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께 속한 전쟁 선언
삼상 17:41-47
41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1-47 / 골리앗도 다윗을 향하여 다가왔다. 그의 앞에는 방패를 든 사람이 호위하고 다녔다. 42) 골리앗은 상대편을 건너다보다가 어린 다윗을 보고서는 대번에 그를 우습게 여겼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어서 얼굴이 붉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43) 그래서 골리앗은 다윗을 깔보며 호통을 쳤다. `네가 막대기를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이냐? 혹시 나를 개로 여겼느냐?' 그리고 골리앗은 자기의 신들을 부르면서 다윗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44) 골리앗은 끝으로 다윗을 이렇게 조롱하였다. `어서 내 앞으로 오너라. 내가 네 살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들의 밥으로 주겠다!' 45)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는 칼과 창과 투창을 들고 내 앞에 나왔지만 나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장하고 나왔다. 너는 만군의 여호와를 조롱하였으나 46) 여호와께서는 오늘 너를 내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 네가 여호와를 저주하였기 때문에 너는 그 벌로 죽게될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내가 너를 쳐죽이고, 네 목을 자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네 시체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시체를 모조리 하늘의 새와 들짐승들의 밥으로 주겠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천하만민이 알게 될 것이다. 47) 또한 여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의 승리가 칼이나 창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직접 나서서 싸우시어 너희 블레셋 족속을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전쟁에 승패를 좌우하는 것에서 블레셋은 군인과 무기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스라엘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에게(41-44) 완전하게 무장을 한 골리앗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을 향해 나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연소함 혹은 왜소함과 허술한 무장, 그리고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여기서 젊다는 것은 나이의 어리다는 것을 가리키며, 붉고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외형적 아름다움만 아니라 나이 어린 사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말이기도 합니다(12). 그리고 “자신을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며 자신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며,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고대의 전사들이 결투를 벌이기 전 저주와 위협의 독설을 함으로써 스스로 사기를 고양시키고, 기선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은 실제 고대 중근동에서는 패배당한 상대 장수의 옷을 벗기는 등 신체에 모욕적 행동을 가했으며, 사체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어 새나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는 등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31:8-13).
다윗이 골리앗에게(45-47) 골리앗이 무기를 의지하고 다윗에게 왔다면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골리앗을 상대하였으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앙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도록 하겠다”고 선포하며 골리앗에게 도전합니다. 이것은 골리앗이 자신의 힘과 무력을 의지하는 것과(4-7) 다르게 다윗은 무력을 떠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향해 믿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세속적인 놋창이라면 믿음의 물맷돌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전쟁을 앞에 놓고 처음부터 전쟁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의 수중에 있다고 믿었지만, 블레셋은 인적자원과 무기 곧 이러한 조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어떤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과 같은 세상에 나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의지하는 것이 세속적인 놋 창입니까? 믿음의 물맷돌입니까?
두 명의 아이들이 장터에서 서로 마주보고 싸움을 합니다. 애들끼리 싸움을 하던 중, 한 아이가 자기 뒤에 서있던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이 대신 아버지가 서는 순간,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싸움이 성립조차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상대해야 했던 실체.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해내고 있는 싸움의 본질입니다.
호크마 주석
=====17:41
블레셋 사람...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 본절은 무장을 안하다시피한 다윗과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다윗과 싸울 골리앗의 완벽한 무장 상태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7절>.
=====17:42,43
여기서는 골리앗이 다윗의 연소 혹은 왜소함, 그리고 허술한 무장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고 그에게 독석(毒舌)을 퍼붓는 장면이 언급된다. 다윗을 보고 - 여기서 '보다'(* , 라아)란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다', '관찰하다'란 의미이다(레 13:3;왕하 7:13;대하 12:17;욥 28:24). 젊고(* , 나아르) - 흔히 '소년'이란 말로 번역되는 단어로(16:18), 곧 나이의 연소함을 가리킨다<33절>.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 이 말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12절), 한편으로는 나이 어린 사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말이기도 한다. 개로 여기고 - 문자적으로는 '내가 개냐?'(Am I a dog?)란 뜻이다. 한편 '개'는 중근동에서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기는 대표적 동물이다(왕상 21:23;왕하 9:36). 신들의 이름으로...저주하고 -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 본문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다만 '신'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골리앗은 분명히 다신주의자(多神主義者)였을 것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충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 모순을 해결할 두가지 방법이 제안되어 왔다. 즉 그 방법은 (1) 단수 '신'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복수인 '신들'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 (LXX, KJV), (2) 단수 '신'을 정확한 것으로 보고, 다만 '신'을 다윗의 신 곧 여호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Keil) 등이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믿는 수호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상대방을 경멸하는 일이 고대 용사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는 사실(Lange)에 근거하여 볼 때,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R. Payne Smith). 또한 이같은 추축은 45, 46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 골리앗을 경멸했다는 점에서, 보다 신빙성을 띠게 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번역자의 의역으로 삽입한 것이다.
=====17:44
네 고기를...들짐승들에게 주리라 - 고대의 전사(戰士)들이 결투를 벌이기 전 이처럼 저주와 위협의 독설(毒舌)을 상대방에게 퍼붓는 것은 스스로 사기를 앙양시키고, 기선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고대 서사시인 호머(Homer)의 작품 속에도 이러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위협은 실제 고대 중근동에서 (1) 패배당한 상대 장수의 옷을 벗기는 등 신체에 모욕적 행동을 가하며, (2) 또한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둠으로써 새나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는 등,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고 있었다(Klein, 31:8-13).
=====17:45
여기서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칼과 창과 단창 -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4-7절), 곧 이것은 하나님을 댜거하는 세상의 무력(武力)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 ,.예호와 체바오트) - 이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밀이다<1:3>.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 이 말은 앞에 언급된 '만군의 여호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나타난 다윗의 말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사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방의 헛된 목석(木石)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17:46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이 말은 주로 성전(the Holy War)을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시고자 할 때(수 6:2;8:1, 7) 사용되는 말이다<14:10 주석>. 온 땅으로...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 다윗의 이 말은 성전(聖戰)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살아계셔셔 역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섭리.운행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는 데 있음을 다윗은 올바로 인식한 것이다(고전 10:31).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만천하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17: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알게 하리라 - 만일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맞사울 장수로 이스라엘에서도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용사를 고르고 골라 내보내어 혹시 이겼다면, 그 싸움의 모든 영광은 그 승리한 용사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조건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다윗이 '창 칼 없이' 막대기와 물매만으로 승리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여요,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이러한 점까지 내다보면서, 진정 골리앗의 창칼이 썩은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이스라엘의 거인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곧 (1)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대하 20:15;시 127:1;144:1) (2) 또한 그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다.
< 설 교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자
사무엘상 17:41-52 / 성흥모목사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북한선교주일입니다. 우리 총회는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면서 6월 마지막 주일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로 6.25 한국전쟁 62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일부의 사람들이지만 정도를 벗어나서 지나치고 그릇된 사상, 편향된 종북사상을 가진 자들이 국기를 흔들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면서 개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가슴 아프고 걱정스러운 심정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국기를 흔드는 무리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머리를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민노총은 올해 발간한 조합원 대상의 학습 자료에서 김정은 북한 세습정권 체제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후계자로 내세운 것”이라며, “그런 세습의 문제로만 후계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통합진보당의 석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애국가는 국가(國歌 a national anthem. )가 아니다”라면서 당의 행사 때에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을 검토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발언이 문제가 되자 “애국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 애국가를 불편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국가는 엄연한 우리나라 국가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불렸고, 2010년 대통령으로 제정된 ‘국민의례 규정’에서 애국가는 국가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은 올해 1월 창당대회를 할 때 애국가 대신에 운동권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항쟁을 기념하여 부른 노래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고 하는 정당의 행사에 애국가를 안 부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북한을 선교하자고 하면 반대할 일은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하는데, 이슬람국가에도 선교사를 보내는데, 북한을 복음화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북한 선교는 남북통일보다도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고, 무너진 예배당들을 회복하고 재건하면서 언론과 거주와 사상과 종교의 진정한 자유가 주어질 때에 통일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원하는 통일이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지 감상적인 통일이 아니라, 통일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남북한의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지 말고, 신앙의 자유, 언론과 표현과 거주의 자유가 주어지는 가운데 통일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그러면 언제 통일이 됩니까? 통일하고 나서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고, 신앙의 자유, 언론과 표현의 자유, 거주의 자유를 강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통일 자체에 급급하여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하고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자유를 유보하는 그런 통일이라면 결코 찬성할 수 없고, 추구할 수 없는 통일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통일을 이룰 때에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명실 공히 세계 모든 나라가 축복하는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플랭크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4대 자유를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을 보장 하고자 하는 미래에는 인류의 4가지 자유가 확립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세계 어디서나 발표와 표현의 자유입니다. 두 번째는 세계 어디서나 모든 이들이 자기의 방식대로 신을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세 번째는 세계 어디서나 모든 국민이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경제 관점의 결핍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네 번째는 세계 어디서나 이웃나라에 대해 무력 침공을 하지 않는 것처럼 무력감축을 의미하는 전쟁위협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에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남북한의 통일은 평화통일이어야 합니다.
통일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의 바라는 소원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평화통일이어야 합니다. 통일한국은 평화공동체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한쪽을 죽이면서 얻어진 통일이라면 그런 통일이 얼마 갈 것입니까?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여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악하면 목적을 이룬 것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평화를 외치지만 무력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이 저 너머에 있으니, 무력에 있어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경제력를 키워야 무력에 의한 통일야욕을 포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북녘에서는 핵으로 무장하는데, 우리는 미사일도 내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은 핵무장하겠다고 하는데,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은 만들지 말라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만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전쟁 억제력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감상적인 통일론자가 되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3. 남북한의 통일은 기도 속에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강단에서 기도할 때마다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저들이 하도 밉게 나오니,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각계각층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 우리 한국교회는 기도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과 은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통일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중에 통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한선교는 우리의 소명과 사명입니다. 에스겔 37:15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통일에 대한 전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막대기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유다와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유셉과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막대기를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에스겔의 손 안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의 막대기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의 막대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요, 남쪽은 유다의 막대기였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종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던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옛날 사울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을 점령하기 위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는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었고, 그는 여섯규빗에 한 뼘을 더하였습니다. 한 규빗이 45.6cm 이며, 한 뼘은 20cm입니다. 293cm 로 거인 중의 거인입니다. 골리앗은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고,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었습니다. 그는 다리에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습니다.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었고, 방패를 든 자로 그의 앞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투구가 로마식 투구였다면 투구가 코까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마가 보이는 투구였습니다.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소리소리 지릅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은 놀라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런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베들레헴의 다윗은 양을 치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새가 다윗에게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형들 중에 큰 형인 엘리압과 아비나답 삼마가 전쟁에 나갔는데, 아버지 이새가 다윗을 불렀습니다.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고 일렀습니다.
이 때 사울왕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형들을 만나 안부를 확인하고 나니 블레셋의 골리앗이 나와서 소리 소리 지르면서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합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하는 말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저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왕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듣고는 “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큰 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를 발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라고 책망하고 나서지 못하게 합니다. 다윗을 아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말에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자기가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사울에게 들어갔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불렀습니다. 다윗이 싸우러 가겠다고 자원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하였습니다. 사울왕이 말합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왕이 다윗을 보아도 다윗은 아직 어리기만 하고 골리앗과 싸운다는 역부족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대표 전사로 내보기로 하였습니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사울은 자기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혔습니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보니 익숙하지 못하고 시험적으로 걸어보다 군복을 거절하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윗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골리앗이 다윗에게로 나아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니, 아주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골리앗이 소리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소리쳤습니다. 다윗이 이에 지지 않고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자기에게 다가올 때에 그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고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다윗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그의 손에는 칼도 없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달려가서 그를 밟고 그의 칼을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블레셋 군인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혼비백산 도망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블레셋 군인들을 쫓아가 죽이고 노략하고 그 날 대승하였습니다. 골리앗에게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골리앗에게는 치명적인 급소가 있는 이마가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군인이라고 하여도 허점이 있고, 맹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은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동안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살려주신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골리앗은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왔지만,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싸우러가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골리앗의 생명을 자신에게 넘겨주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다윗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다윗은 담력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닦고 기른 담대함과 함께 물매를 사용할 줄 아는 용사였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물매를 사용하는 것을 잘 알았고, 익숙하였습니다. 그가 물매를 돌리고 돌을 던져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그가 이미 습득한 기술입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교적 작은 짐승을 쫓아내고 물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곰이 양을 물러가려고 할 때에 물리쳤습니다. 그는 자기가 물매를 돌리며 나가기만 하면 사자가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역전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골리앗을 상대하게 한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양을 치면서 40년 간 휘두르고 다니던 지팡이가 그 손에 있었습니다. 사사 삼손에게는 나귀턱뼈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 나귀턱뼈를 휘두르며 1천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사업을 위하여 우리의 손에 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3) 다윗은 책임적인 애국자였습니다.
나라의 어려움을 보면서 나 몰라라고 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을 부어주시고 장차 왕으로 성별하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라를 위화여 책임적인 자세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원로장로님이 추천한 한 책을 보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꼭 읽어보세요” 라는 글이 표지에 쓰여 있었습니다. “미꾸라지 진짜 용된 나라 대한민국”라는 책이었습니다. 60년 전만해도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 겨우 연명하던 나라였는데,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를 원조하는 DAC 국가로 변모한 것입니다. 단순히 물자만 보내주는 원조가 아니라,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배우려고 합니다. 성남에 있는 한국국제협력단 연수센터에서는 한 해에 4000-5000명의 개발도상국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교육을 받고 간다고 합니다. 이제는 당당히 세계 경제 10대 강국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한국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선진국을 넘어 초일류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국 의사들이 미국에 가서 간이식 수술 연수를 받아왔는데, 10년이 지난 오늘에는 미국교수들와 의료진들이 오히려 한국에 와서 간 이식 수술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연수를 받아야 하는 나라에서 이제는 가르쳐주는 나라로 바뀐 것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여행 중에 급하게 병원에 갈 일이 생겼을 때, 백악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병원이 첫째는 독일의 마이츠에 있는 미공군기지 병원이고, 두 번째가 우리나라의 삼성서울병원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나 홍콩의 병원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병원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수준이 세계정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의료혜택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가 기독교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한국 개신교회는 전 세계 167개국에 무려 22,000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받던 나라였는데, 이제는 베풀고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적인 헌신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가서 싸워줄 거야,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런 마음이 아니라, 나부터, 나 먼저 사랑하고,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워 승리하리라고 다짐해야겠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잘 던졌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 봉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선교주일이며, 6.25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고 전장에 나가는 다윗과 같이 우리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싸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물매 돌
삼상 17장 38~49절 / 손상률목사
지역과 인종에 따라 토속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고대 중동지방에서는 돌을 던질 때 물매에 넣어서 던지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로 적과 싸우는 전투용으로, 또는 사냥꾼들이 짐승을 잡을 때나 그냥 호신용으로도 물매돌을 사용하였습니다. 물매는 가죽 조각이나 천을 엮어서 적당한 길이와 넓이로 만들어 가지고 한쪽 끝은 팔목에 걸고 다른 한쪽은 손으로 잡고 있다가 물매에 끼운 돌이 날아갈 즈음 순간적으로 놓아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숙련된 물매꾼에 의해서 던져지는 돌은 날아가는 거리와 힘과 정확도가 우수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되곤 하였습니다. 거기 쓰여지는 돌의 크기는 지름이 5㎝-8㎝ 정도 되는 것으로 전문 물매꾼은 평소 이런 것을 많이 주워 가지고 자루에 넣어 다니며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떼를 몰고 다닐 때와 간혹 양을 해치러 오는 사나운 맹수들을 공격할 때 물매를 자주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대치하여 있을 때 아비의 심부름으로 다윗이 거기에 갔습니다. 마침 블레셋의 군대장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며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거대한 체구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어깨에는 단창을 메었고, 손에는 베틀 채 같은 창을 잡았으며, 그 앞에 방패를 든 사람들이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사울 왕의 허락을 받고 맨몸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가며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맞히게 되자 단번에 골리앗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한 블레셋의 백전노장 골리앗은 이름 없는 목동 다윗의 물매 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건을 통하여 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하기 원합니다.
