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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동안 미동 없이 서 있는 두 사람.
수혼은 천천히 돌아서며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다.
"..희안군."
딱 보기에도 많이 헬쓱해진 희안의 흔들리는 눈 안엔 수혼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잘..지냈어요..?"
"친구분들과 여행을 오신 겁니까."
"밥은..밥은 잘 챙겨 먹고 있구요..?"
"...희안군."
"왜 이렇게 더 말랐어 속상하게.. 가자. 밥 사줄게요."
수혼을 눈을 회피하며 한 손으로는 수혼의 손목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수혼의 가방을 든 희안은 걸음을 옮긴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이른 시간임에도 식당의 대부분이 이미 문을 닫았기에
한참 동안이나 식당을 찾아 헤메이던 둘은 영업을 하는 식당을 겨우 찾아 들어간다.
앉자마자 얼마 없는 메뉴를 전부 주문하곤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진 수저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희안.
찾으면 오랫동안 눈에 담아 둘 거라 생각했던 희안이지만 왠지 수혼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희안군."
"..밥.. 먹고 말할까."
"식사 하시고 바로 올라가십시요. 워낙 작은 마을이라 교통편이 많지 않습니다."
"안 가. 겨우 찾았는데 형만 두고 어떻게 가. 못 가. 싫어."
완고한 희안의 말투에 수혼은 낮게 숨을 내쉬곤 입을 연다.
"저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참 이기적이네 형도."
"......"
"형이 있던 그 자리에서 형을 알고 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떡해."
희안의 말에 수혼은 어딘지 어두워 보이는 웃음을 내 비춘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희안군도 꽤나 이기적인 사람이군요."
"..형."
"내가 지금 돌아가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늘 평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스럽게 희생하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왜죠?
임수혼이란 이름 아래 산다는게 이렇게 힘든거라면 정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전 기꺼이 이기적인 사람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두려워 해야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평생 남 걱정에 뒤치닥거리나 해주며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습니다.
더 듣고 싶은 말 있습니까 차희안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마치는 수혼.
희안은 한동안 그런 수혼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곤 조소를 흘린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 할 수 있어?
형은 그래도 먹고 싶은거 먹고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을거 다 받고 부유하게 자랐잖아.
아니야? 세상에 모든 행복 다 누려가면서 억울한 거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
형은 좀 특별한 집안의 경호원이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은거지만 그거 뿐이잖아?
나는 내 환경에 대해서 한 번도 응석 부려본 적 없어.
적어도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해가면서 내 환경에서 회피하고 싶어서
몸부림 치는 짓은 부모 없이 자란 나도 치사하고 드러워서 하지 말자고 맹세하고
다짐했어. 형도 나랑 같을 거 같아서 맹목적으로 따라다니고 찾아다녔는데..
이제 보니까 순 엉터리네 임수혼이란 사람은."
희안의 조소섞인 말에도 수혼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형 때문에 괴로워하고 형을 그리워 하며 하루하루 지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한 번 쯤 걱정이라도 해 보는게 어때."
그렇게 말하며 계산을 하곤 먼저 식당에서 나가버리는 희안.
수혼은 이미 식어버린 음식을 쳐다보다가 이내 픽 웃는다.
"..교육..? 개 처럼 맞아가면서 눈물로 배운 그런 교육? 몸살을 앓아도 훈련을 위해
죽 대신 억지로 꾸역 꾸역 삼켰던 밥..? 좀 특별한 집안의 경호원이 된 것 밖에
내가 가진 고통이 없는 거라고..픽. 웃겨 정말.. 특별하게 산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건지.. 남성 명품 수트는 입어도 같은 나이 또래 여자애들이 입는 원피스는
꿈도 못꾸는 여자아이가 얼마나 눈물을 삼켜야 했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차희안 니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게 더 이기적인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네.
어차피 날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아."
위로하듯 중얼거리던 수혼은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자신의 가방 앞주머니에 꽂혀 있는
희안의 핸드폰을 보곤 쓴 웃음을 내 비추다가 역시 음식점에서 나와 집으로 향한다.
.
.
.
"도련님.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안드시고 계십니다. 식사는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 생각 없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내려가."
