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재 너머로
1년 전 이맘때 지기로부터 텃밭 경작을 의뢰받았다. 이웃 노인이 고령으로 경작이 힘드니 내보고 푸성귀를 가꿔보라 권해 받아들였다. 살던 집의 리모델링으로 일시 바쁘긴 해도 퇴직 첫해여서 주체 못할 시간은 제법 넓은 텃밭을 놀이터로 삼아도 될 듯했다. 철이 늦기는 했지만 바쁜 일상에서 묵혀둔 검불을 치우고 잡초를 뽑아내 모종과 종자를 심어 남들만큼 작물을 가꾸었다.
나는 평생 교직에 몸담았지만 어릴 적 농사일을 거들며 학교에 다녔고 결혼 분가 이후에도 가끔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을 찾아뵙고 일손을 도왔다. 퇴직 직전 몇 해는 두 학교에서 황무지나 다름없는 뒤뜰 언덕과 자투리에 봉숭아를 심어 꽃 대궐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텃밭 농사의 작물 재배 원리는 터득되어 어렵지 않게 가꾼 수확물을 이웃과 지기들에게 나누었다.
나에게 경작권을 넘긴 분은 울릉도 출신으로 젊은 날 창원 공단에 취직해 은퇴한 팔순 중반 노인이었다. 그곳 창원축구센터에 딸린 시청 공한지는 장차 에어돔 축구장이 들어설 부지로 원주민은 보상받고 떠났고 이후 이런저런 인연으로 모여든 경작자가 20년 넘는 세월에 걸쳐 푸성귀를 가꾸어 왔다. 그러다 지난 연말 당국에선 그 자리가 해가 바뀌면 예정된 공사에 든다고 했다.
올해 정초 중장비가 들어와 공사가 시작되던 즈음 이웃 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텃밭에서 철수했다. 텃밭을 계속 경작하지 못한다는 아쉬움보다 거기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홀가분함이 앞섰다. 나는 봄 한 철은 주변 산야를 누비면 텃밭에 경계가 없다. 내가 텃밭 경작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설렁설렁했음에도 흙에 황송할 만치 풍성한 수확물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
봄이 무르익은 계묘년 오월 초순 수요일이다. 문득 작년에 텃밭을 가꾸던 현장이 궁금해 거기로 가보기로 했다. 현장을 둘러보고 남산재를 넘어 대암산 북향 기슭에서 산나물을 채집해 올까 싶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101번 시내버스로 창원대와 도청을 지난 법원 앞에서 내렸다. 작년에는 집에서부터 새벽길을 걸어 지나다녀 법무 법인 사무실 빌딩과 간판들은 눈에 익었더랬다.
사파동 창원축구센터 체육관 곁의 2호 국도 아래 언덕이 텃밭이었는데 공사 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계단식 텃밭은 시공회사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터 닦기를 하고 있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올해 말까지 들어선다는 에어돔 축구장의 공사 진행률은 미미한 편이었다. 나는 공사 현장을 벗어난 보조경기장 산책로를 따라 25호 국도 굴다리를 통과 남산재로 가는 등산로로 올랐다.
산기슭에는 아카시꽃이 피어나 바람이 부니 은물결로 일렁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산행은 나선 이들은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경사가 가팔라 쉬엄쉬엄 걸어 남산재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고개를 넘어 북향 비탈로 내려서면서 등산로를 벗어나 산나물을 살폈다. 참취를 몇 포기 찾아냈는데 철이 늦어서 쇠어가는 즈음이었다. 억센 줄기는 두고 부드러운 끄트머리 부분을 뜯었다.
신월에서 송정으로 가는 길고 긴 임도에 닿아 길섶을 살피니 참반디가 보여 뜯었다. 내가 자주 간 북면 야산이나 여항산에서는 드문 참반디가 거기서는 흔한 편이었다. 참반디 곁에는 참나물도 섞여 있어 주섬주섬 뜯으면서 임도를 벗어나 수종 경신지구 숲으로 가봤다. 참나물과 등골나물에 이어 비비추까지 찾아 뜯으니 봉지가 채워져 배낭에 넣고 새로운 봉지에다 산나물을 채웠다.
골짜기에서 사방사업 공사 현장을 지나니 함안 조 씨 선산을 거쳤다. 대암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까지 갔다가 평지마을로 내려섰다. 온 동네가 백숙집으로 외지의 식도락가가 찾는 데였다. 저수지 둘레길을 걸어 신월마을에 이르러 중국집에서 짬뽕으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진영에서 김해로 오가는 버스를 타 장유에서 창원으로 돌아와 배낭의 산나물은 꽃대감에게 건네주었다. 23.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