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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이란 남부 부셰르주의 페르시안걸프 국제공항 기온 66.7도
2023년 전국 집중호우로 46명 사망 4명 실종
지난 일주일간 내린 지붕호우로 전국적으로 피해가 발생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사망·실종·부상자 등 모두 85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경북 22명, 충북 17명, 충남 4명, 세종시 1명 등 44명이다. 실종자는 6명(경북 5명, 부산 1명), 부상자는 35명(경북 17명, 충북 14명, 충남 2명, 경기 1명, 전남 1명)이다. 폭우로 인한 공공·사유 시설 피해는 각각 912건·574건에 달했다. 도로사면 유실·붕괴, 산사태 등 공공시설 피해는 충남이 463건으로 가장 많았다. 충북(170건)·경북(150건)·전북(46건) 순으로 뒤를 이었다. 주택 침수 및 반파·전파 등 사유시설 피해 역시 충남(158건)에서 가장 많이 나타났고 전북 161건, 경북 125건 등의 피해가 집계됐다. 이번 집중호우로 15개 시·도 102개 시·군·구의 8584세대 1만3459명이 일시 대피했으며, 추가 피해를 우려해 귀가하지 못한 인원은 3796세대 5685명에 이른다.
2023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견학 중 미군 월북“
미군 트래비스 킹 이등병은, 징계 사유로 인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호송될 예정이었다 이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견학하던 중 무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2022년 송세라 펜싱 20년만에 여자 에뻬 개인전 금메달 획득
2022년 유럽 이상기온으로 프랑스 1만4천명·스페인 3천200명 대피..포르투갈 지난주 폭염 659명 사망
프랑스 서남부와 스페인 등 유럽 남부 지역이 폭염과 산불이 겹치면서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는 서남부 와인 생산지인 보르도 인근 산불로 인해 1만4천명을 대피시켰다.
산불은 필라사구(뒨뒤필라)와 랑디랑스 주변 두 곳에서 110㎢를 태웠고
스페인에선 남부 휴양지 말라가 인근 미하스 등에서 3천200여명이 피난을 갔다가 일부 돌아왔다.
포르투갈 북부 지역은 약 300㎢가 불에 탔고
모로코에서도 산불로 1천300명이 대피했고 그리스 크레타섬, 터키 서남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인근에서도 산불 진압 작업이 한창이다.
포르투갈에선 지난주 기온이 47도까지 올라가면서 한 주간 폭염으로 인해 659명이 사망했다.
스페인 기상청은 17일 폭염경보를 내렸고 돈 베니토 지역은 43.4도를 기록했다. 지난주 스페인 최고 기온은 45.7도였다.
10∼15일에 폭염 관련 사망자가 360명에 달한 것으로 파악했다.
여름 날씨가 서늘한 영국에서마저 18∼19일 기온이 41도까지 오르면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2019년 일본 교토 후시미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로 36명사망 33먕 중경상
2013년 공주사대부고생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사설 해병대캠프 교육 중 5명 사망
안면읍 앞바다에서 공주사대부고 학생 80여명이 해상 훈련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 80여 명은 보트를 탄 후 해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후 교관의 지시에 따라 다시 바다로 들어갔고 이때 파도에 휩쓸려 깊은 갯골에 빠진 뒤 5명의 학생이 실종됐다. 갯골에 빠지지 않은 학생들이 서로 인간띠를 만들어 여러 명을 구해내서 해변으로 나오자 교관들은 처음엔 인원점검도 안 하고 다 빠져나온줄 알았다가 이후 몇 명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채고도 바로 신고를 안 하고 그 학생들이 숙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며 멀리 떨어진 숙소에 가서 엉뚱한 곳만 찾는 등 어이없는 삽질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 사건 발생 30여 분이 지난 오후 5시 34분경에야 비로소 실종 신고를 했다.
학생들은 교관의 지시로 깊은 물에 들어갔다가 파도에 휩쓸렸다고 하였다
변을 당한 학생들은 모두 바닷속 갯벌의 깊은 웅덩이인 갯골에 빠진 것이 원인이었다. 갯골에 빠진데다가 파도까지 일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고 혼자 힘으로는 탈출이 어려웠다.
