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의 명나라도...애초부터 이성계의 대륙조선였다기 보단...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홍건적(오구태 한국 잔당) 대장 주원장에게 넘겨준 남부 아랍과 인도 같으며...
후에 이성계(티무르?)가 함흥(차가타이 몽골의 사마르칸트?)으로 물어난 뒤...무참한 분풀이를 당하는 지역인 인도가 주원장의 나라 같습니다.
후일 대명(이조)이 망하곤...주원장의 땅이던 동남부 아랍과 인도로 이주하는 무굴이...이조선의 남명일까 싶습니다.
그 이후에 주원장의 인도에 있던 오구태(왜?)왕조가...이때 부턴 무굴(남명)으로 불리워 지는듯 합니다.
인도동해안과 동남아의 왜가 임란후 괴멸되어 해양으로 쫒기고...
청이 동국 조선을 병합한 이훈...남명(인도)이 점차 중원 남부의 동국조선 전라도와 동남아 일대를 점거하는 이치겠고여...
이성계 이후의 종계변무는...최초는 이성계의 서출을 감추기 위한 일이였으나...
아마도 이성계의 선대 가계보다는
이성계에게 황제로 인정받지 못해 옥새도 제후 옥새만 받고...황제의 옥새는 받지 못한거로 예상되는...
이방원(영락대제?)의 왕자의 난에 대한 평가를 조작(회복?)하기 위한 로비사업였지도 싶습니다.
당시 무굴(대명)은
안평 사사후 그 영토의 이징옥이 전체 여진(몽골잔당)까지 규합한 난(토목보의 변?) 이후...
중원의 명(이조)와 분리되며...
이징옥 암살뒤엔
이인자인 깊착크(야인)여진의 신라계 유민족...누루하치가 이끈 우즈벡족이라 서양사가 말한 후금나라에...
차가타이 한국(대명제국)을 다 빼앗끼고...
이 황조 세력들은...주원장의 초기 영지이자...나중엔 이성계에게 다시 도륙났던 남부 속지인 인도로 몰려 나라를 재 창업하면서...
역사서(대명 뭐시기)를 재 편찬할 필요가 생긴 것이고...
이 기회에 동국조선(이조)의 황가가...불명예스런 태종(영락대제?)의 비사를 삭제(순화)해 달라 로비를 햇던게 종계변무의 사건 같습니다.
밑에 글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이성계(티무르?)가 죽을 고생을 했던 아지발도 의 왜군과의 전쟁에서의 적장 "아지발도" 대목입니다.
하얀 얼굴의 미소년 이면서도...무예가 신출귀몰했던 왜구들의 차세대 지도자였답니다.
역사가 말한 남방 해양 왜잡족 신체형과 얼굴형이 아닙니다.
당시의 왜군의 장수들은...역시,오구태 백제의 영역에 있었던 전성기 신라와 똑같은 복장인...
콧구녕에 안면 마스크를 썼던...아틸라군과 비슷한 복장이란 것이며...
그 철가면땜에 이성계는 아지발도 투구끝을 몇번 맞추어 투구를 벗낀 다음 얼굴에 화살을 먹일수 있었단 겁니다.
그 신라 화랑들의 머리인 위그루(소월지+대월지)족들의 삭발=변발 풍속을 지닌...
당시 신장성과 알타이...파미르 산맥을 통해 인도까지 진출한 홍건적인 오구태 한국(몽골)의 잔당들인 것이며...
후기 오일라트요....선대는 오손족이며...오구태 백제인 한성백제로... 서양이 말한 오리진 들이란 얘기가 됩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던 빤쓰도 못 입던 해안 왜잡족들이...인도남부의 원 왜노족들인 게고여...
임란때의 왜군들 중...평양성을 먼저 빼앗은 왜인들은...신라나 백제계와 유사한 오구태 한국(몽골)인들이며...
그들의 인도계 백성(천민)이자...잡족 용병들이 우리가 아는 해양 왜잡족들이란 말이 됩니다.
고로,조선 부산포에 당도한 왜병들은...현 일본열도 남중부 고려유민들의 열도를 병합한지 얼마 않 되는 신생 왜적들이며...
그들을 호응해 줄 중원 동남의 왜성은...현 양자강 하류 복건일대로 예상대는 대목입니다.
세계대전 비슷했단 거지여...
엄밀히 보면...
우리가 아는 ..빤쓰도 안 입고 설치던 그 해안 왜잡족들은...
당시 고려와 원나라에겐...오구태 한국의 잔당들이 지배하던 남방 잡족 속민들인 "왜노(倭奴)"로 비칭되었던 종족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왜구 애리트(싸무라이)들은...오구태 백제&신라계 종족의 복식인...삭발&변발을 하고...안면 마스크를 쓴...
오구태 몽골 잔당의 주력을 얘기하는 것이고...
중원의 역사는...오구태 몽골의 잔당들이 거느렸던 인도를 중심으로한 남방 해양 잡족들을 이르던 왜(倭)자로...
오구태 몽골 진당들까지...싸잡아 모조리 왜(倭)라 했던듯 합니다.
조선(朝鮮)이라는 새 나라를 연 것은 다 알다시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고 난 뒤 이름을 단(旦)으로 고쳤습니다. ‘아침’이라는 뜻인데, 재미있게도 나라 이름 ‘조선’에도 ‘아침’이 들어 있군요.
옛날에 어른이 된 뒤에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字)ㆍ호(號)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성계의 자는 군진(君晉), 호는 송헌(松軒)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전주(全州) 이씨라는 것 역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는 고려 말 동북면(東北面, 함경도) 호족의 자손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관(本貫)과 고향이 다른 경우가 더 많지만,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본관이란 바로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주가 본관인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그의 집안도 조상 때는 전주에 살았습니다. 신라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라는 인물이 시조로 돼 있고, 그 17대손인 이안사(李安社)가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전주를 떠나 동북면에 새로 터전을 잡은 사람이 바로 나중에 목조(穆祖)라는 이름으로 임금 대우를 받는 이 이안사였습니다.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다”는 실록의 의례적인 칭찬이 무색하게도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엉뚱한 사고를 칩니다. 기생 문제였어요. 고을에 온 관원과 기생을 다투었던가 봅니다. 고을 수령이 괘씸하게 여겨 위에 보고하고는 군사를 풀어 잡으려 했지요.
36계 줄행랑. 그냥 그 근처 어디로 잠시 숨은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완전히 딴 나라만큼이나 멀었을 지금의 강원도 삼척(三陟)까지 도망갔으니, 이만저만한 사고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성계 가문의 엑소더스
그런데 그를 따라 거기까지 도망간 백성이 1백70여 호였다고 합니다. 그가 주변에 신망이 두터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정말로 그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다면 이건 단순한 기생 문제가 아니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거기도 편안치는 않았습니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배를 만들어 막기도 했지만, 원(元)나라 군사가 들어올 때는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는 상황이니 어쩝니까? 산속으로 숨어 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그 뒤에 터졌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주에서 마찰을 빚었던 관원이 하필 그 지방에 안렴사(按廉使, 도지사)로 올 건 또 뭡니까? 또 도망가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뱃길 따라 북쪽으로 가 닿은 곳이 동북면의 의주(宜州, 德原)였습니다. 백성 1백70여 호는 또 따라갔다지요?
거기서 그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의주 병마사(兵馬使)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과정이야 분명치 않지만 그는 지역의 군사 책임자 격인 ‘유지(有志)’가 돼서 원나라 땅인 쌍성(雙城, 永興) 바로 남쪽의 고원(高原)에서 원나라와 대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나라를 막으라는 소임을 저버리고 그만 원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두어 번 윽박질러 항복을 받아낸 원나라 대장은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옥으로 만든 술잔까지 주며 정을 표시했고, 이안사는 집안 여자를 그에게 바쳐 항복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항복한 이안사는 다시 두만강 부근까지 갑니다. 경흥(慶興)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알동(斡東)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주변 지역 여러 곳에 흙과 돌로 성을 쌓아 목축을 하며 살았습니다. 원나라에서는 그를 알동 천호로 삼아 남경(南京) 등 다섯 지역 천호를 관할하는 우두머리 천호 겸 다루가치(지방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안사는 1274년 그곳에서 죽어 공주(孔州, 경흥) 성 남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 이안사가 임금 대우를 받으면서 덕릉(德陵)이라는 능 이름도 붙고, 태종 때 여진의 침략 때문에 함흥으로 옮겨 장사지내게 되지요.
그 부인은 이(李)씨입니다. 동성동본? 물론 아니죠. 천우위(千牛衛)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지낸 이공숙(李公肅)의 딸이랍니다.
이안사의 아들이 나중에 익조(翼祖)라는 이름을 받는 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 이행리(李行里)입니다. 이행리는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는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만나 그 아비가 원나라에 투항한 잘못을 빌기도 했습니다.
앞서 이행리의 아버지 이안사는 천호가 되자 주변의 여진 천호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이행리 대에 내려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진 천호들이 작당을 하고 이행리를 해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굴러온 돌’ 이행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여진 천호들이 시기한 것이었겠지요.
어쨌든 천호들은 북쪽으로 사냥을 간다며 20일 뒤에나 보자고 했습니다. 날짜가 돼도 오지 않아 이행리가 가보니 남자는 없고 노약자ㆍ부녀자뿐이었습니다. 사냥감이 많아서 늦는다는 말을 믿고 돌아가려는데, 뜻밖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청하는 이행리에게 물을 떠주던 어느 할멈이, 사람들이 군사를 청해다 그를 치려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행리는 황급히 도망 길에 나섰습니다. 식구들과 세간은 배에 실어 두만강 하류로 보내고 자신은 부인과 따로 출발해 적도(赤島)라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마 두만강 안에 있는 섬인 모양이죠? 서울의 노들섬(中之島)처럼요.
여진인들의 추격도 이미 시작됐습니다. 이행리가 강 북쪽 기슭에 닿았을 때는 여진의 선봉 3백여 명이 거의 따라붙었습니다. 약속한 배는 오지 않고 6백보나 되는 강물은 깊이를 알 수 없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바로 ‘모세의 기적’이었습니다. 그곳은 밀물ㆍ썰물이 없는 곳이었는데, 갑자기 물이 빠져 강폭이 1백여 보로 줄고 물도 얕아져 건널 만해졌다는 것이지요. 일행이 건너자 ‘정석(定石)’대로 물은 다시 불어 추격자들을 따돌렸구요.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같지요?
일행은 적도에서 얼마 동안 살았고, 공주 백성들이 다시 ‘장꾼이 장에 가듯’ 따라와 함께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이안사가 처음 자리잡았던 의주로 돌아와 살았는데, 공주 백성들은 또 따라왔답니다.
이행리는 죽은 연도가 확실치 않은 모양입니다. 다만 처가 근처에서 살았던 모양이어서, 무덤은 안변에 있습니다. 나중에 지릉(智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요.
이행리가 의주에 사는 동안 두 아들을 낳은 먼저 부인 손(孫)씨가 죽자, 등주(登州, 安邊)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이들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襄陽)에 있는 낙산(洛山) 관음굴(觀音窟)에 가 기도해서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꿈을 꾸고 얻은 아이인데, 꿈에서 중이 가르쳐준 대로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지었습니다. 그가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李椿)입니다. 도조(度祖)지요. 원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패안첩목아(孛顔帖木兒)라는 몽고식 이름도 있고요.
이춘은 조상의 터전을 이어받아 함흥에서 안변에 이르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도중에 충숙왕(忠肅王)을 찾아가 하사품을 받은 적도 있군요. 이춘은 자손이 잘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흰 용이 나타나 검은 용에게 집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춘이 신경쓰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자 흰 용은 또 꿈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날짜까지 알려주는데야, 이춘도 할 수 없이 활과 화살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연못 안에서 흰 용과 검은 용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춘은 단발에 검은 용을 쏘아 처치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의 활솜씨 얘기가 나오겠지만, 그 할아버지 이춘도 1백보 밖의 나무 위에 앉은 까치 두 마리를 쏘아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꽤 괜찮은 실력이었답니다.
아무튼 흰 용은 다시 꿈에 나타나 사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 자손에게 큰 경사가 있을 것이오.” 이춘은 1342년에 죽어 함흥에 묻혔습니다. 의릉(義陵)입니다.
나중에 환조(桓祖)로 불리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본래 집안의 세습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이자춘의 아버지 이춘은 부인을 둘 두었습니다. 박광(朴光)이라는 사람의 딸이 첫 부인이었는데, 이자춘은 그 둘째 아들이고 위로 자흥(子興)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박씨가 죽자 이춘은 화주(和州)로 옮겨 쌍성 총관의 딸인 조(趙)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그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복잡해지죠?