Ⅰ.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합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과 그 하시는 일은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전개됩니다. 이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고 감탄하였습니다(롬 11:33).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목장에서 양을 먹이던 목동 다윗을 이곳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나라의 대장군 골리앗과 마주서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노련한 장군의 창과 칼과 단창에 비하여 시냇가에 널려져 있는 돌맹이로 맞서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신 그의 섭리적 작품입니다.
(1) 버려진 돌맹이
본문 40절에 보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시냇가에 널려져 있는 돌맹이들은 가치가 없는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려진 것들입니다. 다윗은 거기 많은 돌들 가운데 자기 손에 맞을 만한 것을 골라서 쓰기 좋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또는 그가 필요로 하는 일에 쓰임을 받도록 선택하였습니다. 그 조건은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요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7-29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마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2)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 118:22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신 예언입니다(벧전 2:7).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였고(사53:3), 사람 보기에는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들어 쓰셔서 위대한 구원사역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싸움에 나갈만한 장정들을 다 불러 모았고 그들에게 무장을 시켜 전장에 투입하였습니다. 이새의 집에도 장성한 세 아들이 사울을 따라 전투에 나갔고 말째 아들 다윗은 목장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삼상 17:13). 다윗은 아비의 심부름으로 현장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며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골리앗을 보고 자기가 맞서겠다고 나서자 그의 맏형 엘리압이 다윗을 건방지다고 하며 크게 나무랐습니다(삼상 17:28). 다윗 역시 그곳에서 골리앗과 싸우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 엮어 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1-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드로의 양을 먹이던 모세를 호렙산 불꽃 앞에 불러 세우시고 그를 애굽에 내려가도록 작용하였습니다. 그 당시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닌 이드로의 목자로서 미디안 광야에 내버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다고 발뺌을 하는 모세에게 마른 막대기 하나를 들려주시며 애굽에 내려가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모세의 손에 들려진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기적의 지팡이로 행사하였습니다.
(3) 생명적 능력을 행사합니다.
골리앗의 손에 들린 창과 칼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다윗의 손에 잡힌 돌맹이는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골리앗의 손에 들린 무기는 힘이 있는 것 같으나 사실상 죽은 것이고, 다윗의 손에 잡힌 돌맹이는 죽은 것 같으나 그 속에 생명력이 작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을 가지고 그의 생명운동에 기여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큰 군대로 만드셨고(겔 37:9-10), 회막 안에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였습니다(민 17:8).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죽을 것이 하나님으 손에 붙잡혀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하며 결국 사망이 이김에게 완전히 삼켜 버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고전 15:54).
Ⅱ. 신비로운 믿음의 실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저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7:20). 이처럼 믿음은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합니다. 여기 첫발로 날린 다윗의 물매 돌이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를 때려 단번에 쓰러뜨린 것은 다윗이 고백한 그 믿음이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 말씀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한 그의 신앙이 이렇게 확인된 것입니다.
(1)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
예레미야 17:5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7-8에는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은 자기의 완력을 의지하는 자와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의 싸움입니다. 본문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한 이 말씀에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골리앗은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무기와 그 무기를 능숙하게 잘 다룰 줄 아는 자기의 기술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앞서 사울 왕과 면접할 때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삼상 17:37).
(2)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믿음
골리앗의 손에 있는 창과 칼과 단창은 모두 다 인간의 가공품들입니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많이 죽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제작된 기구입니다. 창세기 4:22에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인 계통의 두발가인이 최초로 전쟁 무기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싸움은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새롭게 개발되는 무기들은 가공할만한 성능으로 모든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다윗의 손에 들린 물매 돌은 시내 바닥에 널려 있는 자연석의 자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 그대로일 뿐 인간에 의하여 고안된 가공품이 아닙니다. 어느 때나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본래의 모습을 변형시켜 자기들의 성향에 맞게 가공하며 그것으로 자기들의 이름을 들어내고자 애를 씁니다. 마치 노아의 후손들이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하고 하나님께 도전했던 바벨탑 운동처럼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창 11:4).
옛날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본 거대한 신상 곧 정금 머리와 은으로 된 팔과 가슴,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그리고 철로 된 종아리와 흙이 섞인 열 발가락은 모두 바벨론과 메데 파샤, 헬라, 로마에 이르는 고대 왕국들로써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찬란한 문명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조그만한 돌맹이 하나에 그것들은 모두 산산조각 나서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날아가 버렸습니다(단 2:31-35). 다윗의 손에 들린 물매 돌 한방에 거대한 골리앗의 무력은 힘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3) 불가능이 없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 9:23).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딸아이로 인하여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살려 내셨습니다(눅 8:50-54). 예수님의 하시는 일 곧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신비로운 능력을 보면서도 믿음으로 이를 수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궁무진한 능력이 행사되더라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 보듯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기적 같은 사실을 실감할 뿐 아니라 그 능력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대권을 가지시고 그가 의도하는 대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생사화복과 모든 문제가 다 포함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지금 그 앞에서 전개되는 운명적인 대결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본문 46-47절에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1) 세상과 교회
여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이스라엘을 공포에 떨게 하는 골리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앙의 세력이요 혈육을 권력으로 삼는 세상 나라의 상징입니다. 한편 다윗은 성도의 표본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이 두 세력의 싸움은 필연적이며 체질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그침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교할 때 세상의 권세는 막강하고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미약하게 나타납니다. 마치 빌라도의 권세와 그 앞에서 소리지르는 유대군중에 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예수님처럼 비교가 안될 만큼 열세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과 인류를 지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운동의 특징입니다. 이사야 54:1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성령사역의 신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하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본 골리앗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고 하였는데(43절), 여기 대하여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하였습니다(45절). 또 47절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돌을 들고 나간 사람은 다윗이지만 그것으로 싸우고 이기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교회는 그 구성원이 사람이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운동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자기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운동입니다. 스가랴 4: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승리하는 교회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그침 없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고 하였는데(아 2:2), 이는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가 가시울타리와 같은 사탄의 세력에 둘러 싸여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리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4:22). 그렇지만 어떤 환난이나 죽음의 세력이 덮쳐와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승리하고 맙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최대 무기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57).
손에 물매 돌을 가지고도 창과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골리앗을 능히 이기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되라
삼상 17:40-51 / 김창환목사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4-45).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1-22).
1. 다윗(David, 사랑하는 자)
1) 사울 왕을 이어서 왕의 후보자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2-13).
2) 물맷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아가 골리앗을 죽이고 승전하였다.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삼상 17:51).
3) 다윗의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삼상 18:11). - 사울 왕은 다윗을 9번이나 죽이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 하여 죽이지 않았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삼상 26:12).
5)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싸우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6).
6) 헤브론에서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삼하 2:4).
7)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 5:3-5).
8) 다윗이 범죄하였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유감되게 큰 죄가 있었으니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한다,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 낳은 아들이 죽고, 압살롬의 반역, 형제간의 살육, 압살롬이 반역하여 후궁을 간통, 아도니야의 반역, 그 후 인구조사를 한 것으로 인해 전국에서 온역으로 7만 명이 사망하였다.
9) 다윗이 죽었다.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왕상 2:10-11).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하였다(대상 22:6-16). 70세에 별세하였다. 재위 40년 중 7년 반은 헤브론에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33년간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는 종교가요, 왕이요, 시인이요, 전술가요, 음악가요, 정치가였다.
2. 우리가 생각하고 느껴야 할 신앙적 교훈
1) 다윗은 절대적으로 여호와를 신뢰하였다.
(1)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2) 전쟁은 누구에게 속하였다고 했습니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2) 범죄함으로 환란에 처했던 다윗 누구든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인간을 신뢰하거나 자신의 업적, 공로를 신뢰할 때 하나님이 부리시는 마귀는 틈을 타게 마련이다. 다윗이 범죄함을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1) 우리아 장군을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간통한 것이다.
(2) 통일을 이루고 전쟁하기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외쳤던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죄를 범한다. 그 결과 환난을 당하였다.
(3) 통회 자복하여 회복한 다윗이 통회하고 자복하여 쓴 시가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0-17).
결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성도가 되자.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1-22).
하나님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자는 첫사랑을 찾아야 되며, 다윗의 온유하고 겸손했던 점들은 우리의 귀감이 되며 원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그 신앙을 본받는 자가 되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삼상 17장 41~49절 / 이필재목사
6·25동란 59주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6·25를 기억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30퍼센트 미만 소수가 되었습니다. 그 해에 태어난 사람은 60세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산당을 체험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역사가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 대한민국에는 북한을 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 각도로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6·25를 몸으로 체험한 세대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나쁜 정치 제도는 공산당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세대들에게 죽여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 절대 신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절대 뒷받침하는 확실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공산당 나라들은 모두 다 망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는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해도 우리 한반도 역사만 해도 그 이후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GNP가 2만 달러가 되었고 북한은 20분의 1인 1천 달러 밖에 안 되는 이런 차이가 났습니다.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공산당이라고 외쳤는데 현실은 정 반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과 간접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간접 경험자들은 들어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경험한 사람들이 말을 해주어서 그렇다고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은 직접 경험자들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할 때는 직접 경험자들과 같이 아주 강하게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어쩔 수 없이 세대의 차이로 생각을 달리 하는 일이 지금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문제점이라고 판단됩니다.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육군 사관학교 신입 생도들에게 설문지를 돌렸습니다. “대한민국의 주적, 가장 적대 국가가 어느 나라이냐?” 질문서를 돌렸더니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가 될 사람들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제일 적대 국가가 미국 36퍼센트, 제이 주적 나라는 북한 24퍼센트라고 신문에 났습니다. 이런 반응을 보는 시각도 아주 판이하게 다릅니다. 공산당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아주 아찔하게 느낍니다. ‘큰일 났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공산당을 전혀 모르는 세대들은 무덤덤합니다.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이런 차이가 됩니다.
1994년도에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큰일 났다.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강경파들이 “북한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미국에 큰일 난다. 남한은 말할 것도 없는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쯤에서 전쟁을 해야지 안하면 미국에 큰일 날 테니 봐라.” 그래서 모든 전쟁 준비를 끝내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전쟁 브리핑을 끝냈습니다. 이제 클린턴 대통령의 명령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말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북한이 그 후로 핵을 만들어서 미국이 큰일 나고 있잖아요? 그때 이 전쟁을 막은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고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 몇 달 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TV에 공개 출연해서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때 동해안에는 명령을 기다리는 미국 전함들이 쫙 깔려 있었다. 이 전쟁은 오래 끌면 안 된다. 단시간에 끝내야 한다. 그래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요즘 그런 분위기가 또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국가 공영 TV 방송들이 매일 톱뉴스로 한반도 전쟁 위기감 분위기의 방송을 거침없이 하고 있으며 북한은 당장이라도 때려 부술 것 같은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이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 우리보다도 일본 사람들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북한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그들은 핵을 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탄 피해가 40만의 사망자와 100만의 원자병 후유증을 지금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또 이런 것을 맞아야 되느냐?” 그래서 저렇게 한국보다 훨씬 열심히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무엇인가를 필요를 했던 것 같이 느껴지죠? 급하게 미국에 가서 오바마 대통령의 어떤 확인을 받아서 온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만원 씨라는 군사 전문가가 언론에 발표한 남한과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를 읽어봤습니다. 옛날에는 이 전쟁이라는 것이 상대방의 실력을 모르기 때문에 무모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방의 전쟁 능력에 대해 피차 너무나도 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북한도 남한도 전쟁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준비가 잘 된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한의 공격을 북한이 막아낼 방법도 없고 마찬가지로 북한의 공격도 막아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쪽에 준비된 미사일은 1분에 5천발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분에 5천발이 발사되는 이 포탄을 방어하기 위해서 패트리어트 방어 미사일 1천대를 동원해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양쪽이 소유한 화생방 무기는 남북한 전체 인구를 세 번 이상 전멸시킬 수 있는 것을 피차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운 이 상황을 피차 만들 수 없는 견제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미 군사 전문가 회담을 미국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키신저 전 국무 장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은 더 이상 자기들이 갈 길이 없다고 판단이 될 때 너 죽고 나 죽자 전쟁을 도발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망하니까 너도 망해라.”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은 모두가 돌발적 이유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그만 지식을 가지고 상식적 판단으로 “전쟁이 안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양쪽 똑같이 가능성이 있는데 그 큰 문제 하나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한반도인 것입니다. 미국에 웨스트민스터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청년 하나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게 되어서 갔었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여기서 4년 동안 장교로서의 모든 훈련을 마쳤는데 졸업한 다음 어느 나라에 가서 근무하기를 희망하느냐? 세계 지구상 360군데 미국의 기지가 있는데 희망하는 곳을 적어라.” 그런데 그 해에 한국이 제일 많았습니다. 왜 한국 근무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거기가 제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으니까 내가 4년 동안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최첨단 기술을 배웠는데 언제 쓸 거냐? 쓰려고 배우지 않았느냐?” 군인다운 정신입니다. “한국에 근무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내 몸과 마음을 거기에 투자하고 싶다.” 이런 설문지 조사 결과가 그 해에 나왔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로 본 전쟁! 이 세상을 가장 참혹하게 만드는 것은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악 중에 제일 큰 악이 있다면 전쟁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 하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전쟁터에서는 많이 죽일수록 좋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난 50년 동안에 아주 놀라운 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산업 시설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고 도시 문명도 선진국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기업들이 앞을 다투어 건축하려고 하는 빌딩은 100층 넘는 건축물입니다. 하도 높이 지었기 때문에 비행기 진로가 걱정될 만큼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피땀 흘려 건설한 대한민국, 50년 이상 걸린 이 아름다운 것들이 전쟁이 나면 50일만에 다 폐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전쟁은 일어나지 말기를 항상 기도하잖아요? 경제가 좀 어려워져도 살 수 있습니다. 사회가 다소 혼란스러워도 살 수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식량이 좀 부족하다 하여도 전쟁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면 왜 전쟁을 하는 것이냐?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입니다. 이웃 나라가 침략을 해오잖아요? 살아남으려면 어떡합니까? 전쟁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또 하나는 전쟁을 하여야 할 때 전쟁을 안 하면 전쟁보다 더 큰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악의 제거를 위해서 피땀 흘려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역사적으로 블레셋 민족은 호전적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호전적이란 말은 전쟁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족속은 성경에도 기회만 있으면 전쟁을 합니다. 사울왕은 말년에 늙어서인지 사고력과 통치능력이 나라를 지킬 만한 지도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기회를 블레셋이 알고 침략해온 상태입니다. 싸움 좋아하는 민족이나 싸움 좋아하는 사람은 싸움이 취미생활 같습니다. 싸움을 안 하면 주먹이 근질근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이 블레셋 족속을 말하려면 창세기 인류의 조상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해야 합니다. 노아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셈과 함, 야벳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 후에 정착해서 농사짓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포도 농사를 지어서 그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노아는 이때 아주 즐거운 오락이 하나 생겼는데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것입니다. 기분은 좋아지지만 술에 취하니까 실수가 나타납니다. 이 어른은 술만 취하면 옷을 홀라당 벗어버리고 벌렁 누워버리는 주책스러운 버릇이 생겼습니다. 셈과 야벳 두 아들은 노인 되신 아버지를 이해하고 잘 보살펴드리고 덮어드리고 늘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 중에 함은 아버지를 멸시했습니다. “노인이 돼서 술을 정도껏 마셔야지 취해가지고 며느리들이 셋이나 있고 손자, 손녀들이 있는데 날마다 옷을 홀라당 벗어서 벌떡 누워서 저게 뭐하는 짓이냐?” 막 아버지를 멸시하는 바람에 노아와 함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나중에 노아는 함을 결국 저주해 버립니다. 블레셋 족속이 함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그들과 계속 전쟁을 하던 족속이 나타납니다. 시돈 족속, 헷 족속, 여부스, 기르가스 족속, 스말 족속, 핫 족속, 아르왓 족속 이 모든 족속이 다 함의 후손입니다. 이 함의 후손들은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그 이후에 종교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이 믿는 하나님은 안 믿겠다.” 그들의 신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호전성 민족이 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체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장 초반에 블레셋 군대 골리앗 대장의 신체적 조건이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 사람은 신장이 6규빗 반이요 머리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갑옷을 입었으며 갑옷의 준수가 놋 5천 세겔이며 다리에는 놋 경갑을 쳤고 어깨에는 단창을 메었으니 창 자루가 베틀 채 같았더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말을 현실적으로 비유하면 “우리 군대는 정신적 무장이 완전하고 철통같은 군사 훈련을 받은 바 있으며 현대식 성능의 최고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절대적 숫자의 군인을 갖고 있으며 과학적 존수를 소유한 천하무적 군대라.” 이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골리앗의 모습과 무장이 마치 핵무기만큼이나 무서웠던 장비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핵무기 같은 골리앗 앞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문명은 비참한 식민지 노예가 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은 유엔이라는 세계적 기구도 있고 국제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어서 전쟁에 이겼다 하여도 상대국 국민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국제적 약속에 기준해서 인격적 취급을 해야 되고 전쟁에 이겼어도 그 나라 국가재산을 함부로 취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무법천지였습니다. 전쟁에 이기면 재산 몰수, 남자들은 죽여 버리고 여자들은 다 성폭행의 대상자였습니다. 블레셋이 지금 그렇게 하려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삼손도 블레셋 사람과 전쟁한 기록으로 사무엘상서와 하서에 블레셋이 수백 번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 전쟁의 윤리는 무엇인가? 바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때 전쟁을 안 하면 블레셋의 잔인한 사회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악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전쟁을 해야 된다.” 그래서 이 전쟁 상황에 다윗이 나타나서 전쟁의 이유를 국민 앞에 선포합니다. 그 선포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라고 했습니다. 전쟁도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시작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양쪽 군대의 뚜렷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네가 모욕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가노라.” 이렇게 다윗은 말하고 그쪽에서는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큰 문제는 블레셋 군대와 다윗의 비교입니다. 우선 다윗은 실전 경험이 없는 목동에 불과합니다. 군인으로 훈련된 사람도 아니고 성숙치 아니한 소년이었습니다. 3미터 가까운 골리앗에 비해 너무나 어린 아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의 무기는 주머니에 돌을 몇 개입니다. 사무엘서는 이와 같은 대조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러 나온 골리앗 장군이 다윗의 출전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을 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전쟁하러 나왔느냐?” 지금 이스라엘 민족은 풍전등화, 국가적 위기로 국민들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전쟁에서 국민들의 소원은 사울이 옛날처럼 나가서 싸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사울은 지금 골리앗 앞에 절대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과 골리앗의 비교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즘 북한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골리앗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까불면 핵을 터뜨릴 거니까!” 국제회의의 인격적 파트너가 모여서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남한을 한 번에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어!” 이것이 국제회의입니까? 외무부 장관이라는 사람의 발언이 “몇 시간 안에 다 초토화 해버리고 너도 살아남지 못해!” 골리앗과 똑같이 말하고 있잖아요? 핵 하나 만들어놓고 큰소리치며 세상을 다 지배할 것 같이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윗의 말대로 해석한다면 “전쟁은 일어나는 것도, 이기고 지는 것도 모두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반드시 군대가 우수하거나 전략이 잘된 쪽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고하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왔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의 승리는 의로운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온 땅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쟁에 임하는 철학이다.” 그러면서 지금 나가는 겁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남군도 북군도 다 하나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전쟁하면서 군사들이 “하나님은 어느 편에 계신가?” 하니까 링컨이 “그것 따지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이긴다.” 그래서 이겼잖아요?