2004년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보유자인 윤옥 (尹玉·79)씨가 지난 18일 오후 9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황해도 봉산군 흥수 출신인 윤씨는 1942년부터 아버지 윤창석씨로부터 봉산탈춤을 사사했으며, 1970년 봉산탈춤의 상좌무·돌머리집·목중 역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된 뒤 미국·일본·유럽·홍콩·대만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2004년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2004년 7월 18일 서울지역 부유층 노인들을 살해하고 전화방과 출장마사지 일을 하는 여성 등 모두 19명을 무차별 살해한 유영철(34)이 구속됐다. 유영철은 경찰에서 자신의 범행이 우리 사회의 부유층과 여성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지난 2002년 절도죄로 수감 중 출장마사지 일을 하던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후 가진 것이 없어서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 부유층 노인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전처와 애인의 직업과 똑같은 출장마사지 여성들을 겨냥했다.
유영철의 연쇄살인은 2003년 9월 24일 처음 시작됐으며 지난 15일 새벽 서울 노고산동 그랜드마트 뒷골목에서 만난 출장마사지 여성과 접촉을 시도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2002년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삼성그룹과 이건희(李健熙) 회장·이재용(李在鎔)씨 부자(父子)가 매년 200억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총 5000억원 규모의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이 장학 재단이 매년 지급할 장학금은 서울대학교 공대 석사 1~2학년생 전원(1567명)의 2년치 등록금(148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삼성은 18일 “매년 해외 유명 대학·대학원 유학생 100명씩을 선발, 1인당 5만달러(미국 유학생 기준)씩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는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을 8월 중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이건희 회장이 800억원,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가 700억원 등 1500억원 규모의 삼성전자 주식을 기금으로 출연해 장학 재단을 출범시키고, 내년부터 2005년까지 삼성그룹 계열사가 3500억원을 추가 출연, 총 5000억원의 재단 장학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삼성은 올해 8월 중 장학생 공모에 들어가 오는 9월 중 1기 장학생 100명을 선발하며, 내년부터는 해외 대학 입학이 결정되는 매년 3~4월에 100명씩 선발할 계획이다. 대상자는 이공계를 중심으로 미래 전략사업 분야인 생명공학을 비롯, 인문·사회·자연 계열 등 전 분야에서 학부(25명)·석사(50명)·박사(25명) 과정 장학생을 뽑을 계획이다. 지금까지 국내 최대 기금 규모의 장학재단은 지난 4월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회장이 3000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부동산과 계열사의 자산, 현금 등을 출연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이었다.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1995년 김대중 신당창당 선언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3년9개월만에 김대중 신당과 이기택 민주당으로 분당되고 정국은 4당체제로 분할되게 됐다.
김 이사장은 회견에서 “고뇌에 찬 마음과 심정으로 정계복귀 의사를 밝힌다”고 말하고 “정계은퇴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김 이사장은 “만일 은퇴 당시 기대했던대로 정부와 민주당이 해야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면 다시 정계에 복귀할 엄두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은퇴 번복을 해명하고 신당의 지향점으로 지방자치단체장 등과의 당-정 협조, 젊은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개혁, 중산층에 안정과 희망을 되찾아주는 노력, 통일 및 21세기 대비 등을 제시했다.
김 이사장은 이어 기자들과 가진 일문일답에서 권력구조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한다”고 전제한뒤 “그러나 내년 총선에서 나타날 민의를 겸허히 경청, 필요하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고 말해, 경우에 따라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뜻도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김 이사장은 또 “민주당이 개혁에의 길을 걷겠다면 언제든 대화의 문호는 열려있다”고 말해, 민주당 잔류세력의 흡수를 위해 노력할 뜻임을 간접 피력했다.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서강대 박홍 총장이 1994년 7월 18일 김영삼 대통령과 대학총장간의 청와대 오찬석상에서 "제한된 숫자이기는 하지만 주사파가 대학가에 깊이 침투해 있으며 주사파 뒤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그동안 땅속에 잠복해 있던 주사파 문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특히 전남대 김일성 분향소 사건, 경상대 교재 이적성 논란 등 시국사건과 맞물려 뜨거운 공개논쟁으로 확산됐다. 박총장은 일련의 주사파 발언으로 학생과 재야세력의 거센 비판을 받았는가 하면 `뿌리깊은 좌경폭력학생운동에 대항하는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김일성 사후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0년 윤보선 전(前) 대통령 별세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1990년 7월 18일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93세였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30일 노환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후 8시쯤 퇴원, 자택에 옮겨진 후 별세했다.
