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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다
삼상 17:48-58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53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55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삼상 17:48-58 / 골리앗이 앞으로 나아와 다윗에게 가까이 이르자, 다윗은 날렵하게 그의 앞으로 달려가면서 49)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내어 물매로 던졌다.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꽂혔다. 이렇게 돌이 이마에 박히자 골리앗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물매와 조약돌 한 개로 골리앗과 싸워 이기고 그를 단번에 죽였다. 그는 칼이나 창을 쓰지 않고도 블레셋 장수를 처치한 것이다. 51) 다윗은 즉시 달려가 골리앗을 밟고 서서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의 목을 잘랐다. 블레셋 족속들은 그들의 장수 골리앗이 어처구니없이 죽는 것을 보고 모두 도주하였다. 52) 그러자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블레셋 족속을 추격하여 가이를 지나 에그론 성문에까지 이르렀다. 사아라임에서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는 길에는 블레셋 족속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53) 추격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군인들은 블레셋 족속들이 버리고 달아난 진지에서 약탈을 하였다. 54) 이때에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가져다 두었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가져갔고, 골리앗이 쓰던 무기는 놉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다 두었다. 55) [사울에게 소개되는 다윗]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였다. 전선에 서 있던 사울이 다윗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물었다. `저 소년이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오?' 아브넬이 대답하였다. `임금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56) 사울이 명령하였다. `저 소년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아보시오!' 57)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진지로 돌아오자, 아브넬이 그를 데리고 왕에게로 갔다.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58) 사울이 다윗에게 물었다. `자네의 부친이 누구이신가?' 다윗이 대답하였다. `제 부친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입니다.'
갑옷과 무기를 무장하고 전쟁에 나왔던 골리앗이지만, 믿음의 물맷돌을 들고 나온 다윗에게 완패를 당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48-49)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전쟁에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록 물맷돌 하나이지만 만군의 여호와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장을 한 다윗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의 목을 베는 다윗(50-54)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은 그의 목까지 베어 완전히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본 블레셋 군대는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하여 도망가기에 급급하였으며, 반대로 이스라엘 진영은 그들을 쫓고 노략물들을 탈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밟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한 블레셋 민족을 정복하는 것과(삼하 8:1), 그리스도를 통한 사단의 세력을 멸절시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롬 16:20; 계 20:10). 또한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 44)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목 베임 당한 것처럼,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시 7:15; 9:15).
사울 앞에 서는 다윗(55-58) 사울은 이미 다윗을 궁중에 있을 때부터 알았고(16:19-23), 골리앗과의 싸움 요청 때에도 만났지만, 그럼에도 다윗의 신분을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한 다윗의 가문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기도 하고, 승리에 대한 상급을 내리기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사울의 부름을 받은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가지고 왔는데 이는 고대 전투에서 패배한 적장의 머리는 승리의 기념물로써, 또는 전사의 업적으로써 흔히 베어졌고, 그리고 그것은 존경과 충성에 대한 표시로써 왕에게 바쳐지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 용 :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물맷돌을 골리앗과의 전쟁 때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용할 물맷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에겐 골리앗을 물리치는 것 같은 즉각적이고 스펙터클한 기적은 없을지 몰라도 선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비록 그것이 때로는 기나긴 침묵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있거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침묵을 견뎌낼 수 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견뎌낼 수 없다면 이미 손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호크마 주석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 여기의 '일어나'(* , 쿰)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 보다는 차라리 어떤 결정적 행동에 선행되는 의지적 결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블레셋 사람에게로...빨리 달리며 - 이러한 다윗의 적극적인 전투 자세는 오직 여호와의 능력만을 힘입어 싸우려 했던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는 달리 극히 가벼운 무장, 즉 막대기와 물매 만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 43절). 항오를 향하여 - 본 문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블레셋의 진영과 가까운 지점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골리앗은 중무장(4-7절)으로 인해 행보가 둔했던 반면, 다윗은 평상시 목동의 복장과 소도구 그대로였기 때문에 블래셋 군대의 대열쪽으로많이 전진해갔던 것 같다. 한편 '항오'는 '군대의 대열(隘列)'을 의미한다<23절>.