저는 미국이나 남한이 하는 일은 모두 다 잘하고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을 때는 어떤 나라도, 어떤 민족도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고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바입니다. 누가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인류의 평화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어김없이 내려졌습니다. 전쟁도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 일이라고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왜 이 땅에 내렸는가?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마귀의 소원이 점점 확대되어 나갈 때 그 잘못 가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 심판의 방법이 전쟁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골리앗의 블레셋 군대가 유대 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는 목적이 성경에 나옵니다. 법궤를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궤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정신적인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그것을 없애버릴 때 유대 나라는 힘이 없어진다. 그것을 빼앗아 와라.” 이 흉계를 알기 때문에 다윗이 “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그래서 이 하나님의 역사가 어려워지는 것을 막으려는데 다윗의 전쟁 목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맨 발의 소년 군사인 다윗을 도와 그로 하여금 승리를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전쟁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전쟁이 일어나든 전쟁이 안 일어나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정의롭게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면 혹 전쟁이 일어나서 피를 흘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을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을 향하여 세계인의 이름으로 충고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북한은 고집 좀 그만 부리고 세계인의 충고 좀 들어라. 너희가 세계를 등지고 골리앗과 같이 핵 하나 만들어 크게 떠들어 봐야 역사의 심판은 너희 민족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변하지 않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것입니다. 왜 북한이 밥도 못 먹는 저런 사회가 되었는가? 이 적화통일이라는 목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 국제 사회에서 고립국가가 되었는가? 이 적화통일의 목표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모든 말을 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국민이 다 굶어 죽어도 남북한이 모두 불바다가 될지라도 그 목표는 절대 변하면 안 된다는 이 마귀 철학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다 어려워진 겁니다. 제 믿음으로는 북한의 그런 계획은 하나님의 절대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6·25 동란 때 저는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공산당들이 동네에 들어와서 하는 일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매일 일전의 회의를 합니다. 피곤한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자아비판에서부터 무엇을 그렇게 시키는 게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아주 절대적인 철학은 일방적으로 말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계속 일방적으로, 날마다, 저녁마다 회의에 지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6·25 동란 이후에 우리 사회에 한참 유행하던 언어문화가 뭔지 아십니까?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야.” 이 말이었습니다. 일방적인 말만 합니다. 여러분도 주변에서 어쩌다가 수다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전화기에 대고 두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나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막 계속 합니다. 그러면서 끊을 때는 또 뭐라고 하느냐?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합시다.” 공산당은 회담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공산당들과 무슨 회의가 됩니까? 일방적인 요구만 있습니다. 6·25 세대들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아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민족과 백성은 어떤 민족이냐? 이런 사람입니다. 모든 국민이 누구든지 최대한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목적을 두고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정치 제도와 철학을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권력가들 몇 사람만 잘 사는 나라! 국민은 점점 더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절대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시점에서 북한이 하루 속히 마귀 생각을 버리고 세계 평화 질서에 협조하고 6·25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그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들이 준비한 모든 살인무기가 자기들을 해치고 그 나라만이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저는 다윗의 승리를 남한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 역사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이 도우시고 애국가의 뜻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그런 나라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운명의 골짜기
삼상 17장 41~49절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 제가 머리를 자르러 어느 미용실에 갔습니다. 머리를 잘라주는 스타일리스트와 대화 내용이 당연히 월드컵으로 옮겨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여성 스타일리스트가 붉은 악마 멤버였습니다. 그래서 시청 앞에 가서 응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생겨 물었습니다. ‘시청 앞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였는데 화장실은 어떻게 가느냐?’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아예 물을 안 마신다.’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물을 안 마시면 화장실에 갈 일이 없지요. 또 물었습니다.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는 게 아니고 시청 앞에서 하는 것인데 그 응원에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응원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기가 선수들에게 전달돼서 선수들이 더 잘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축구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응원의 효과를 신뢰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갈 때 이스라엘 군대가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를 응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응원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구경했을 것입니다. 응원을 하려면 정신이 같아야 됩니다. 같은 기를 가져야 됩니다. 그 스타일리스트가 자기의 기가 선수들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응원을 하려면 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되는데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으로서 골리앗과 싸우러 내려간 것은 다른 병사들 중에 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싸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응원을 할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영적대결을 벌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모여서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들이 엘리야를 응원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냥 누가 이기나 지켜본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가 전달된다면 오히려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 군대에게 전달되었을지언정 그 반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응원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 모세를 응원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졌을 때 다니엘을 응원해 주는 사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응원하느냐, 찬성하느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성령께서 응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내게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만인이 나를 응원한다고 해서 없었던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고 내게 믿음이 있다면 만인이 나를 반대한다고 해서 내 믿음이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이기느냐 골리앗이 이기느냐 이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더라도 골리앗과 같은 장사들은 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기느냐 블레셋이 이기느냐 이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전쟁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이기든 지든 블레셋과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이 전투가 왜 중요하냐.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의 결과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다윗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이 결과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승리나 실패가 중대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런 목사님 한 분이 계심으로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분 한 분의 삶과 신앙이 결코 한 사람의 삶과 신앙으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러 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이 자기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승패에 좌우된다는 얘기입니다. 다윗이 싸우러 내려갈 때 마치 하나님이 내려가시는 것과 같은 그런 사건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행위에 좌우될 수 있는 매우 드물고 거룩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소년에 불과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년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종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입고 이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본래 철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가급적 깊이 생각한 것을 성도님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여러분의 신앙을 정말로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일만 마디의 신학이 아닌,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과 같은 한 번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론에 이론을 거듭할 수 있지만 이론은 믿음을 낳지 못합니다. 오직 다윗 한 사람만이 물매를 손에 쥐고 운명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그의 승리는 전설이 되고 영적인 선언이 되었습니다. spiritual statement. 46절에 그의 영적인 선언문이 담겨져 있습니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온 땅으로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의문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집에 함께 계시느냐, 하나님이 우리나라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함께 역사하시느냐, 개입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우리 집안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우리나라의, 민족의 역사에 얼마만큼 개입하시느냐, 이것이 우리의 궁금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눈에 밝히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더라도 우리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개입하신다면 왜 세상에는 불의함이 존재할까?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신다면 왜 이단을 처단하지 않으실까? 왜 세상에는 부조리가 있을까? 왜? 왜? 생각은 생각을 낳고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머릿속의 개미와도 같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책으로 다 기록하면 세상에 둘 곳이 없으리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이론과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둘 곳이 없도록 채웠습니다. 이천년의 신학, 이천년의 기독교 신학이 학문의 발전을 거듭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가 이천년 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신학은 발전하고 학문은 발전했지만 그것이 정작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주지 못했고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해준 것은 아닙니다. 신학박사 학위가 열 개가 있는 사람이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권사님보다도 믿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이 믿음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실천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단순해질 때 믿음이 분명해지고 내가 무엇을 믿는지를 알게 되고 내가 이 믿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단순하게 해야 됩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저희 교회 창립기념음악회를 했는데 많은 기자재와 음향장비를 동원하고 조명시설을 동원하다보니까 그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시설이 많을수록 고장 날 확률이 그만큼 많아집니다. 그래서 저희 주일예배는 가급적이면 아주 심플하게 드립니다. 주일에 저희가 사용하는 것은 이 마이크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이크가 만약 고장 나면 육성으로 하면 됩니다. 가급적이면 심플하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 가급적이면 단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려고 하는데 다윗이 이것저것을 복잡하게 생각해서 골리앗과 싸우러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싸우러 여기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님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자기가 싸우겠다고 평소에 사용하던 물매를 손에 들고 이 골짜기에 내려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 단순한 논리에서 엄청난 담대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아마 사울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는 놀랐을 것입니다. 믿음이 저렇게 역사할 수 있구나! 믿음이 저렇게 역사하는구나! 저렇게도 하면 되는구나! 저렇게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구나!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아, 저렇게 하는구나! 이것이 진짜 배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번민을 주는 많은 것을 좇아가기 보다는 정말로 중요한 믿음에 대하여 배워야 됩니다. 믿음을 배워야 되고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되고 그리고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을 보고 배워야 됩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과정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옳은 명분이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려간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는 올바른 명분이 있었어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충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사람과는 싸워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을 움켜쥐려고 하면 자기가 가서 양을 건져내고 그리고 만일 사자나 곰이 그를 위협하면 수염을 잡고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타잔이 따로 없습니다. 다윗에게는 충분한 경험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 것을 충분히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세 번째는 확실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만 있으면 계획이 없어도 될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충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고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충분한 계획이 없는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충분한, 확실한 계획. 그래서 사울왕의 갑옷과 투구와 무기는 너무 무거워서 안 되기 때문에 다윗의 손에 익은 물매와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간 것입니다. 골리앗은 한 명인데 왜 물맷돌을 다섯 개나 들고 나갔느냐? 골리앗의 형제들이 덤빌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음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먼저 마음속에 우러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우러나는 이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호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고 사람들의 응원으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고 자신의 혈기로 그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우러나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이 골리앗을 내 손에 붙이셔서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실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믿었어요.
다섯 번째는 입술로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입으로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 불신을 고백하는 데 익숙합니다. 입으로 불가능을 고백하고, 입으로 원망을 고백하고, 입으로 불평을 고백하고, 입으로 미움을 고백하고, 입으로 우울한 감정을 고백하지만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자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건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함도 아니고 예절도 아니고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친구의 인기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평소에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요.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아요. 불필요한 말의 양을 줄이고 그리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믿음을 고백하는 훈련을 할 때 성경말씀에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내가 행하여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여러 번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이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왜 그것을 물으셨겠습니까. 사람들의 입으로 믿음 고백하는 것을 듣기 원하신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데에서 끝나면 입만 산 그리스도인이고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야 됩니다. 돌을 물매에 던지는 것, 그것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물맷돌로 하여금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셨어요.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스마트 폭탄이에요. 레이저로 쏜 게 아니고 레이다를 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이 돌멩이를 유도하셔서 골리앗의 이마를 향하여 날아가게 하셨어요.
이 일로 다윗은 영웅이 되지요. 그건 부차적인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높이십니다. 다윗이 높아지기 위해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에요. 다윗이 사람들 보는 앞에 하나님을 높였더니 하나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반대로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만 바라보는 인물이 되라
삼상 17장 41~49절 / 이충섭목사(의정부승리교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난다
▮ 하루는 어떤 방문객이 화가의 화실에 찾아왔다. 화가가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화실의 벽에 걸려 있었다. 방문객은 그것을 둘러보고 난 뒤에 화가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 많은 그림들 가운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최고의 걸작품은 무엇입니까?’ 방문객은 아마도 그것을 사려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화가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의 최고 걸작품은 제가 다음에 그릴 그림입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됩니다. ... 사람 속에서 절망을 체험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희망을 보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골리앗이 있다.
우리를 힘들게 어렵게 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다. 우리보다 힘이 세고 우리보다 실력이 있고 우리보다 물질이 많은 사람이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를 세상에 빠지게 살도록 유혹하는 사람이 있다.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과 염려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것인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물질의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을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는 어려움이 다가 올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나안 땅을 40일동안 정탐하고 왔을때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하였다. 갈렙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갈렙과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땅의 거주민을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라고 말한다.
문제가 있을때가 문제를 쳐다 보느냐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쳐다 보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능히 이기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나가면 승리한다.