윤 전 대통령은 189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경응의숙 보통부와 속성학교인 정칙학교를 다니다 귀국, 20세가 되던 해에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영국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했으며 1954년 5월 3대 총선때 민국당 소속으로 종로갑구에 출마해 원내에 진출했고, 1960년 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5·16 으로 재임 1년8개월 만에 대통령직을 하야한 뒤 박정희정부와 오랜 세월 투쟁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서 고난을 겪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은 순탄한 편이었다.
그의 정치적 컬러는 1962년의 대통령 하야를 분기점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1962년까지의 전반기는 영국신사같은 풍모처럼 온건, 합리주의적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는 강성민주투사로 다양한 투쟁을 전개했었다. 특히 1963년 하반기의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후보에게 15만표차로 패배한 이후 ‘정신적 대통령’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계속한 대(對) 박대통령 투쟁과정은 실로 험난한 것이었다.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배우 강수연이 1989년 7월 18일 폐막된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작품상, 심사위원특별상, 주연여우상, 주연남우상 등 본상 4개 부문 중 하나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낸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이어 두번째로 권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시상식에서 분홍빛이 도는 한복을 입고 나와 “영화속에서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현지 기자들의 표현대로 독특한 동양미를 과시했다.
모스크바 영화제는 영화예술의 발전과 국제적인 우호증진을 위해 1959년 창설된 공산권 최대의 영화제이다. 행사기간은 매년 7월경이며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와 격년제로 번갈아 연다. 시상부문은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남여주연상 등 4개부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수연에 이어 이덕화가 1993년 영화 ‘살어리랏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6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1985년 화가 박생광 세상 떠남
1983년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1983년 일본 중의원 해산
1983년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1982년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1982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1981년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1981년 중국 남부에 홍수 사망 4천명 부상 5만 명 이재민 50만 명
1980년 바크티아르 이란 전 총리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해 파리에서 피격
1976년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6년 7월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1m53에 39kg, 가냘픈 14세 소녀가 2단 평행봉에서 현란한 연기를 펼치고 사뿐히 착지했다. 전광판 숫자는 `1.0`. 관중석은 술렁였다. 항상 9.0 이상의 점수를 받던 소녀도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1.0이 아니었다. 만점인 10.0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체조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전광판은 최대 9.99점 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 소녀는 루마니아에서 온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코마네치는 그후에도 여섯번이나 만점을 더 받아 2단 평행봉과 평균대, 개인종합에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미국의 타임지는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코마네치는 4년 뒤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땄다. 여성미를 강조하던 여자 체조는 코마네치 이후 기술 위주로 바뀌었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한 코마네치는 체조선수 출신의 미국인과 결혼했다.
1973년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1970년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8년 인텔 창업
인텔의 역사적인 항해가 시작된 것은 1968년 7월 18일이었다. 출항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뷰 페어차일드 부근이었다.
1947년 12월 23일,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 3명은 연구소 안에서 트랜지스터를 공개 시연함으로써 20세기의 반도체 혁명을 견인할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했음을 공표했다. 세 사람은 이 공로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무어는 1968년 노이스와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라고 정했다가 통합(Integrate)과 전자공학(Electronics)이란 단어를 합친 ‘인텔(Intel)’로 바꾸었다. 인텔은 1969년 봄 첫 메모리칩 ‘3101’을 출시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970년 10월 ‘1103 D램’으로 다시 도전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1년 11월에 선보인 첫 CPU ‘4004’는 손톱만한 크기인데도 1946년에 개발된 30톤 무게의 에니악과 맞먹는 성능을 자랑했다.
1972년에는 ‘4004’보다 10배나 빠르면서 값은 비슷한 8비트의 ‘8008’을 선보였고 1974년에는 세 번째 CPU ‘8080’을 출시함으로써 매출액이 급증했다. 인텔은 이후 10여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1965년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1963년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3년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1962년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1956년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국 정상회담이 1955년 7월 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이번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 열린 동서수뇌회담으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영국 수상 이든, 프랑스 수상 피에르, 소련 수상 불가닌이 참석했다.
참가국들은 독일의 통일문제, 유럽의 안전보장, 군비축소, 동서간의 교류촉진 등에 대해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23일 막을 내렸다.
