 데려다 놓았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한 10만원 정도(집 하나에)하는 집 두 채를 월세로 잡아줬지만 그들한테는 그 외에도 많은 도움이 필요한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빠른 기간 내에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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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날 짜 2003년 11월 6일 목요일
L교수의 평양방문기1
어제 얼마 전 평양관광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대북전문가 L교수와 만났다. 그의 평양방문담 가운데 한 토막.
옥류관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을때,L교수는 일찍 밖으로 나와 평양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았다.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소년단 소속으로 보이는 소녀 두 명이 지나갔다.
잠시 뒤 모녀가 L교수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딸(?)이 조금 전 지나간 두 명의 소녀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L교수를 흘낏 보더니 "찍으면 안 되는데..."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번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지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부인(?)은 바로 조금 전 딸(?)과 함께 L교수 앞을 지나갔던 어머니(?)였다.
얼마 후에는 두 명의 사내가 L교수 앞을 지나갔다. 그 중 하나는 조금 전 부부가 지나갈 때 남편으로 모습을 보였던 바로 그 남자였다.
L교수는 "평양 시내 전체가 하나의 세트장이라는 얘기는 많이 해 왔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그 증거를 확보했다"면서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