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 아닌 무명 모델 기용 광고 인기
메시지 주목도 높이고 젊은층 사로잡아
‘반도체 의인화’ 광고 유튜브서 2700만 클릭
#. 4월 어느 날. 경기도 파주 출판 단지 한 스튜디오에 60여명 청년들이 모였다.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로 의상을 맞춘 이들은 허리춤에 신기한 물건을 하나씩 찼다. 일반 플라스틱 보다 가벼운 포맥스 소재와 나무 합판으로 만든 반도체 모형이다. ‘의인화된 반도체’들이 앞으로 자신들이 쓰일 곳을 통보받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말하자면 졸업식이다.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분장을 한 이유는 SK하이닉스 광고를 찍기 위해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연예인 하나 없는 이 TV 광고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입소문을 타 대박이 났다. 조회 수가 유튜브 론칭(지난 4월 말) 3주 만에 1000만을 찍고 6월 15일 현재 2700만을 넘었다. 통상 광고업계에선 유튜브 조회 수 1000만만 넘어도 빅히트작 소리를 듣는다.
◇‘스타’ 없어도 ‘뜰 광고’는 뜬다
스타는 흥행 보증 수표다. 드라마, 영화, 앨범 뿐 아니라 기업 광고에서도 스타는 이름 값을 한다. 기업들은 많게는 수십억을 써가며 톱스타를 광고 모델로 쓴다. 그러나 스타 없이 성공한 광고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동아제약의 박카스 시리즈다. 최근 동아제약은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라는 카피의 광고로 다시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 광고에도 유명 스타는 보이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200만명 이상이 본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 최고의 CF 베스트5’란 영상이다. 영상 안에 박카스, 초코파이, 웅진씽크빅, 두산, 포스코 예전 광고를 묶어 놓았다. 5200명 넘는 사람들이 공감 버튼을 누른 이 영상에 등장하는 광고의 공통점은 스타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 최고의 CF 베스트 5. /출처 유튜브
박카스 광고 제작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정규영 렛잇플로우 이사는 "유명인을 모델로 쓰면 관심, 주목도 측면에서 유리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델이 가릴 수 있다"고 했다. "일반인처럼 느껴지는 모델을 쓰면 메시지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늘 찾는 제품이란 메시지를 전달할 때 스타가 오히려 걸림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 없는 광고'를 찍는 기업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CJ가 작년 론칭한 그룹 광고에도 톱모델은 없다. TV, 섬유 등을 수출하던 나라에서 드라마, 음악 등 문화 콘텐츠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스토리를 풀어낸 영상을 유튜브에서만 140만이 봤다. 베트남, 중국, 터키, 미국 등에 사는 현지인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은 ‘세계인의 일상편’도 주목을 받았다.
일반인같은 모델을 주로 쓰는 박카스 제품 광고. /사진 동아제약 광고 유튜브 캡처
요즘 최대 광고주는 게임업체다. TV나 포털 광고창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의 상당 부분이 게임 특히 모바일 게임 광고다. 장동건, 이정재, 정우성 같은 톱스타들이 한동안 게임 광고 속에서 뛰어다녔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주요 모바일게임 광고에선 톱스타를 찾아보기 힘들다. 넥슨의 '야생의 땅: 듀랑고' 광고에는 무명의 외국인 배우만 나온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신비한 자연과 게임 장면이 어우러진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모바일' 광고에도 모델은 없다.
◇스타 없는 광고가 스타 만들기도
스타 없이 찍은 광고가 인기를 끌어 광고에 출연한 무명 모델들이 발돋움한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은경과 설현이다. SK텔레콤은 1999년 TTL 브랜드를 선보이며 알려지지 않은 배우 임은경을 기용해 말 그대로 '히트'를 쳤다. 이후 SK텔레콤은 2015년 걸그룹 AOA 멤버 설현을 발탁해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 설현 등신 사진이 거리를 뒤덮었고 수많은 아이돌 중 한명이던 설현은 만인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당시 설현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SK텔레콤에 보내기도 했다.
SK텔레콤은 광고 모델로 발탁한 설현이 인기를 끌자 등신대를 제작, 입간판 마케팅을 펼쳤다. /사진 SK텔레콤 광고 유튜브 캡처
SK하이닉스 광고에 출연했던 모델들도 요즘 제 2의 임은경, 설현을 꿈꾸는 눈치다. 업계에 따르면 영상에 등장한 최혜진 윤태환 장윤석 양하늬씨 등이 요즘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기업이 광고에 인기 연예인을 쓰지 않는 이유는 '돈' 때문만은 아니다. 모델료 수억 원을 호가하는 유명인이나 연예인을 광고에 등장시키면 직관적인 인지도를 높여 홍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독창이고 신선하다면 유명 모델이 오히려 메시지 전달을 방해 할 수 있다.
아예 유명인이 등장하기에 부적절한 스토리도 있다. SK하이닉스 광고가 그런 예다. 광고를 제작한 이노션의 안정훈 차장은 "이 광고는 보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자는 것을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다. 광고에 등장한 '인간 반도체'들은 졸업생, 취업준비생, 신입사원을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다. 스타가 그런 역할을 맡으면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왼쪽부터)CJ그룹·두산그룹 광고 화면. / 사진 유튜브·오리콤 홈페이지 캡처
◇무명 모델도 아닌 아예 일반인 등장 광고도
품이 많이 들어도 무명 모델이 아닌 '진짜 일반인'을 광고에 쓰는 기업도 늘고 있다. SK텔레콤은 신선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스마트폰 광고에 촬영 현장 메이크업을 담당하던 일반인을 발탁했고 네이버도 자사 서비스 설계 업무를 소개하는 광고에 실제 직원을 등장시킨 적이 있다. ‘두산은 지금 내일을 준비합니다-물 편’에는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섭외한 어린이들이 등장한다. 손원혁 오리콤 제작 1본부장은 "광고도 결국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귀띔했다. 대학생이나 일반인은 전문 모델보다 연출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지만 기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진실성 있게 전달할 때 최적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