독일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 수상 피에르는 독일의 재통일이 나토잔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소련 수상 불가닌은 독일 재통일에 있어서 최대의 장애는 서독의 재무장과 미군의 서독주둔이라고 응수했다. 군비축소문제에 있어 최종 공동성명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안한 자유영공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과 소련이 방위계획을 교환하고 방어시설에 대한 공중감시를 서로 허용하자고 제의했다.
1952년 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1949년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6년 서울대학교 신설
1944년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2차대전의 리허설` `신병기의 실험장` 그리고 `지식인들의 전쟁`등으로 표현되는 스페인 내전이 1936년 7월 18일 발발했다. 이날 오전 5시.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와 국민을 향해 쿠데타를 선언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5개월 전인 1936년 2월 19일 정교 분리, 농지 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펼쳐 중산층과 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스페인에 수립된 정부였다. 반면 가톨릭교회와 대지주, 대자본가들은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의 불만에 군부, 왕당파, 우익 정당들이 호응한 것이 스페인 내전이었다.
반란군은 모로코 주둔부대들을 필두로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 전국적으로 궐기했다. 이들은 압도적인 우세로 쉽게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대도시에선 반란군이 민병들에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들의 힘은 전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공황과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그들이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네루다, 시몬느 베이유, 조지 오웰, W H 오든 등 세계적인 지성들을 포함, 4만여명의 외국인 용병이 삽시간에 모여 `국제여단`을 조직했다.
내전은 국제전의 성격도 띠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도왔고,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를 도왔으나 1939년 3월 28일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전세계를 휘감고 있던 보수와 갈등,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파시즘과 자유, 공산주의와 문명의 긴장ㆍ대립이 스페인 내전 한판에 응축된 양상이었다. 스페인 내란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29년 평양역 기공
1925년 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1923년 11월 8일 오후 8시,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뮌헨 교외의 한 맥주홀에 난입, 천장을 향해 총을 쏘고는 큰소리로 "혁명은 시작됐다"며 맥주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맥주홀에서는 바이에른주(州) 통감 카를이 3000여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 중이었다.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분리주의자 카를은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카를은 제거돼야 했고 주 정부는 전복돼야 했다. 그러나 감시 소홀을 틈타 도주한 카를은 이틀 뒤 히틀러를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히틀러에게 이 기간은 오히려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입지를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반역죄로 5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도 자신의 궤변을 정리하는 호기로 삼았다. 그는 감옥에서 반(反)유대인과 반(反)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가다듬었다. 히틀러에게 아리안족은 천재 민족이었고 유대인은 기생동물이었다.
1924년 12월 출소했을 때 이미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비서 루돌프 헤스에게 받아적게 했다. 그리고 1925년 7월 18일,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제1권을 출간했다. 원래 제목은 `허위, 우열, 비겁에 대한 4년간의 투쟁`이었으나 강렬한 인상을 주자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제목을 바꿨다. 연말까지 팔린 책은 1만여권에 불과했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나의 투쟁`을 나치의 바이블로 삼은 뒤부터는 거의 2000만부나 팔려나갔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 보다는 큰 거짓말에 더 쉽게 속는 법이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강조했던 말이다.
1921년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1919년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조선신사 세움
1918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1910년 항일우국지사 전해산 순국
1907년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1907년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1907년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1904년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창간
1895년 불가리아 독재 정치가 스탐볼로프 사망
1885년 영국-청나라 아편협정 체결
1872년 멕시코의 대통령(1861-72 재임) 후아레스 사망
1870년 바티칸 공회 ‘교황불가오류’ 교리 선언
1840년 아편전쟁 발발
1840년 6월 16일 영국이 철갑선 `네메시스`(신의 보복)를 비롯, 48척의 함대를 동원해 이른바 아편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의회는 4월 10일 271대 262라는 근소한 표차로 전쟁을 결의한 바 있다. 100여년 동안 중국에 아편을 팔아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던 영국은 중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보복차원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광주에 부임한 임칙서가 `아편금연대업(阿片禁煙大業)`에 나서면서 촉발됐다. 임칙서는 중국인 밀매자들을 적발해 처벌하고 밀수선들을 억류하거나 이를 보호하고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는 등 강력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압수한 아편 전량을 폐기하기도 했다. 아편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1817년 영국 작가 오스틴 세상 떠남
1635년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 출생
1401년 신문고 설치
660년 백제 의자왕 항복,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