=====17:49
돌을...물매로 던져 - 여기서 '물매'는 불레셋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정도의 비밀 병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1) 물매는 이미 고대 중근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병기였으며<40절>, (2) 또한 골리앗은 다윗이 물매를 휴대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골리앗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이나 거의 빈큼없는 무장 상태로 보아 그까짓 물매로 인해 어떤 타격을 입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 이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1) 그당시에는 중세기의 기사(騎士)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안면 보호대(面甲)가 개발되지 않았으며, (2) 골리앗 앞에 있던 방패드는 자가 골리앗의 큰 키로 인하여 그의 안면을 방어하지 못했으며, (3) 그리고 다윗의 뛰어난 물매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과(戰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거두어질 수 있었음<45-47절>이 분명하다(Galling). 그러므로 실로 이것은 "40일 동안이나 그 교만한 블레셋 사람(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의 물맷돌 속에 응축되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이다". 한편 '이마에 박히니'라는 말은 (1)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가 결코 다윗 자신의 물매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2) 골리앗이 단 하나의 물맷돌로 인하여 죽기까지 했던 이유를 시사해 준다. 땅에 엎드러지니라 - 외형적 자세로만 볼 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표할 때에 취하는 자세이다. 일찍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블레셋의 다곤(Dagon) 신상이 이처럼 엎드러졌었다<5:3>.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멸하던 자를 강제로라도 굴복시켜 그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의 물맷돌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종 주위의 흔하고 평범한 물체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물체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용에 합당하도록 하나님께 헌신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 주변에, 또는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 무엇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들어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17:50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 여호와께서는 창.칼 등 무기의 도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다윗의 확신과 신앙(47절)이 실제적으로 입증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이처럼 다윗의 물맷돌이 대적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쳐서 거구러뜨린 것은 다니엘서 2:34, 35에 나타난바 '뜨인 돌이 큰 신상(神像)을 부숴뜨리고, 이어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골리앗을 스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단의 세력을 징치하고 전멸시킬 것이라는 심판 사건의 전조(前兆)에 다름 아니었다.
=====17:51
다윗이...블레셋 사람을 밟고 - 밟는 행위는 완전한 승리.정복의 의미를 갖는다(수 10:24;롬 16:20). 따라서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다윗을 통한 블레셋 민족 정복(삼하 8:1), (2) 그리스도를 통한 사단 세력 멸절(룸 16:20;계 20:10) 등의 의미를 이중적으로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칼을...빼어 내어...그를 죽이고 - 전쟁 관례상 자신의 무기를 사용치 않고 상대국 장수로부터 칼을 빼앗아 그 장수를 죽이는 일을 강대국과 그 장수에 대해 수치심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Klein, 삼하 23:20, 21). 한편 여기의 '칼'은 골리앗이 소지했던 창과는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추정은 (1) 소년 다윗이 능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2)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 칼을 다윗에게 적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21:9) 등으로 충분히 뒷받침 된다. 아무튼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 44절)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자신의 목을 베임당한 이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시 7:15;9:15). 그 머리를 베니 - 고대의 전투에서 적국의 적장을 죽이고, 그 승리의 증거로서 그 머리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일(57절)은 하나의 관례였다.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스라엘 군에 대한 총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패배라는 어이없는 결과에 그만 전의(戰意)를 완전 상실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초에 약속했던 것, 곧 양쪽의 대표 중 진 쪽의 군대는 이긴 쪽의 군대에게 완전한 항복의 예(禮)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9절)을 스스로 파기한 행동이기도 했다.
=====17: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쫓아 - 여기서 본서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같이 분리 언급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본 전투가 있었던 당시와 본서가 기록된 당시의 유다지파와 타지파가 상호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11:8;15:4), (2) 본 전투에서의 승리가 유다지파 사람 다윗의 결정적 역할에 따른 결과였다는 사실,(3) 본 전투가 유다 지파의 당에서 벌어졌었다는 사실(1절) 등의 정치.군사적 배경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이 함께 블레셋 군대를 추격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방원수를 격퇴함에 있어서는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lein).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7:14>. 그런데 한편 여기서 '가이'(* )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이를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3절)로 보고, '성문'처럼 '에그론'에속한 한 지점일 것이라는 해석(Targum, Vulgate),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른 오기(誤記)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 )를 가리킬 것이라는 해석(Keil, Klein, LXX) 등이다. 그런데 첫째,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시사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 등에서 (2) 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다. 사아라임 가는 길 - 이것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3절>. 한편 '사아라임'(Saaraim)은 여호수아 15:36의 언급을 통해서 볼때, 소고 및 아세가<1절>와 인접한 한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의 '텔 케플 자카리야'(Tell Kefr Zakariya) 지역으로 추정된다(Keil). 가드와 에그론 - 블레셋의 주요 도시 국가들. 수 13:3 주석 참조.
=====17:53
진을 노략하였고 - 고대 중근동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하는일은 극히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행위는 본서 저자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하다. 그 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여기서 합법적인 탈취를 뜻하는 '솰랄'(* )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아니하고(민 31:31;신 2:35;수 8:2;11:14;삼하 3:22;대상 20:2), 부정적 의미의 탈취를 뜻하는 '솨사스'(* )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삿 2:14;시 89:41;사 13:16;렘 30:16). 그렇다면저자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략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1) 그 물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던 블레셋 족속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필연 하나님께 바쳐진 저주받은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며(15:3 주석 참조;수 6:18-21), (2) 따라서 그 물건들은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처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임의로 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Klein, 민 31:21-24;수 6:18).