다윗은 골리앗을 쳐다보지 않고 하나님을 쳐다 보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블레셋사람을 우리 손에 넘기시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 문제가 과거에도 일어나고 문제가 미래에도 일어난다. 우리가 문제를 쳐다 본다고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안에서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 불안, 걱정, 염려를 극복해야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가는 방법에 없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 시편 46편 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다. 감사로 불안한 마음과 생각을 잡아 낼수 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꿈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인물이 되어야 한다. 꿈과 믿음으로 인물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앞에 나서 돌을 옮기라고 하였다. 돌을 옮기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다. 풀어 놓아 다니게 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기게 하는 것은 온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딸을 고치려 갔다. 그 와중에 12년 혈루증여인이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을 맞져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흐르게 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건강해 졌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믿음을 요구하셨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였을때 떠드는 소리와 사람들이 심히 울며 심히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고 하니 사람들이 비웃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달리다굼>하였다. 소녀야 일어나라 12살된 그아이가 일어나서 걸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한가지 <하나님만 믿고 나가라>
▮ 페르시아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다. 그 진흙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강하게 났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라고 물었다. 진흙은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나그네가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라고 묻자,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그네는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라고 물었다. ... 이에 이 진흙은 비결을 말하기를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동안 살았습니다.’고 했습니다. 진흙이 지닌 향기의 비밀은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은 아름다운 것도 없고 향기로운 것도 없으며 자랑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줌의 진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삶의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말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고 결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기도하는 습관으로 운명이 바뀐다.
하나님과 친밀한 전도하는 습관으로 운명이 바뀐다.
하나님과 친밀한 예배하는 습관으로 운명이 바뀐다.
믿음의 무기로 승부하라
박찬길목사(좋은교회) / 삼상 17:41-49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좋아하는 믿음의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저는 다윗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다윗만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로 검색해 보니까 개역개정 성경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903번 나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일까요? 다윗을 가장 잘 표현하는 성경구절이 사도행전 13:22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에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만해지면서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으로 보내서 2대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은 왕으로 세우실 때에,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예언자로 세우실 때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왕으로 세우라고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새의 집에 가서 너에게 일러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새의 집에 갑니다.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아들들을 차례대로 부릅니다.
제일 먼저 큰 아들 엘리압이 옵니다. 사무엘이 보니까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어요. 마음에 ‘아~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우려는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 아비나답을 지나가게 합니다. 이 사람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셋째 아들 삼마를 지나가게 합니다. 삼마도 아니라는 겁니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아들이 지나갑니다. 모두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묻지요. ‘아들이 다 온 것입니까?’ ‘아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서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시오.’ 이제 다윗이 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보니까 눈이 아름답고 외모가 준수합니다. 얼굴이 아름답다고 했지요. 이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이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어떠한 부분이 마음에 드셔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을까요? 이새의 대답 속에 키워드가 있습니다. 11절 중간을 보세요.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다윗이 뭐하고 있습니까?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양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말씀하시지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집에 선지자가 온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잖아요. 사무엘 선지자가 우리 집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러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러 오는 것이니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16장 4절에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에 오니까 장로들이 맞이하면서 좋은 일로 오시는 것이냐고 묻잖아요. 선지자가 온다는 것은 축복된 일입니다.
예전에, 어릴 때에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심방 오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가시다가 그냥 들르기만 해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몰랐는데 목사에게는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 축복권이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아신 거예요. 목사님이 지나가시다가 물 한잔 마시러 오셔도 축복 기도해 주실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요즘은 이민 사회가 영적인 질서도 모르고 거룩한 욕심도 없어서 목사가 심방을 간다고 해도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하는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자,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왔습니다. 밖에 나가 있는 아들들을 불러오라고 말합니다. 양을 치고 있던 아들들이 이 소식을 듣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중요한 기회잖아요. 이새의 아들들이 서둘러 집으로 갑니다. 이때에 다윗은 남아서 양을 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주의 일을 진실하게 감당할 때에 방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입니다. 다윗에게는 형제들이 방해물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가고 싶었을 겁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형이 기름 부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형들이 오지 말라는 겁니다. ‘너는 양이나 치고 있어’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상심했겠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에 성탄절에 새벽송 도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새벽송 도는 것이 기도제목이 될 정도로 너무나 좋아보였어요. 12월 24일에 성탄축하예배를 드립니다. 찬양하고 율동하고 성극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모든 순서가 끝나면 청년들이나 고등부 학생들은 집에 가지 않습니다. 새벽 3-4시가 되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정마다 다니면서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있는 거예요. 그들은 새벽까지 곰발바닥 소발바닥 하면서 친교하고 놉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 집에 가지 않고 형들의 눈치를 보면서 미적미적합니다. 그런데 형이 와서는 “너는 집에 가서 있어.” “나도 가고 싶은데...” “어린 것이 어디를 따라와. 집에 가” 얼마나 서운한지요. 눈물을 머금고 집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다윗의 마음의 충분히 이해합니다. “너는 양을 치고 있어” 하는 말이나 “어린 것이 어디를 따라와. 집에 가” 동일하게 서운한 말입니다. 다윗이 형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 너무 속상했을 거예요. “나도 가야 되는데, 나도 봐야 되는데...”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형제라는 방해물을 뛰어 넘었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환경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17:34-35,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의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 쳐 죽였나이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장애물은 곰과 사자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늬만 양을 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긴 양을 지키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양떼를 물어 가면 쫓아가서 살려내는 근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사자나 곰이 양을 물어 가면 방법이 없잖아요. 요세미티에 캠프 갔다가 곰이 어슬렁거리고 오면 대항해서 씨름하시겠어요? 어리석은 짓이지요. 사자나 곰이 양을 물어 가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쫓아갑니다. 사자의 입에서 양을 살려냅니다. 사자나 곰이 덤비면 턱수염을 잡고 때려 죽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이 맡은 일에 진실하게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극복하고 이겼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으셨던 이유는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신 겁니다. 자신이 맡은 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방해물을 뛰어넘는 믿음을 보신 겁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양을 지키는 어린 다윗의 자세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 다르잖아요. 세상에서는 지식과 지혜가 뛰어나야 합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하고 많이 배워야 합니다. 재주도 있어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합니다. 인물도 훤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는 마음이 가잖아요. 요즘은 사람들이 훤한 얼굴을 만들려고 깎고 다듬는다고 하잖아요. 최고의 졸업선물은 성형수술해 주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다는 겁니다. 오늘 7절을 보세요.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에 따라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얼마나 책임 있게 감당했느냐? 얼마나 진실하게 감당했느냐? 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재능이 탁월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함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환경과 여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것에 승부를 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2대째 장로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장로 안수를 받는 날 아버지 장로님이 아들 장로님을 불러서 말합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장로로 헌신하면서 교회에서 하는 일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모든 일을 아멘으로 순종하며 섬겼다. 너도 나처럼 장로로 헌신해라.” 아버지 장로님이 얼마나 진실하게 사명을 감당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재산을 맡겼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어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곧바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요.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바로 장사를 해서 두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땅을 파고 묻어두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계산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열 달란트를 내 놓습니다. “주인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길 것이다.” 칭찬해 줍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이 주인에게 옵니다. 여차저차 하면서 네 달란트를 내 놓습니다. 주인이 동일한 칭찬을 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길 것이다.”
이번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나옵니다. 저는 주인어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땅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뭐라고 말하나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 종은 주인을 잘못 본 겁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달란트가 다섯 달란트이든, 두 달란트이든, 한 달란트이든 상관없이 진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이면 어떻고, 두 달란트이면 어떻고, 한 달란트이면 어때요? 혹 반 달란트면 어때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나를 믿고 신뢰하신 것인데,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사실 한 달란트가 작은 액수가 아니에요. 다섯 달란트에 비해서 작은 것이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면 보통 33kg인데, 요즘 금값이 비싸잖아요. 금 1g에 50불이라고 들었는데, 계산해 보면 160만 불 정도 됩니다. 큰돈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아 놓고 진실하지 않은 거예요.
우리는 작다고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많다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동일한 자세로 감당하면 되는 겁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주님은 동일한 칭찬을 하시잖아요. 만일 한 달란트를 받은 종도 한 달란트를 남겨서 두 달란트를 가지고 왔다면 주인이 동일하게 칭찬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무엘상 17:37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냈은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사자와 곰과 싸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사람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려고 발걸음을 뗄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때에 이제부터는 믿음의 시각으로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흔들어도 그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환경이 힘들어도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골리앗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보십시오.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으로부터 이기십시오. 꿋꿋하게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듯,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시듯,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듯,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시듯, 하나님이 힘과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주셔서 탁월하게 감당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성공학자 중에 ‘지그지글러’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인생의 고도를 결정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고 했어요. 재능이 좋아서 돈을 벌고, 재능이 좋아서 출세한 것이 아니라 자세 때문이라는 거예요. 삶의 자세 때문에 돈을 벌었고, 삶의 자세 때문에 출세했고 인정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다윗처럼 진실하게 양을 키우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의 자세가 변함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일이 있든 좋지 않은 일이 있든, 몸이 아프든 아프지 않든, 누가 핍박을 하든 칭찬을 하든 진실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진실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우나 추우나 개의치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라면 진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주님을 위해서 죽는 척(?)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아버지 이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윗은 왜 안 데리고 왔냐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형제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너는 양을 지키고 있어 하면서 눌러 앉히잖아요. 사무엘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장남에게 마음이 가 있었어요.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확률은 제로 퍼센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유는 진실성이 있었습니다. 진실 됨에 비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자세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고전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이 맡겨주신 일이 크던 작던 묵묵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맡겨주신 하나님이 알아주면 되는 것이지요. 목사가 칭찬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칭찬하시면 되는 것이지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나님으로부터 이 칭찬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고 주님의 일을 맡겨주셨잖아요. 성경 시험 치르지 않고도 주님의 일을 하고 있잖아요. 오디션 받지 않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잖아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아무 것도 보지 않으시고 단지 믿음만 보시고 맡겨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금년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도 진실하게 참여하시고, 기도회도 진실하게 참여하시고, 성도들도 진실하게 사랑하시고, 담당하고 있는 사역도 진실하게 감당하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진실성을 보시고 더욱 값지게 사용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실하게 양을 지키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흠이 많음에도 맡겨주신 일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골리앗 같은 문제들 속에 숨겨진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라
삼상 17:41-49 / 김상수목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싸움은 지금부터 무려 약 3천여 전인 B.C 1020년경에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인 다윗의 청소년 시절에 벌어졌던 싸움이다. 이 당시에 다윗과 싸워서 패했던 골리앗은 그 키가 약 270cm 정도(“여섯규빗 한 뼘”, 삼상17:4)이며, 입고 있던 갑옷의 무게만 해도 약 60kg("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삼상17:5)였고, 그가 가진 창날의 무게는 약 7.5kg("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삼상17:7)였다. 이러한 대략적인 골리앗의 용모와 장비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장대한 자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오래된 고대에,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가 지금 21세기 하이테크 시대에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나)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우리가 이 싸움의 원리와 과정을 상고해야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의 원리와 승리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바로 그 영적인 원리들을 함께 나누고 함께 간절히 기도하기 원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에서 진짜 중요한 본질은 뭘까? 어떤 상황이이든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발시킨 숨은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겉으로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만, 그것을 유발시킨 진짜 이유와 본질은 따로 있다. 그것이 뭔가? 그것은 바로 원수 사단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이다. 마귀 사단은 이 양자대결을 유발시킨 숨은 원인이며, 이 싸움의 본질은 영적싸움이다.
많은 경우에 마귀 사단은 자신의 모습은 숨기고, 그대신 다른 어떤 것을 앞세우고 배후에서 조종한다. 우리들이 잘아는 창세기 3장에서도 하와를 유혹한 뱀의 배후에는 마귀 사단이 있고,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준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과 문제들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마귀 사단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의 경우에, 마귀 사단이 골리앗을 전면에 내세우고 큰 소리치게 했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리앗이 소리쳤던 말들 중에 특별히 사무엘상 17장 8절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삼상 17:8)
이 말씀을 보면 골리앗은 “한 사람”을 택해서 자신 앞으로 내려 보내라고 말한다. 지금 큰 소리치는 골리앗의 진짜 목표는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아니다. 자신과 대결할 대표성을 지닌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일차적으로는 다윗이요, 더 근본적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올 한 사람 그리스도인 것이다. 결국 마귀 사단의 숨은 의도는 다윗을 제거함으로서 다윗의 후손(더 근본적으로는 “여인의 후손”, 창3:15)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막으려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싸움에 임하는 다윗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다윗은 그 마음에 거룩한 분노를 품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가서, 주머니 속에 넣어왔던 물맷돌로 골리앗의 머리를 한 방에 명중 시켰다. 사무엘상 17장 43절에서 골리앗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고 하면서 저주하는 장면을 볼 때, 아마 골리앗은 다윗의 주머니 속에 있던 비장의 무기인 매끄러운 돌들과 물매는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막대기만 봤던 것같다. 아마 다윗이 갑옷도 입지 않고 공격할 만한 무기는 막대기 하나만 달랑 있는 것을 보고, 조롱하면서 골리앗과 그 배후의 사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46절)”벨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49절에 보면 마침내 주머니에 넣어왔던 비장의 무기(돌)를 꺼내들고 물맷돌질 돌려서 단 한방에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여기에서 우리는 “머리”라는 말과 “이마”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귀 사단은 사전에 주님이 오는 길을 막고, 제거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골리앗은 다윗이 던진 돌에 그 머리가 상했다. 골리앗을 쓰러드렸던 이 돌 그리고 무너진 골리앗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 이래로 우리들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그 품속에서 사단의 머리를 한 방에 격파할 비밀 병기를 꺼내 드셨다. 바로 주님 품에 계셨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단의 머리를 단번에 박살 내셨다. 그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죄와 사망과 마귀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십자가는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는 하나님의 결정직인 무기요, 방법인며, 동시에 오늘 우리들이 원수 사단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출발이다.
마귀 사단은 지금도 내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골리앗들을 일으켜서 쉼 없이 우리들에게 공격한다. 또 어떤 때는 설령 사단으로부터 연유된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문제들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낙망 가운데 빠지게 하고, 주님을 부인하도록 거짓 메시지를 속삭인다. 어떤 때는 재정(맘몬)의 골리앗으로, 또 어떤 때는 질병의 골리앗으로, 또 어떤 때는 가족이나 주변사람들과 관계에서 분열의 골리앗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엄청난 인생의 쓰나미같은 골리앗들을 앞세운다. 그래서 두려움을 주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만들고, 결국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골리앗 같은 문제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낙망하고, 좌절하고, 주저앉는 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나를 통해 이루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무산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골리앗같은 문제들을 통해서 사단이 우리들에게 노리는 진짜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수 많은 내 인생의 골리앗들과 특별히 그 배후에 있는 원수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그 첫 번째 영적인 싸움의 원리는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45절을 보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정면으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울 것을 선포했다. 다윗은 ‘내가 너의 머리를 베고야 말겠다’고 한것이 아니라, 만군이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했고,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선포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각종 형태의 골리앗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는 절대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된다. 십자가의 깃발을 군사가 영적싸움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없다. 야고보서 4장 7절 말씀에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면전(全面戰)에 나서서 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피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마귀는 더 기가 살아서 덤벼든다는 말도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사단 마귀, 귀신 나부랭이 같은 것들이나, 그것들이 골리앗같은 문제나 사람들을 앞세워서 비웃고 조롱하는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에게 동정이나 인정을 베풀 필요도 전혀없다. 또 그런 것을 베풀어 줄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존재다. 단호하게 주님의 이름로 대적해서 물리쳐야 한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내 인생의 골리앗들 특별히 그 배후에 있는 원수 사단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영적인 싸움의 원리는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 이전에 이미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그 이전보다 더욱더 성령에 확실하게 크게 사로잡힌 사람(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이 말씀에서 보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물맷돌 질을 잘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성령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셨고, 담대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게 하셨고, 돌을 던졌을 때 날아가는 그 돌의 방향을 잡아 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다하셨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의 원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우리 삶 속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골리앗 같은 문제들 앞에서 내가 용쓴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영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들은 더욱 그렇다. 용쓴다고 쓰다가 오히려 일이 더 어렵게 꼬이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수많은 삶의 문제들, 수학공식보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문제들, 점수라는 괴물 골리앗,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될 수 있는 근본적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해결이 된다. 내가 나를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마귀 사단의 온갖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오히려 더 공격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너무도 잘 알고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1절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0-11)
이 말씀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눈에 보이는 거대한 골리앗의 배후에는 어둠의 마귀 사단이 있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곧 영적싸움의 과정이다. 골리앗 같은 어려움들이 우리 앞에 있을 때, 그것을 통해서 사단이 노리는 것은 우리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장차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무산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해 대적하고, 무엇보다 내 힘으로 싸우려 하지 말고, 주님을 앞세우자. 성령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자. 우리들이 성령의 전신갑주로 뜨겁게 무장하면 할수록, 주님은 이 마지막 추수 때에 우리들을 추수하는 작은 낫의 수준을 넘어서, 이사야 41장 15절의 말씀처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만들어 주신다.
