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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여기에 참된 기다림이 있습니다/마 3:1-6
○ 선구자 세례 요한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막1:5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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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쓰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Waiting for Godot],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2막짜리 연극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이유는 막연한 구원자를 기다리는 인간 내면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도를 기다리며]는 절망하고 있는 현대인의 구슬픈 노래요 약속된 희망의 등불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기다리다 못해 지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설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굳이 이 작품을 거론하지 않고 나 자신을 보아도 우리는 마음속에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탄의 계절에 “양로원(Nursing Home)”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차를 몰고 입구에 들어서면 각 방 창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들이 고개를 내어놓고 열심히 지켜봅니다. 아예 현관에 나온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이 아닐 때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서 스쳐지나가던 실망의 표정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군가가 인생을 ‘기다림의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구원자를 기다리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의 외침 앞에 진지하게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오실 길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정말 간직하고 사모해야 할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렸던 이유는 약속된 그 나라는 참 행복이 있고, 인간이 추구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온갖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진 이상적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르치신 대부분도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초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좋은 소식 즉, 복음이라 말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 목사님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첫째 풍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9:13-14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그들이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그런 시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화목과 조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적대 관계가 사라집니다. 이사야 11:6-9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세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고통이 없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즉 땅의 모든 고통이 종식되고 새롭게 건강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25장 8절을 보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말씀했습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전쟁이 끝이 나고 진정한 평화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32장 18절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몹시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굶어죽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저기 내부 다툼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적대감이 가득했습니다. 전쟁과 죽음의 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 하여 형제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픔도 겪습니다. 희망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에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눈물의 나라였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형편이 이스라엘보다 나을 것은 무엇입니까?
연세 많으신 한 어른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당신은 짧은 생애 동안 네 나라의 통치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본, 다음에는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현재는 미국의 통치입니다. 고향이 평양으로 일제 시대에 태어나셔서 북한 공산치하에 계시다가 남한으로 월남하셨고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네 나라의 통치를 받는 동안 그 어르신에게는 두려움과 분노, 죽음의 시간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군 장갑차에 치어죽은 여중생의 재판문제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의 그 마음은 그야말로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정을 보십시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위장해 남편을 살해한 사람이 있습니다. 싸움 때문에 속이 상한 나머지 방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죽고 가족도 함께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회로 우리 눈을 돌려봅시다. 빈부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지켜봐야하는 일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군대에서 의문사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억울함이 있습니다. 남과 북이 대처하고 있고, 반세기가 흘렀지만 가족끼리 만나지 못하는 서러움에 눈물짓습니다. 전쟁의 위협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늘 불안한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입니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 이 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이 제창된 이래 인간의 행복과 유토피아를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도 ‘어떻게 하면 인간을 행복하게 할까’하는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이 제안하고 시도한 제도와 방법이 많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죄로 인한 문제와 고통으로 이 땅은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합니다.
어디에서 외치느냐 하면,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입니다. 광야는 쓸쓸한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그곳에 진정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통치하시겠다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거나 세상 종말에서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광야 같은 이 땅이지만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잇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했습니다. 즉 주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평강이 있고, 구원의 즐거움이 있어 희락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나라입니다.
이번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간구는 ‘주님! 나의 삶과 가정, 우리 교회와 민족위에 하나님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고 바라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8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행해야 할 것, 즉 하나님 통치를 이루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라고 말씀하신 ‘메타노에이테’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메타노에오’는 이동 변화를 의미하는 전치사 ‘메타’와 ‘마음으로 이해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을 바꾸다’,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기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계획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전존재를 다해 자신의 계획과 작정 및 행동을 바꾸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덧붙여 이 단어가 현재시제로 되어있어 메시야를 맞이해야 할 사람은 언제나 현재로서 자기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은 자복했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했습니다.
공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세례 받는 행위는 죄인임을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말할 때에 ‘악시우스’의 원형 ‘악시온’은 ‘무게를 단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죄에 상응하는 회개의 열매, 삶의 변화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말씀하고 있을까요?
세례요한이 외친 말씀은 이사야 40장 3-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사야 40장은 포로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포로생활에 익숙해져 약속하신 땅에 대한 소망을 더 이상 가꾸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에 대해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면 포로 귀환 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한 말을 보면 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정탐하러 왔을 수도 있습니다. 혹 스스로 정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깨끗해지고자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특별한 지위에 있다할지라도 그분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폐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하며, 임박한 진노를 경고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40장이 쓰인 배경과 마태복음에서 말씀의 대상이 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삶을 보면 세례요한이 말한 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선에 생활이 편하여 어려움 없이 살만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죄인으로서 이 땅의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무리 편안하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또한 나 자신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리라 자신하십니까?
목사로, 장로로, 안수집사로, 권사로, 구역장으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교회 출석하며 직분을 감당하고, 사회적으로 볼 때 도덕적ㆍ윤리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 해서 주의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담긴 본질적인 사명을 잊어버린 그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뿌리에 놓여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정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기를 치거나 거짓된 삶을 사는 등 이중생활을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웁니다. 잘못된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이미 안주하며 얻은 편안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후회입니다. 주님은 후회가 아닌 회개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 것을 변화시킴에 인색한 삶은 아닌지요?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 가슴과 가정과 섬기는 직분 그리고 이 민족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찾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우리 삶에 오셔서 다스리시도록 초청하십시다. 회개는 재림을 기다린다 하는 성도의 마땅한 간구며, 성탄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지난 주간 중에 기적의 100달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데니 & 리사 벨레시 목사님 부부가 쓴 체험적인 글입니다. 미국 남가주 한 교회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 이뤄지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의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 100명을 선정하여 100달러를 주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결과를 함께 나누었고, 이를 담은 것이 책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돈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토록 한 이유는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가장 쉽고도 멀리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몇 사람의 지원으로 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4부 예배를 드리는 동안 각각의 예배시간마다 25명의 신청자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겨우 겨우 100명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백 달러와 함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그 백 달러의 돈은 하나님의 재산임을 잊지 말 것,
둘째 그 돈을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할 것,
셋째 그 사업의 결과를 시작한 날로부터 구십일 되는 날에 보고할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보고회 날 온 교인이 엄청난 축복과 변화 앞에 놀랐습니다. 석 달 동안 만달라에서 십만 달러로 늘어났고, 수 천명되는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받았으며, 지역 사회 전체가 변화되었음은 물론 미국 NBC방송 데이트 라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 사실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중에 스티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위스콘신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아 마흔넷에 꽤 큰 회사의 사장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정말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브에게는 6살짜리 알렉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런던으로 출장간 사이에 딸이 죽었습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방황하는 중 교회를 찾아가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고 교회에 왔지만 한동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말씀을 듣고 주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 달러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딸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고 싶지만 못해주는 대상과 선물을 적은 리스트를 받았습니다. 모두 80개였는데 나무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80개의 소원 종이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다 없어졌습니다. 며칠 뒤에 약 팔천달러 어치의 선물과 상품이 모아졌고 스티브는 모인 선물로 온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바로 이 운동에 100여 가정 이상이 참여했고, 참여한 사람들 마음속에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스티브 부부는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간증했습니다.
주님은 오늘에 안주하고 종교생활로써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라고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를 보내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잊고, 곧잘 매일 반복되는 교회 생활이 다 인줄 아는 우리에게 일깨워주십니다. 내 삶의 현장에 주님 나라가 선포되도록 날마다 깨어 있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례요한의 외침을 마음으로 듣고 진정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백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성탄에 먼저 깨달은 우리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이웃과 지역사회에 전해지기를, 또한 계속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출 처| 김형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