=====17:54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고 - 이같은 언급은 여기의 '예루살렘'이 그당시 여전히 여부스 족속(the Jebusites)의 수중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삼하 5:6-9). 바로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그것은 (1) 당시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에 의해 부분적으로 장악되긴 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수 15:63;삿 1:21), 다윗은 그때 블레셋과의 싸움 직후 골리앗의 머리를 가까운 그곳으로 가져갔다는 해석(Keil, Lange), (2)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움 직후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다른 곳에 임시 보관하였다가, 마치 임시 장사 되었던 사울의 시체가 후일 그 아비의 매장지에 완전히 안장되었듯이(삼하 21:12-14),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그곳으로 옮겼다고 보는 해석(Willis) 등이다. 그런데 다윗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부 거주 하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는 여부스 족속의 강력한 지배 아래 있었고 또한 다윗과 같은 특별한 인물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는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는 여기의 언급은 후대에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결과론적 진술임이 부명하다(R. Payne Smith). 본서 저자는 이같이 의도적으로,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예루살렘'으로 적장의 머리를 가져갔다고 함으로써, 적국 블레셋에 대한 다윗 혹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 여기서 '갑주'(켈리, * )는 문자적으로는 '기계' 혹은 '물건'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처럼 여기서도 '무기'(weapons, NIV)란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14:1, 12;20:4;21:8). 그리고 여기서 '자기 장막'은 혹자들(Hertzberg, Abravanl)의 주장처럼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의 베들레헴 집을 가리키는데(Keil, Smith), 그 근거는 여기서 '장막'(te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 )은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대 어휘로서(Fay), 그 용례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4:10;13:2:삼하 18:17;19:8;20:1).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후일 골리앗의 칼이 높(Nob)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보관되었다는 본서 21:8, 9의 언급과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후일 다윗이 블
=====17:55
군장 아브넬 -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로서 사울과는 사촌 형제지간이다(삼상 14:50, 51). 사울의 군장(軍長)이자 사울 가의 능력있는 무사로서, 사울을 보필하다가 사울 사후 다윗 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울 왕의 첩 이스바와의 통간 사건으로 이스보셋으로부터 질책을 당하자 격노하여 다위 가로 귀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순의 과정에서 다윗의 군장 요압의 계교에 걸려 살해당하고만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슬퍼했다. 다윗은 후일 아들 솔로몬에게 아브넬의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다(삼하 3:6-39;왕상 2:5, 6). 한편 아브넬은 적어도 아들 하나 이상은 가졌던 것 같다(대상 27:21).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 이같은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은 사울을 위해 궁중 악사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16:21-25) 우리에게 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제시해 왔다. 즉 (1)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사울이, 당시 자신과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지 오래되어 많이 변해있었을 다윗을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여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lein, Lange, Smith), (2) 사울은 그때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 무쌍한 다윗의 가문(家門)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늦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eil)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첫째, 골리앗과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다윗과 대면을 했었고(31-40절) 둘째,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은인(恩人)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때 두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서론, 7. 사무엘서에 대한 고등 비평 비판>.
=====17:56
청년(* , 엘렘) - 그당시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소년'(* , 나아르)이라는 단어(35, 58절)대신 사용된 이 단어는 다윗의 연소함을 특별히 강조한다(Klein, 20:21, 22).
=====17:57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 고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장(敵將)의 머리는 승리의 기념물로서, 또는 전사(戰士)의 업적으로서 흔히 베어졌고, 그리고 그것은 존경과 충성에 대한 표시로서 왕에게 바쳐지는 관례가 있었다.
=====17:58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 대해서는 16: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그러나 이같은 다윗의 대답만으로는 다윗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분명히 밝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구 뒤에 다윗 가문의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 등에 관한 사울과 다윗의 긴 대화가 분명 있었는데,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해야만 할 것이다(Keil). 그리고 18:1의 첫 문구는 그러한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Smith).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 폐백금으로 사울이 다윗에게 양피 일백을 요구한 기한이 이르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7절의 내용과 연결된다.
< 설 교 >
우리를 위협하는 골리앗
사무엘상 17:47-49 / 이정익목사
다윗시대에 블레셋이 참 위협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운명적인 관계였고 숙명적인 숙적관계였습니다. 오늘도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블레셋은 에베스담밈 골짜기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양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중입니다. 블레셋은 양쪽에서 한사람씩 나와서 싸울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에서는 장수 골리앗이 나왔는데 그의 키 여섯 규빗 한 뼘입니다. 키가 286cm입니다. 갑옷의 무게가 58kg이고 창날무게가 7kg이나 됩니다. 그러니 누가 그 앞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40일간 싸울 위인이 없어서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그때는 사울이 나가 싸워야 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이유는 그런 때 나가서 싸우라고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가 싸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 차 와 보니 그 형편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모든 군인들이 그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보고도 그냥 속수무책으로 있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지독가게 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모두들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청해서 사울 앞으로 가서 “내가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과연 그때 다윗은 무슨 마음으로 싸우겠다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또 다윗은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용기 있는 마음이 우러나왔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그 이유를 밝혀 알아야 우리도 그 마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다”
다윗은 전쟁터에 와서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와 보니 앞에 장대 같은 골리앗이 서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사울을 비롯해서 모든 군인들이 조용히 듣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다윗은 자신이 싸우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 그때 다윗은 무엇을 본 것입니까. 그때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보인 것이 아니고 골리앗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때 골리앗의 칼을 본 것이 아니고 그 골리앗 너머의 하나님의 손에 들렸던 예리한 성령의 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군인들 모두가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데 다윗이 혼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역사하는 섭리를 보는 눈이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저 골리앗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일반인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고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인들이 보는 것은 현실뿐입니다. 현실만 보게 되면 그때 신앙은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때 신앙은 아무 능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현실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합니다. 사울과 군인들이 모두 그 현실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용기가 없어졌고 두려움이 더 커졌던 것입니다. 모세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홍해의 물결만 보았더라면 모세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 땅만 바라보았더라면 그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너머를 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다”라고 바라보는 섭리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역사관이고 섭리의식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쩔쩔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골리앗은 어린 아이가 오니까 방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팔짱끼고 서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골리앗이 방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방심하면 그것이 장수 아니라 그 누구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다윗이 맹수를 쫓던 힘으로 돌을 던졌을 때 정확하게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해서 박혔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싸움은 다윗이 완승을 했습니다. KO승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순간 골리앗 진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황당해서 허둥지둥 모두 도망갔겠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진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얼마나 의기충천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저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안목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현실만 바라보게 됩니다. 현실은 언제나 과장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보고 낙심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많은 경험”입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앞에 크든 작든 적이 나타나면 먼저 무서움부터 옵니다.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젊은이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떱니다. 군대에 가 보면 참 재미있는 생활인데 말입니다. 경험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경험은 자신감을 줍니다. 흥미를 줍니다.