예, 결국 일은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춘은 죽기 전에도 풍질 때문에 관직을 이자흥에게 넘겨주려다가 후처인 조씨의 반대에 부딪친 적이 있는데, 이춘이 죽은 뒤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이춘이 죽은 뒤에는 정상적으로 맏아들 이자흥이 이어받았지만, 이자흥이 곧 죽어버려 문제가 꼬였습니다. 제대로 하자면 이자흥의 맏아들이 이어받아야 했겠지만, 아들 교주(咬住)는 어렸습니다. 그 틈을 후처의 아들들이 노렸습니다. 이들 형제는 왕실과 핏줄이 닿는데다 외할아버지가 쌍성 총관이어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조씨 소생인 나해(那海)가 임명장과 도장을 훔쳐간 것입니다.
이자춘이 형수와 함께 원나라 관청에 가서 결정을 받아 왔는데, 교주가 어리니 임시로 이자춘이 이어받았다가 교주가 어른이 되면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맏아들이 아닌 이자춘은 조카에게 넘어가야 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고, 결국 조카가 커서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조카가 사양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록을 조금 더 넘기면 이천계(李天桂) 곧 교주는 자신이 진짜 후계자라 해서 사촌인 이성계를 꺼렸다는 기록이 나오니, 이는 헛소리임이 분명합니다. 이성계는 그 ‘빚’ 때문에 이천계 남매가 자신의 집 종을 부추겨 나쁜 일을 꾸몄어도 말을 못하고, 그들 자손의 혼사 등 여러 일들을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자춘은 윗대 조상들과는 달리 자기 지역을 넘어 중앙 무대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이성계가 큰 활약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반이 바로 이자춘 때에 이루어진 셈이죠.
그 계기가 된 것이 1356년의 쌍성 토벌이었습니다. 중앙에서 보낸 장수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현지에 있는 이자춘에게 벼슬을 주고 힘을 합치도록 했는데, 그 연합군이 승리를 거둬 함흥 이북의 여러 성을 수복했습니다.
고려 고종 때 원나라에 넘어간 지 99년 만에 되찾은 것이라나요. 이자춘은 사복시(司僕寺) 경(卿)의 벼슬을 받고 서울에 집 한 채까지 받았습니다. 공식적인 중앙 무대 진출이었지요.
그 뒤 이자춘은 왜구 방어에 나서면서 몇 개의 중앙 관직을 지낸 뒤 근거지인 동북면 지역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지역 출신이라 군벌화(軍閥化)를 우려하는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호부(戶部) 상서(尙書)의 벼슬을 더 주었습니다.
잘 나가던 그는 불행히도 비교적 일찍 죽었습니다. 1361년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으니까요. 함흥에 장사지내 나중에 정릉(定陵)으로 불렸습니다. 전국적인 인물이 된 것을 실감케라도 하듯, 임금이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부의를 보냈으며 사대부들의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들렸답니다. “이제 동북면에는 인물이 없구나!”
이성계는 1335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자춘이 최한기(崔閑奇)라는 사람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았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이원계(李元桂)라는 배다른 형의 존재입니다. 실록은 이원계가 서자라고 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이성계의 어머니 최씨가 후처고 이원계는 전처가 낳은 적장자(嫡長子)인데, 이성계가 임금이 되자 이성계를 적통으로 만들기 위해 전처를 첩으로 둔갑시켜버렸다는 것이죠.
일리가 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는 임금이 된 뒤 이원계의 큰 아들 이양우(李良祐)를 자기 아들들과 동격인 군(君)으로 봉합니다. 적자인 형의 아들이라도 한 등급 낮추는 게 당연할 텐데, 서출을 왕자와 같은 자리에 올린 것은 좀 이상하지요? 그렇다고 뚜렷한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구요. 보상심리 아닐까요?
또 태종 때 환조(이자춘)의 비문(碑文)에 적.서의 ‘사실’이 잘못 적혀 있다 해서 소동이 나는데, 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봐서도 ‘혐의’가 짙습니다. 신하들은 이원계의 자손이 서출인데 비문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고 난리를 치지만, 정작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은 그쪽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하는 것이죠. 엄연히 왕비로 책봉받은 이성계의 후처 강(康)씨 소생들을 서자로 모는 행태로 미루어 봐서도 이원계가 서자라는 얘기는 미심쩍습니다.
이성계의 사촌(이자춘의 형의 아들) 이름이 이천계죠? 이들 사촌의 돌림자가 ‘계’자 아닐까요? 이자춘의 서자 하나는 돌림자를 따라 이원계로 짓고 또 다른 서자는 이화(李和)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명을 했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잘 생기고 똑똑하고 용감해 3박자를 고루 갖춘, 한마디로 애초부터 임금 감이었다는 게 실록의 주장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다만 그가 활을 매우 잘 쏘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이성계에 관한 실록의 초기 기사는 온통 활 잘 쏜 얘기뿐이니까요. 이런 식입니다.
이성계가 젊었을 때 이자춘의 첩 김씨(이화의 어머니)가 담장에 앉은 까마귀를 쏘아보라고 했습니다. 다섯 마리를 단발에 떨어뜨렸죠. 김씨는 남이 알면 큰일나겠다 싶어 이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냇가에서 목욕하고 쉬다가 숲에서 잇달아 달려나오는 담비 스무 마리를 나오는 족족 맞추기도 했습니다. 또 노루 다섯 마리 한 무리를 쫓아 다섯 발로 모두 죽인 적이 있었으며, 평상시에도 노루 서너 마리를 연달아 쏘아 죽인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숨어 있는 꿩을 잡을 때는 꼭 놀라게 해서 몇 길 위로 날게 한 다음에 올려 쏘아 번번이 맞혔습니다.
동북면(함경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도지사) 이달충(李達衷)이라는 사람이 고을을 순시할 때였습니다. 그 부하 장수 하나가 이성계와 다투고 이달충에게 와 일러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를 부른 이달충은 그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뜰에 내려가 맞아들인 뒤 술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부하는 당연히 불만을 제기했겠지만, 이달충은 부하에게 절대로 그에게 맞서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큰 인물’임을 알아본 것이지요.
이달충이 서울로 돌아갈 때는 더욱 기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자춘이 전별하면서 술을 따르자 이달충은 서서 마셨는데, 이성계가 따르자 꿇어앉아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자춘에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이오. 공께서도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 집안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드님일 것이오.”
그러고는 이성계에게 자기 자손을 부탁했습니다. 이달충의 아들 이전(李專)은 나중에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 술에 취해 실언을 해서 죽게 됐으나, 이런 인연으로 죽음을 면하고 해남현(海南縣)으로 도형(徒刑)을 가는 선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도형중에 죽기는 했지만.
이성계가 즐겨 쏜 것은 대초명적(大哨鳴鏑)이라는 화살이었답니다. 싸리나무로 살대를 만들고 학의 날개로 깃을 달아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습니다. 순록의 뿔로 깍지를 만들어 크기가 배(梨)만 했습니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 보통 화살보다 힘이 배는 세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자춘이 이성계의 화살을 뽑아 보고 사람이 쓸 게 못 된다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는데, 이성계가 주워 살통에 꽂고 섰다가 달려나오는 노루 일곱 마리를 잇달아 쏘아 죽이니 이자춘도 기뻐하며 웃었다고 합니다. 또 평소에 배만한 나무 공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50~60 보 밖에서 위로 던지게 하고는 나무살로 쏘아 번번이 맞혔습니다.
사냥을 자주 다닌 이성계는 위급한 상황도 곧잘 넘겼다고 합니다. 한번은 말을 달려 멧돼지를 쫓다가 갑자기 백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자 얼른 말에서 몸을 빼쳤습니다.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고 자신만 살아났습니다. 큰 범을 사냥하다가 범이 갑자기 곁에 나타나 물려 하자 팔을 휘둘러 벌렁 나자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인 일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얼음판 위를 달리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앞서의 이달충 전별연 때는 얼음이 언 큰 연못으로 도망치는 노루를, 말을 타고 쫓아 건너가서 쏘아 죽였습니다. 이자춘을 따라 사냥을 갔을 때도 짐승을 발견하고 얼어붙은 비탈길에 말을 달려 모두 맞히니, 야인(野人)들도 놀라 세상에 당해낼 사람이 없겠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또 들에서 사냥하면서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달려들어 형세가 급박했습니다. 말고삐를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쳤는데, 깊은 못은 얼음이 겨우 얼기 시작해 사람조차 건너갈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성계는 그 위로 말을 달렸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 발자국에 구멍이 나 물이 튀어올랐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동북면 화령(和寧)에서 사냥하는데, 땅이 험하고 미끄러웠지만 이성계는 가파른 비탈을 말을 달려 내려와서 큰 곰 몇 마리를 모두 화살 한 개로 죽였습니다. 요성(遼城) 싸움에서 항복해 따라다니던 처명(處明)이라는 장수가 감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지만, 공의 재주는 천하 제일입니다.”
홍원에서 사냥을 하는데,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말을 달려 먼저 한 마리를 쏘아 죽이자 두 마리가 달아났습니다. 다시 쏘아 화살 한 개가 두 마리를 꿰뚫고 나무에 꽂히니, 부하를 시켜 그 화살을 뽑아 오게 했습니다. 부하가 늦게 오자 까닭을 물었습니다. 부하는 화살이 나무에 깊이 꽂혀 잘 빠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성계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노루가 세 마리였더라도 내 화살 힘으로 충분히 꿰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한번은 친한 친구 여럿을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았습니다. 배나무가 1백 보 밖에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늘어져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이성계에게 쏘아보라고 조르니, 한 발로 모두 떨어뜨려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했습니다.
이성계가 이두란(李豆蘭)과 함께 사슴 한 마리를 쫓았습니다.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사슴은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났습니다. 이두란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지만, 이성계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 이를 넘은 뒤 나무 밑으로 빠져나간 말을 다시 잡아타고 뒤쫓아가 사슴을 잡았습니다. 이두란이 놀라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공은 하늘이 낸 재주여서 사람의 힘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공민왕(恭愍王)이 신하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직접 구경했습니다. 이성계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임금이 감탄해 말했습니다. “오늘 활쏘기는 이성계의 독무대로구나.”
원나라에 벼슬했던 찬성사 황상(黃裳)은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나, 원나라 황제가 직접 그 팔을 당겨 살펴보기까지 했습니다. 이성계가 동료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50 보 밖에 설치했는데도 이성계는 쏠 때마다 다 맞혔습니다.
한낮이 지나 황상이 오자, 재상들이 이성계에게 황상과 단둘이 활쏘기 시합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50 발까지는 둘 다 실수 한 번 없이 맞혀 팽팽했으나, 그 뒤에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황상은 간혹 맞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성계는 수백 발을 쏘았어도 빗나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대궐의 작은 은거울 10 개를 내다가 80 보 밖에 두고 신하들에게 쏘게 한 뒤 맞힌 사람에게 그 거울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성계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임금이 칭찬하며 감탄했습니다.
이쯤에서 실록은 이성계의 활솜씨에 덧붙여 인품까지 치켜세웁니다. 이성계는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상대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수를 살펴 겨우 상대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 승부를 내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아무리 구경하자고 권해도 한 개쯤 더 맞힐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스물두 살 때인 공민왕 5년(1356)에 처음 벼슬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 이자춘이 이미 절반쯤 중앙 무대에 발을 들여 놓은 상태라 이성계도 중앙군에 편입돼 외적 토벌 등에 자주 나갔습니다.
1361년에 서북면(평안도)의 독로강(禿魯江) 만호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키자 금오위(金吾衛) 상장군 겸 동북면(함경도) 상만호이던 이성계는 친병 1천5백명을 거느리고 가 토벌했습니다. 그해 겨울 홍건적 20만 명이 쳐들어와 도성을 빼앗겼는데, 이듬해 1월 도성을 수복하는 데도 친병 2천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을 공략해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를 고려 말의 대표적인 장수로 우뚝 일어서게 것은, 첫 번째가 원나라 납합출(納哈出)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가 남부 지방을 휩쓴 아기발도(阿其拔都) 왜구의 격퇴였습니다. 이 두 사건은 조선 건국 후 노래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이성계의 공적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됩니다.
만주 지역을 다스리던 원나라 심양행성(瀋陽行省) 승상 납합출은 1362년 2월 동북면 지역에 쳐들어왔습니다. 이 지역 군사 책임자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거듭 패하자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사로 나가 싸움을 도왔습니다.
