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봄은 아닌가 보다.
모란이 피기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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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詩 (1934년 4월 『문학(文學)』 3호에 발표 )
1903년 1월 전남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그는 강진보통학교를 나온 뒤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상급 학교 진학이 막힐 뻔하나 어렵사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1916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힌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는데, 선배인 홍사용 · 안석주 · 박종화와 후배로 들어온 정지용 · 이태준 등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학창 시절을 보낸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열여섯 살이던 그는 구두 속에 선언문을 감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결국 재학중이던 휘문의숙을 졸업하지 못한 채 1920년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입학한다.
이 무렵 김영랑은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 박용철을 만난다. 박용철은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한다.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음악에 남달리 관심이 많던 윤식은 도쿄에서 성악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음악 공부를 하면 절대로 학비를 대줄 수 없다는 아버지 때문에 영문과로 적을 옮긴다. 그러나 이 또한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과 교유하게 된다. 최승일의 집에 드나들던 그는 숙명여고에 다니던 최승일의 누이동생이자 해방 후 월북한 당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와 사귀며 문단에 염문을 뿌린다.
~중략~
해방 뒤 그는 고향인 강진으로 가서 우익 운동에 참여하고,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며 ‘시문학’ 시절의 순수 문학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9·28 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김영랑은 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둔다.
~백과 사전 발췌 인용~
김성옥(金聖玉) - 모란이 피기까지는
1959
김영랑 詩, 손석우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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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성옥 노래
메조소프라노의 맑고 정감이 묻어나는 소리의 주인공 김성옥(金聖玉)은 1958년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미8군 무대 등에서 짧게 활동하였다. 1962년 여름, 홍콩으로 출국하기까지가, 그의 한국 활동 전부였다.
1958년 당시, 김성옥은 KBS 전속가수가 되었고, 손석우는 KBS 악단 지휘자였다.
국민들의 귀가 온통 라디오에 쏠렸던 당시 59년도에 방송된 드라마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 시를 모티브로 방송작가 이경재 씨가 각본을 쓴 드라마로 , 손석우 씨가 주제가를 맡았다.
김성옥 씨는 KBS 전속가수 응시 당시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성불사의 밤’을 불렀는데 대중가요 가수라기 보다는 성악가를 꿈꾸던 음악생도였다.
실제로, 오디션 당시 수백 명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노래를 끝까지 불러 주목받았던 응시생이었다 한다.
1962년 여름, 김성옥 씨는 무대를 해외로 옮긴다.
이 6개월 일정의 홍콩 공연을 시작으로 이후 마닐라, 방콕,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사이공 등등 동남아 순회공연을 통해 가는 곳마다 인기를 얻으면서 결국 활동무대 자체가 해외로 바뀌게 된다.
특히 그를 눈여겨 본 영국 에이전시에 의해 픽업되어 영국을 비롯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핀란드, 파키스탄 등을 다니며 세계 공연의 길에 올랐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1년간 머무르며 공연을 했는데, 이 때 스페인 TV ‘Spain on Television Española’의 인기 쇼 프로그램인 ‘Noche De Sábado(토요일의 밤)’에 출연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였으니, 말하자면 ‘한류의 원조’이자 ‘한류 스타 1세대’였던 셈이다.
김성옥(金聖玉, 예명 Kathy Kim)은 1988년, 미국 플로리다(Florida)로 이주 하였다.
스페인에서의 이름은 카따리나, 미국 이름은 ‘케티 쿡(Kathy Cook)'.
~-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님의 글에서 발췌 인용함~.
50년대 명곡, ‘검은 장갑’의 실제 주인공.
▲ 1960년 대 가수 김성옥
가수 김성옥에 관한 일화는 몇몇 서적이나 회고록 등에 간혹 등장한다.
작곡가 손석우 선생은 그의 저서 ‘손석우 작곡집’에서 김성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검은 장갑. 이 노래는 58년 9월 경에 만들어진 노래로 이 노래는
당시 가수 김성옥씨가 끼고 있는 검은 레이스의 장갑을 보고 그 장갑을 모티브 삼아 만들게 된 노래다.” 라고.
그러니까 김성옥씨는 ‘검은 장갑’이라는 노래가 탄생하게 된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셈이다.
또한 김성옥씨의 후배가수들인 한명숙, 최양숙, 김상희씨 등을 인터뷰했을 때
이들 모두 자신들의 데뷔 시절 가장 닮고 싶어 했던 가수가 바로 김성옥씨였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로써는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실력파였고
특히 언제 들어도 좋은 맑은 음색과 정감 어린 보이스 컬러가 돋보였던 가수로 기억했다.
첫댓글 김성옥 가수.... 해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셨는데 국내서는 그의 존재를 많이 몰랐군요.
그러고보니 한류 1세대가 맞네요.
오랜만에 스페인어 노체 데 사바도 의 글도 읽어보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또 검은 장갑의 유래도 알게 되었네요. 잘 머물다 갑니다.
에스파니아
‘Noche De Sábado
반가운 문자가 나타났군요.
김성옥은 일찍 해외 무대로 진출했군요.
이 귀한 노래를 남겨두고.......
지난번 동심초라는 드라마를 소개해 주셨는데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명의 드라마도 있었군요.
노래나 시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각본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모습에서 비롯된 작곡 동기 등
참 재미있는 일화들이네요.
무궁무진한 좋아요님의 정보 창고 잘 보았습니다.
ㅎ
잡식성 오만 세상 여행하다가
들은 풍월은 있었나 봅니다.
사실
전설따라, 노래따라 세월따라 삼천린데
인생사 뒤안 길
뒷골목 뒷 이야기가
참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거 같아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래요...
모란꽃 보고싶어요
매화, 진달래, 개나리
ㅎ 남의 봄은 ....ㅋ
모란은
메아리님의 봄!
지둘리셔야죠
좋은아침입니다
잘 계셨죠?ㅎ
며칠간 봄방학 했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런 슬픈 사연이 있군요?
머지않아 모란이 필 것입니다
울 화단에 모란은
잎이 나기 시작했답니다
좋은 하루 시작하소서~^^
믿는 돌은 배신하지 않는다~!
내 그러실줄 알았네요.
알아서 봄방학 ㅎ~
뭐 며리님이 안보이신다
찾자 ㅋ
갈 곳도 없는 벼리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지나친 걱정 ㅋ
오늘도 여전한
벼리님의 텃밭 인생
즐거우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