지금 사울과 군인들은 골리앗의 모습만 보고도 질려 있습니다. 떨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40일째 대치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이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지금까지 양떼를 치면서 골리앗 보다 더 힘센 맹수들과 강도들을 물리친 경험이 여러 번 있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위험에 처한 것도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들이 오늘 저 사람 정도면 이 물맷돌로도 충분하다 하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윗에게는 저 골리앗 너머에 턱 버티고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은커녕 자신감에 넘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신만만하게 골리앗에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골리앗을 잘 만났다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경험이라는 것은 배나 더 강한 힘을 제공해 줍니다. 세상에 형통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형통만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형통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고난도 아픔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하 20도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모진 훈련이 되어 영하 10도만 되어도 “날씨 많은 풀렸구먼”하고 말합니다. 섭씨 40도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섭씨 30도만 되어도 “이젠 제법 찬바람이 부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 5도에서 살아가던 사람에게는 영하 1도만 내려가도 난리를 떱니다. 이것이 경험과 연단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한국민족이 강한 이유도 이런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하도 많은 사고를 당하며 살아서 작년에도 금년에도 피해를 당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해마다 자연재해와 맞장 뜨는 민족입니다. 데모를 해도 너무 실감나게 하기 때문에 면역이 되어서 그 모습 보고 외국에서는 난리가 난줄 알고 염려하며 전화를 해 오는데 우리는 아무 염려도 없이 태평하게 살아갑니다. 겨울에는 영하 20도에서 여름에는 영상 35도에서 생활해서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살아갈 수 있는 문제가 없는 체질을 가진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이 경험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도 몸도 생체리듬도 강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많은 경험을 해 보십시오. 젊은이들은 방학 때만 되면 놀러만 다니지 말고 단기 선교를 가고 농촌봉사를 가 보십시오. 가서 봉사하고 땀을 흘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되시는 분들은 손님들 떨어질까 봐 걱정 말고 일주일간 문 닫고 단기 선교를 갔다 와 보십시오. 그리고 병원 문에 “단기 봉사 갔습니다”라고 써 붙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이 의사 중심 있구나”하고 더 신뢰하고 인정해 줄 것입니다. 또 젊은이들은 시간만 있으면 놀러 갈 생각하지 말고 때로 공사판이라도 가서 무거운 짐이라도 한번 져 보는 경험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삶에 아픈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미국에 간 부모가 돈을 벌어 아들 과외를 열심히 시켜 대학입학 수능에 만점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인류대학에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낙방통지를 받았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항의차 방문을 해서 알아보니까 “댁의 아들이 사회에 봉사한 흔적이 한 시간도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얼굴이 빨개져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윗을 고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저 너머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양떼들을 지키는데 책임감 있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맹수들과 싸워 양떼를 지켰고 도둑떼와 싸워 양떼를 지켰습니다. 또 다윗은 양떼를 지키는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양떼들을 지켰습니다. 다윗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그런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두 가지 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인식이 있었고 또 하나는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 젊은이에게 내 백성을 맡겨도 되겠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무책임한 사울을 버리시고 책임감 있는 다윗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 앞의 골리앗
골리앗은 다윗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골리앗은 오늘 지금도 나에게도 있고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골리앗이 무엇입니까. 몸이 이상합니다. 마음이 두렵습니다. “혹시 암이 아닐까” 염려되고 두려워서 병원에도 못 갑니다. 그래서 밤이면 잠도 안 옵니다. 마음이 불안해 옵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 더 겁이 납니다. 그것이 오늘의 골리앗입니다. 이 골리앗은 걱정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 집니다.