7월에 납합출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홍원(洪原) 달단동(韃靼洞)에 진을 쳤습니다. 이성계는 덕산동(德山洞) 등지에서 이들을 쳐부수고, 함관령(咸關嶺) 차유령(車踰嶺) 두 재에서 거의 섬멸했습니다. 그들이 버린 갑옷과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이성계가 도착해 장수들에게 거푸 패한 까닭을 물으니, 장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참 싸우다 보면 붉은 기꼬리로 장식한 쇠갑옷을 입은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는데, 모두 무너져 감히 맞설 사람이 없습니다.”
이성계는 그 사람을 찾아 대적하려고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앞으로 달려나왔습니다. 그가 조급히 창을 찔러대자 이성계는 몸을 뒤집어 말 옆에 붙었습니다. 적의 장수가 헛찌르면서 창과 함께 거꾸러지니, 이성계는 곧 안장에 걸터앉아 쏘아 죽였습니다. 적은 낭패해 북으로 도망쳤습니다.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온갖 싸움터를 다 돌아다녔지만, 이런 장수가 어디 또 있습디까? 빨리 피해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납합출은 듣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 바로 달단동으로 갔습니다. 납합출 역시 진을 치고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마주나왔습니다. 이성계도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 서로 대면하니, 납합출이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 올 때는 본디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일 뿐, 귀국 땅을 침범하려는 것은 아니었소.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해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부하 장수 몇 사람을 잃어 형세가 매우 궁색하게 됐소. 그만 싸웁시다. 말만 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소.”
이때 적의 병세(兵勢)는 매우 강성해 이성계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습니다. 이성계가 납합출 곁에 있는 장수를 쏘아 죽이고 다시 납합출의 말을 쏘았습니다. 납합출이 말을 바꿔 타자 또 말을 쏘아 죽였습니다. 일진일퇴하며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이성계가 납합출을 몰아 쫓으니, 납합출이 급히 말했습니다.
“이(李) 만호, 장수끼리 서로 핍박할 필요가 무에 있소?”
그러고는 말을 돌렸습니다. 이성계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이자 납합출의 부하 군사가 제 말을 주어 겨우 벗어났습니다.
며칠 뒤에 납합출과 함흥 들판에서 만났습니다. 이성계는 혼자 돌진하면서 적을 떠보았습니다. 적의 날랜 장수 셋이 한꺼번에 곧장 앞으로 달려오자 이성계는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습니다. 세 장수가 가까이 왔을 때 이성계는 휙 말머리를 돌리니 세 장수의 말이 흥분해 미처 고삐를 당기지 못하고 쑥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성계는 뒤에서 그들을 쏘아 넘어뜨리고 적을 복병 쪽으로 유인해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납합출은 당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쳤습니다. 은패(銀牌)와 구리 도장 등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고, 그 밖에 주운 물건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로써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됐습니다. 나중에 납합출은 사람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임금에게 말을 바치고, 또 북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이성계에게 주어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납합출의 누이동생이 군중에서 이성계의 뛰어난 무용을 보고는 감동해, 이런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자춘이 전에 원나라에 들어가다가 납합출에게 들러 이성계의 재주를 칭찬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 납합출이 패하고 돌아가서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탄식했습니다.
나중에 고려 사신이 오자 납합출이 말했습니다.
“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공민왕이 젊은 이(李) 장군을 보내 치는 바람에 죽을 뻔했소. 이 장군께서는 평안하시오? 나이는 젊어도 군사 쓰는 것이 귀신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재주요.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
공민왕 13년(1364)에는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우리 나라 출신의 최유(崔濡)라는 사람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이라는 왕족을 세우려고 요동 군사를 내어 쳐들어왔습니다. 최유는 역시 우리 나라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奇) 황후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 등을 보내 막았으나 거듭 패해 안주(安州)까지 물러났습니다. 임금은 다시 찬성사 최영(崔瑩)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이성계도 지시를 받고 동북면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 참여했습니다.
이성계는 앞서 패한 장수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했다가 혼자 싸우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어쨌든 그의 분전으로 적은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이성계는 이 싸움에 나갔다가 본거지를 잃을 뻔했습니다. 이성계와 인척 관계에 있던 삼선(三善) 삼개(三介) 형제가 여진족을 끌어들여 변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은 여진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 힘이 세고 말타기 활쏘기에도 능해 젊은 불량배들을 모아 북쪽 변방을 휘젓고 다녔지만 이성계가 두려워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성계가 서북면으로 가자 이들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함주(咸州, 함흥)를 함락시켰습니다. 지키던 장수들이 도망쳐 철관(鐵關)까지 물러나니 화주(和州, 영흥) 이북 지방이 모두 넘어갔습니다.
이 사태는 2월에 이성계가 서북면에서 돌아오고서야 해결됐습니다. 화주 함주 등 고을은 모두 수복되고 삼선 삼개는 여진 땅으로 달아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로 승진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성계는 또 이때 공주(孔州, 경원)를 점거하고 있던 원나라 장수 조무(趙武)를 치고 그를 사로잡아 휘하에 두었습니다. 조무는 뒤에 벼슬이 공조 전서(典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기(奇)황후의 조카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는 원나라가 망한 뒤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18년(1369)에 고려는 그 정벌에 나섰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 원수, 지용수 양백연(楊伯淵)은 서북면 원수를 맡았습니다.
이듬해 1월에 이성계는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 설한령(雪寒嶺)을 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날 저녁 서울의 서북쪽 하늘에 보랏빛 기운이 가득 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천문을 맡은 서운관(書雲觀)에서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말하자 임금이 기뻐하며 이성계를 지목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우라산성(亏羅山城)을 포위하고 장기인 활솜씨를 발휘했습니다. 70여 발을 쏘아 모두 적의 얼굴을 바로 맞추니 성 안에서는 기운이 쑥 빠져버렸습니다. 지휘자는 밤중에 도망치고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했습니다.
다른 산성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해 총 1만여 호를 얻었습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쪽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고 귀순하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원나라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 동지사 이원경(李原景) 등 3백여 호를 데리고 와서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이원경은 조상이 본디 고려 사람이라며 항복을 해왔고, 원나라 장원 급제 출신의 배주도 이성계를 통해 항복해 임금으로부터 한복(韓復)이란 성과 이름을 받았습니다. 한복은 이성계를 매우 정성껏 섬겼습니다.
8월에 동녕부 공격령이 내려졌습니다. 12월에 이성계는 친병 1천6백 명을 이끌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빠른 기병 3천 명으로 요성(遼城)을 습격해 함락시켰으나 기새인첩목아는 도망쳤습니다. 이 싸움에서도 이성계는 적장 처명(處明)을 활솜씨로 항복시켜 부하로 삼았습니다.
이때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을 공격하면 꼭 빼앗는 나라로 고려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공민왕 20년(1371) 7월에 이성계는 문하부 지사가 되고 이색(李穡)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는데, 임금이 측근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문신인 이색과 무신인 이성계가 같은 날 문하부에 들어왔는데, 조정에서는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이는 스스로 인재를 제대로 등용했다고 자랑스러워 한 말이라고 합니다.
북방의 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제 문제는 왜구였습니다. 공민왕 21년(1372) 6월에 왜적이 동북면 지역을 노략질하자 임금은 이성계를 화령부(和寧府, 영흥) 윤(尹)으로 삼고 그대로 대장으로 삼아 왜적을 막게 했습니다.
우왕(禑王) 원년(1375) 9월에 왜적의 배가 덕적도(德積島) 자연도(紫燕島) 두 섬으로 잔뜩 모이자 우왕은 여러 도(道) 군사를 징발해 이성계와 삼사(三司) 판사 최영에게 거느리도록 하고 동강(東江) 서강에 군대를 모아 적을 막도록 했습니다.
우왕 3년(1377) 3월에 왜적이 강화부(江華府)를 노략질해 도성이 크게 흔들리자 임금은 이성계와 의창군(義昌君) 황상 등 열한 명의 대장을 시켜 서강에 군대를 모아 겁을 주게 했습니다.
이해 5월에 왜적이 경상도에 쳐들어왔습니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禹仁烈)은 왜적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새까맣게 몰려온다며 도와서 싸울 장수를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가 도착하지 않자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우인열은 연신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성계는 밤낮으로 행군해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웠습니다. 2백여 보 거리에서 적 하나가 몸을 숙이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렵지 않다는 듯이 욕을 해댔습니다. 이성계가 화살 한 개로 거꾸러뜨리니 적군이 놀라고 사기가 꺾여 크게 무너졌습니다.
낭패한 적은 산으로 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에서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어 우리 군사가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휘하 장수를 보내 치게 했으나 바위가 높고 가팔라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며 돌아왔습니다.
이성계가 꾸짖고 다시 둘째아들 이방과(李芳果)―나중의 정종(定宗)―를 보냈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성계는 직접 가서 보겠다고 말하고 휘하 군사들에게 따라오라고 일렀습니다. 이성계의 말이 한 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밀고 당기며 따르고 분발해 적군을 쳤습니다. 적군은 태반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으며 나머지 적군도 쳐서 모두 섬멸했습니다.
8월에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했습니다. 장수들이 거푸 패해 이성계 등이 싸움을 도울 장수로 동원됐습니다. 이성계는 싸움에 나가기 전에 투구를 백수십 보 밖에 놓고 쏘아 싸움 결과를 점쳐보았는데, 세 번 쏘아 모두 꿰뚫었습니다.
해주의 동쪽 정자(亭子)에서 싸우는데, 싸움이 한창일 때 깊이가 한 발을 넘는 진창 땅을 만났습니다. 이성계의 말은 한 번 뛰어서 건너갔으나 따라간 사람은 모두 건너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가지고 있던 화살 20 개 가운데 17 발을 쏘아 모두 맞혔고, 군사를 풀어 승세를 타고 마침내 적군을 크게 부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17 발 모두 왼쪽 눈초리를 쏘았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살펴보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남은 적군들은 험한 곳에 의지해 섶을 쌓고 튼튼히 지켰습니다. 이성계는 섶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하고 걸상에 걸터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차고 적군은 곤경에 빠지자 죽을 힘을 내어 부딪쳐왔습니다. 화살이 자리 앞의 술병에 맞는데도 이성계는 태연히 앉은 채 싸움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이때 왜적들은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꼭 이성계가 지금 어디 있는가를 묻고 감히 이성계의 군사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했으며, 틈이 보여야만 들어와 노략질했다고 합니다.
우왕 4년(1378) 4월, 왜적의 배가 서해로 몰려들어 해풍( 개풍)을 거쳐 개성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니, 온 나라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대궐 문에 군사를 배치했고, 성 안이 흉흉했습니다. 지역 군사로 하여금 성에 올라 망보게 하고, 여러 부대를 동강과 서강에 나가 지키도록 했습니다.
삼사 판사 최영이 여러 부대를 통솔해 해풍군에 진을 쳤습니다. 적군이 이를 정탐해 알고 최영의 군대만 부수면 서울을 엿볼 수 있다며, 도중의 진지는 건드리지 않고 곧장 해풍으로 달려와 중군(中軍)으로 향했습니다.
최영은 사직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며 부장 양백연과 함께 나아가 적을 쳤습니다. 최영은 적군이 쫓아오자 이성계의 정예 기병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고, 이성계는 양백연과 합세해 적군을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최영도 옆에서 쳐 적군은 거의 다 죽었고 나머지 무리는 밤에 도망쳤습니다.
우왕 6년(1380)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머물면서 남부 3 도(道)를 노략질했습니다. 바닷가 고을을 도륙하고 불태워 쑥밭이 됐으며, 사람을 얼마나 죽이고 잡아갔는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쌀을 배로 운반하다가 떨어뜨려 한 자 두께로 쌓였다고 합니다. 잡아가는 포로의 자녀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지나간 곳은 피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두세 살 먹은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뒤 쌀 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냈습니다. 3도 바닷가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어버렸으니, 왜적의 노략질이 시작된 이후로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왜적을 정벌하러 보냈습니다.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부장(副將)이 되고, 그 밖에 10여 명의 대장에게 모두 이성계의 지휘를 받도록 했습니다. 군대가 장단(長湍)에 이르렀을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점쟁이는 싸움에 이길 징조라고 말했습니다.
지리산 일대는 이성계가 활약하던 시대에도 처절한 싸움터였다.
