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시조 - 고려 문하시중 문성공 최아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文成公)은 휘(諱)가 아(阿)이며 자(字)는 형지(衡之)이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며 완산군(完山君)이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문성공이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고, 큰아들 안렴사공 최용생(按廉使公 崔龍生)이 1350년에 경상도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대호군공 최용각(大護軍公 崔龍角)이 1357년에 검교대호군을 지냈고, 셋째아들 판사공 최용갑(判事公 崔龍甲)이 1323년에 중국 원나라(元) 과거에 합격했고 증손자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 )이 1346년에 태어났으므로 문성공은 1260년에서 12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최초의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에서 말하기를;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의 선조는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 최청지, 최○○, 최송년(崔松年) 심지어는 최선능(崔善能) 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비록 모두가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이라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혈연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가 매우 멀어서 비록 같은 혈연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누어진 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서로 따로 따로 믿고 서로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고증을 거쳐서 문성공을 시조로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崔之別以史傳人物言之則先祖又有崔均崔純爵崔淸之崔○○崔松年之異至於崔善能又自中國淸河而來矣此皆雖曰同姓字同本貫而其實則不相統屬遠矣雖或同是一源而亦不知其分派之所自來故隨其諸本之誤認辦證如後而直以文成公爲始祖此誠後人之不可不知者也)"라고 적었다. 문성공 제단 비문(祭壇 碑文)에는; "우리 동방의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 공의 휘는 아이고 벼슬은 문하시중으로 문성은 공의 시호이다. 공은 네 분의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 최용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용각은 검교대호군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최용갑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를 지냈고 막내아들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공의 후손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와 중랑장공 최용봉의 후손만 하더라도 향사(享祀)가 열 여섯이고 정려(旌閭)가 여섯이며 문과 급제가 41명 무과 급제가 67명이고 생원과 진사가 84명이다. 그 외의 대소 관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여기에다 다 적을 수가 없다. 할머님에 대해서나 공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산소의 위치 등의 기록은 오랜 세월과 그 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없어져 전해오지 않는다. 전주 주덕산에 있는 분토동에는 전주최씨의 선산이 있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해 공의 현손 존양당공 최덕지(存養堂公 崔德之)의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 무덤(大人葬)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정조년간 병진년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 조사를 했으나 광(壙) 위에는 넓은 돌 하나가 덮여 있을 뿐 다른 유물(遺物)이나 지석(誌石) 등 공의 산소라고 증거 할 만 한 자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다음해인 정사년에 후손들이 합의하여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북쪽으로 수궁허(數弓虛)에 제단(祭壇)을 쌓고 위토(位土)를 두어 제사를 올리니 전해오는 이야기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 경진년에 다시 표석(標石)과 산문(山門)을 세워 예전에 못 이룬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눈이 미치지 못하여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옛날 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조선 순조 21년 경진년 통훈대부 경기전령 이병운 근지"라고 되어있다. 공의 산소에 대하여 전주최씨 연촌공파 족보에는; "족보 초성일권에 '공의 산소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 주덕산에 있다고 하였고 옛날 노인들이 이야기로 전해오기를 연촌공 최덕지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날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의 무덤이 공의 산소'라 하므로 후손 4파가 회의를 거쳐서 1796년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조사를 해 보았으나 지석이나 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 할 수 있는 유품을 발견 할 수가 없어서 1797년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주최씨 집안에서는 중랑장공파 만이 그 무덤을 공의 산소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나머지 3파에서는 그 무덤을 공의 산소라고 인정하여 제단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그 무덤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사는 중랑장공파는 음력 3월 3일에 단각에서, 그리고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는 한식날 그 무덤(疑塚)에서 올린다. 문의는 : choisj@kec.co.kr로..... 해설 : 휘(諱) 돌아가신 분의 이름. 살아 계신 분의 이름은 함(銜)이라 한다. 자(字) 본래의 이름 외에 따로 부르기 위해서 지은 이름. 시호(諡號) 임금, 정승 등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죽은 후에 지은 이름. 존호(尊號) 왕의 종친(宗親)이나 고려시대 종1품, 조선시대 종2품 이상 벼슬의 신하에게 왕이 내리는 이름. 대개 무슨 군(君)이라고 호칭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시대 문하성 최고 관리. 종1품으로 조선시대 영의정,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안렴사(按廉使) 고려시대 지방장관. 현재의 도지사.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 대호군은 고려 공민왕 때 대장군을 고쳐 부른 이름이다. 무관에서 두 번째 계급으로 종삼품(從三品)이었다. 검교는 정원 이상의 임시직이다. 초성일권(草成一卷) 감찰공 최세영이 최초로 만든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족보. 1683년(숙종 9년)에 시작하여 1686년(숙종 12년)에 완성되었다. 