회사사정이 점점 나빠집니다. 불안하고 위태합니다. 집안 사정도 불안하고 위태 합니다. 하루 살아가기가 바늘방석입니다. 그래서 안절부절 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 걱정이 골리앗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눈만 감으면 미래가 걱정되고 장래가 캄캄하고 불안하고 막연합니다. 한때는 사오정이라고 하더니 또 38선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이구백이라고 합니다. “20대 90%가 백수”라는 말입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뭘 해먹고 사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모두 골리앗입니다. 그리고 그 심정이 바로 사울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골리앗 앞에 나갈 수도 없고 안 나갈 수도 없고 소리치는 골리앗을 보면 점점 더 크게 보입니다. 키가 286㎝이고 갑옷무게만도 58kg이고 창날 무게만도 7kg입니다. 누가 당합니까. 그래서 지금 40일간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대치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실에 믿음이 없으니까 더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은 경품을 내 걸었습니다. “저 골리앗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 딸을 주겠다.” 얼마나 궁여지책입니까. 누가 이 위기를 건져주면 내 딸을 주겠다고 합니다. 왕이 이 지경이니 무슨 권위가 있고 또 왕의 영이 서겠습니까. 왕이 이러니까 하나님이 그 사울을 버리신 것입니다.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에게는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요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미군 정예공정사단장으로 근무할 때 낙하훈련을 했습니다. 물론 훈련 때는 자신도 뛰어내립니다. 하루는 낙하 훈련을 하는데 강풍이 불어서 부대원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도 강풍이 부는데도 훈련을 중단하지 않고 강행하였습니다. 다만 훈련에 앞서 자신이 먼저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부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강풍의 강도를 내가 먼저 뛰어내려서 확인해 볼 테니 너희들은 기다려 보라” 그리고 먼저 뛰어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역시 강해서 낙하산이 강풍에 휘말려 한참을 끌려가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때 이 장군이 부하들에게 오늘은 훈련을 중단한다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것이 책임 있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지도자가 되면 백성이 근심하게 됩니다. 불안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골리앗 너머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너는 창과 검을 가지고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이 용기는 다윗이 골리앗 너머에서 골리앗 보다 더 우람하게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나오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백성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뭔가 살아계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어진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4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다윗은 이 전쟁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다윗인들 무슨 힘으로 그렇게 나아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너무 현실을 보고 계산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고 계산을 해 보니까 골리앗의 키가 286㎝이고 갑옷 무게만도 58k이고 창날의 무게만도 7kg이라는 것만 보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고 누가 그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싸워 보지도 않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의 주신이십니다. 동시에 나의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적을 과대평가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다윗처럼 나아가면 골리앗은 작게 보일 것이고 사울처럼 현실만 보고 계산만 하다 보면 골리앗은 더욱 크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자주 찾아오는 골리앗은 언제나 내가 물리쳐야 합니다. 내가 물리치고 나면 영광이 주어지고 자신감이 주어지고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한번 물리치고 나면 그 싸움은 없었던 것 보다 훨씬 큰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골리앗은 자주 와 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골리앗 앞에서
전승문 목사 / 삼상 17:45~49
현재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인구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불과 수십 년 후에는 우리나라의 국가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 2020년 우리나라 여성 1인당 출산율이 0.84명이었습니다. 여성 1인당이라는 말은 한 부부의 출산율이 0.84명이라는 겁니다. 인구가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부부 당 2명의 자녀를 출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2명은 고사하고 0.84명 1명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구가 급감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인구절벽 인구가 절벽을 만난 것처럼 뚝 떨어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어째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이유들이 많지만 결국은 힘들어서 그러는 겁니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기가 너무너무 부담스럽고 힘든 겁니다. 사는 것도 힘들고, 공부하는 것도 힘들고, 취업하는 건 더 힘들고, 정말 모든 게 다 힘든 겁니다. 그러니 나 하나 살기도 힘든데 자식을 양육하는 건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힘든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는 게 힘든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힘들고 버거운 겁니다. 그런가요? 여러분도 세상이 그처럼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세상이 두려우십니까? 그래서 세상 앞에만 서면 스스로 너무나도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이겨낼 엄두가 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블레셋 앞에 선 이스라엘도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두려웠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블레셋 앞에서,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사울왕을 만나 잠시 총애를 받으며 사울의 무기 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활이 길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바로 다음 장인 17장 오늘 말씀에서는 다윗이 아버지 집에 돌아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이 다윗을 다시 만나고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다윗이 집에 돌아와 있는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이 또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한 겁니다. 지난번에는 요나단 덕분에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 한 사람의 믿음으로 중과부적의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블레셋은 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블레셋 군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어마어마한 거인입니다. 아낙자손의 후예로 키가 3미터 가까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능숙한 노련한 장수였습니다. 도무지 패배를 모르는 백전백승의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온 몸을 갑옷으로 감싸고 나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 튼튼한 갑옷에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나온 겁니다. 