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동 감재 언저리에서
오월 초순 화요일이다. 혼자 누리는 산책이나 산행에 익숙한데 근래 지기와 동행 기회가 늘어난 일상의 변화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년 이후 반려 동식물이나 자연과 교감도 우울감을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주변에 은퇴 이후 교류가 잦던 이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가족과 소통도 어려움을 겪어 자칫 사회적 고립으로 빠져듦에 비하면 지기와 동행은 행복 바이러스다.
새벽잠을 깬 일과로 생활 속 글을 남기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책을 읽음은 변함이 없다. 날이 밝아오는 즈음 이른 아침밥을 해결하고 베란다 창밖으로 동이 트는 기미를 살폈다. 춘분과 하지 사이 입하 절기를 앞둔 때라 낮은 점차 길어져 해가 일찍 뜨는 편이었다. 평소와 같이 빈 배낭을 둘러메고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 이웃 동 뜰에서 꽃을 가꾸는 친구를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꽃대감 친구와 오늘 하루도 잘 보내자며 헤어지니 각자도생의 길이 기다렸다. 나는 전날 지기와 오간 안부 인사에서 바깥나들이에 동참하려고 창원역 앞으로 나갔다. 아무런 대책이 없이 길을 나섰는지라 목적지와 수행 일과의 의견 수렴이 필요했다. 두 지기는 나에게 행선지와 과제를 위임해 내가 즐겨 가는 산행에서 때늦은 감이 있지만 산나물을 채집해보자니 동의를 쉽게 받았다.
내가 마음속으로 정한 목적지는 서북산 감개고개 일대였다. 거기로 가려면 산중이라 현지 식당이 없기에 간편식으로 내가 가끔 이용한 마산역 번개시장에서 김밥을 마련했다. 운전대를 잡은 지기는 낯이 익은 거리를 안전하게 주행해 밤밭고개를 넘어간 교외로 나갔다. 79번 국도를 따라 동전터널을 통과해 학동교차로로 내려 시골길을 달려 학동 저수지를 돌아간 서북동으로 향했다.
서북산 아래 서북동은 3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주변 풍광이 많이 달라졌다. 그 당시는 포장길이긴 해도 구부정했고 폭이 좁았더랬다. 지금은 중앙선 차로에 황색선이 그어진 시원한 길이 뚫렸고 외지인 들어온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늘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교직 선배 두 분도 그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문학 동아리 한 회원은 세컨 하우스에서 주말 여가 텃밭을 일구며 살았다.
일행은 ‘가야사’에서 ‘산산사’로 절 이름을 바꾼 서북산 비탈 임도로 올랐다. 도중에 굴참나무가 우거진 길목에 차를 세우고 가져간 다과를 들면서 나는 하루를 보낼 동선을 안내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산기슭에 자생하는 참취를 뜯고는 차를 몰아서 산허리의 임도 갈림길까지 가자고 했다. 내가 솔선해 취나물을 뜯은 뒤 갈림길에 차를 세우고 감재 가는 산기슭에서 산나물을 뜯었다.
그즈음 인적 드문 숲을 찾은 사내를 앞세워 보내고 우리는 길섶에 자생하는 참취를 비롯해 몇 가지 산나물을 뜯었다. 두 지기는 산나물 식별은 곤란을 겪어도 청정지역 쑥을 뜯는데 어려움 없었다. 감재를 넘으니 산나물의 종류가 늘어나 비비추와 고사리에다 좀 쇠기는 해도 바디나물까지 보탤 수 있었다. 숲이 우거진 여항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길섶의 산나물 채집은 묘미를 더해갔다.
봉화산으로 가는 산등선에서 아까 먼저 간 사내를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니, 그는 지리산 국립공원관리소에 근무하다 은퇴 후 서북동에 와 살았다. 우리는 일용할 찬거리로 삼을 산나물을 뜯었는데 그는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가 캐는 약초는 우리가 뜯는 바디나물의 뿌리로 연삼으로 통하는 한약재였다. 아마 주변에 연삼 뿌리로 효소를 내거나 술을 담가 먹으려는 이가 있는 듯했다.
산마루 쉼터에서 자연인과 같은 산림 고수와 함께 김밥을 비롯한 소찬으로 점심을 요기했다. 식후에 우리는 여항산 둘레길을 더 걸으면서 까실쑥부쟁이와 참취를 찾아내 뜯었다. 임도 길섶만 걸었는데도 내가 짊어진 배낭은 물론 손에 든 비닐봉지에도 산나물이 가득했다. 아까 차를 둔 곳으로 와 황금비율로 삼등분해 나누었다. 귀로는 거제만이 바라보인 찻집에서 커피를 들고 왔다. 23.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