왜적은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엿새 동안 술판을 벌이고 창고를 불사른 후 경산부(京山府, 성주)를 지나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했습니다. 3도 원수 배극렴(裴克廉) 등 아홉 대장이 패전하고 두 대장이 죽었습니다. 일반 군사로 죽은 사람은 5백여 명이었습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 드디어 함양성(咸陽城)을 치고 남원(南原)으로 가다가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습니다.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니, 온 나라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성계는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습니다. 적군과 1백20 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배극렴 등이 마중나와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성계는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했습니다.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장수들은 모두 적군이 험한 곳을 지고 있어 그들이 나오면 싸우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성계는 분개하면서 말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적군에 대한 의분이 솟으면 오히려 적군을 못 만날까 염려하는 법이오. 이제 적군을 만났는데 치지 않는 게 옳겠소?”
그러고는 각 부대의 임무를 정하고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한 후 동쪽으로 진군해 운봉을 넘었습니다. 적군과의 거리는 수십 리.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랐습니다.
이성계가 길 오른쪽의 험한 샛길을 보고 말했습니다.
“적군은 틀림없이 이 길로 나와서 우리 뒤를 칠 것이오. 서둘러야겠소.”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선봉이 매우 날카롭자 싸우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이때 날은 벌써 저물었습니다.
이성계가 험준한 곳에 들어가자 과연 적의 기습 군사와 정예병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성계는 화살 50여 발을 쏘아 모두 적의 얼굴에 맞추었으며, 모두 세 번을 만나 힘껏 싸워 적을 죽였습니다. 진창을 만나 적군과 우리 군사가 서로 넘어졌으나, 빠져나와서 보니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적군은 산을 의지해 굳게 지켰습니다. 이성계는 군사들을 지휘해 길목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휘하 군사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했습니다. 이성계가 올려 공격하니, 적군은 죽을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부딪쳐왔고 우리 군사는 패해 내려왔습니다. 이성계는 다시 소라를 불어 부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에 부딪쳤습니다.
창을 든 적의 장수가 곧바로 이성계 뒤로 달려와 매우 위급했습니다. 휘하 장수 이두란이 말을 달리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이성계는 미처 보지 못했으나 결국 이두란이 쏘아 죽였습니다.
이성계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졌습니다. 바꾸어 타자 또 화살에 맞아 넘어졌습니다.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맞았습니다. 이성계가 화살을 뽑아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싸우니, 군사들은 이성계가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적군이 이성계를 몇 겹으로 포위하자 이성계는 기병 몇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습니다. 적군이 이성계의 앞에 부딪쳐오자 이성계는 그자리에서 여덟 명을 죽였습니다.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손을 휘두르며 말했습니다.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나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장수와 군사가 감동하고 고무돼 용기백배했습니다.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은 나무를 심어 놓은 듯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적의 장수 가운데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겨우 열대여섯 살쯤? 그러나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럽기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흰 말을 타고 춤추듯 창을 휘둘러대며 돌진해 부딪치니, 가는 곳마다 무너져 당해낼 장사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군사들의 말로는, 그가 하도 용감하고 날래어 오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는 장수들도 설설 기었으며, 군중의 명령은 그가 모두 주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군사는 그를 아기발도라 부르고 서로 피했습니다. 아기는 우리말로도 아기, 발도(바투)는 용사라는 뜻의 몽고말이니, 아기발도는 ‘아기 용사’지요.
이성계는 그의 용맹을 아껴 이두란에게 사로잡도록 지시했으나, 이두란은 사로잡으려면 사람이 다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목과 얼굴까지 감싸 쏠 곳이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말을 달리며 그 투구를 쏘아 꼭대기를 바로 맞혔습니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적장은 서둘러 투구를 바로 썼습니다. 이성계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꼭대기를 맞혔습니다. 투구가 떨어지자 이두란이 곧 쏘아서 죽였고, 그러자 적군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이성계가 몸을 던져 힘껏 치니, 적의 무리가 궤멸되고 정예병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적군의 통곡 소리가 마치 만 마리 소가 우는 듯했습니다. 적군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 군사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산으로 달려 올라가 기뻐하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마침내 적을 크게 쳐부수니, 냇물이 모두 시뻘개져 예니레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물을 떠 맑아지기를 기다려 한참 지나서야 마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 1천6백여 필을 얻고 무기는 셀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우리 군사의 10 배나 되던 적군은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성계는 세상에 적을 깡그리 섬멸하는 나라는 없다면서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적군을 친다면 이렇게 해야지.”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탈춤을 베풀었습니다.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적군의 머리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장수들은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봐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진에서 돌아와 말했습니다.
“아기발도는 이 장군이 진을 가지런히 설치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 무리들에게 ‘이 부대의 기세는 결코 지난날의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싸움은 너희들이 각기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행군에서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려 하니, 이성계가 말했습니다.
“대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가벼워 멀리 가져가기 편하겠지만, 대나무는 민가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다.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가면 충분하다.”
이성계는 이렇게 가는 곳마다 털끝 만한 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실록은 한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부대를 정돈하고 돌아오니, 삼사 판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산대놀이와 여러 가지 재주를 베풀며 도성 동쪽 교외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습니다. 이성계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니, 최영도 두 번 절하고 앞으로 와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성계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하며 말했습니다.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에 이긴 것뿐이지, 제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은 이미 세력이 꺾였으나, 혹시라도 다시 덤빈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공! 이 싸움 하나로 우리 나라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성계는 사양하면서 과분한 칭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왕이 금 50 냥을 내려주는 것도, 장수가 적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이라고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우왕 8년(1382) 7월, 이성계는 동북면 도지휘사가 됐습니다. 이때 여진 사람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 인민을 사로잡아 갔는데, 이성계가 대대로 그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아 지역 사정에 밝으므로 그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8월에 호발도가 다시 와서 단주(端州, 단천)를 노략질했습니다. 부만호(副萬戶)의 자리에 있는 자가 내응해 재물을 모두 챙겨 일부러 뒤에 빠져 있다가 거짓으로 잡혔습니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靑州, 북청)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했습니다.
이때 이두란이 모친상으로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이성계는 나라 일이 급하니 상복을 입고 있을 수 없다며 상복을 벗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길주(吉州) 들에서 호발도를 만난 선봉 이두란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해 돌아왔습니다.
곧 이성계가 도착했습니다.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으로 입고 붉은 털옷을 걸친 채 검은 암말을 타고 진(陣)을 옆으로 펼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성계를 깔보고는 군사를 남겨둔 채 칼을 뽑아 앞으로 달려나오니, 이성계도 혼자서 칼을 뽑아 말을 달려나갔습니다.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쩍이면서 지나쳐 맞히지 못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이성계가 급히 말을 돌리고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습니다.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곧 다시 그의 말을 쏘자 말이 넘어져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성계가 다시 쏘려는데 그 휘하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와 함께 그를 구해냈습니다. 우리 군사도 도착하니, 이성계가 군사를 풀어 크게 적군을 쳐부수었습니다.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쳤습니다.
9월에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이성계가 안변에 이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밭 한가운데 뽕나무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쏘자 단발에 비둘기 두 마리가 함께 떨어졌습니다. 길가에서 한충(韓忠) 김인찬(金仁贊)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다가 이를 보고 감탄해 말했습니다.
“대단합니다, 도령의 활솜씨가.”
이성계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도령은 벌써 지났소.”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갖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조밥을 차려 바쳤고, 이성계는 그 성의를 보아 수저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이성계를 따르고 떠나지 않았고, 모두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9월에 명(明)나라 사신들이 우리 나라에 와 이성계와 이색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때 이성계와 최영의 이름이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으므로, 사신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최영은 교외에 나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왜적의 배 1백50 척이 함주 홍원 북청(北靑) 등지를 노략질해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 씨가 말랐습니다. 대장인 찬성사 심덕부 등이 왜적과 홍원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습니다. 심덕부는 적진에 혼자 뛰어들어갔다가 창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 분전에도 불구하고 크게 패해 적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이성계는 가서 적을 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함주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의 담당을 정하면서 이성계는 다시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역시 장기인 활솜씨로 말입니다. 군영 안에 소나무가 있었는데, 70 보 거리에서 몇 번째 가지의 몇 번째 솔방울을 쏘겠다고 공언하고 즉시 활로 쏘았습니다.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모두 말한 대로 맞히니,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했습니다.
이튿날 곧바로 적이 주둔해 있는 토아동(兎兒洞)으로 가서 골짜기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습니다. 적의 무리가 먼저 골짜기 안의 동쪽과 서쪽 산을 차지했는데, 멀리서 소라 소리를 듣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이건 조개로 만든 이성계의 소라 소리다!”
이성계는 상호군 이두란 등 1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삐를 당기면서 천천히 행군해 그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적군은 우리 군사가 적고 행진이 느린 것을 보고는 까닭을 알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동쪽의 적군이 서쪽의 적군에게로 가 한덩어리가 됐습니다.
이성계는 동쪽의 적군이 진을 쳤던 곳에 올라가서 걸상에 걸터앉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안장을 벗겨 말을 쉬게 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말을 타려는데, 1백 보 가량 되는 곳에 마른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잇달아 세 발을 쏘아 모두 맞히니, 적군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고 탄복했습니다.
이성계는 적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뒤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적의 우두머리는 그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하고 부하와 더불어 항복을 의논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공격하기로 하고 말에 올라 이두란, 고여, 조영규 등을 시켜 그들을 유인해 오게 했습니다.
선봉 수백 명이 쫓아오자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면서 스스로 맨 뒤에 서서 물러나 복병 속으로 들어갔고, 드디어 군사를 돌려 몸소 적군 20여 명을 쏘아 모두 죽였습니다. 이두란, 안종검 등과 함께 말을 몰아 공격했고, 복병도 일어났으며, 이성계도 몸소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적군의 후면을 쳤습니다.
손수 죽인 적군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쏜 화살이 튼튼한 갑옷을 꿰뚫기도 하고 화살 한 개에 사람과 말이 함께 꿰뚫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친 자가 없었습니다.
우왕은 이성계에게 백금 50 냥과 안팎 옷감 다섯 벌, 안장 갖춘 말을 내리고, 또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습니다.
당시에는 이인임(李仁任)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시중(侍中) 자리에 앉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정부 격인 문하부의 맨 윗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바로 그 다음 자리인 찬성사에는 도길부(都吉敷)를 앉혔으며 재정을 담당한 삼사(三司)의 윗자리인 영사와 좌사로는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앉혔습니다.
이들 무리가 중요한 자리를 나누어 차지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땅과 노비를 빼앗았습니다. 그들이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니, 나라건 개인이건 주머니가 텅텅 비어버렸습니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면서 군사를
징발·독려하면서 압록강(사진)에
부교를 설치했다.
우왕 14년(1388) 1월,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이들을 제거했습니다.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고 길 가는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임견미 등은 목을 베었고, 이성계는 문하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습니다. 총리대우 격이죠.
2월에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인사를 의논하는 정방(政房)을 맡았습니다.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이 썼던 사람을 모두 내쫓으니, 이성계가 말했습니다.
“임견미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 되었으니, 사대부들은 모두 그들이 추천한 사람이오. 지금은 다만 재주가 있나 없나만 물으면 그만이지, 그들의 과거까지야 어찌 허물하겠습니까?”
최영은 듣지 않았습니다. 최영은 전 원주목(原州牧) 사(使) 서신(徐信)이 쫓겨난 세력인 이성림(李成林)의 동서라 해서 함께 목베려 했습니다.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말했습니다.
“죄인과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악한 무리도 이미 참형을 당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형벌과 살생을 중지하고 덕음(德音)을 펴야 할 것입니다.”
최영은 역시 듣지 않았습니다.
앞서 명나라 황제는 철령(鐵嶺)에서 비스듬히 북 동 서쪽이 원나라 소속이었다며 중국인 여진인 고려인 등 관할 군사와 백성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켰습니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을 치는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을 찾아가 극구 반대하자, 최영은 이자송이 임견미에 붙었다는 핑계로 곤장을 쳐서 전라도 절제사 군영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후에 죽였습니다.
우왕은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로부터 요동 군사가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신하들이 요동을 공격하려는 내 계책을 듣지 않더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는 다시 요동 군관을 보내 철령위를 세운다고 알렸습니다. 우왕은 최영과만 의논하고 요동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사냥한다는 핑계로 서쪽 해주로 행차했습니다.
4월에 우왕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과인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주오.”
이성계가 아뢰었습니다.
“지금 군사를 내는 일은 네 가지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고, 둘째로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킬 수 없으며, 셋째로 온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을 나가면 왜적이 그 빈틈을 노릴 것이고, 넷째로 지금 한창 덥고 비가 올 때여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이 전염병을 앓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물러나와 최영에게 내일 이렇게 다시 아뢰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영은 그러마고 했으나, 밤에 다시 들어가서 딴 소리는 들을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우왕이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소.”