그에게는 정말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완전무결한 전쟁의 화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맨 앞에 서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자신과 붙어보자고 조롱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그와 맞설만한 장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거인이며 무시무시한 살인병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골리앗 앞에서 블레셋 군대 앞에서 이스라엘은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가서 싸울 생각을 못하고 가만히 숨어서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은 요새화된 지역이었습니다. 쉽게 정복할 수 없는 안전한 지형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대치하고 있은 지 벌써 40일이나 된 겁니다. 그 40일 동안 골리앗은 매일 나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했습니다. 사울을 조롱하고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이것이 세상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세상이 가진 권세가, 너무나도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맞설 엄두가 나지 않는 겁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조롱합니다. 교회를 조롱하고 목회자를 조롱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성도는 맞설 수가 없습니다. 세상 권세가 너무나 대단해서 감히 맞설 엄두가 나지 않는 겁니다. 돈의 힘 앞에서, 권력의 힘 앞에서, 지식의 힘 앞에서, 골리앗 같은 세상의 권세 앞에서, 우리는 늘 겁을 집어먹고 대답조차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가 세상 앞에서 그토록 초라하게 숨어있는 것일까요? 세상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것이 블레셋 앞에 선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골리앗 같은 세상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윗이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부은 성령충만한 사람,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이 나타난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직 많이 어렸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20세 이상의 성인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전쟁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 심부름으로 온 겁니다. 아버지가 세 명의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때마침 골리앗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이스라엘을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어린 다윗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곁에 있던 다른 병사들에게 물었습니다 :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6절)” 다윗이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그런 다윗을 바라보며 큰형 엘리압이 말했습니다 :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8절)” 엘리압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요? 엘리압은 그냥 다윗이 싫었던 겁니다. 어린 다윗이 자신을 제치고 사무엘에게 인정받은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 겁니다. 안 됩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단순히 엘리압이 다윗을 시기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마귀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성령충만한 사람, 다윗을 막으려고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성도는 이런 일을 공식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방해합니다. 거기에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런 일에 주저앉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큰형 엘리압이 그토록 크게 화를 내는대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가 사울에게 들어갔습니다. 골리앗에게 맞서겠다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겁니다. 사울이 반가운 마음에 다윗을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골리앗과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33절)”
하지만 다윗은 그런 사울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입니다 (34절~36절)” 자신이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사자와도 싸웠고 곰과도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자도 이겼고 곰도 이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자와 곰에게서 건져주셨다고 했습니다 :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37절)” 그 말에 크게 감동한 사울이 말했습니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사울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요나단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허락은 했는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군복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갑옷도 벗어주고 투구도 씌워주었습니다. 왕의 갑옷을, 왕의 투구를, 입혀준 겁니다. 왕이 입는 갑옷이니 그 갑옷은 최상의 제품이었을 겁니다. 또한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칼까지 들게 했습니다. 그러면 될까요? 제일 좋은 갑옷을 입고, 제일 좋은 칼을 들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마 그 갑옷은 골리앗의 갑옷보다도 훨씬 더 좋은 제품이었을 겁니다. 왕이 입는 갑옷이니 세상에 그보다 좋은 것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될까요? 골리앗보다 더 좋은 옷을 입으면, 더 좋은 무기를 들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골리앗은 그런 방식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들이 도리어 방해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의 것들로, 세상을 이기려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골리앗은, 그렇게 이기는 상대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놨습니다. 갑옷도 칼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냇가에 가서 돌멩이 몇 개를 들고 왔습니다. 주먹만 한 물맷돌 다섯 개를 주머니에 담아온 겁니다. 그리고는 막대기 하나와 물매를 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골리앗이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그러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에게 주리라!” 그 거대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살기등등해서 외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지만 다윗은 그런 골리앗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5절)”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나온 겁니다. 만군의 여호와! 세상의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이름으로 나온 겁니다. 다윗은 막대기를 믿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절대로 물매 던지는 실력을 믿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그런 것들을 믿고 나왔다면 골리앗을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만 믿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외쳤다 :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6절~47절)”
이게 믿음입니다. 이것이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더미 같은 문제를, 두려움을 근심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절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믿음 앞에서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그 대단한 골리앗도 다윗의 믿음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골리앗이 쓰러지자 용기백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이번에도 믿음으로 승리한 겁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한 겁니다.
