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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4일 목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송시편 47(46),2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고, 그가 이를 실행하려 하자 그를 말리며 그에게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제1독서<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2,1-9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116(114─115),1-2.3-4.5-6.8-9(◎ 9)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 ○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 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 ○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 ○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복음 환호송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하느님,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시편 103(102),1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된 사람들, 곧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중풍 병자 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상태, 곧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은 그를 죄의 상태, 곧 병에서 풀어 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병 자체가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이, 곧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유다인들이 자기네 방식으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죄인으로 여기던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고통만을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화해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July 4 2019
Thursday of the Thirteenth Week in Ordinary 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