“전하께서 꼭 큰 계책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에 행차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군사를 내소서. 곡식이 들판을 덮어 대(大)부대가 먹기에 넉넉할 것이니, 북을 치면서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를 낼 시기가 아닙니다. 비록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리니 군대가 전진할 수도 퇴각할 수도 없습니다. 군대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지면 화(禍)만 재촉할 뿐입니다.”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했소?”
“이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훌륭한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신들은 비록 살아 있으나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우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성계가 물러나와 울고 있자, 휘하 군사가 말했습니다.
“공(公)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
“백성의 재앙이 이제 시작된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고 징발해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었습니다. 또 중들을 징발해 군사로 삼았습니다. 최영을 8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습니다. 좌군과 우군이 모두 5만여 명이니, 무리가 10만이나 되었습니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은 술에 취해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않아 장수들이 출발 신고도 하지 못했습니다. 술이 깬 뒤에는 석포(石浦)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와 장수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각 부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이 아뢰었습니다.
“지금 대부대가 길을 떠나는데, 열흘이나 한 달만 지체해도 큰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가서 감독해야겠습니다.”
우왕은 함께 정사(政事)를 볼 사람이 없다며 말렸고, 최영이 굳이 청하자 우왕은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변방에서 와서 말했습니다.
“요사이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 안에는 군사책임자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대가 도착하면 싸우지 않고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최영이 매우 기뻐해 그 사람에게 물품을 잔뜩 주었습니다.
우왕은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年號)를 그만 쓰도록 하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원나라식 옷을 입게 했습니다.
늘 대동강(大同江)에 나가 부벽루(浮碧樓)에서 원나라 음악을 듣고 몸소 호적(胡笛)을 불며 즐기느라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나가서 놀 때는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광대들에게 갖가지 재주를 피우게 했습니다.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를 불었습니다.
우왕은 사람을 보내 장수들에게 금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주었습니다. 5월에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는데, 도망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왕은 그 자리에서 목베라고 명했으나, 도망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좌,우군 도통사가 보고했습니다.
“신들은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물이 불었습니다. 첫번째 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두번째 여울은 더욱 깊습니다. 섬 안에 머물러 주둔하고 하릴없이 군량만 축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동성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은데, 역시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전에 옳지 못한 일의 내용을 조목조목 적어 보고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해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 하물며 지금은 무덥고 비가 오는 철이라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겁습니다.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꼭 이긴다고 할 수 없으며 공격해도 꼭 빼앗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때에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면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군사를 돌리도록 명을 내리셔서 나라 사람의 여망에 답하소서.”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내시 김완(金完)을 보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했습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김완을 붙잡아두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람을 최영에게 보내 빨리 군사를 돌리도록 허락할 것을 청했으나 최영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군중에는 이성계가 휘하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해 벌써 말에 올랐다는 헛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군중이 흉흉했습니다. 조민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이성계에게 달려와 울며 말했습니다.
“공이 가시면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이성계는 말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시오.”
위화도 회군
그런 뒤에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상국(上國) 땅을 범해 천자에게 죄를 짓는다면 종묘 사직과 백성의 재앙이 바로 닥치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릴 것을 청했으나 임금은 살피지 않았으며, 최영도 늙고 정신이 혼몽해 듣지 않았다.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뵙고 직접 화,복을 말하고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해 백성들을 편안케 하지 않겠는가?”
장수들은 모두 따라 드디어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압록강에서 이성계는 흰 말을 타고 활 화살을 든 채 기슭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에서 바라보고 이렇게들 말했다 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저런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어찌 다시 저런 사람이 있겠는가?”
이때 장마가 며칠 동안 퍼부었지만 물이 붇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고 나자 갑자기 큰물이 몰려와 온 섬이 물에 잠겼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신통해했습니다. 또 동요에도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군사와 백성들은 늙으나 젊으나 모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보다 앞서 이성계가 살던 마을에 동요가 돌았습니다.
서경성(西京城) 밖엔 화색(火色)이요
안주성(安州城) 밖엔 연광(煙光)이라
그 사이를 오가는 이(李) 원수여
제발 창생(蒼生)을 구제하소서.
얼마 안 가서 군사를 돌이킨 거사가 일어났습니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은 부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습니다. 이날 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李芳雨)와 둘째아들 이방과, 이두란의 아들 이화상(李和尙) 등은 성주(成州)의 우왕 처소에서 도망쳐 이성계 등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우왕은 한낮이 되도록 이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임금의 행차를 지원하러 오는 수령들을 만나 말을 빼앗아 타고 갔습니다.
우왕은 대군이 돌아와 안주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도성(都城)으로 돌아갔습니다. 군사를 돌이킨 장수들이 서둘러 추격할 것을 청했으나, 이성계는 서둘러 가면 틀림없이 싸우게 되고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며 이를 막고 항상 군사들을 이렇게 경계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만약 임금을 범한다면 나는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백성에게서 오이 한 개만 빼앗아도 죄를 묻겠다.”
부대는 도중에 사냥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서경에서 서울에 이르는 사이의 수백 리 길에 우왕을 따르던 신하들과 서울 사람, 이웃 고을 백성들이 줄을 지어 술과 음료로 영접했습니다.
본디 종군하지 않았던 동북면 사람과 여진인 가운데서도 이성계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모여들어 밤낮으로 달려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왕은 도망쳐 돌아와 도성의 화원(花園)으로 들어갔습니다. 최영은 맞서 싸우려고 백관에게 무기를 가지고 곁에서 호위하도록 지시하고 수레를 모아 거리 입구를 막았습니다.
6월 1일,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주둔한 채 유만수를 보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조민수의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갔으나 최영이 맞아 싸워서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성계는 유만수를 보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틀림없이 패해 달아날 것이다.”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들에 말을 놓아 먹이고 있었는데, 유만수가 도망쳐 돌아오자 주위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이성계는 대답도 않고 장막 안에 계속 누워 있었습니다. 좌우의 사람들이 두 번 세 번 아뢰니, 그제서야 천천히 일어나 음식을 들고 말에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출발하면서 또 사기 진작 행사를 가졌습니다. 1백여 보 밖의 키 작은 소나무를 활로 쏘아 승패를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화살 한 개에 소나무 줄기가 바로 끊어지자 군사들이 모두 축하했으며, 한 부하 장수가 꿇어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영공을 모시고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이성계는 숭인문으로 입성해 좌군과 협격(挾擊)하면서 진군했습니다.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와 군사들을 맞으며 위로하고 수레를 끌어내 길을 뚫었습니다. 노약자들은 산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기뻐 고함을 지르며 펄펄 뛰었습니다.
조민수는 검은색의 큰 기, 이성계는 노란색의 큰 기였습니다. 검은 기는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했습니다. 조금 뒤에 노란 기가 선죽교(善竹橋)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최영의 휘하 장수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차지하고 있다가 노란 기를 바라보고는 도망쳤습니다.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를 한 번 불었습니다. 이때 행군하던 여러 부대가 모두 뿔나팔(角)을 불었으나 유독 이성계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은 소라 소리를 듣고 모두 이성계의 군사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군사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쌌습니다. 우왕은 영비(靈妃) 및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습니다. 곽충보(郭忠輔) 등 서너 사람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냈습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했습니다. 최영은 임금에게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의(大義)에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해 원망이 하늘에 뻗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서로 마주보면서 울고는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보냈습니다. 시중 이인임이 일찍이 이성계를 가리켜 나랏님이 될 것이라고 말해 최영이 듣고 매우 화가 났으나 감히 말하지는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옳았다고 탄식했습니다.
두 도통사와 36 명의 대장들이 대궐에 나가 신고했습니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은 도성에 있는 원로 재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만났으며, 이성계는 이색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문 밖으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삼고, 이성계를 우시중으로 삼았습니다.
전교시(典校寺) 부령(副令)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이성계를 만나서는 ‘곽광전(霍光傳)’을 바쳤습니다. 곽광은 한(漢)나라 때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람이니, 이는 말하자면 우왕을 폐위하자는 주장인 셈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인옥(趙仁沃)에게 읽으라 해서 들었는데, 조인옥이 다시 왕(王)씨를 왕으로 세우자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우왕은 밤에 내시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이성계 및 조민수 변안열의 집으로 달려가 잡으려 했으나, 이들이 모두 성문 밖 진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허탕을 치고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시도에서 실패한 우왕은 결국 쫓겨나 강화로 가고, 군부는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실록은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왕씨의 후손을 골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 이임(李琳)과 인척 관계여서 우왕의 아들을 고집했고, 이색에게 물은 뒤 의논을 정해 창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왕,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창왕도 왕씨가 아닌 가짜 임금이라고 쫓겨나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겠지요.
이때 이성계의 본처 한씨는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 농장에 있고 강(康)씨는 포천 철현(鐵峴) 농장에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나중의 태종―은 전리사(典理司) 정랑(正郞)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변고가 터졌다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 말을 달려 포천으로 갔습니다.
일 보는 종들이 벌써 다 흩어져 도망쳐버리고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한씨와 강씨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방원은 말을 탈 때나 내릴 때나 모두 직접 부축하고, 스스로 허리춤에 익힌 음식을 차고 가며 봉양했습니다. 강씨의 두 딸과 두 아들도 모두 나이 어렸으나 함께 따라갔습니다. 이방원은 직접 안아서 말에 태우기도 하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직접 말을 끌기도 했습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 길가의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철원(鐵原) 관문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으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밤중에 몰래 떠났습니다.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습니다.
이천(伊川)에 있는 한충의 집에 이르러 가까운 마을의 장정 1백여 명을 모아 담당을 나누고 부대를 편성해 변고에 대비하면서 말했습니다.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틀림없이 나를 뒤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오더라도 두렵지 않다.”
이방원은 이레 동안을 거기서 머물다가 일이 안정됐음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앞서 최영은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고자 했으나, 곧 일이 급박해져 그러지 못했습니다.
창왕은 이성계를 동북면 삭방강릉도 도통사(都統使)로 삼고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이성계는 병으로 사직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창왕은 또 이성계의 공을 칭송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창왕은 8월에 이성계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상서사(尙瑞司) 판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공민왕이 죽은 뒤 중국 황제가 집정 대신을 부를 때마다 모두 두려워 감히 가지 못했는데, 이때에 문하부 시중 이색은 창왕이 중국에 직접 조회하는 문제와 왕의 즉위를 승인받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스스로 중국에 가겠다고 청했습니다.
창왕은 이색과 밀직사 첨서(僉書) 이숭인(李崇仁)을 중국에 보내 새해 하례를 드리면서 이를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이성계는 이색을 칭찬했습니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구나!”
이색은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고가 있을까봐 이성계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데려가게 했습니다.
중국에 가는 길에 여관에서 중국 관리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색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나라 최영이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렸으나 이성계는 그를 파리 잡듯 손쉽게 잡았으니, 당신 나라의 백성이 이성계의 한없는 덕을 무엇으로 갚겠소?”
중국에 이르니,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듣고 있었던 황제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원나라에 벼슬해 한림(翰林)으로 있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
이색은 곧 중국말로 대답했습니다.
“왕이 직접 조회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얘기냐고 물으니 예부(禮部) 관원이 이 말을 전해 아뢰었습니다.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아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중국말은 변방의 납합출하고 똑같구나.”
돌아오는 길에 발해(渤海)에서 객선(客船) 두 척과 동행했습니다.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렀을 때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객선 두 척이 모두 침몰했습니다. 이방원이 탄 배도 거의 침몰 직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당황해 허둥거렸으나, 이방원은 태연자약했고 결국 온전히 돌아왔습니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 황제는 마음속에 주관이 없는 임금이다. 내 생각에 황제가 틀림없이 물을 것이라 여겼던 일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묻는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실록은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비웃었다고 전합니다.
“큰 성인(聖人)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파악하고 논할 수 있는가?”
이때에 토지 제도가 크게 허물어졌습니다. 남의 땅을 빼앗아 어떤 집안은 땅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들로 이어졌습니다. 매서운 고통이 날로 심해져 백성들이 서로 원망했습니다. 창왕 원년(1389), 이성계는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私田) 혁파를 주장해 관철시켰습니다.
앞서 종친인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 왜적에게 사로잡혀 갔다가 몇십 년이 지난 뒤에 돌아왔습니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습니다. 이숭인은 왕환이 가짜임을 밝히려다가 무고죄에 걸려 도망쳤습니다.