힘드십니까? 어렵습니까? 골리앗 같은 세상 앞에서 주눅 들고 기죽어 두려워 떨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골리앗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비웃고 조롱하는 여러분의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돈인가요? 권력입니까? 지식입니까? 실제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가혹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다는 젊은 사람들의 탄식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정말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골리앗 같은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벌면 될까요? 공부를 많이 하면 될까요?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쓰러뜨렸는지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갑옷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도 얼마든지 갑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갑옷을 임금의 갑옷을 가장 좋은 갑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좋은 무기를 들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무기를 임금의 무기를 가장 좋은 무기를 들고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벗어버렸습니다. 임금의 갑옷도 임금의 투구도 임금의 칼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돈이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오직 그 이름만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승리합니다. 그래야 골리앗 같은 세상에서 다윗 같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 3:8~9)”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그 한 분이면 우리는 충분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눅 들지 마십시오. 그러니 기죽지 마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믿음으로 세상에 나가십시오. 이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 승리하십시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위대한 승리자가 되라
>성경본문|
삼상17장 45절 ~ 49절
……………………………………………………………………………………………………………………………………………
>주 제|
승리
……………………………………………………………………………………………………………………………………………
>출 처|
최낙중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
※글씨확대- ctrl + 마우스휠
사람들 가운데는 이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긴 선수들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군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는 사탄의 유혹을 대적하여 물리치고 자기 속에 있는 죄악과 싸워서 이기는 자, 이기는 자들만을 위해서 예비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세상은 싸움터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악한 마귀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아무나 와도 좋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죄인을 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죄인을 들어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예수 믿고 변하여 새 사람된 사람만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만 둘 다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새사람만 들어가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사탄, 죄악세상과 싸워 이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내용은 어린 목동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 이긴 이야기 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에베소 단님이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두 진영 사이에는 골짜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 가운데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으니 키가 무려 2m85cm가 되고 머리는 놋투구를 썻고 몸에는 금속조각들로 고기 비늘 같은것들을 붙인 갑옷을 입었습니다. 그가 가진 창이 얼마나 컷던지 창자루만 베틀채 같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군대 중에는 그와 맞싸울 장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며 또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겼습니다. 그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기가 질렸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또 숨어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곳에 왔던 소년 다윗이 그와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사울이 그아이를 말리며 “너는 그와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는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 소년다윗이 왕에게 이르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짐승중 하나같이 되리이다.” 하니 사울왕은 그의 용기있고 믿음있는 말을 듣고는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원하노라.” 하고 사울이 저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니 다윗의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키 큰 어른의 옷이 나이 어린 소년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복을 입고 칼을 군복위에 차고 걸어보니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군복을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평상복 그대로 시내에서 매끄러운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 목자의 개구에 넣고 손에 물메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골리앗이 그를 가소롭게 보고 하는말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하고 자기가 믿는 잡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말하기를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짐승들에게 주리라” 말하니 다윗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가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내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오늘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고 그를 향하여 마주 치며 그 앞으로 빨리 달려 나가면서 주머니 속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물메로 채워 던졌습니다.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블레셋 군대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울왕의 군대는 다윗의 대신 싸워주신 그리고 싸워서 이기는 그 이김으로 인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인 한 토막의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악이고 악의 세력이고 또 사탄의 역사입니다. 십자가 군병된 우리 크리스챤들이 적과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완전한 무기를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것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과 담대한 믿음입니다. 임전무퇴. 전쟁에 임하는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무기라는 것이 칼과 창, 그리고 말과 병거에 불과했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군사무기가 많이 발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무기를 마귀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 입니다. 실제로 세계 전쟁사 가운데 기도로써 승리하는 멋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세계1차대전 때 영국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알렌비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터키군이 점령하고 있던 그 도성을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림으로 승리하는 그런 멋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했을 때 터키군은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나서 그들은 두손을 들고 항복을 하게 됐고 영국군은 알렌비 대장을 선두로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찬송을 부르면서 성안에 들어갔던 일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어두운 세력이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연말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해서 어두움의 죄악과 싸워 이기는 승리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위대한 승리자가 되라
삼상 17:45-49 / 최낙중목사
사람들 가운데는 이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긴 선수들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군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는 사탄의 유혹을 대적하여 물리치고 자기 속에 있는 죄악과 싸워서 이기는 자, 이기는 자들만을 위해서 예비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세상은 싸움터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악한 마귀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아무나 와도 좋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죄인을 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죄인을 들어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예수 믿고 변하여 새 사람된 사람만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만 둘 다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새사람만 들어가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사탄, 죄악세상과 싸워 이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내용은 어린 목동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 이긴 이야기 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에베소 단님이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두 진영 사이에는 골짜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 가운데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으니 키가 무려 2m85cm가 되고 머리는 놋투구를 썻고 몸에는 금속조각들로 고기 비늘 같은것들을 붙인 갑옷을 입었습니다. 그가 가진 창이 얼마나 컷던지 창자루만 베틀채 같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군대 중에는 그와 맞싸울 장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며 또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겼습니다. 그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기가 질렸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또 숨어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곳에 왔던 소년 다윗이 그와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사울이 그아이를 말리며 “너는 그와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는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 소년다윗이 왕에게 이르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짐승중 하나같이 되리이다.” 하니 사울왕은 그의 용기있고 믿음있는 말을 듣고는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원하노라.” 하고 사울이 저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니 다윗의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키 큰 어른의 옷이 나이 어린 소년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복을 입고 칼을 군복위에 차고 걸어보니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군복을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평상복 그대로 시내에서 매끄러운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 목자의 개구에 넣고 손에 물메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골리앗이 그를 가소롭게 보고 하는말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하고 자기가 믿는 잡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말하기를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짐승들에게 주리라” 말하니 다윗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가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내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오늘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고 그를 향하여 마주 치며 그 앞으로 빨리 달려 나가면서 주머니 속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물메로 채워 던졌습니다.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블레셋 군대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울왕의 군대는 다윗의 대신 싸워주신 그리고 싸워서 이기는 그 이김으로 인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인 한 토막의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악이고 악의 세력이고 또 사탄의 역사입니다. 십자가 군병된 우리 크리스챤들이 적과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완전한 무기를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것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과 담대한 믿음입니다. 임전무퇴. 전쟁에 임하는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무기라는 것이 칼과 창, 그리고 말과 병거에 불과했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군사무기가 많이 발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무기를 마귀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 입니다. 실제로 세계 전쟁사 가운데 기도로써 승리하는 멋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세계1차대전 때 영국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알렌비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터키군이 점령하고 있던 그 도성을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림으로 승리하는 그런 멋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했을 때 터키군은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나서 그들은 두손을 들고 항복을 하게 됐고 영국군은 알렌비 대장을 선두로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찬송을 부르면서 성안에 들어갔던 일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어두운 세력이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연말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해서 어두움의 죄악과 싸워 이기는 승리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신앙과 용기
삼상 17장 45~49절 / 박인걸목사
감리교에 박기창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이 군에 입대해서 졸병으로 군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통지가 온 것을 보니 직업군인으로 장기 복무를 지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언제 군복을 벗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즉시 중대장한테 사정했지만 안 되고 대대장을 찾아가도 고칠 도리가 없었습니다. 안타까워서 몹시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 연대에 사단장이 순시 차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가 사단장이 순시를 마치고 돌아갈 때 지프차 앞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가로막아선 다음 차가 멈추자 무릎을 착 꿇고 “사단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다행히 때리지도 않고 걷어차지도 않고 “나중에 사단장실로 찾아 와!”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찾아가는데, 일등병 주제에 하늘같이 높은 사단장이 만나줄 것 같지가 않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더니 “들어오라”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장기 지원병이 된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당장 전화를 걸어서 고쳐 주었다. 이후 군복무를 잘 하고 제대했다고 합니다.