마영의 방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부지배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가득한 머그잔을 들고 올라가는
무현령과 마주한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무현령. 쓸 때 없는 짓을 하신 것 같습니다. 도련님께 뭐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까."
"흠.. 글쌔요. 어린아이같은 작은 도련님은 저러고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제사장과 대화한 후 방에서 꼼짝도 안하시고 식사도 하시지 않습니다.
이런게 도련님을 위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어리다지만 설마 백 일만 푹 자고 일어나면 임수혼이 올 거라는 그런
버림받은 애들이나 믿는 말을 듣고 저렇게까지 하시는 도련님을 보면서
느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여유롭게 커피를 입술에 축이는 무현령.
"아니요. 전 일단 보이는 그대로 도련님의 건강이 우선일 뿐입니다. 어서 그만 두십시요."
무현령은 부지배인의 당부어린 말에도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시 입을 연다.
"저는 이 가문의 제사장입니다. 해를 끼칠 일은 하지 않습니다 부지배인.
마영 도련님께서 지금 저 상태로 밖을 다니시다가는 애꿎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병원에서 눈을 뜰지 모를 일입니다.
도련님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 같던 부지배인께서 왜 그건 모르십니까."
"그래도 방법이 틀립니다. 저렇게 계속 버티시면 건강이 상하실 것입니다."
"마영 도련님은 저 상태로 계시는게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지켜 보시지요.
그렇다고 정말 백 일 동안 저러고 있진 못할 겁니다. 등교는 하셔야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점점 더 어두워 지는 부지배인과는 다르게 여전히 여유있어 보이는 제사장.
마치 부지배인의 심리를 모두 꿰뚫고 있다는 듯한 눈이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무현령..!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것 처럼.."
"그러는 부지배인은 지배인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 믿고 또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섬뜩해 보이는 무현령의 표정에 부지배인은
은근한 오한을 느낀다.
"역시 아무 말씀도 못하시는 군요. 마영 도련님은 백일 안에 지배인이 돌아 오리라
믿으니까 제 말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걸 염려하며 말리는 부지배인의 생각은 그 반대일 테니 도련님을 막으려는
것이겠지요. 제 말이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무현령의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던 부지배인은 이내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렇게 되길 바란건 아니지만 두 도련님께 질리도록 당하셨던 지배인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배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을 하시는 것입니까."
부지배인의 물음에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싱긋 웃으며 방으로 올라간다.
"저는.. 지배인을 아주 잘 알기 떄문이랄까요..훗."
정말 알 수 없는 사람.
부지배인은 꽤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목 뒤로 흐르는 식은 땀을 닦고는 거실로 내려와
중얼거리듯 말한다.
"..결국 제사장도 지배인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은 같은 것.. 이라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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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선배님. 아직 희안이가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희안의 친구 수권.
1학년 대표로 온 희안은 백사장으로 답사를 갔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명찰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곤 다시 백사장으로 갔다가 수혼을 발견 했던 것이었다.
지도교사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 희안이 걱정되기 시작했는지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허튼짓 하고 다닐 놈은 아니니까."
"허튼 짓은 안해도 개기는 건 잘 하나 보내."
"후배가 없어졌으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지."
"누가 들으면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라도 잃어 버린 줄 알겠습니다."
항상 이런 식인 둘이었지만 오늘 따라 더 심한 계윤과 청후 때문에 하루 종일
같이있던 수권은 아주 죽을 맛이다.
속으로는 희안이 나타나면 흠씬 두들겨 주리라 생각하지만 막상 나타나면 뛰어가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들 데리고 선생님부터 올라가시죠. 차희안은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니..그래도.."
"받아..받아..희안아 제발..제발...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차희안!"
"받았니? 선생님 좀 바꿔봐."
계속 주문을 외우 듯 희안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리던 수권은 긴 통화음 끝에
연결이 되자 쾌재를 지르듯 소리쳤고 그에 담담교사는 바로 수권의 전화를 뺏어든다.
"여보세요? 희안아. 선생님이야. 너 어디야, 무슨 일 있는거야?"
- .....
"여보세요? 여보세요. 희안아."