옥졸(獄卒)이 그 아들 이차약(李次若)을 뒷결박하고는 아버지를 찾아내라며 등을 후려쳐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현(梨峴)을 지나다가 마침 이성계를 만나자 옥졸은 이차약을 길가 집에 숨겼습니다. 이차약이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자 이성계가 놀라서 불러 묻고는 옥졸에게 말했습니다.
“어찌 아들을 추궁해 아버지를 찾는단 말인가?”
곧 풀어주라 명령하고 수행원 한 사람을 시켜 이차약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시중 이임과 함께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즉위 초에 마땅히 너그럽고 어진 정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숭인 등을 용서하소서. 또 이숭인이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모셔 오래 임금을 가르쳤으니, 업무를 보게 하소서.”
그제서야 이숭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창왕은 이성계에게 지시해 칼을 차고 신을 신고 탑전에 올라올 것과 알현 예를 올리면서 이름을 말하지 않도록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은 50 냥과 채색비단 10 필, 말 1 필을 내리고, 교지를 내려 권장하고 타일렀습니다.
이해 11월, 김저(金佇)가 황려부(黃驪府, 여주)에서 몰래 우왕을 만나니 우왕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평소 곽충보와 사이가 좋으니, 네가 가서 일을 꾸미라. 이성계를 없애면 내 뜻을 이룰 수 있다.”
김저가 와서 곽충보에게 알렸습니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응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달려와 알렸습니다. 김저와 정득후(鄭得厚)를 체포하도록 했는데, 정득후는 김저와 같이 모의하고 밤에 몰래 이성계의 집에 갔다가 붙잡히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김저는 순군부(巡軍府) 옥에 가두었습니다. 진술에 변안열 등의 이름이 오르자 대간(臺諫, 사헌부와 문하부 낭사)이 변안열을 목베라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는 힘껏 구하려 했으나 창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앞서 왕의 직접 조회를 청하러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윤승순(尹承順) 등이 돌아와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낸 공문을 전했습니다. 다른 성씨를 왕씨의 후계로 삼았음을 문책해 직접 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이성계는 삼사 판사 심덕부, 찬성사 지용기(池湧奇)·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 설장수(偰長壽), 평리 성석린(成石璘), 문하부 지사 조준(趙浚), 자덕부(慈德府) 판사 박위(朴葳), 밀직사 부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군사를 배치해 놓고 의논했습니다.
“신우 신창은 본디 왕씨가 아니니 제사를 받들게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중국 황제의 명령까지 있으니, 가짜 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가장 가까운 왕족이니, 그를 세워야 할 것이다.”
우왕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서 왕으로 인정치 않고 신우 신창으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공민왕의 정비(定妃) 궁으로 몰려갔습니다. 우왕을 강릉(江陵)에 옮기고 창왕은 강화에 내쫓아 서민으로 만들며 왕요를 맞아 왕으로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恭讓王)입니다.
공양왕은 심덕부를 시중으로, 이성계를 그 밑의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습니다. 실록은 당초 이성계를 시중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성계가 사양해 이렇게 조정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2월, 사재시(司宰寺) 부령(副令) 윤회종(尹會宗)이 글을 올려 우왕 창왕을 목베도록 청했습니다. 실록은 이 부분에서도 이성계의 ‘알리바이’를 마련합니다. 공양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일일이 물었으나 모두 잠잠했는데, 이성계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했다고 중국에 보고했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들이 있는데 신우가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 해도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공양왕은 우왕이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자신도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포상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공양왕은 또 아홉 공신에게 녹권(錄券, 공신증)을 내렸습니다.
이성계는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삼고, 화령군(和寧郡) 개국충의백(開國忠義伯)의 작위를 주었습니다. 식읍(食邑) 1000 호(戶)에 땅 200 결(結), 노비 20명을 내렸습니다. 그 녹권은 개국공신 배현경(裴玄慶)의 예에 따라 중흥공신(中興功臣)이라 일컫고 포상 내용을 적었습니다. 가족에게 작위와 벼슬을 주고, 자손은 영구히 죄를 용서하며, 하인들도 정해진 숫자만큼 등용한다는 내용입니다.
공양왕 2년(1390) 1월, 임금이 경연 관원을 두면서 이를 총괄하는 경연 영사로 이성계를 임명했습니다. 또 8도의 병마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설치해 교대로 지키게 했으며, 군비(軍費)로 월급을 주게 했습니다.
3월에 이성계가 병으로 사직했습니다. 공양왕은 4월에 대궐 내시를 보내 문병하고 억지로 나오게 했습니다.
아홉 공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칭찬했습니다. 대궐 말 1 필, 백금 50 냥, 비단과 명주 각 5 단(端), 금띠 한 개를 내리고는 내전(內殿)에서 위로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또 회군의 공을 적어 교지를 내리고 표창했으며, 토지 1백 결을 내려주었습니다.
공양왕 2년(1390) 5월,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밀직사 동지사인 조반(趙胖) 등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져온 소식이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중국 예부(禮部)가 이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중국에 가서 황제에게 고려를 쳐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시중 이성계가 종실이 아닌 자신의 인척 왕요(공양왕)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며, 왕요가 이성계와 함께 모의해 군사를 움직여 중국을 범하려 해서 재상 이색 등이 반대하자 이색,조민수,이임,변안열,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숭인,권근(權近),이종학(李種學),이귀생(李貴生) 등을 잡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 등은 잡아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살해당하거나 쫓겨났다고 윤이, 이초에 의해 거명된 사람들을 순군부 옥과 청주(淸州) 감옥에 가두고 국문케 했습니다.
6월에 공양왕은 이성계와 심덕부를 불러 죄수를 풀어주고 이조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 교지를 내렸습니다. 옥중에서 죽은 윤유린과 죄를 자복한 최공철, 도피중인 김종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황이 명백하지 않으니 고문을 가하지 말고 각처에 안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이 문제로 11월에 글을 올려 사직했습니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삼사(三司) 영사(領事)로 삼았습니다.
김종연은 서경에 가서 천호 윤귀택(尹龜澤)과 심덕부 휘하의 선공시(繕工寺) 판관(判官) 조유(趙裕)와 공모해 이성계를 살해하려 했습니다. 윤귀택은 계획이 누설될까봐 몰래 이성계에게 가서 변고를 고발했습니다.
“김종연이 심 시중과 지용기 등과 함께 모반을 꾸미고 있습니다. 조유도 심 시중이 자신과 조언 등 부하 장수들을 시켜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공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성계가 그 말을 몰래 심덕부에게 알리니, 심덕부가 조유를 옥에 내려 가두었습니다. 이성계가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신은 심덕부와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본디부터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조유를 신문하지 마셔서 우리 두 신하의 관계를 끝까지 보전케 하소서.”
공양왕이 조유를 풀어주려고 하니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국문하기를 청했습니다. 조유는 죄를 자백해 교수형에 처하고, 심덕부,지용기,조언 등은 모두 지방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공양왕은 사헌부의 청에 따라 대장들의 직인을 모두 거둬들였습니다. 12월에 다시 이성계를 문하부 시중 겸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습니다. 이성계가 글을 올려 사양했지만,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비답(批答)을 내렸습니다.
이듬해 1월, 5군(軍)을 줄여 3군으로 만들었는데, 도총제부(都摠制府)가 중앙과 지방의 군무를 통솔케 하고 이성계를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습니다. 이성계는 3월에 글을 올려 사직했지만, 임금은 역시 윤허하지 않고 비답을 내렸습니다.
6월, 대간(臺諫)에서 우현보의 죄가 이색과 같다며, 지금 이색이 이미 징계를 받았으니 같이 물리쳐 귀양보내야 한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글이 모두 세 번 올라갔지만 다 보류시켰습니다.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으로 가서 대간을 금지시키도록 청하라고, 우대언(右代言)으로 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지시했습니다. 대언은 나중의 승지(承旨)죠. 이성계가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게다가 내가 대간을 사주했다고 하시는가?”
그러고는 글을 올려 사직했습니다. 왕이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에게 가서 왕명을 전하라고 지시하고, 곧 비답을 내려주었습니다. 이성계가 아뢰었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어 함께 의논하고 변경이 위급해 막도록 신이 할 수 있는 일로써 책임지운다면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지금 신이 임무는 크고 직책은 무거워 그것만으로도 견디지 못하는데, 병까지 이것저것 신을 괴롭힙니다. 원컨대 의원과 약으로 스스로 보양(保養)토록 해주소서.”
공양왕이 윤허하지 않고 억지로 나오게 했습니다. 이성계는 사양하며 나가지 않은 채 다시 글을 올렸습니다. 공양왕은 글을 보고 이방원에게 말했습니다.
“시중이 글에서 말한 것은 모두가 내게 뜻밖의 것들이다. 내가 능력도 없이 외람되이 왕위에 있는 것은 오직 시중이 추대하는 힘만을 믿는 것이다. 시중을 아버지처럼 받드는데, 시중은 어찌 나를 저버리는가? 윤이, 이초와 신창을 세우고 신우를 맞이할 것을 함께 모의했다는 사람들은 이미 지난해에 의논해 증거가 명백치 않다고 해서 특별히 사면했고, 시중도 찬성한 일이다. 지금 대간이 다시 사면 전의 일을 들어 처벌을 청하기에 경으로 하여금 시중에게 가서 만약 대간을 보게 되면 이런 뜻으로 깨우쳐달라고 했을 뿐이다. 경이 시중에게 어떻게 말했기에 시중이 굳이 사퇴하려 하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나 또한 어찌 감히 이 자리에 편안히 있겠는가?”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가리키며 간절하게 맹세했습니다. 곧 이방원을 보내 업무에 복귀토록 타이르게 했으나, 이성계는 끝내 업무를 보지 않았습니다. 공양왕이 다시 대간에게 타일렀습니다.
“우현보의 죄상은 애매하고 게다가 사면 전의 일이니, 다시 청하지 말라.”
그러고는 이성계를 부르게 했으나 이성계는 아프다며 거부했습니다. 심부름 간 자가 억지로 나오라고 하니,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아뢰었습니다.
“신이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는데 지금 억지로 나가라 하니, 어찌할 바를 몰라 황공하고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공양왕은 화가 나 심부름갔던 자를 순군부 옥에 내려 가두었습니다.
이성계가 정도전, 남은(南誾), 조인옥 등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왕실을 위해 힘을 다했는데도 헐뜯는 말이 자주 일어나 우리가 배겨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동북면으로 돌아가 피해야겠다. 먼저 집안 사람들에게 빨리 짐을 꾸리도록 해서 떠나보내겠다.”
“공의 한몸에 종묘 사직과 백성이 달려 있습니다. 어찌 거취를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남아서 왕실을 도우며 훌륭한 사람을 등용하고 못난 사람을 물리치시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강을 세우면 헐뜯는 말은 모두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 한구석에 물러가 있으면 헐뜯는 말이 더욱 불붙어 무슨 화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옛날 한(漢)나라 때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니 고조(高祖)가 벌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다른 뜻이 없는데, 임금이 왜 나를 벌하겠는가?”
서로 의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이 이성계의 부인 강씨에게 말했습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에게 동북면으로 돌아가도록 권하고 있으니, 일이 잘못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을 없애는 게 낫겠습니다.”
강씨가 그 말을 믿고 이방원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을 내버려둘 수가 없다고 말하자, 이방원이 대답했습니다.
“아버님은 헐뜯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려 하시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해로써 힘써 설득해 가시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김지경을 꾸짖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들이다. 너는 다시 말하지 말라.”
7월에 공양왕이 이성계의 집에 거둥해 술과 음악을 베풀고 밤중까지 즐겼습니다. 이성계는 대궐에 나가 공양왕에게 답례 잔치를 올렸습니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옷 삿갓과 보석 갓끈, 안장 갖춘 말을 주었고, 이성계는 즉석에서 입고 절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밤이 되어 유만수가 문을 잠갔는데, 이방원이 몰래 이성계에게 나가자고 하고는 이성계의 명이라며 열쇠 담당에게 문을 열게 한 뒤 이성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이성계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갓끈을 이방원에게 주었습니다.
이튿날 임금이 화가 나 열쇠 담당을 가두었으나, 이성계가 대궐에 나가 술을 이기지 못해 문을 열게 했다고 사과하자 풀어주었습니다.
9월에 이성계는 문하부 판사가 됐습니다. 12월에는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더 받았습니다. 이 사이, 이색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귀양지에서 서울로 돌아와 이성계를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이성계는 몹시 기뻐하며 그를 윗자리에 맞아들이고 꿇어앉아 술을 올렸는데, 이색은 전연 사양치 않았습니다.