이 시간 다함께 이사야 41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고, 불같은 성령님의 강력기름부음이 이 자리와 각 심령에 임하기를 위해 기도하자.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 마지막때에 골리앗같은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고, 여혼을 추수하는 낫으로 더 나아가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쓰임받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사41:15)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삼상 17:41-54 / 노경모 목사
한국 축구 선수들이 이번에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대회에 슈틸리케 감독으로부터 쓰임을 받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좋은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자기에게나 가족에게 또한 가문에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작년에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큰 화제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이름은 빅토르 안, 바로 안현수 선수입니다. 안 선수는 본래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였는데 러시아로 귀화를 하여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관왕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올림픽에서 통산 6개의 금메달과 2개의 동메달로 쇼트트랙 황제에 오른 선수입니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안 선수가 왜 러시아로 귀화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살펴 볼 것을 권고했습니다. 알려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안 선수는 ‘쓰임 받고 싶어 러시아로 귀화한 것’입니다. 결국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서는 메달이 하나도 안 나왔는데 안 선수는 금메달을 세 개씩이나 러시아에 안겼습니다. 아마도 운동에 대한 절실함이 더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빅토르 안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디서든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쓰임 받고 싶습니까? 쓰임 받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잘 쓰임을 받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면 사실 그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 함께하는 교회, 더 나아가서 한국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사용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처럼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반면에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찾으시겠습니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덟 명의 아들 중 세 아들은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다윗’이라는 막내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에게 전쟁터에 나가있는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보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깐 너무나 이상한 일이 생긴 거예요. 이스라엘 군인들과 블레셋 군인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숨어있거나 그 사람이 두렵고 겁이나서 도망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몸이 엄청 크고 전쟁에 능한 장군이었거든요. 그러니 감히 골리앗을 대항하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어린 다윗이 보고 있는 거예요. 비록 어린 다윗이지만 열을 받았습니다. 감히 할례 받지 못한 불레셋 사람이 누구인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들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째 왕인 사울 왕의 불순종과 교만 때문에 폐하시고 그 다음 왕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세우셨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4절을 제가 한 번 읽어 볼께요.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도행전 13장 22절에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세워 졌는데,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의 어떠한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분개하여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하는 때의 나이는 17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고등학생 정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살펴보면 정말로 도전을 받습니다. 정말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밖에 없었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드디어 17세의 다윗은 거대한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싸우러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갑니다. 완전 무장한 골리앗은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세우고 칼과 창을 갖고 나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승부는 결정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다윗이 이겼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면서 다윗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을까 찾아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또 사울 왕에게도 ‘내가 곰과 사자를 쳐서 죽였듯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받지 않은 불레셋 사람 골리앗을 쳐서 죽이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완전 무장하고 칼과 창을 갖고 다가오는 골리앗을 향해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을 네가 간다.’고 외칩니다.
오늘의 본문 45절을 다 함께 읽어 볼까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군대들이 벌벌 떨면서 숨어 있는데, 17세의 소년 다윗만이 이렇게 하나님의 대한 충만한 자부심을 갖고 나아갑니다. 이 다윗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아니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을 받으셨을까? 어떻게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다윗을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습니까?
삼성 회사에 입사한 사람들은 삼성 제품을 갖고, 비가 오는 날, 추운 날, 더운 날을 막론하고 길 거리로 나가서 그 물건의 장점을 외치고 그 물건을 파는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삼성 회사에 입사한 것에 대한 자부심, 삼성 회사에 대한 자부심, 삼성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다할지라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좀 힘들다고 내가 좀 어렵다고 해서 마치 골리앗 앞에서 숨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두려워하고 겁이 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마디도 안하고, 마치 하나님을 안 믿고 사람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침묵하고 있다면 글세,,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까요? 내 꼭 써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디에서도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대한 신뢰입니다.
‘신뢰한다.’는 말은‘ 믿고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누구를 신뢰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사람을 신뢰하지 말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합니다. 사람을 신뢰한 사람은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배신감을 느낍니다. 큰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사야 2장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시편 115편 9절도,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말씀합니다.
어린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본문 46절, 47절을 읽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내 손에 넘기시어 골리앗의 목을 베게 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계심을 온 땅에 드러낼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누구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하나님은 돕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한 행동입니다.
본문 48절에서 51절을 보면 동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다윗의 행동이지요. 제가 읽어 볼께요.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이기고, 쳐죽였으나, 달려가서, 밟고, 빼내어, 죽이고, 베니. 모두 동사입니다. 다윗을 주어로 하는 동사입니다. 즉 다윗의 행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행동은 실천이요, 행함이요, 순종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행동했습니다. 알고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생각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즉시 행동합니다. 앞에 무서운 골리앗이 무기를 들고 달려 오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더 빨리 움직입니다. 48절에 보면, 다윗이 불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립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즉각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이사야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사야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자를 쓰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의 말씀이지요. 예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위대한 성경교사인 바이럼 목사님은 그의 인생에 일어났던 한 사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을 위한 사역에 나를 부르신 직후, 나는 믿음에 대해 귀중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많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세 사람에게 갑자기 고열이 났습니다. 나는 질병이 나를 사로잡은 것을 느꼈고 곧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침대에 누워 기도했습니다. 그 때는 심방을 부탁할 지도자가 없었음으로, 성경 말씀 속에 나오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인용한 말씀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이었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 안에 거하고, 당신의 말씀은 내 안에 거하기 때문에, 이 약속은 저의 것입니다. 내 온 심령으로 기도하오니, 저를 고쳐 주세요."
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는 참다못해 다시 "주님, 왜 저를 고치지 않았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치료 이미 받았다. 나의 말을 붙잡고 일어나라.' 그 순간 내 마음에 큰 확신이 들어 왔습니다. '아멘,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머리는 아파서 터질 것 같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아픔은 그대로 있었지만, 육신의 아우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영적인 주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옷을 반쯤 입었을 때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고, 옷을 다 입고 나니 훨씬 좋아졌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내 병을 다 고쳐 주신 것을 선포하고, 감사하며 다른 방으로 건너갔습니다. 20분 안에 열이 내 몸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 나는 일하러 나갔고, 그 시간 이후로 건강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에 행동이 따라 올 때, 모든 반대되는 증상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오스본은 저서 ‘성경적인 치유’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행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신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조용기목사 / 삼상 17:41~50
<서론>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고 그의 영이 죽었고 속사람이 버림을 당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은고로 그의 영이 죽었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져 하나님 사람이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점차 죄에 속박되어 마귀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하나님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 되었고, 보통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마귀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본론>
1.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모시고 살도록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데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로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블레셋 이방민족과 대결되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떱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움을 싸울 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마귀의 백성과의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인 사울왕은 똑같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인 골리앗과 대결해서 싸우자니까 인간의 감각으로 보니까 상대가 안됩니다. 골리앗이 외모로 어떠냐면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으로 약 3m 가까운 키입니다. 제가 골리앗 앞에 서면 골리앗은 나보다 두 배 반이나 큰 키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키 큰 사람하고 같이 지내는 것 상당히 괴롭습니다. 우리 친구 한 사람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다가 키다리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를 만나서 그 부인하고 같이 보면 친구가 부인하고 키스 한번 하려면 하늘을 곤두쳐다봐야 되고 위에서 병아리에게 모이 주는 어미닭같이 이렇게 내려다 봐야 되는데 우리가 놀리기를 많이 합니다.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쓰고 57kg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어깨 사이에 놋단창을 매고 베틀 채 같은 창자루를 들었는데 그 창날이 무려 1,600세겔 약, 7킬로그램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골리앗의 어마어마한 몸에 비교해서 사울은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골리앗이 사울의 눈을 가리워서 하나님은 안 보이고 사울만 봐요. 골리앗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8절로 10절에 보면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갖가지 사울과 같은 문제의 골리앗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의 골리앗이 너무 커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포기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힘에 겨운 문제가 오면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3포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이냐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취직을 못하니까 결혼도, 출산도 다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문제 앞에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로서, 33분에 1명꼴로 생명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보는 동안에도 한 사람이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다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골리앗에 밀려서 사울왕이 절절맬 때 여기에 다윗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군대에 동원된 형들에게 문안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다윗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목축이나 하지 전쟁 구경하러 왔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잘 믿는 소년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눈으로 골리앗을 보니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큰 고깃덩이리로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인 골리앗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세워 놓으니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윗이 어림도 없습니다만 실제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골리앗은 인간적인 골리앗입니다. 절대로 골리앗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인 골리앗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쟁을 하면 이미 전쟁은 끝난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6절로 47절에 보면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아예 간이 배밖에 나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먹을 가지고 싸우기 전에 말싸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말싸움에 이겨야 주먹싸움에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벌벌 떨고 있는데 17살 정도밖에 안 되는 초립동인 다윗이 나가서 아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소리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하나님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과 자기가 손에 손잡고 함께 일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하면 감각적으로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 앞에 큰소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밝히 떠서 하나님 앞에 막힌 담이 없어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 왔다갔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생활 할 때라도 절대로 사람 만든 울타리가 우리 눈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실시된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에 결혼한 가족 중의 아내의 70%가 결혼 후 남편에게 실망을 했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남편과 결혼했는가? 실망을 할 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하지 왜 그랬는가?’를 물으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 1위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아일보, 2014.9.1.) 그래서 내 생각이 우리 아내도 눈에 꽁깍찌가 끼어서 조용기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살면 큰일 아니겠는가.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겁이 나서... 콩깍지는 콩을 떨어내고 남은 껍질인데, 반투명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을 가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눈에는 골리앗이 콩깍지였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골리앗이 눈앞에 딱 서서 가리워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말싸움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3. 말의 에너지
다윗은 대단히 담대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4~37)
굉장히 긍정적이고 담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골리앗이 이 다윗의 말을 듣고 말에 응전해 나왔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삼상 17:44) 다윗이 거기에 대한 도전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이 두 사람의 입씨름에 여러분 무엇이 다릅니까? 골리앗은 자기 스스로 인간적인 힘에만 의지했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의지해서 하나님과 함께 전쟁에 나가지 인간의 힘을 의지해서 나간다고 말 안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다른 것은 여기는 그냥 사람으로서 골리앗이 오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한 사람 오는데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대결해 나가니 패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골리앗같이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항상 말씨름에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말로 나는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힘이 없다. 그러면 벌써 그 말로 말미암아 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이긴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그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못 봤죠? 여러분! 하나님을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었잖아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설교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시인하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하시고 우리가 꿈을 가지면 꿈을 통해서 같이 계시고 우리가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같이 계시고 입술로 담대히 고백하면 그 고백 속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하는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조용기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기가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용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달하는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대단한 간증을 일본 오사카에서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 30세가 조금 넘은 젊은 주의 종인데 주의 종이 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뇌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뇌 중심에 암이 자라기 때문에 수술할 도리도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날이 갈수록 몸의 기능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눈도 깜박 거릴 수 없고 씹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더구나 하루종일 누워 있어야 되는데 노래나 세상 잡다한 이야기 프로그램 같은 텔레비젼을 틀어 놓으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누님이 제가 일본에서 가졌던 부흥회 설교하는 테이프를 틀어주는데 이 테이프를 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구역질이 안 납니다. 그래서 구역질이 안 나기 때문에 제 테이프를 수백 번 듣는데 거기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서 수백 번 들었으니까 교회 나간적은 없지만 테이프를 통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나는 나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치료받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아프다는 말 안합니다. 이제는 약으로 치료할 수 없으니까 약도 소용없습니다. 그는 건강하다. 나았다. 나을지어다. 건강할지어다. 그랬는데 하루는 자기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보자. 내일이면 나의 눈이 보일 것이다. 깨끗이 나을 것이다. 잠에 들어가면서 나는 나았다. 건강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잠에서 깨니까 눈이 환하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희한하다. 그러면 내일이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아서 입술에 말할 수 있다. 말을 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자고나니까 말이 돼요. 그래서 기도하니까 수족이 다 움직이게 되고 완전하게 되어서 병원에 찾아가서 보니까 의사선생님이 이런 일은 의학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오지 마라.