- ..차희안군이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간 것 같습니다.
"..누..구시죠..? 희안이 아는 분이신가요..?
담당교사와 상대방의 대화 내용에 수권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교사만 쳐다보고 있고
계윤은 여전히 관심 없다는 듯 바다만 바라본다.
- 희안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겁니까.
"아니.. 수련회 답사 왔는데 애가 없어져서요. 혹시 희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세요?"
- 좀 전에 헤어졌습니다. 이 쪽에 계시면 핸드폰은 전해드리러 가겠습니다.
희안군 만나게 되시면 전해 주..
"아..어머..!"
순간 소란스러워 지는 반대편 때문에 살짝 수화기를 떼었던 수혼은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하며 눈을 감는다.
"..임수혼이지."
- ......
"대답해 임수혼. ..너 맞지."
- .. 안녕하셨습니까..계윤 도련님.
수화기에서 반대편에서 오랫만에 듣는 수혼의 목소리에 계윤은 발 끝에서 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핸드폰을 더 꽉 쥔다.
청후와 수권 역시 임수혼이란 이름에 계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끊지 말고 대답만 해. 지금 어디야."
-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디냐고 물었어."
-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기 쉽습니다. 특히나 이곳은 습한 곳이 많으니 수련회 와서
생활하시는 동안에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몸 조리 잘 하시고 식사 꼭 챙기십시요.
조금 더 지나면 제가 먼저 인사 드리러 가겠습니다.
마영 도련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요. 그럼..
"...하아..임수혼."
"어..차희안..희안이다.."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백사장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희안이 보인다. 담당교사는 그런 희안에게 달려가 꾸지람을 놓다가 차를 가지러 간다며
주차장으로 갔고, 청후는 담당교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수권은 혼이 반쯤 빠진 것 같은 희안에게 다가가 무슨일이 있었냐며 다그치듯 묻고,
계윤은 끊긴 전화기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채 서 있다가 바로 앞까지 와서
청후와 계윤에게 번갈아 죄송하다며 인사하는 희안을 쳐다본다.
"..임수혼 만났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계윤의 질문을 회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돌려버리는 희안.
"만났냐고 물었다."
"...네."
"지금 어디냐."
"...저도.. 잘 몰라요."
"왜 임수혼이 니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
수혼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급한 마음에 수혼과 연락할 길을 만드려고
가방에 자기 핸드폰을 꽂아 두고 나왔던 희안.
"잠깐 마주친 건 맞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어땠냐."
"..네?"
"임수혼..어땠냐고. 괜찮아 보였냐."
끝까지 어디있냐고 물으면서 주먹을 휘두를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른 계윤의 행동에
그제서야 계윤을 쳐다보는 희안.
"..네."
"..하아....그럼 됐다. ..가자."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수권에게 주곤 주차장 쪽으로 앞서 걸어가는 계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 거에요..? 왜 더 찾지 않으시죠? 이제 수혼이 형을
버리시는 건가요?"
조금은 흥분한 듯한 희안의 물음에 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입을 연다.
"버린 다는 건 동물이나 쓰레기한테나 쓰는 말이지.
임수혼을 잘 키운 충견쯤으로 여겼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 무조건적인 복종이
무서워졌다. 그냥 기다리는 거야. 방금 임수혼이 그랬거든.
시간이 지나면 먼저 인사하러 오겠다고.
그 녀석은 워낙 고지식하고 확실해서 거짓말은 안해. 그러니까 믿는거다.. 임수혼을."
그런 계윤의 뒷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수혼에게 했던
말들이 얼마나 철 없는 생때였는지를 돌이켜 보는 희안.
영문을 잘 모르는 수권은 그런 희안을 툭툭 치며 계속 무슨 일이 있었냐며 추궁했고
청후는 다 태운 담배를 지져 끄꼰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계윤의 뒤를 따라간다.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글 을 기다리는게 무척이나 힘드네요. 알던내용인데도 자꾸만 기다려집니다.
언젠가마주치겟지요??
...나중에는 마주치겠죠??ㅎㅎㅎ 수혼의 진짜 모습을 보면 다들 어떨지 궁금해요~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