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스님은 추운 겨울 석탄차를 타고 출가의 길을 떠났다. 태백으로 달려가 새벽이 오기를 기다려 마침내 탄허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삭발염의했다. 삼촌이었던 김지견 박사의 안내로 맺은 인연이었지만, 열여섯 살의 혜거 스님은 그마저도 너무 늦게 왔다 싶어 안타까웠노라고 했다. 하루 종일 경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영은사의 풍경이며, 주경야독하며 선교겸수의 양날을 벼리던 대중스님들은 하나같이 맑고 청아해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게다가 탄허 스님께서는 행자 첫날부터 공부를 가르쳐주셨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언감생심 이제 막 출가한 행자가 어떻게 스님들과 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탄허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말이죠. 행자 시절 3년 동안 화엄경 80권을 다 보고, 사집과 영가집 그리고 모든 범패의식까지 다 배웠습니다. 그런 스승이 없습니다.” 당시 탄허 스님은 영은사에서 화엄경 3년 결사를 막 시작하던 참이었으니, 열여섯 살 혜거 스님은 신명나게 공부하고 배우며 수행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어려운 만큼 더 열심히 했고,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 세 번 네 번도 부족하다 여기며 공부해서 강을 받치면 탄허 스님은 명쾌하게 길을 짚어주곤 하셨다. 한국불교 역경사의 금자탑을 세웠던 대강백이요, 대선사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스님은 먹물을 들여갔다.
한국불교사에 금자탑을 세운, 역경보살
혜거 스님에게 탄허 스님은 한없이 부러운, 닮을 수만 있다면 온전히 닮고 싶었던 참 수행자였다. 실제로 탄허 스님은 천재스님이라 불릴 만큼 막힘이 없었던 만인의 스승이었다. 화엄경 번역의 금자탑이라 불리우는 『신화엄경합론』 전47권 완역을 비롯해 수십 권에 달하는 저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기적으로까지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혜거 스님은 보았다. 그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한 수행자의 오롯한 정진이 어떻게 회향되어 왔는지 눈으로 마음으로 경외하며 지켜보아왔다. “탄허 스님은 ‘바쁘다, 시간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글을 쓰면서도 늘 한가로우셨습니다. 저녁 9시면 어김없이 취침에 들었고, 새벽 1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경전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면 대중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 중에 틈이 나면 편안하게 숨을 쉬듯 경전을 보고 번역을 하셨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하게 그 어마어마한 살림을 이뤄내셨던 거죠.” 혜거 스님은 빙긋 웃으며 당신의 책상 위 복잡한 살림들을 들춰보았다. 수북이 쌓인 책들, 사전, 그리고 어록들…. 그러나 탄허 스님은 책상 위에 사전이 없었다고 했다. 어떤 경구든지 직독직해가 되었고, 동서양 철학에 막힘이 없었고, 내전 외전 경계없이 두루 통달했다고 한다.