공양왕 4년(1392) 1월, 밀직사 사(使) 이염(李恬)이 술에 취해 임금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는데, 간관은 극형에 처하자고 청했으나 이성계가 용서를 청해 결국 곤장을 쳐 귀양보냈습니다.
이성계가 공이 큰데다 사람들이 많이 따르니 공양왕이 싫어했습니다. 또 유력 가문들에서는 사전(私田)을 혁파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양왕이 이성계를 꺼리는 것을 알자 갖은 방법으로 모함하고 헐뜯었습니다.
실록은 공양왕이 헐뜯는 말을 믿고 밤낮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몰래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이성계 진영에서는 글을 올려 변명하려 했습니다. 글을 써 놓고 올리지 않았는데, 이성계의 서형(庶兄)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공양왕의 사위 익천군(益川君) 왕즙(王緝)에게 이를 알렸습니다.
변중량은 평소 왕즙과 동갑계를 맺는 등 가까이 지냈는데, 중간에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의 시기 혐오가 이미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봐 훗날에 대비해 흘렸다는 것이지요. 공양왕은 이 사실을 알고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듣자니 경의 휘하 사람이 글을 만들어 우현보 등을 논죄하고자 한다는데, 경도 알고 있소?”
이성계는 깜짝 놀라 모른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나와 휘하 사람을 불러 본 뒤 비로소 그 내용을 알고는 중지시켰습니다.
3월, 이성계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하러 황주(黃州)에 갔다가 그길로 해주로 가서 사냥을 했습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방올(方兀)이라는 무당이 강씨에게 말했습니다.
“공의 이번 나들이는 마치 사람이 1백자나 되는 높은 누각에 올라 발을 헛디뎌 떨어졌는데, 거의 땅에 닿기 전에 많은 사람이 모여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강씨가 매우 근심했습니다.
이성계는 활을 쏘며 사냥했는데, 새를 쫓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다쳐 교자(轎子)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공양왕은 내시를 연달아 보내 문병했습니다.
앞서 정몽주는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져 온 나라의 민심이 모두 그리로 쏠리는 것이 싫었는데,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 틈에 그를 제거하려고 대간(臺諫)을 사주했습니다.
먼저 그의 날개인 조준 등을 잘라낸 뒤에 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이성계가 가까이 믿는 삼사 좌사 조준, 전 정당문학 정도전, 전 밀직사 부사 남은, 전 판서 윤소종, 전 판사 남재(南在), 청주목(淸州牧) 사(使) 조박(趙璞)을 탄핵했습니다. 공양왕은 그 글을 도당(都堂, 도평의사사)에 내렸습니다.
정몽주는 조준 등 여섯 명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낸 뒤, 자신의 심복들을 조준, 정도전, 남은이 귀양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 그들을 국문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들이 길을 떠날 즈음에 이방원은 어머니 한씨가 죽어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부인 이제(李濟)가 차와 과일을 가지고 가니 이방원은 이제에게 정몽주 제거 의사를 내비쳤고, 이제도 옳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이성계가 벽란도(碧瀾渡)에 와 머물게 되자, 이방원이 달려가 말했습니다.
“정몽주가 틀림없이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성계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곳에 유숙하지 말고 바로 도성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이성계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청한 뒤에야 이성계가 병을 무릅쓰고 밤길을 떠나니, 이방원은 이성계를 부축해 모시고 집으로 갔습니다.
이 장면에서 실록은 일화 하나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방원이 대언으로 있을 때 이달충의 아우인 밀직사 제학 이성중(李誠中)이 아들을 시켜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원은 부인 민씨와 함께 앉아서 이를 받았는데, 민씨가 웃으면서 보검은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이방원이 이성중의 집에 가서 사례하며 유생(儒生)에게 보검은 왜 보냈느냐고 묻자 이성중이 대답했습니다.
“보검은 소인이 쓸 게 아닙니다. 명공(明公)께서 쓰셔야 하겠기에 감히 바쳤습니다.”
여하튼 정몽주는 대간을 사주해 연명으로 글을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목베자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과와 아우 이화, 사위 이제, 그리고 휘하의 황희석, 조규(趙珪) 등을 대궐로 보내 아뢰었습니다.
“지금 대간은,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에 조준이 다른 사람을 세우자고 주장했는데 신이 이를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준은 누구를 세우자고 했고, 신이 이를 막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청컨대 조준 등을 불러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시비를 가리게 하소서.”
두세 번을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 했으나, 공양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소인배들의 헐뜯는 말과 모함이 더욱 급박해지고 어떤 화(禍)가 닥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자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는 허락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나가서 형 이방과와 숙부 이화, 매부 이제와 의논하고 다시 들어와 이성계에게 아뢰었습니다.
“지금 정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 정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진술서에 우리 집안에 끌어넣으려 합니다. 일이 벌써 급박해졌으니 장차 어쩌시렵니까?”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라며 그저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이방원에게 빨리 여막으로 돌아가 큰일이나 마치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원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겠다고 두 번 세 번 청했으나 끝내 허락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어쩔 수 없이 나와 숭교리(崇敎里) 옛 집으로 가 사랑에 앉아 근심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급히 나가 보니 광흥창(廣興倉) 사(使) 정탁(鄭擢)이었습니다. 정탁이 극구 말했습니다.
“백성의 이해(利害)가 걸린 시점에 소인배들이 저렇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공은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씨가 있겠습니까?”
이방원은 즉시 이성계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방과, 이화, 이제와 함께 이두란을 불러다 정몽주를 치라고 하니, 이두란은 이성계가 모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 말을 듣지 않으시지만, 정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허물을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러고는 휘하 군사 조영규를 불러 말했습니다.
“이씨가 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해 스스로 밝혀내지 못하고 손이 묶여 죽음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틀림없이 이씨에게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씌울 것이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겠는가? 휘하에 군사가 많은데 누구 하나 이씨를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 없는가?”
조영규가 분개하며 지시를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방원은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여,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 정몽주를 치게 했으나, 변중량이 그 계획을 정몽주에게 누설했습니다.
정몽주가 이를 알고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왔습니다. 실은 사태를 엿보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성계는 정몽주를 이전과 같이 대접했습니다.
이화는 이방원에게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으나, 계책을 정한 뒤에는 이성계가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논이 정해지지 못하니,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님이 화내시면 제가 대의(大義)를 설명하고 위로해 풀겠습니다.”
그러고는 길가에서 치기로 모의했습니다. 이방원이 다시 조영규에게, 이방과의 집에 가서 칼을 가지고 바로 정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가 기다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고여, 이부 등 몇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에 들어왔다가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나갔습니다. 이방원은 일이 잘못될까봐 직접 가서 지휘하려 했습니다.
문 밖에 나오자 안장을 얹은 휘하 군사의 말이 서 있었습니다. 그것을 타고 달려 이방과의 집에 가서 정몽주가 지나갔는가 물으니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습니다.
정몽주는 마침 상가(喪家)에 들르느라고 조금 지체했고, 그 때문에 조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다릴 시간을 벌었습니다. 정몽주가 오자 조영규가 달려가 쳤으나 맞지 않았습니다.
정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니, 조영규가 쫓아가 말 머리를 쳤습니다. 말이 넘어지고 정몽주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일어나서 급히 달아났으나 고여 등이 쫓아가 죽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선죽교(善竹橋)였습니다.
조영무가 돌아와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죽인 사실을 말했고, 이방원은 들어가 이성계에게 알렸습니다. 이성계는 화를 벌컥 내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이방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멋대로 대신을 죽였구나!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생각하겠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은 충성하고 효도하라는 것인데, 네가 감히 이런 불효를 저지르니 내 약을 마시고 죽고 싶다.”
“정몽주 등이 우리 집안을 결딴내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려야겠습니까? 이것이 곧 효도인 까닭입니다.”
이성계는 더욱 화를 냈습니다. 강씨는 곁에 있으면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방원이 거들어달라고 하자 굳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해왔습니다. 어찌 이다지도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이방원은 휘하 군사를 모아 뜻밖의 사태에 대비해야겠다고 말하고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집을 빙 둘러싸 지키게 했습니다.
이튿날 이성계는 마지못해 황희석을 불러 말했습니다.
“정몽주 등이 죄인과 한패가 되어 대간을 몰래 꾀어 충신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죄값을 받았으니, 조준,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시비를 가려야겠다. 네가 가서 임금에게 보고하라.”
황희석이 미심쩍고 겁이 나 가만히 올려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제가 옆에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자 황희석은 대궐에 가 모두 고했습니다.
공양왕은 대간(臺諫)을 탄핵당한 사람들과 맞세워 시비를 가릴 수는 없다며, 대간을 지방으로 내보낼 테니 다시 청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노기 때문에 병이 더쳐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일이 급하다며 몰래 사람을 보내 조준, 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겠다고 알렸습니다.
또 이방과, 이화, 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한 뒤 이방과를 공양왕에게 보내, 정몽주 등을 처벌하지 않으려면 자신들을 벌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공양왕은 마지못해 대간을 순군부 옥에 내려 가두면서 국문은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곧 삼사 판사 배극렴, 문하부 평리 김주(金湊)에게 지시해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제조(提調) 김사형(金士衡) 등과 함께 국문하게 했습니다.
결국 정몽주, 이색, 우현보가 이숭인, 이종학, 조호(趙瑚)를 대간에게 보내 이성계의 부상을 틈타 그 날개를 잘라낸 뒤 치라고 했다는 자백이 나오자, 대간과 이숭인, 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습니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대간을 참형에 처하자는 주위의 주장을 물리치고, 곤장이라도 때리자는 것마저 그만두게 하는 ‘인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조준 등은 다시 불려왔고, 이성계는 문하부 시중이 됐습니다. 이성계는 사직했지만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6월에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에 찾아가 문병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진영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일고 있었습니다.
남은은 위화도 회군 때부터 조인옥 등과 더불어 몰래 이성계 추대를 의논했는데, 돌아온 후 이방원에게 이를 알리자 이방원은 이를 말렸습니다.
“이것은 큰 일이니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에 이르러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럿이 모인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습니다.
남은은 평소부터 이성계를 따르던 조준, 정도전, 조인옥, 조박 등 52 명과 함께 몰래 이성계를 추대하자고 모의했지만, 이성계가 화를 낼까봐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방원이 들어가서 강씨에게 고해 이성계에게 전하려 했으나, 강씨도 고하지 못했습니다. 이방원은 나와서 남은 등에게 일렀습니다.
“즉시 의식을 갖추어 왕위에 나아가시도록 권고해야겠소.”
이에 앞서 공양왕은 이방원과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불러 이성계와 동맹(同盟)을 하겠다고 밝히고 이성계에게 의논해 맹세문 초안을 잡아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틀림없이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조용은 대답했습니다.
“맹세는 귀하게 여길 게 못 되고 성인(聖人)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나라간의 동맹이라면 옛날에 있었으나, 임금이 신하와 동맹하는 것은 책이나 고사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공양왕은 초안이나 잡아 오라고 재촉했습니다. 조용과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가서 임금의 지시를 전하니, 이성계는 할 말이 없다며 임금의 지시대로 초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조용이 잡은 맹세문 초안은 이랬습니다.
“경(卿)이 없었으면 내가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 어찌 감히 잊겠는가? 황천(皇天) 후토(后土)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에게 빚지고 있는 바가 이러하다.”
조용과 이방원이 이를 공양왕에게 바치니, 공양왕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관(史官)을 겸직하고 있던 조용은 사초(史草)에 이렇게 썼습니다.
“임금은 시중(侍中)이 자기를 도와 임금으로 세운 공도 미처 보답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해칠 마음이 이미 싹텄다. 천명이 이미 가버리고 인심이 이미 떠났으니, 구구한 맹약(盟約)도 의지할 바가 못 되었다.”
드디어 고려 왕조 5백 년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공양왕 4년(1392) 7월 12일에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에 가 술자리를 베풀고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행차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가서 아뢰었습니다.
“지금 임금이 어두워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사직과 백성의 군주가 될 수 없으니, 청컨대 폐하소서.”
왕대비는 마침내 공양왕을 폐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남은이 문하부 평리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당시 임금이 거처하던 북천동(北泉洞) 궁(宮)에 가 교지를 선포했습니다.
공양왕은 엎드려 명령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나를 억지로 임금으로 세웠다. 내가 똑똑치 못하고 일이 돌아가는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는가?”
그러면서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고는 원주(原州)로 갔습니다. 백관이 옥새를 받들어 왕대비 궁전에 두고 모든 업무를 그곳에 나아가 처리했습니다. 왕대비는 13일에 교지를 내려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습니다.