그래서 너무 감동이 되어서 그 길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 간증이 너무 놀라워서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격려가 될까 싶어서 그 간증을 가지고 제 사무실에 맡겼습니다. 아마 순복음지에 간증이 나올런지도 모릅니다. 저는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인간으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 귀로써 직접 듣지도 못했지만 설교 중에서 나오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믿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듣고 읽고 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붙잡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잡힌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육신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다윗에게 말할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전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도전적인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할 때 바라는 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있는 상황을 보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 나는 못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고달프다. 나는 현재 병들었다. 현재 일어나는 것을 보고 말하면 현재 감각을 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고 말하는 것은 현재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잘될 것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나았다. 건강하다. 이것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될 것을 현재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자녀가 맘에 안 든다고 “넌 싹이 노랗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싹이 노래요. 노란 것을 보고 노랗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싹이 노란 애라도 “너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 사업가가 될 것이다.” 현재는 안 그런데 그런 것처럼 말합니다.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증거가 현재 안 그런데 그런 것처럼 입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디슨 같은 애를 보면 학교에 가서 너무나 잘못하기 때문에 선생이 가르칠 수가 없어요. 교장 선생이 그 어머니를 불러다가 이 아이는 아주 바보니까 우리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데리고 가라고 할 때 이 어머님은 “우리 애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아이큐가 높고 머리가 좋은 애입니다. 다른 애들이 다 모자르니까 우리 애가 같이 있을 수 없을 따름입니다. 좋습니다. 내가 교육하지요.” 그렇게 학교를 중퇴하고 나온 그 애를 어머니가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된다. 해 보자”고 한 결과에 오늘날 세계 에디슨과 같은 발명왕이 어디 있습니까? 위대한 사업가요, 발명가가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으니, “바라는 것들”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장차 될 것을 바라보고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차 될 것을 바라보고 명령하고 선포하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의 공격을 받아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하루만 날이 더 길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후 해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 그러자 그 순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에 있는 적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벽 주위를 돌고, 여리고 성을 향해 크게 소리치며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향해 담대하게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의 질병은 물러가라! 원수야 떠나가라! 너희 사업아 형통하라! 너희 불행아 사라져라! 행복이 다가오라! 기쁨아 나타나라!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명령을 하면 말씀이 나가서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향해 담대히 명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9절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야훼가 말하노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야훼가 말하노라.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입술을 받아서 그 말을 가지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의 열매를 창조하셔서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밭에 “말”이라는 씨를 심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을 심으면 긍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고,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가 여러분 바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잔뜩 말해놓고 난 다음에 긍정적인 열매가 맺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말을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서 매일같이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들어와서 거할 수 있는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지킬만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마음의 생각을 지키면 하나님은 그 생각 속에 들어와서 같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이 그 생각 속에서 온갖 일을 다 하시지요. 생각은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내 안 보이는 생각 속에 와서 성전삼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함께하심
그 생각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단단히 무정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생각과 같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넘치게 한다. 생각이 그릇이 되고 그 생각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넘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귀한 것입니다. 그 생각이 십자가 대속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기대하는 꿈이 있지 않습니까? 소원하는 마음의 꿈이 긍정적이어야지 실패하고 파탄에 이르는 꿈을 가지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승리하는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니까 무엇을 하나 종국적으로 이기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얻는 꿈을 꾸어야 되고 사업을 잘하는 꿈을 꾸어야 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는 꿈을 꾸어야 되고 그러면 꿈 자체를 여러분 못 보았지요? 안 보이는 하나님께서는 안 보이는 우리의 꿈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꿈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마음에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믿음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안 보이는 믿음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재 있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현재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내가 바라는 장차 그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때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이 만물을 지었다고 우리가 말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사카에 있는 그 젊은 목사처럼 암으로 죽어가고 치료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건강을 얻었다. 나는 튼튼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매일 고함을 치고 말하고 잠자리에 들어가고 여섯 달 동안 그렇게 계속하니까 몸에 암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믿음이란 현재 보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주님의 말씀은 눈에도 안 보이지요.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명령입니다. 창조적인 명령을 하는 것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말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안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수용 못합니다. 생각은 눈에 안 보이는데 안 보이는 하나님이 생각을 성전삼고 꿈은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고 믿음은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고 창조적인 말도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이 우리 인간 속에도 눈에 안 보이는 무한한 성격의 존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보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좋은 성전이지요. 꿈도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보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성전입니다. 믿음도 안 보이니까 좋은 성전이고 창조적인 말도 안 보이니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성전삼고 와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품고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품에 품고 기도를 하고 꿈을 품고 기도를 하고 믿음을 품고 기도해야 되고 창조적인 말씀을 품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가 하나님의 손을 위대하게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부르짖어 기도만하지 말고 우리는 명령할 담대하게 시인하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이 산보고 바다로 던지라고 말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시인을 하고 이루어지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는 것에 말씀으로 언제나 결과를 지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무덤에 들어가 죽은지 나흘 만에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상여에 실려나가는 청년에게 관뚜껑을 열고서 말하니 그 말이 나가서 이 청년이 살아 일어난 것입니다. 네가 이 말을 했으니 네 딸이 고침을 받았느니라. 나았습니다. 바디매오에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바람아 잠잠 하라. 파도야 잠잠 하라. 그러면 그 말이 나가자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것 최성규 목사 아닌가? 최성규 목사가 어떻게 여기 와있노? 아주 내 훌륭한 제자입니다. 아주 굉장한 사람이에요.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내가 조그마한 창고 같은 집을 빌려서 그를 데리고 갔는데 마음에 괴로워요. 가보니까 물이 지하실에 꽉 들어차 있어요. 여기서 시작해라. 그런데 거기에서 두말하지 않고 변명하지 아니하고 예! 하고 시작해서 오늘날에 경인지역에 제일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저런 제자를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론>
다윗은 아직 성숙한 군인이 되지 않은 17살쯤 되는 초립동이지만 하나님이 같이 한 4차원적 삶을 가진 승리자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젊은 목동이었지만 그의 생각 속에 꿈속에 믿음 속에 고백 속에 하나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고깃덩어리 사람인 골리앗을 말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골리앗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많이 다가올 때 말싸움에서 이겨야 돼요. 여러분 말싸움에서 지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싸움에서 벌써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약속으로 나는 이겼다. 승리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말싸움에서 이기고 나가면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싸움에서 진 환경은 변화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체험을 많이 해야 돼요. 자기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 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사자와 곰을 이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싸워야 할 적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다윗의 눈에 골리앗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경험해 보면, 그 다음 싸움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는데, 그의 성경에는 “T.P.”라는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T"는 뭐냐면 “Tried.” “P”는 “Proved” Tried는 시험해 보았다. “Proved.”는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내가 시험해 보고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져서 증명되었다. “T.P.” “T.P.” “T.P.” 자기가 시험해 보고 증명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담대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험해 보고 증명되면 그만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고 시험에 승리하면 그만큼 여러분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응답을 체험하면 할수록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커질수록 더욱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현재 것을 보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 여러분 현재의 어려운 고난과 괴로움을 보고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이라고 인정하지 마십시오. 현재 나는 패배하고 있다. 슬프다. 괴롭다. 불행하다. 안 된다. 나는 이런 생활을 살아서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바라보는 것을 현재처럼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나는 소망차다. 나는 이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불신앙은 현재 있는 것을 운명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 속에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년 동안 기도해도 마음에 꿈이 없이 기도하니까 응답 못 받았잖습니까? 그러나 밤중에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고 난 다음 자기 자식을 꿈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니까 믿음이 생겨나고 하나님이 이삭을 아들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꿈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담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고 발전합니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아멘.
다윗처럼 원수를 향해 포효하라!
이삼규목사(낙양교회) / 삼상 17:41-49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왜 옛 뱀(사탄)은 손을 탁 털고 그들을 깨끗이 포기하지 않을까요? 사탄은 사람들은 멸망시키려고 혈안이 된 사악하고 음험한 원수입니다. 하지만 그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주님의 장중(掌中)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멸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차선책으로 그들의 영혼을 결박 상태로 꽁꽁 묶어두는 것을 자기 일로 삼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속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한 자신들의 정당한 영적 권리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 주님은 그를 꽁꽁 묵은 천을 풀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수의(壽衣)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이런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과거에 영혼이 죽어 있을 때보다 영적으로 별로 나아지지 않다는 것을 사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기 때문에 그들은 겁먹은 양떼처럼 행동합니다. 겁먹은 그들은 심지어 “아멘!”이라는 말조차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겁을 주고 그들을 침묵에 빠뜨리고 압제하는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싸움을 돋우는 자-두려움을 불어넣다
오늘 봉독해드린 본문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군대도 엘라 골짜기에서 이런 두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이끄는 장수가 누구였습니까? 골리앗이었습니다. 그는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250cm 정도 됩니다. 이런 거인이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같은 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었으며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600세겔이며 그 앞에 방패를 든 자가 앞서 행하였습니다.
그는 싸움을 돋우는 자였습니다. 그가 서서 외쳤습니다(삼상 17:8-11)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나타났는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뭐라고 외쳤습니까?
삼상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다윗은 날마다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거인 골리앗에게 완전히 기가 죽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던진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능력의 근원이신 분을 알았기 때문에 확신과 평안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어린 소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그때 다윗이 뭐라고 소리쳤습니까?(삼상 17:45-47)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삼상 17: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다윗은 믿음으로써 역사상 가장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으로서, 우리의 대표자와 중보자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우리는 마땅히 가장 용감하고 가장 관대하고 가장 행복하고 하나님의 평안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큰 용(龍)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적한다. 너희가 어쩌겠느냐?”
사탄의 전략
첫 번째 전략 : 죄의식의 새장 속에 가둬라!
우리는 마땅히 해방되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와 태도와 의심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우리를 불행하고 패배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에 감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과거에 여러분이 지었던 죄 때문에 두려우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죄가 끔찍한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사탄 역시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따라다니며(우리가 허용한다면)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를 들춰내며 우리를 조롱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새장 안에 가두고 그들의 날개를 잘라서 날지 못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온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도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그들의 수의(壽衣)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이하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불어 넣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가 죄를 전혀 짓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시며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 대한 어떤 심중유보(진술이나 선서에서 중대한 관련 사항을 숨긴다는 법률용어)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용서 하실 때 그분은 “이 사람은 과거에 죄를 지은 적이 있으니 앞으로도 내가 쭉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분은 마치 우리가 방금 창조되어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진리의 기초 위에서 확신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사탄의 전략에 속지 마십시오. 사탄은 우리를 죄의식의 새장 속에 가둬놓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전략 : 실패에 대한 기억을 증폭시켜라!
사탄이 여러분의 영적 실패에 대한 기억을 증폭시키도록 내버려두십니까? 여러분이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 믿음으로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계속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너는 더 깊은 영적 생활을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느냐?”
“너는 성령 충만을 받겠다고 그토록 큰 소리쳤지만 벌렁 나자빠져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느냐?”
그는 아마도 여러분이 여러 번 신앙생활에서 실패한 것을 문제 삼으며 조롱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과거를 후회하고 원통해하면서 낙심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사람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넘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당신이 용서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존 웨슬리를 도와 함께 사역했던 존 윌리엄 플레처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천사 같은 플레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일곱 번 넘어져서 하나님을 크게 실망시켜드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 실패한 후, 그는 자기 방으로 가서 문제를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을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저는 죄의 속박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주님이 저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다면 저는 주님을 위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 플레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그분의 변화된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8:8-11 /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그분이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이름을 위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세 번째 전략 :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 써라!
어떤 사람들은 건전하고 신중하고 전통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평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담대히 일어나 주님을 증거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호감을 주는 점잖은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엄한 기독교 신자라는 평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그들의 근엄함을 깨뜨리시지 않는 한 그들은 영적 진보와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복음전도자 찰스 피니(19세기 초 미국의 부흥운동을 이끈 중심인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대언자로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면서 그의 열정적인 사역을 가로막으려고 애썼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그분을 찬양한 성도들은 찰스 피니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을 위해 헌신할 때 전통적인 의미에서 경건하고 근엄하고 독선적이고 신중한 사람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십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듣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광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기는 믿되 미치지는 말아라.’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광신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술전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거룩한 열정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거룩한 열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매우 적극적이지만, 유독 거룩한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절제를 잘합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 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 펄펄 뛰며 경기 내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체험하여 소리를 지르다가 목이 쉬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우리 시대에는 많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양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냉랭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속에서 열정이 사라졌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수의에 감싸여 있고, 우리의 심령은 메말랐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찬양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감사와 부활의 기쁨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한 승리 같은 내적 생명 없이 그저 힘없이 찬송을 따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찬양과 열정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간의 수고와 땀과 눈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는 주님의 땀과 눈물과 피를 통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고통스러운 죽음과 승리의 부활과 승천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복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겸손히 감수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의 뜻에 따라 우리를 괴롭힐 때에는 과감히 그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록 어린 소년이었지만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향하여 포효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결박하려는 사탄을 향하여 포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 골리앗과 싸우다
이윤재목사 / 삼상 17:41-50
10월 첫주입니다. 하늘이 열린 계절 10월에 하늘이 열리고 축복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화 “십계”를 보신 분은 홍해바다가 갈라진 장면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좇아오는 데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합니다(1. 영상). 이때 박수안친 사람은 없습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 다 박수칩니다. 분명 성경 최고의 장면입니다. 성경에 많은 감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이 장면도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 싸움은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골리앗이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싸움입니다.
하도 유명하니까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1607년,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그림입니다(2. 그림).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잘라 들고 있습니다. 승리한 다윗이 자신감이 넘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어깨에는 목동의 자루를 있습니다. 1509년에 그린 미켈란젤로의 그림입니다(3. 그림). 다윗이 골리앗을 누르고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치고 있습니다.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은 골리앗의 칼입니다. 바티칸 성당 천정에 있는 벽화입니다. 이 모든 그림들은 골리앗을 이긴 영웅 다윗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쓰러뜨린 골리앗은 누구입니까?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블레셋 족속이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블레셋 족속이 아니라 용병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상17: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싸움을 돋우는 사람이 왔는 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성경은 골리앗의 고향이 “가드”라고 했는 데 이 가드는 과거 출애굽 시대에 아낙 자손들이 살던 가나안입니다. 민13장에서 12정탐꾼이 이곳을 정탐하고 보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민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들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같으니”. 그러니까 12정탐꾼들이 이곳에 와서 거인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골리앗도 아마 아낙 자손의 후손으로 거인인데 불레셋 사람이 이곳에 와서 전쟁을 위해 채용한 용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블레셋 사람이든 용병이든 중요한 것은 그가 블레셋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명운을 갈랐던 세기적 전쟁의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골리앗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골리앗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골리앗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보겠습니다. 삼상17:4을 다시 봅니다.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여기에 골리앗의 키가 나옵니다. 여섯 큐빗 한 뼘입니다. 옛날 도량형으로 한 큐빗은 보통 남자의 손가락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입니다. 보통 45.5센티를 잡습니다. 그러면 2미터 90센티 가까이 됩니다. 이 정도 컷으면 아마 프로 농구 스카우트 제일 순위가 될 것입니다. 키만 큰 것이 아닙니다. 5-7절을 보면 삼상17:5-7,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골리앗은온 몸을 갑옷으로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청동으로 된 갑옷을 입어 어깨에서 무릎까지 덮어 어떤 화살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완전 무장했습니다. 그 갑옷만도 5천 세겔, 요즘으로 하면 80에서 90kg되는 무게였습니다. 또 투구는 청동 투구, 정강이는 청동 각반, 어깨에는 청동으로 만든 창을 메고 있었습니다. 그 창무게만도 6백 세겔, 9kg에서 11kg 정도 나가는 무게였습니다.
그 엄청난 거인이 여러분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한번 싸워볼만 하겠습니까? 키는 2미터 90, 갑옷만 90킬로, 몸무게까지 합치면 한 300킬로 거구가 11킬로 창을 번뜩거리며 소리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야, 이 놈들아, 나와라. 나와 싸우자. 싸울 놈이 하나도 없느냐? 이 병신 머저리같은 놈들” 하면서 소리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나마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삼상17:16입니다. “그 불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무려 40일간이나 소리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삼상17:24,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고 도망가기 바빳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 용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울의 아들로 부하 한 명만 데리고 블레셋으로 들어가 이십 명의 블레셋사람들을 죽인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용감한 장수 아브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골리앗 앞에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오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네 놈들을 내가 박살을 내겠다. 빨리 나와 내 창을 받아라. 이 놈들”. 소리지르는 데 아무도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싸우기도 전에 골리앗의 기세에 눌렸습니다. 골리앗이 주는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며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일까요? 예일대 역사학 교수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이 쓴 "On the Origin of War", “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 세 가지 동기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빵입니다. 사람들이 전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 정치적 이익 때문입니다. 빵 때문에 빵 하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명예입니다. 자존심입니다. 2차대전 때, 독일 사람들의 전쟁의 동기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이었습니다. 한때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그들은 앵글로 색슨족이 세계제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세 번째가 두려움입니다. 전쟁은 심리적으로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힘이 넉넉하면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이 그런 상황입니다. 미국이 두렵고 무서우니까 핵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쪽에서는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북한쪽에서 전쟁을 겁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두려움때문에 일어나고 전쟁하면 또 두렵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본질입니다.
