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는 호오가 분명하게 갈릴 만한 영화다. 뜨거운 연쇄살인마 장경철(최민식)과 그에게 약혼녀를 잃어 분노하게 되는 차가운 복수자 수현(이병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며 복수를 거듭하다 파멸한다.
관객은 영화 초반에 수현의 약혼녀가 장경철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또한 그 이후 다른 여성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 또한 보게 된다. 그에 비해 경찰의 모습은 초라하고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수현의 약혼녀의 훼손된 사체의 머리 부분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과학수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는 잔인한 살인마를 경찰이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마치 <살인의 추억>처럼 말이다. - 영화 중후반부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터널에 장경철이 버려지는 장면이 나온다. 일종의 비틀기일까? -
이제 관객은 약혼녀를 잃은 수현의 괴로움에 감정이입하고 그가 장경철을 찾아 복수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수현을 비추는 카메라는 장경철을 비추는 카메라와 다르지 않다. 장경철의 공간, 특히 살인을 저지르는 공간은 어떤 틈을 지나야 한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듯한 화면 중앙의 틈. 그리고 수현이 쉬기 위해 들어간 침실 역시 틈으로 보여진다. 두 개의 공간은 서로 겹친다. 수현의 공간은 휴식의 공간이나 그 공간에서 나와 비로소 장경철을 뒤쫓게 된다. 그리고 이 틈으로 수현은 장경철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또한 장경철에게 마지막 복수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 동굴과 같은 곳은 그들의 내면의 불안을 의미할 수도 있고 침실과 살인의 공간이라는 휴식과 파괴라는 양면성을 지닌 심리적 공간을 내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수현과 장경철이 다르지만 같은 - 다른 연쇄살인범의 말처럼- ‘같은 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매개항일 수도 있다. 수현은 ‘우리와 같은 과’라는 말에 흥분하지만 결국 파괴자가 되는 것은 광기의 표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이코패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묻지마 살인’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장애를 갖는 부류이다. 그들에게는 죄책감과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장경철이 영화의 끝에서 수현에게 말했듯이 그들은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절제된 광기를 뜨겁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최민식의 광기와 차갑게 식어 더 뜨거워 보이는 이병헌의 광기에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닮은 듯 다른 광기는 그 근원의 유무에 의해 달라진다. 수현의 광기가 복수에 의해 움직인다면 경철의 광기는 근원이 없다. 있다면 본래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이다. - 경철의 가족은 수현이 바라던 그의 죽음 이후의 고통을 형상화하기 위해 제시된 모습이지만 경철의 잘려진 머리가 그의 아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이후 그가 갖게 될 트라우마가 어떠한 형식으로 표출되게 될 지는 모른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잔인한 대목이라 생각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아들은 그것을 내면화하게 될 것이며 어느 방향으로 표출될지 모르는 상처는 두려움으로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경철의 아들은 또 다른 수현의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내포한다. 결국 경철은 수현을 낳고 수현은 또 다른 수현을 낳는다. 결국 근원은 없으나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우리는 감추어진 광기라는 사회 속에 위태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수현에게 감정이입된 관객은 연쇄살인마인 장경철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직업이나 능력은 차치하기로 하자. 영화란 매체의 속성상 상업적 요소가 들어가게 마련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렬한 폭력을 유발하기 위해 일종의 권력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것이 영화 외적이든 내적이든 상관하지 않도록 하자. 어쨌든 초점은 복수에 맞춰진다. 그러나 그 복수라는 것이 또한 광기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이며 무고한 사람의 피해를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수현은 장경철에게 약혼녀가 당했던 것 이상의 고통과 두려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준다. 이것은 삼국지의 칠종칠금(七縱七擒)과는 맥락이 다르다. 잡음과 풀어줌 사이에 고통과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는 기계적 장치의 존재가 파악되는 순간 장경철에게는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며 다른 게임이 형성된다. 두려움의 역전 혹은 전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잡음과 풀어줌 사이에는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으며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 그들의 게임은 그들만의 게임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 개입하게 되며 피해를 입는다. 의사나 약사 혹은 택시기사의 죽음이나 간호사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현의 약혼녀 가족의 처참함이 제시된다. 스펙타클의 사회를 사는 관객은 장경철의 잔인한 폭력에서 혹은 수현의 복수에서 스펙타클을 본다. 보여지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서 필요한 것은 스펙타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움으로 전이시키기 위해 파편화된 시각적 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은 시체다. 그리고 그 시체는 조각조각 찢기고 손상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육체가 필요하다.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관객의 자리는 살인자의 시선과 동일화되는 순간이 있다. 남성 살인자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고 그 여성은 남성에 의해 파편화된다. 이 영화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파편화된다. 그러나 남성 피해자들은 손상을 될 지언정 파편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산에 버려질 때에 조차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남성 관객은 여기서 일종의 관음증을 느끼며 잔인함과 쾌감을 느끼고 여성 관객은 피해자와 동일시하며 두려움에 휩싸인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관객들 중 현저하게 많은 여성관객들이 두려움과 역겨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게임을 통해 가장 피해를 당하는 것은 여성이며 그들은 그저 찢겨진 육체로 육화되어 보여질 뿐이다. 그들은 강간을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존재이다. - 수현은 처제에게 전화할 수 있었음에도 전화하지 않으며 장경철은 자신을 도운 동료의 여자조차도 강간한다. - 즉 그들의 게임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한 보여지는 것의 수동적인 존재를 양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상업성과 관련을 맺으며 사회의 광기를 담아낸다. 우리는 이 영화가 수 많은 사이코패스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는 현실이 이러하기에 영화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역으로 현실은 영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 반영과 재반영 사이, 수현과 장경철 사이, 현실의 관객과 영화 속 피해자는 동일자가 된다. 우리는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영화 속일 뿐이라는 쾌감 사이에서 공황을 얻으며 영화관을 나오게 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박찬욱의 영화가 있다. 그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를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복수의 비정함 뿐이며 죽음 뿐이었다. 결국은 어느 누구 하나 얻는 것이 없이 허무한 파국을 맞는다.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악마란 결국 연쇄살인자인 장경철이나 그 이외의 사이코패스 인간들일 것이지만 수현과 같이 광기에 휩싸여 복수하는 존재도 악마로 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는 서로를 만들며 서로의 존재로 파국을 맞고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며 파멸할 것이다. 상처는 내면화되고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은 장경철만이 아니라 수현을 포함은 모든 존재가 될 것이다. 악마는 결국 동굴 속에 존재하는 깊은 내면의 이름이라기보다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 영화 몇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감독의 의도가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관객이 영화내내 수현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기에 그의 폭력을 긍정하고 장경철의 폭력을 부정하면서 장경철에게 가해지는 몇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과 두려움을 갖는 동시에 쾌락과 희열을 느끼는 악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