변오고증(辨誤考證)을 포함하여 족보를 만들게 된 배경을 적은 서문과 시조 문성공에서 시작하여 13세까지의 족보가 적혀있다. 문정공 최재(文貞公 崔宰) 자는 재지(宰之) 호는 문정이다. 1303년에 태어나 1330년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고 1352년 집의가 되었다. 성산군(星山君)의 존호를 받았으며 중광대문하시중을 지냈고 1378년 10월에 돌아가셨다. 문열공 최순작(文烈公 崔純爵)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고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108년 9월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으나 고증 해 보면 잘못된 연대인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열공이다. 복야공 최균(僕射公 崔均)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시조로 자가 간유(幹儒)로 복야공 또는 사도공(司徒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127년 완산 군수 박춘령이 연구(聯句)로 시(詩)를 짖는 시험을 열어 최척경, 최균, 최송년 3명의 어린이를 뽑아 완산의 3최라고 불럿고 이 3최 모두가 완산백 문영공 최언위의 후손이라고 했다.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의 토벌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 도지휘사가 되어 토벌군을 지휘하였다. 화주에서 조위총의 부장인 깁박승(金朴升)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병마사 이의(李儀)와 함께 붙잡혀 살해되었다. 최송년(崔松年) 문충공 취군옥의 큰아들로 고려 명종때 문인(文人). 문장이 뛰어났으며 어릴 때 복야공 최균, 최척경과 함께 문장에 뛰어난 호남의 3최라고 불리었다. 문영공 최언위(文英公 崔彦 ) 868-944. 전주최씨의 선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주최씨가 소벌도리공에 이어서 전주최씨의 원시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는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이며 경주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글을 잘 했다. 신라 말기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당나라 예부시랑 설정규 아래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니 발해의 재상 조소도의 아들 광찬도 함께 급제했다....."라고 하여 경주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또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는 42세에 신라로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과 서서원 학사 벼슬을 했다. 이어 고려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자 가족을 데리고 고려로 와서 태자사부가 되었으며 고려 조정이 그에게 문한(文翰)의 책임을 모두 맡기니 고려 궁궐의 건물 이름은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당시의 귀공자들이 모두 그를 섬겼고 벼슬은 대상원봉 태학사 한림원령 평장사에 이르렀다. 고려 혜종 원년에 돌아가시니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광 벼슬을 다시 내리고 시호를 문영공이라고 했다......"라고 했다.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 즉 고손자.(高孫子) 소윤공 최득지(少尹公 崔得之) 1379-1455.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 )의 셋째 아들로 소윤공파 파조이다. 휘는 득지(得之)이고 호는 율헌(栗軒)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공의 묘비는 1457년에 세운 것으로 전주최씨 문성공계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최선능(崔善能) 전주최씨 문충공계 5세손이며 문성공 최아의 사위이며 위정공 최칠석(威靖公 崔七夕)의 아버지이며 만육공 최양(晩六公 崔瀁)의 증조 할아버지로 추충보절공신(推忠補節功臣) 삼중대광 문하 찬성사를 지냈고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판사(判事) 고려시대 종1품 벼슬. 이부, 병부, 호부, 예부, 공부에 각 1명씩 있었다. 중랑장(中郞將) 고려시대 정5품 무관, 각 영(營)에 2명씩 있었다. 소령이나 중령 정도 계급의 장교. 향사(享祀) 큰 학자나 충신 등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는 일.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우고 그 뜻을 기리는 일. 생원과 진사. 생원(生員)은 생원시를 진사(進士)는 진사시를 합격한 선비로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대과(大科)가 권력층의 농락으로 위신이 떨어지자 생원과 진사를 소성(小成)이라 하여 이에 만족하고 대과에 응하지 않음을 청렴하게 여겼다. 진사는 선비에 참여할 자격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세종 때부터 합격자에게 흰패(白牌)를 주고 성균관 입학자격과 대과의 응시자격을 주었으며 하급관원으로 등용되어 진사과(進士科)를 소과(小科)라 했다. 존양당공 최덕지(存養堂公 崔德之) 1384-1455.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 )의 넷째 아들로 연촌공파 파조이다. 휘는 덕지(德之)이고 자는 우수(迂 ) 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연촌(烟村) 또는 존양당(存養堂)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 대각을 거쳐서 여러 지방의 지방관을 지냈고 남원 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나주(전남 영암군 영보촌)로 내려가 서재를 지어 이름을 존양루(存養樓)라 부르고 호를 "연촌"에서 "존양당"으로 바꾸었으며 책과 글을 벗삼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450년에 조선 문종의 부름을 받아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직제학을 이 되어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다음 해인 1451년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이 벼슬을 버린 2년 후 1453년에 계유정란이 일어나고 1456년에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공과 친분이 깊었던 충신들이 목숨을 잃었다. 만약 공이 벼슬을 버리지 않았으면 공도 이런 변을 당했거나 아니면 신숙주 등과 마찬가지로 명예에 훼손을 입었겠지만 공은 적절한 시기에 벼슬을 버리므로 명예를 유지하면서도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아 자손을 번영하게 할 수가 있었다.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 남긴 업적(業績)이나 태어난 날자와 죽은 날자 그리고 무덤의 위치와 방향 등을 적어서 무덤에 함께 묻은 돌. 수궁허(數弓虛) 활(弓)의 사정거리(射程距離)로 몇배에 달하는 거리. 즉 수 백미터 정도의 거리. 위토(爲土) 향사나 집안의 제사 등에 사용할 경비를 마련 할 목적으로 준비 해 둔 땅. 산문(山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 경기전령(慶基殿令) 전주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둔 전각 관리를 담당하는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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