지금 290센티에 200킬로의 거구가 100킬로 갑옷을 입고 소리칩니다. “누구 나와봐. 이스라엘은 사람도 없냐? 그러고도 하나님 믿는다고?” 하고 골리앗이 소리칩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버지 심부름때문에 왔습니다. 그러다 골리앗의 소리를 들었는 데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의 첫 반응이 이것이었습니다. “뭐, 하나님이 어떻다고?”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나가겠다고 했는 데 두 사람이 말립니다. 하나는 큰 형 엘리압입니다. 그가 다윗을 보자 소리칩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삼상17:28, “여기서 무엇하는 것이냐? 양떼는 어떻게 하고? 네 일이나 신경써. 빨리 꺼지지 못해?”. 엘리압은 다윗을 무시했습니다. 항상 막내이기 때문에 어리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압은 다윗속에 감추인 믿음의 능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네까지게 뭣을 해?” 하고 무시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보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삼상17:32-33, 역시 헌대역입니다. “너는 저 불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다. 너는 어무 어리고 경험이 없어. 저 불레셋 사람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싸움판에서 잔뼈가 굵은 자야. 그 자를 네가 어떻게 이긴다고? 집으로 돌아가”. 사울도 다윗을 얏잡아 보았습니다. 마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골리앗과 싸운다고? 너는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냐. 저 거인을 봐라. 너하고 게임이 되겠니?”.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번도 하나님 이야기를 안합니다. 이들에게 없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다가 가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삼상17:44-45,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다. 내가 네 머리를 베어 까마귀와 늑대의 밥으로 주겠다”.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윗도 왜 인간인데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습니다. 두러움의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움의 대상보다는 두려움 자체에 집중하게 해서 두려움 때문에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상극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렵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 생기고 두려움 생기면 믿음도 사라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유달리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한 구절씩 믿음으로 크게 읽겠습니다. 시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112: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112: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시46: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마지막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전쟁은 두려움 때문에 생기고 전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여호아께서 내 편이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 믿음을 갖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다윗이 골리앗앞에 섰을 때 가졌던 믿음의 근원에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함께 하면 어떤 싸움도 이긴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윗에게는 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삼상17:50입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왜 성경이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강조할까요? 맨손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무기로 싸운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처럼 갑옷입고 싸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것은 믿음의 물맷돌 몇 개였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던 현장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중간지역입니다.(4. 지도). 지도를 볼까요?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이기 때문에 산악지대에 살았습니다. 헤브론, 베들레헴, 예루살렘이 모두 유다 산악지역입니다. 그런데 불레셋은 해양민족이라 바닷가에 삽니다. 두 민족이 가나안 땅을 놓고 대결하면 어쩔 수 없이 중간지점에서 만납니다. 이곳을 “쉐펠라”라고 부르고 성경은 “평지”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로 이곳이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 골짜기”입니다(5. 사진). 넓고 평온하게 보이는 엘라 골짜기에서 운명을 건 두 민족간의 세기적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곳에 가면 시내가 있고 지금도 물맷돌이 있습니다(6. 사진). 이 돌이 그중 하나입니다(7.사진). 그리고 지금도 목동들이 들고 다니는 제구와 물맷돌입니다(8. 사진).
그런데 이 물맷돌을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다윗이 싸웠던 시내에서 물맷돌을 주우며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이곳에서 물맷돌을 주우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는 어리고 무기도 없고 나라는 풍전등화처럼 위기입니다. 자기라도 골리앗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물맷돌을 주우며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나를 살려주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물맷돌 다섯 개를 주었습니다. 그가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의 작전이 재미있습니다. 일대일 싸움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대표가 한 명 나와 자기와 싸워 결판을 내자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삼상17: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이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더 두렵게 했습니다. 아니 몽땅 달라붙어서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누가 일대일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그래서 백성들은 더 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전쟁에 이긴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어떤 싸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싸움은 다 이겼습니다. 도단성에서 아람과 싸웠던 엘리사의 싸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습니다. 애굽에서 바로와 싸웠던 모세의 싸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이겼습니다. 가나안에서 가나안 족속과 싸웠던 여호수아의 싸움, 하나님이 태양을 머물게 하고 달을 멈추게 해서 이겼습니다. 가장 큰 싸움이 예수님의 십자가 싸움이었습니다. 다윗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싸움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다윗 예수님
출신 유다지파, 베들레헴 유다지파, 베들레헴
가문 목동, 막내 말구유, 목수
기름부음 하나님의 영 성령
사람들 엘리압, 사울의 반대 사람들의 비난, 희롱
대상 골리앗 마귀
장소 엘라골짜기 십자가
결과 승리 승리
구원 이스라엘 인류
다윗의 싸움은 예수님의 싸움과 비교됩니다. 다윗과 예수님 다 유디지파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윗은 자라면서 막내로 목동으로 고생하며 자랐고 예수님도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로 사셨습니다. 다윗도 사울, 엘리압등의 반대를 받았고 예수님도 수많은 핍박과 멸시, 비방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엘라골짜기에서 골리앗과 싸웠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와 싸웠습니다. 둘 다 다 승리했습니다. 다윗은 승리해 이스라엘을 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여 온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하니님은 전쟁용사입니다. 그를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다윗은 삼하22:30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예수님은 요19:30에서 말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실제 이스라엘에 믿음으로 승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6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인구가 250만이었고 아랍은 1억이 넘었습니다. 누가 봐도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날이 토요일, 안식일인데 네 나라가 동시에 쳐들어왔습니다. 안식일에 대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그날 저녁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모세 다얀을 통해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2534년 만에 되찾은 조국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최 단기간 내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 장병이 최강의 무기로 무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최첨단 핵무기를 개발했나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군인들을 전쟁터로 내 보낸 국방장관은 방송국에서 이렇게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이제 그 최강의 무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6일만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최강의 무기는 믿음, 최정예부대는 하나님의 말씀, 최고사령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전쟁은 여호아께 속했습니다. 어떤 싸움이든 하나님과 함께 하면 이깁니다. 우리는 어떤 싸움이든 예수님이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언제나 이깁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다윗고 골리앗의 싸움은 다만 옛날에 한 거인을 상대로 다윗이 이겼다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싸움을 성경은 “영적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싸움이라는 마귀와 싸움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귀의 존재를 믿습니까? 간첩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동네에 간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옥에 있는 마귀 대장이 땅에 있는 자기 조카 마귀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책에서 마귀 대장은 지기 조카에게 두 가지 작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라고 합니다. 하나는 자기가 없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명 세상에 무슨 마귀가 있느냐고 공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마귀를 이야기하면 무식한 사람처럼 매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귀에 대하여 너무 많은 관심을 갖게 해서 마귀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마귀 이야기하면 무식한 사람이 되고 또 한쪽은 마귀 문화가 일상화되어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수많은 마귀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약성경은 30번이 넘도록 마귀를 “원수”로 언급합니다. 벧전5:8은 마귀를 우리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나니”. 히브리서는 마귀를 “비방자”, 또는 “고발자”라고 합니다. 마테복음은 마귀를 “시험하는 자”, 요한계시록은 “파괴자”, “용”, “옛뱀”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살인자”, “거짓말쟁이”, “이 세상 임금”으로 불렀습니다. 어떻게 부르든 성경은 마귀가 디섯 가지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분열을 일삼습니다. “마귀”를 뜻하는 헬라어 “디아불러스“는 ”나누는 자“, ”분열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단어로 division입니다. 이 말은 di, 둘, vision, 비전이 둘입니다. 그러니까 나누이는 것입니다. 나와 저, 아군과 적군, 우리 편, 남의 편, 마귀가 역사하는 곳은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그렇게 좋았던 사람들을 이간질해서 갈라놓습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고 마귀는 분열시킵니다.
마귀는 죽이는 일을 합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요“. 마귀가 역사하는 곳은 언제나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함하고 비방하고 정죄해서 죽입니다. 마치 암세포처럼 자기 죽는지 모르고 움직이다 자기가 죽어야 끝납니다. 마귀는 의심하게 합니다. 전형적인 사건이 하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하와에게 다가가 ”정말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하고 묻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Did God really say?”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하더냐?”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그게 정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고 사람들을 의심케 하고 서로 서로 불신하게 합니다. 네 번째는 유혹입니다. 유혹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가 미혹입니다. 미혹은 신앙적으로 탈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이래서 생깁니다. 미혹의 영이 들어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귀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행복하던 가정이 어느날 갑자기 싸우고 갈라섭니다. 왜 그렇게 사이좋던 부부가 갈라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기 전에 혹시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 마귀의 시험에 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래전에 제가 집사람하고 무슨 일로 다퉜습니다. 그 날 저녁 잠을 자는 데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시골 집에 있는 데 집사람이 들어옵니다. 보니까 치마가 낡아 헤었습니다. 순간 마귀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여보, 미안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나봐. 네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때부터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평화롭던 교회가 어지러워지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혹시 우리 교회를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섬겼던 서울의 모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정신이상자가 지하철에서 속에서 자꾸 누가 “여기서 내리라” 하더랍니다. 내렸더니 “저 교회로 들어가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들어갔는 데 마침 유치원 어린이들이 점심먹고 있었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라”해서 들어가서 칼로 어린이들을 찔렀습니다. 어린이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확실히 마귀는 존재합니다. 엡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엡6:14-17에서 바울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성도의 일곱가지 무기를 소개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진리의 말씀이 이깁니다. “의의 호심경”, 나는 용서받았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평안의 복음”, 복음은 평안입니다. 십자가에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믿음의 방패”, 믿음으로 방어합니다. “구원의 투구”, 나는 구원받았다. 구원의 확신이 이깁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공격용 무기입니다. 그리고 “기도”, 성령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을 위해 특히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는 목회자만 공격하면 넘어집니다. 마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를 넘어 뜨릴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설교가 챨스 스펄전이 말했습니다. “모든 성도는 스파르타 군대처럼 용사로 태어났다. 마귀에게 공격받는 것이 성도의 운명이라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긴다. 마귀는 반드시 진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친 명백한 진리이다”. 그렇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은 옛날 이스라넬에서 일어난 영웅적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께는 복종하십시오, 마귀는 대적하십시오. 누구나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다윗처럼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가?
조명식 목사 / 삼상 17장 41-49절 /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358장)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10월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면 가장 많이 들었던 성경 이야기 중의 하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오늘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언더독의 비유로 자주 사용합니다. 언더독의 비유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이겼을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저는 작은 소년 다윗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이언트 골리앗에게 승리한 것을 언더독의 비유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을 언더독으로 만들면 그 안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언더독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이언트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겼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골리앗은 다윗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요?
첫째로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42절).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42절). 당시에 붉고 용모가 아름답다는 의미는 나이가 어린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이언트 골리앗은 나이 어린 다윗이 갑옷도 입지 않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업신여겼다는 의미는 전쟁하면서 방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솝 우화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처럼 우리도 모든 일에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큰 일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골리앗은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43절). 골리앗이 ‘그의 신들’이라는 고백에 여러 신들을 믿는 다신론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의 유일신 하나님과 골리앗의 다신론 우상이 전쟁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블레셋 사람처럼 우상을 섬기는 신앙은 자신이 신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들을 조종하여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유일신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주여’라고 부르지만 골리앗처럼 자신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조종하여 움직이려는 신앙들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가고 있나요?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합니다(45절). 여기서 다윗은 세상의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대의 무기보다도 전적으로 만군의 하나님 이름을 의지하여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직 만군의 하나님 이름을 의지한 다윗이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군의 하나님 이름보다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더 의지하면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교회가 어떤 것을 소유했느냐보다 만군의 하나님 이름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만군의 하나님 이름과 자신이 소유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소유한 것보다 오직 만군의 하나님 이름을 더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46절). 다윗은 전쟁에서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온 땅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진심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웅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땅에 알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저도 목회가 성공하여 내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과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온 땅에 알려지기를 원하는 영적 싸움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신이 알려지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알려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더 알려지기를 원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합니다(47절). 전쟁이 내게 속했으면 자신이 해결해야 하지만 하나님께 속했으면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회의 문제들이 내게 속했다고 생각했다면 지쳐서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모든 문제가 주님께 속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금년에도 집중호우로 교회에 물이 새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의 주인되는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코로나의 어려운 시기에도 주님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문제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음으로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3.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님의 자녀들은 패배주의를 이겨내야 합니다. 고대의 전쟁은 세 가지 영역으로 싸웠습니다. 하나는 국가와 국가의 싸움이었고, 둘은 국가대표들이 나와 싸웠고, 셋은 후방에서 지원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은 둘째의 국가를 대표하는 싸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은 골리앗이 국가대표로 나왔지만, 이스라엘은 국가대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10절). 블레셋의 국가대표 골리앗이 40일 동안 하나님을 조롱하는데 이스라엘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 백성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지는 패배주의를 고발합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패배주의를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45절).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함으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자녀들은 삶의 현장에서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고 수없이 들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세상의 골리앗에게 짓밟히는 다윗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세상의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46절). 우리가 교회에서만 앵무새처럼 말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세상의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이 일치해야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주님을 체험했다는 신앙고백으로 멈추면 세상의 전쟁터에서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세상의 싸움터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이 일치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자녀들은 ‘하카톤’이 되어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때는 막내 아들의 하카톤이었습니다(16:11). 하카톤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하카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가진 것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카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하카톤은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는 흙수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세상에서 하카톤의 흙수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부가 되었던 것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의 가진 것이 자꾸 생겨나서 하카톤의 믿음을 잃어버릴까봐 두렵습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하카톤이 되어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믿음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 골리앗이 다윗에게 패배한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요?(42,43절)
2.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했던 세 가지 믿음은 무엇인가요?(45,46,47절)
3. 다윗이 이스라엘의 패배주의를 어떤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었나요?(10절)
4.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질 때 하카톤의 믿음이 될 수 있는가요?(16:11)
□ 말씀 적용하기 (서로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의지하기 위해 내가 소유한 무엇을 버려야 하나요?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섬겨야 하나요?
3.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내가 이겨내야 하는 패배주의는 무엇이 있나요?
4. 우리가 삶의 현상에서 주님의 신앙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나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
삼상 17장 41~54절 / 주달영목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위험과 고통이 따르는 광야 같고 무서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와 같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 어떤 위기를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를 만나 좌절하고 어떤 사람은 위기를 통해 도약하며 성공의 길로 갑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위기를 만났지만 그것을 기회로 삼아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간중할 때 눈물도 흘리며 감동을 받고 힘과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생각지 않는 위기를 만나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지만 더 큰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청소년기에는 공부하는 기회를 주어 미래를 준비하게 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날 기회를 주시고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날 기회를 주어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을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무엇보다도 죄로 인한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열심히 예배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하게 하시고 헌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시간과 기회임을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음으로 놓쳐버립니다.
준비하지 않고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오히려 위기를 맞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주저앉지 말고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다음 기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회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또한 기회는 우리를 무작정 기다려 주거나 무한정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회는 반드시 때가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왔을 때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이 기회인지를 알지 못하고 놓쳐버리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은 위기 때문에 더 준비하여 기회를 붙잡은 사람입니다.
2. 본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 할 때에 블레셋 군사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은 강력한 무기로 무장을 했고 군인도 훨씬 많았는데 그 중에 키가 2m 90cm가 넘는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날마다 갑옷을 입고 큰 창을 들고 나와서 우뢰 같은 소리로 이스라엘을 조롱했는데
이스라엘은 무기도 없었고 군대 수도 적었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40일 동안이나 조롱을 받았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 이처럼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기업들도 위기가 오면 투자를 줄이지만 어떤 회사는 더 투자하여 기술을 축적 합니다.
가정도 여러 가지 위기가 있지만 그 때마다 믿는 사람들은 회개하며 하나님을 더 찾습니다.
국가도 위기가 옵니다. 많은 나라들이 전쟁과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육이오 전쟁과 외환위기를 만났지만 잘 극복하여 잘살게 되었습니다.
4. 특히 나라간의 전쟁은 그 나라 백성들의 생사와 안위가 걸려 있습니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남자들은 죽거나 남은 사람들은 종이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이기 때에 절대로 전쟁에서 질 수가 없음에도 지금 이스라엘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워야 할 장수들과 군인들은 잔뜩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 했습니다.
(11절)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24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32절)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이런 모습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위기를 만났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를 피해 도망가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대처해야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강하고 마귀가 강해도 믿음의 방패를 사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위기는 고통과 어려움도 주지만 좋은 기회도 주기 때문에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누구든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큰 상을 약속 했습니다.
(25절)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이스라엘 병사들은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왔습니다.