먼 세월 돌아 다시 만난 스승
혜거 스님에게도 방황은 있었다. 은사를 떠나 선원에서 공부도 해보았고, 월정사 재무소임을 맡아 불사에 전념하기도 했다. 물론 수행자로서 할 일들이었으나, 혜거 스님에게는 회한으로 남는 시간이었다. “탄허 스님 밑에서 한참 화엄경 공부를 할 때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화엄경 완역이라는 역사적인 대불사를 앞두고 미력이나 힘을 보태던 시절이었는데, 스님께서 어느 날 어떤 일로 제게 크게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선원으로 갔습니다. 물론 훗날 생각해보면 그때 선원에서의 경험 또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지만, 아무튼 몇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돌아와 보니 화엄경 완역은 끝이 나 있었고, 한참 무르익던 제 공부도 무뎌져 있었습니다. 화 한번 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혜거 스님은 경전공부 못지않게 마음공부를 강조한다. 금강선원에서 경 공부를 마친 이들은 반드시 마음공부로 이어가게 한다. 소견을 넓혀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쉽게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자리가 됐을 때 행복도 소중한 인연도 지킬 수 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먼 세월 지나 혜거 스님은 탄허 스님을 마지막 열반 즈음해서 6년 동안 모셨다. 갈증이 컸던 만큼 지난 공부를 새롭게 점검받고 다시 채워가는 충만한 나날이었다. “스님은 칭찬을 많이 안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손님들이 와서 스님께 공부에 대해 물어보면, 저를 불러 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뒤에서 묵묵히 증명해주셨는데, 무언의 다독임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깊어지면서, 비로소 저는 그 어떤 일에도 서운치 않게 됐죠. 오히려 스님이 꾸지람을 주시면 마음으로 참 행복하고 좋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 마지막 6년은 스님께서 제게 준 마지막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이 옷 길고 짧은 게 왜 문제야, 공부가 문제지
탄허 스님을 떠나보내고, 혜거 스님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부처님 말씀을 전했고 선과 교를 씨줄 날줄 엮듯 틈틈이 참선지도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참선강좌까지도 모두 혜거 스님이 직접 지도해왔다. 사실 그 정도 공력을 기울였으면 금강선원은 벌써 서울에서 제일 큰 법당을 갖춘 대가람으로 우뚝 일어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스님은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공부에서만 그 길을 찾았다. 오로지 참선과 경전강의로만 오늘의 금강선원을 일궈온 것이다. “스님 열반에 드시고, 방 한 칸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 몇을 모아 하루종일 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해요. 공부하다 방문을 열어보면 쌀이 놓여있고, 향이 놓여있습디다.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은 쌀이 놓여있었구요. 그래서 생각했죠. 다 함께 부처님 공부만 하면서 살 수 있겠구나.” 그렇게 혜거 스님 회상에서 걸음마부터 공부한 재가불자들이 많다.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스님과 탁마하며 『화엄일발록』, 『탄허 스님 방산굴 법어록』 등을 엮어냈으니, 그간의 정진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탄허 스님의 원력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불국토를 이 땅에 만들고 싶어하셨어요. 그러자면 큰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은 승·재가를 가리지 않고, 공부한다고 하면 부목도 공양주도 일손 다 놓게 하고 강의를 듣게 하셨거든요. 당신이 아는 모든 걸 다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뜻을 잇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스님처럼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는 것, 그것이 제 원력입니다.” 금강선원에서도 10년을 두고 진행되는 불사가 하나 있다. 자곡동에 선원을 건립하고 있는 데, 불사를 강의료만으로 진행하다보니 더디기 짝이 없다. 애초에 그 또한 신도들이 시작한 불사였다고 한다. 좁디좁은 상가의 법당 안에서 매일 경공부하랴 참선하랴, 어느 때는 삼배조차 하기도 어려웠으니 부득불 신도들이 나서 불사를 공모하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늘 마음공부를 당부해온 혜거 스님 또한 기대가 크실 터, 그 다급한 마음을 여쭈니 개의치 않는 듯이 다른 이야기를 쥐어주었다. “언젠가 누가 옷을 주었는데 두 팔이 짝짝이더군요. 그래서 조금 불평을 했더니 탄허 스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어요. ‘중이 옷 길고 짧은 게 왜 문제야, 공부가 문제지!’”
탄허 스님 _ 1913년 전북 김제 출생, 16세가 되던 해까지 유학과 도교학을 두루 섭렵했다. 1931년부터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과 3년간 대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1934년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한암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역경사업에 전념하여, 화엄경 120권과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등을 번역했다. 월정사 조실, 동국역경원 초대 역장장(譯場長), 동국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3년 오대산 방산굴에서 입적했다.
혜거 스님 _ 1959년 영은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탄허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치고 묵호 대원사와 서울 대원암 주지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서 20년째 불교진리와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불교방송과 불교TV 경전 강의를 통해서, 쉬지 않고 쉽고 행복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