16일에 배극렴, 조준이 신하들과 함께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골목을 꽉 메웠습니다. 신하들 가운데 대사헌 민개(閔開)는 얼굴을 찡그리고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남은이 그를 쳐 죽이려 했으나, 이방원이 의인(義人)을 죽일 수 없다고 극구 말렸다고 합니다.
이날 마침 여러 친척 여자들이 이성계와 강씨를 찾아와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국새가 들이닥치자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며 북문으로 해서 흩어져버렸습니다.
이성계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안뜰로 들어와 국새를 대청 위에 놓았습니다. 이성계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에게 의지해 겨우 침실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백관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배극렴 등이 합동으로 글을 올려 왕위에 오르도록 권했습니다. 이성계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이니 어찌 감당하겠소?”
그러고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은 둘러싸고 물러가지 않으며 더욱 간절히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습니다. 이날 이성계는 결국 수창궁으로 갔고, 백관이 궁궐 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습니다.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임금 자리는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성계는 6조(六曹)의 판서 이상을 전각 위에 오르도록 지시하고 일렀습니다.
“내가 수상(首相)일 때도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우려했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몸만 건강했다면 필마(匹馬)를 타고라도 피해갈 수 있었겠는데,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어 여기에 이르고 말았다. 경들은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내 부족한 덕을 보좌하라.”
그러고는 중앙과 지방 각급 신하들에게 그대로 일을 보도록 명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성계는 이튿날인 7월 17일 수창궁(壽昌宮)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첫 임금 태조(太祖)입니다.
새 왕조가 섰으니 이를 합리화하는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임금 자리에 오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니, 그런 천명의 증거로 여겨지는 일들이 제기되고 때로는 만들어지기까지 합니다. 조선의 건국에도 그런 설화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깨끗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은 곧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 밖에 와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다는 이상한 책을 바쳤습니다. 그 책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 땅을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의(非衣), 주초(走肖), 삼전삼읍(三奠三邑) 등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글자들은 모두 파자(破字)라고 하는, 한문 글자를 쪼개 놓은 것들입니다. 목자(木子)는 이(李)의 파자로 이성계를 의미하고(돼지는 이성계의 띠), 비의(非衣)는 배(裴), 주초(走肖)는 조(趙), 전읍(奠邑)은 정(鄭)의 파자로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시켜 책을 가져온 사람을 찾았으나 이미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고려의 서운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목자(木子)가 들어 있고,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고려 말에 이르도록 숨겨 알려지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하다가 뒤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한 뒤에야 ‘조명’이 곧 ‘조선’을 이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북면 의주(宜州)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개국하기 1 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무성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고 했습니다.
또 이성계가 전에 시중 경복흥의 집에 갔는데, 경복흥이 맞아들이고 그 아내로 하여금 나와 보게 하면서 지극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 자손을 부탁하고 늘 그를 특별 대우했습니다. 이성계가 혹시 밖으로 정벌을 나갈 때면 경복흥은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 사직이 장차 그대 손안에 들어갈 것이니, 어려움을 꺼리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공을 이루도록 하시오.”
일찍이 역술가 혜징(惠澄)이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운명을 많이 보았으나 이성계만한 사람은 없었소.”
“타고난 운명이 제아무리 좋아도 벼슬이 재상에 이르면 끝이 아니오?”
“재상이라면 말할 필요가 어디 있소? 내가 본 것은 임금의 운명이오. 그가 왕씨를 대신해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3 군(軍)이 한양(漢陽) 땅에서 사냥하는데,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이 함께 갔습니다. 노루 한 마리가 나오자 이방원이 달려가 쏘아 화살 한 개에 죽였습니다. 왕씨 종친 10여 명이 마침 높은 언덕에 모여 서서 이를 보고는 몹시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씨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아닐까?”
또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도 시중 이인임을 집으로 찾아갔는데, 나가고 난 뒤에 이인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가 장차는 틀림없이 이씨에게 돌아갈 것이다.”
실록은 이런 이적(異蹟) 시리즈를 ‘가뭄의 단비’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즉위 이튿날인 18일에 비가 내렸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 이에 앞서 오랫동안 가물다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억수같이 비가 내려 사람들이 진심으로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관직 명칭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계신 듯해서 그 부분을 좀 설명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똑같은 의문을 가지셨던 분들은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화령부 윤(尹)’ ‘원주목 사(使)’라는 게 좀 이상했다구요. 아직도 무슨 얘긴지 모르신다구요? 아, 띄어쓰기 문제예요. 왜 ‘화령 부윤’ ‘원주 목사’가 아니냐는 거죠.
사실 우리에겐 ‘부윤’ ‘목사’가 너무 익어서 후자 쪽의 띄어쓰기가 편해 보입니다. 모두 그렇게들 쓰구요.
그런데도 일부러 낯선 띄어쓰기를 한 것은 그 쪽이 관직 이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자가 펴내고 있는 ‘재편집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에서도 이런 방식을 띄어쓰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왜 ‘화령 부윤’이 아니고 ‘화령부 윤’인가? 모두가 한문 원문에는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이지만, 이 문제를 풀려면 관직 이름의 구성 방식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일반적인 관직 이름은 ‘기관명+직책(직위)명’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문화관광부(기관) 장관(직책)’처럼요.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이조(기관) 판서(직책)’와 같은 구성입니다. 물론 소속 기관이 애매하거나 내세울 필요가 없는 ‘대통령’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구성 원칙은 그렇습니다.
그럼 ‘화령 부윤’으로 가볼까요? 이 이름은 ‘지명+직책명’이라 원칙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직책명이라는 것도―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제대로 된 직책명이 아니라 어느 직책명에서 파생된 ‘직책명 대우’ 정도에 불과합니다.
반면 ‘화령부 윤’은 ‘화령’이라는 지명에 기관을 표시하는 ‘부(府)’가 붙어 ‘화령부’라는 기관명이 됐기 때문에 앞의 원칙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면 ‘윤(尹)’이나 ‘사(使)’가 진짜 직책명이라는 얘기를 해보죠. ‘윤’보다 ‘사’ 쪽이 예를 들기 쉽겠군요. ‘사’는 고려와 조선 초기 여러 기관의 직책명으로 쓰인 일반명사입니다. 도평의사사에도 ‘사’가 있었고, 밀직사나 중추원에도 ‘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본 개념이 돼서, ‘사’를 둘씩 둘 경우의 ‘좌사(左使)’ ‘우사(右使)’가 있고, 조금 낮은 직급을 표시하는 ‘부(副)’자가 붙은 ‘부사(副使)’도 있었습니다. ‘관찰사(觀察使)’ ‘안렴사(按廉使)’ ‘병마사(兵馬使)’나 ‘사은사(謝恩使)’ 등은 ‘사(使)’에 성격을 한정하는 말을 붙여 만든 파생 직책명이었구요.
‘부윤(府尹)’ ‘목사(牧使)’ 등은 직책 자체만 얘기한다면 ‘윤(尹)’이나 ‘사(使)’지만 그 사람이 ‘윤’과 ‘사’로 있는 기관이 ‘부(府)’나 ‘목(牧)’이라는 보충 설명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경창부(慶昌府)’ ‘인수부(仁壽府)’처럼 지방행정 관청이 아닌 ‘부’도 많은데, 이들 기관의 ‘윤’을 ‘경창 부윤’ ‘인수 부윤’으로 띄어쓰기해 보면 그 비논리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현령(縣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영(令)’이 일반적인 관직 이름인데, 소속 기관의 이름에 따라 현(縣)에는 ‘현령’, 도성 5부(部)에는 ‘부령(部令)’, 종묘서(宗廟署) 같은 서(署)자가 붙은 기관에서는 ‘서령(署令)’입니다.
물론 영(令)보다 직급이 낮은 부령(副令)이라는 직책도 있구요. ‘운봉(雲峰) 현령(縣令)’ 식으로 적는다면 도성 5부의 하나인 동부(東部)의 영(令)은 ‘동(東) 부령(部令)’이 되는데, 이상한 모양이 되지요?
또 한 가지는 ‘판부사(判府事)’라는 벼슬 이름 얘기입니다. 요즘 어느 TV방송의 ‘여인천하’라는 역사드라마에 중종(中宗) 때 세자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이 ‘판부사 대감’으로 나오죠?
앞의 ‘목사’는 모두가 ‘원주 목사’로 잘못 띄어쓰는 것이 문제라면, 이 ‘판부사’는 내용도 모른 채 여러 가지 표현이 섞여 쓰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 보면 윤임은 ‘판부사’, 경빈(敬嬪)이라는 후궁의 똘마니로 나오는 반정공신(反正功臣) 심정(沈貞)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입니다.
그 둘은 뜯어보면 같은 구조의 관직 이름입니다. 윤임의 경우는 어떤 부(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부’라는 이름이 붙은 기관의 판사(判事)고, 심정은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는 대로 의금부의 판사입니다.
그러니 심정도 ‘판부사’라고 부를 수 있고 윤임도 ‘판○○부사’라고 부를 수 있으련만, 드라마에는 시종일관 한 사람은 판부사, 한 사람은 판의금부사로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니 이 두 관직명에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죠.
필자는 이런 종류의 관직명도 앞서의 ‘기관명+직책(직위)명’ 원칙에 따라 적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나치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연재에도 이미 나왔던 ‘삼사(三司) 영사(領事)’ ‘문하부 판사’ 같은 식의 표기입니다.
이를 ‘판의금부사’ 식으로 표기하면 ‘영삼사사’ ‘판문하부사’가 되고, 앞서의 드라마에 나오는 ‘판의금부사’를 이렇게 표기하면 ‘의금부 판사’죠. 물론 ‘판부사’는 ‘부’라는 이름이 붙은 기관의 ‘판사’죠.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에서 한 사람은 ‘판의금부사 대감’, 또 한 사람은 ‘판부사 대감’으로만 줄기차게 부르고 있는 것은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때문이 아닐까요?
연습 문제 하나 풀어봅시다. 앞으로 나올 관직 이름이니까요.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는?
예, ‘춘추관 감사’지요. 기관명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감관사’로 부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요즘 지방 각 도(道)의 지사(知事)나 외교관인 영사(領事), 기업체들의 감사(監事) 등은 여기서 나온 말들인지 모르겠네요. ‘강원도 지사’를 ‘판의금부사’ 식으로 적으면 ‘지강원도사(知江原道事)’가 되나요?
말이 나온 김에 아예 샛길로 좀 빠져서, 드라마의 ‘판부사’ 얘기 하나 더 해보죠. 그 드라마에 나오는 몇 사람은 통 직책 변동이 없데요. ‘판부사’ 윤임, 그와 단짝인 ‘이조 참의’ 김안로(金安老), ‘판의금부사’ 심정. 이 분들은 어찌 그리 한자리에 오래들 앉아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뒤져보았지요. 지금 안당(安塘) 안처겸(安處謙) 부자의 역모 사건이 터지고 있으니, 중종 16년(1521). 윤임은 그로부터 10여 년은 더 지나야 병조 판서에 올라 정2품 이상에게 붙는 ‘대감’ 소리를 듣게 되는데, 언제부턴지 이미 ‘판부사 대감’으로 부르고 있군요.
그 이전 중종 12년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들어올 때도 이미 ‘판부사 대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임은 중종 16년 무렵에 겨우 3품 직급에 있는 30대 중반의 ‘영감’(정3품 이상)이었을 것이고 문정왕후가 들어올 때는 ‘영감’조차 붙이지 못할 갓서른의 애송이였을 텐데, 종1품 ‘판부사 대감’이라니요? 참고로 윤임은 중종 37년에 ‘판부사’인 돈녕부 판사가 됩니다.
김안로는 몇 년째 이조 참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른 ‘특이한 케이스’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몇 해 뒤에나 들을 ‘대감’ 소리를 역시 언제부턴지 앞당겨 듣고 있는 게 거슬립니다. 참의면 정3품, 영감 중에서도 이를테면 ‘신참’입니다.
심정은 중종 16년 봄까지 이조 판서(정2품)에 의금부 지사(정2품)를 겸하고 있었으니 그동안 계속해서 ‘판의금부사 대감’으로 불렀던 것은 잘못이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종 16년 상황에서도, 그해 여름부터 좌참찬(정2품)으로 옮긴 그가 한 직급 높은 의금부 판사(종1품)를 겸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첫댓글 '아지발도'의 대목이 눈에 들어오네요... 요즘 선생님의 글에서 흥미진진한 내용을들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관련글을 제가 올려 보겠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흥미진진한 추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