신분 상승과 함께 가문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어느 누구도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기회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일지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회는 항상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6. 이 기회를 누가 붙잡았습니까? .... 심부름으로 전쟁터를 방문한 다윗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다윗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왔다가 우연히 기회를 얻은 것 같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섭리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다윗을 준비시켜 은혜와 믿음을 주시고 훈련시켰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 미리 준비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준비하도록 감동을 주실 때 성실하게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명지휘자인 토스카니니(1869∼1957)는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악보를 잘 보지 못함으로 악보 전체를 미리 외워서 연습하고 연주회에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연주회 직전에 지휘자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서 곡 전체를 암기하고 있던 사람은 토스카니니 한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휘자를 대신하여 지휘를 하게 되었고 청중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19세였는데 이를 계기로 해서 그는 세계적인 명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준비가 된 사람만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7. 다윗은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다윗은 나이가 어렸지만 아버지께서 양을 맡기자 그 양들을 잘 키웠습니다.
양을 치면서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만났지만 위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다윗에게 있어 양을 치는 광야는 삶의 터전이요, 직장이요, 기도 처소요, 신앙의 훈련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윗을 만나 주셨고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 했습니다.
(34-37절)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8. 다윗은 사울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나이가 어린 다윗은 기죽지 않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 골리앗을 향해 외쳤습니다.
(45-47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외침에는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준비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졌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물맷돌을 던졌더니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그래서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베었더니 블레셋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갔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힘을 얻어 그들을 쫓아가 죽였습니다.
9. 그래서 이스라엘은 승리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는데 무엇을 보여주실까요?
사단을 보여주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해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 싸워서 지는 자가 종이 되자고 했는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나가 물맷돌로 골리앗의 머리를 깨뜨렸습니다.
이것이 대표와 연합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산 돌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취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보여주시며 그와 연합된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승리를 힘입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되고 훈련된 다윗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고 이 일을 통해 누가 진짜 이스라엘 왕이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인가를 알리셨습니다.
이일로 인해 다윗은 왕족이 되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여 연단을 받은 후에는 이스라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 위기 속애 있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준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주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능력과 은사가 개발되도록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은사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준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위기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위기라고 생각될 때는 두려워 말고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입니다. 준비된 자는 어떤 위기를 만나더라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준비하는 자세로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유은호목사 / 삼상 17:41-49
기원후 8년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년-AD 17년)는 『변신이야기』 라는 서사시를 썼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트로이아를 공격하다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비디우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신은 무쇠로 트로이아인들의 몸을 땅에 뉘고 있던 팔레우스의 아들을 가리키며 그를 향해 활을 돌리더니 죽음을 가져다주는 손으로 화살을 확실하게 인도했다. 헥토르가 죽은 뒤 노왕 프리아모스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아킬레우스여, 그토록 위대한 자들을 이겼던 그대가 그라이키아인 아내를 비겁하게 납치한 자에게 지고 말았구나!”(오비디우스/ 천병희 옮김, 『변신 이야기』 (경기도: 도서출판 숲, 2017(제2판), 536.).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인들을 추격하다가 스카이아이 문 앞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아폴론이 쏜 화살에 복사뼈를 맞고 죽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발목을 잡고 저승을 흐르는 스튁스 강물에 담갔는데 발목 부분은 물이 묻지 않아 부상 당하면 죽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아폴로도로스/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서울: 숲출판사, 2004), 332, 특히 각주 141).
자기의 힘만을 자랑하던 교만한 아킬레우스는 뜻밖의 화살에 자기의 가장 약한 약점인 복사뼈에 맞고 죽었습니다. 아마도 오비디우스는 자기의 힘만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의 최후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젠가는 그 교만 때문에 인생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교만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겸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히, 외적으로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할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1-42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 말씀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가까이 왔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대표 다윗과 블레셋의 대표 골리앗이 일대일로 싸워서 이기는 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른입니다. 골리앗은 블레셋 군대에서 가장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입니다. 골리앗의 키는 2미터가 넘는 거인입니다. 여기에 골리앗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하고 손에는 칼과 창과 단창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무장도 하지 않고 막대기 하나와 몇 개의 돌과 물매를 가지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골리앗과 싸우러 나왔습니다.
우리 친구 목사들 사이에서 호칭 문제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친구 목사 가운데 큰 교회 목회를 하는 친구가 어느날부터 친구들을 부를 때 ‘자네’ ‘자네’ 라는 말을 자주쓰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불편했는지 어느 친구가 그런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 쓰는 호칭이 아니라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아니냐고 했습니다. 혹시 그 말을 쓴 사람의 문화에서는 그렇게 써도 된다고 생각했을 지 몰라도 거기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불편하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친구의 마음에 약간의 교만한 마음이 생겨 자기도 모르게 그런 호칭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3-44절을 읽겠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면서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고 하고, 자기 신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다윗에게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면서 저주하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골리앗이 교만하기 때문에 다윗에게 저주하고 무시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교만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을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추기경 카제탄은 루터를 불러 면담을 했습니다. 카제탄 추기경은 루터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첫째 너의 잘못에 대해 철회하라. 둘째 그것들을 결코 다시는 가르치지 말 것을 약속하라. 셋째, 교회의 평화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동을 삼가라. 교황은 공의회 위에 있으며, 또한 성경 위에 있다라며 철회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어떤 교서도 성경에 모순된다면 권위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W. 뢰베니히/ 박호용 옮김, 『마르틴 루터: 그 인간과 그의 업적』 (서울: 성지출판사, 192-197, 특히 192.).
결국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파면과 협박과 위협에도 철회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비록 다윗과 같이 연약한 한 사람이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골리앗과 같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가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교만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국 망하고 성경의 진리를 따르는 자기가 승리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칼과 창을 앞세워 나온 골리앗의 교만을 보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 있다고 믿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가 싸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로 인해 세상은 교만하고 악한 영도 교만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교만한 자들을 모두 이길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 세상의 교만한 자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 모든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00여년이 지났을 때 프랑스에서는 칼빈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은 개신교인들을 위그노라고 했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위그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 위그노 가운데 마리 뒤랑(Marie Durant, 1711-1776)이라는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 성도는 19살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잡혀서 무려 57살이 되도록 38년 동안 콩스탕스 탑에 감금되었습니다. 콩스탕스 탑에는 실날같은 구멍으로 겨우 빛이 들어오는 캄캄한 감옥에서 쇠로 된 착고에 채워진채 38년을 지냈습니다. 뒤랑은 개신교를 버리고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 받았습니다. 만약 개종을 하면 감옥에서 풀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랑은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뒤랑은 38년 동안 콩스탕스 탑 감옥에 있으면서 바닥에 한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그 글자는 ‘저항하라’라는 글짜였습니다.
[기쁜소식교회]종교개혁사 특강 '걸어서 역사 속으로' 5주차_"위그노의 저항과 개혁정신"/누가복음 12:32/박경수 교수님/2024.12.01. 38분-43분 사이.)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 뒤랑을 개종시키지 못하고 풀어주었습니다. 마리 뒤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연약한 여자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과 같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워 승리한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15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교만한 골리앗을 물리쳐주시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 49절을 읽겠습니다. 골리앗이 투구와 칼과 창과 단창으로 완전무장을 했지만 한 군데 무장을 하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얼굴입니다.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가릴 수 있었지만 얼굴만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마가 교만한 골리앗의 약점이었습니다.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던졌습니다. 다윗이 양때를 돌보면서 이리 때를 쫓는데 늘 물매를 사용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물매의 돌이 골리앗의 미마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교만하며 저주하고 무시하는 말을 했던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신체적으로는 골리앗의 이마가 약점이었지만 골리앗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은 교만이 최대의 약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교만한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는 결국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교만한 자는 반드시 쓰러지고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이 설교 시간은 내가 성도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설교합니다. 만약 제가 교만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성경의 말씀보다 제 말을 더 하고 싶어하고, 말투도 끝이 다로 끝나지 않고 이런거요 저런거요 하면서 요로 끝나면서 가르치려 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겸손하다가도 조금만 교만한 것이 생기면 교만해지는 본성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인생에서 패하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도록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고 교만한 자를 두려워 하지 마시고 싸워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쟁의 경륜적 속성
삼상 17장 41~49절 / 곽선희목사
성도 여러분, 무서운 전쟁은 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왜 이 세상에는 고통의 날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질병이 있고 실패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또 두 문제가 생기고 세상은 갈수록 갈수록 난감하고 어둡기만 하고 벼랑에 선 것만 같은 위기를 체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람마다 혹은 그 어느 누구도 원인을 모를 일이 아닙니다. 알면서 부인하려고 합니다. 인정을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을 기피하려고 합니다. 계속 이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부인하려고 하는 일 때문에 세상은 더더욱 어지러워지는 것이올시다.
1968년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역사를 깊이 연구하는 중에 '이 지구촌에 전쟁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것을 자세하게 면밀하게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했더니 지난 3421년, 이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3421년 동안에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습니다. 이 말은 이 지구촌 역사에는 91.6%의 나날이 전쟁으로 점철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 없는 날이 없었다는 얘기지요. 지난 100년, 20세기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서 약 9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여기서 죽었습니다.
예일대학에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이라고 하는 교수님이 쓴 "On the Origin of War"라고 하는 '전쟁의 기원' 이라고 하는 그 책에서 그는 깊은 역사 연구 속에서 전쟁의 동기, 전쟁이 왜 있어졌느냐 하는 것을 총괄적으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넉넉하면 힘의 여유가 있으면 요사이 말로 초강대적 여유가 있으면은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힘이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심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이익을 추구하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생기는 전쟁, 이것은 실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명예를 추구하는 명분적 전쟁 동기론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2차대전 때, 독일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죽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사람이 최고랍니다. 영국사람들은 앵글로 색슨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승리자의 명예, 승리자의 영광,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이런 것을 자랑하면서 소위 명분적 전쟁동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한국 역사 연구회에서 내놓은 '한국 역사 속의 전쟁'이라고 하는 책중에 이런 부분을 읽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6.25전쟁 때 남북한을 합쳐서 대략 250만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여기에 부상자까지 합치면은 500만 명입니다. 죽거나 부상당한 겁니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온 민족적이지만은 죽거나 부상당한 것, 500만명이라는 것은 당시 인구로 보면 1/6입니다. 여섯사람 중에 한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이런 엄청난 일을 우리는 지난날에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역사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A Study of History"라고 하는 '역사 연구'라고 하는 책, 열두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에서 인류 역사를 자세하게 면밀하게 연구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는 도전과 응전이 있다. 인류는 계속해서 문제의 도전을 받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은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 몇 절밖에 안 되는 짧은 이야기요 드라마틱한 역사적인 이야기입니다만은, 이 속에 엄청난 역사 해석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아주 천진 난만한 깨끗한 믿음의 소유자, 다윗 소년의 고백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이게 사람의 일처럼 보이는데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의 일처럼 보이고, 누구 때문이라고 보여지는데, 그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예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믿음으로 그렇게 수용하고 이해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십니다. 섭리자가 되십니다. 경륜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할 때 '자연계시', '특별계시' 라는 말을 합니다. '자연계시'라 함은 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계시. 인간의 마음, 심성 속에 있는 계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답니다. 역사는 살아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계시.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전도자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끝내 듣지 않을 때, 교만할 때, 빗나갈 때 극단적 형태, 비상 조치를 취하십니다. 사건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고, 역사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엄청난 전쟁이라고 하는 역사 속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치른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촌 여기 저기서 지금도 전쟁이 터지고 있습니다. 강 건너 불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언제나 전쟁은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깊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감추어진 비리와 악을 들추어냅니다. 인간들의 변명, 인간들의 정당화, 인간들의 악한행동, 은폐해 놓은 사건들을 백일하에 확실하게 드러내십니다. 죄로 인해서 망합니다. 무기가 아닙니다. 죄 때문에 망합니다. 나라도 개인도 죄 때문에 망합니다. 의인은 나라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죄는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요새 와서 구소련이 만들어 놓은 무기, 원자무기는 물론이고 화학무기까지. 이 화학 무기를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이렇게 만들어 놓고, 구소련은 무너집니다. 이 지금 화학 무기를 어떻게 처분하느냐? 이건 땅에 묻어놔도 문제요 바다에 던져도 문제요, 이게 만일에 터지는 날이면 온 세계가 큰일납니다. 지금 온 세계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면 구 러시아 소련이 무기가 없어서 망했습니까? 과학기술이 모자라서 망했습니까? 죄로 인하여 무너진 것이요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7장 4절에 보면 인생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준비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주 목줄처럼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유대나라가 망할 때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망했고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망했습니다만은 성경은 강하게, 강하게 증거하십니다. 바벨론 때문도 아니고, 앗수르 때문도 아니에요. 이스라엘에 전쟁이 있어진 것은 죄악 때문이에요. 그들의 죄가 전쟁을 불러 놓은 것이에요. 그들의 악이 바벨론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에요.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핵심적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무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오로지 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심판하십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의가 땅에 묻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놀랍게도 초점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습니다. 그 놀라운 섭리, 놀라운 은총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은 있어집니다.
1945년 8월입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지금도 히로시마에 가시거든 원폭투하 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만들어 놓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한번 시간을 내어서 일부러 가서라도 한 번 보십시오. 저는 두 번 가보았는데요, 큰 감동이 있습니다. 원자탄 하나에 일시에 꽝 하는 순간에 50만명이 사라집니다. 이 쇠붙이는 다 녹아 없어지고 심지어는 이 돌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림자만 남고 사람은 없어져요. 아주 그냥 깨끗하게 사라집니다. 모든 집, 건물이 그대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한 성전에 성당에 있었던 종 하나가 요만합니다. 노란 종 하나가 그대로 있습니다. 요한 석상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고대로 떠다가 박물관에 갖다 놓고 그 옆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Unbelievable,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 종이 원자탄의 불꽃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그 앞에 서서 30분 동안 조용히 명상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꽝 하는 순간에 50만명이 날아가 버리는데 그래도 그 불꽃 속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그것이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나 여기에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고. "내가 거기 있었노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괘도를 수정하게 합니다. 역사가들이 어떻게 기록하고 이해할는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입니다만은 만일에 우리가 6.25라는 사건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들 말합니다. 꼭 월남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한은 공산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 북쪽에서 너무 서둘러서, 공산화란 그렇게 전쟁을 통해 이루는 게 아닌데, 서둘렀기 때문에 그만 공산주의라고 하는 악이 만천하에 노출되면서 엄격히 말하면 온 세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6.25는 역사의 피안에 서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높이높이 드러내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 너무나 잘 아는 동화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소년 다윗의 힘으로 이긴 것입니까? 하나님의 힘으로 이긴 것이에요. 그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요, 그의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긴 것이올시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리앗 대장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다윗을 다만 집행자로 사용했을 뿐이요. 이스라엘의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일 뿐입니다. 여기에 참 구원과 참 믿음의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혹 영화를 보십니까? 혹은 전쟁영화를 보십니까? 전쟁영화는 다 끔찍하지요. 그러나 그 역사 속에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 서부활극 같은 것 보면은 마차가 구르고 총을 쏘고 마차에서 떨어지고 난리가 납니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쥡니다만은 이런 전쟁영화를 보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연은 절대로 안 죽는다' 그걸 알고 보아야 됩니다. 이 영화 끝날 때까지는 안 죽어요. 이게 시나리오예요. 하나님의 엄청난 시나리오 속에 내가 있고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주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원인이 있는 곳에 결과가 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이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외세를 탓할 것도 없고 무기를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안에서 썩을 때, 전쟁을 통해서 청소합니다. 우리가 바로잡지 못하면 하나님이 손을 댑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강권을 쓰십니다.
여러분 시편 46편 10절에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조용하야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니라." 조용하여 하나님의 역사 앞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 그대로, 그대로 전적으로 수용을 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주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조용하야 네가 하나님 됨을 알지니라. 내가 역사의 주인 됨을 알지니라. 내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함을 알지니라. 내 이름을 내가 스스로 높이는 것을 너희가 알지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