“의(義)로운 것을 보고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혹은 보신(保身)을 위해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논어는 말했고 “돈이 없어졌을 때는 인생의 절반을 잃게 되고 용기가 없어졌을 때는 모두를 잃게 된다.”라는 유대인의 격언이 있습니다.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인 캐스데이리라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입이 너무 큰데다 이가 뻐드렁니여서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무대에 서려면, 더구나 노래를 하게 되면 자기의 얼굴, 특히 입을 주시할 텐데 말입니다. 그녀는 보기 흉한 이를 가리려고 애를 썼으며, 입을 작게 보이려고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폼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인기 있는 가수의 흉내를 냈었는데 그 바람에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숨기려고 애쓰지 말아요. 입을 마음껏 벌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내세요. 사람들은 숨기려고 하지 않고 당당한 당신을 사랑하고 찬사를 보내줄 거예요. 당신의 목소리는 참 훌륭해요. 흉내 내지 마세요."그녀는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끝내는 유명한 스타가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 약점이 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애물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 약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상실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이 약점을 극복한 사람들은 의외로 더 값지고 풍성한 것들을 차지하고 누리며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으며, 또 그 단점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용기란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라고 합니다. 어떤 적이나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떤 환경과 처지를 만나도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견디거나 싸워 이기는 것을 신앙의 용기라고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이 신앙의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넉넉한 인물입니다. 주전 1,000년경에 하나님의 선민국가인 이스라엘은 왕정 제도가 수립되고 사울이 초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정세가 심히 불안하여 주변국들과 전쟁을 빈번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마침 블레셋이 쳐들어와 큰 싸움을 하고 있는데 골리앗이라는 장수는 워낙 힘이 세고 강하여 누구도 그와 맞붙어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골리앗은(Goliath) 가드 사람, 블레셋 장군으로서 키가 육 규빗 한 뼘, 약 2m90Cm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머리에는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는 자그마치 놋 5천 세겔, 약 1백96kG이나 됩니다. 다리에는 놋 경갑을 찾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매었는데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으며 창날은 철 6백 세겔이나 된다고 했습니다(삼상17:4∼7)최홍만이보다 훨씬 큰 장수를 누가 감히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17세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대항하여 물 매돌 한 방에 끝장을 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에는 무엇보다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흔히 말들 하는“백전불굴의 용기”를 가지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으며 어려움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오늘은 골리앗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각가지 사회 환경들로부터 다윗과 같은 신앙의 용기를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용기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삼상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11절에 보면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 하니라.”고 하였고 24절에 보면“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이 너무나 크고 무서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담대함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확신합니다.47절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고 인간이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어린 다윗은 일찍이 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다윗의 이런 신앙은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하였으며 다윗의 조상 가운데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열 두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한결같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 백성의 편을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한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두렵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병이 무섭습니다. 수술도 무섭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두렵습니다. 강호순이 같은 사람이 만날까봐 두렵습니다. 강호순이 얼굴을 봐서는 누가 그 사람이 살인강도라고 하겠습니까?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 여성들이 따를만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걸려들면 거미줄에 얽힌 나비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성들이여 밤길을 조심하십시오. 옆에 남자를 조심하십시오. 아무나 차를 태워 준다고 타지 마십시오. 영원히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망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는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재산도, 명예도 업적도, 친구도, 그동안 누렸던 모든 행복도 모두 잃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실직이 무섭습니다. 회사 사정이 나빠져서 구조조정을 하고 직원을 감원하고 명 퇴를 강요할 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가정이 있고 매월 정기적인 월급으로 살던 가정들이 실직으로 가정이 어려워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다른 때 보다 일찍 출근하고 상사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며 몸을 한 없이 낮추고 매사에 성실하게 행동하라는 지침을 어느 전문가가 신문에 실을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언제나 풍랑 이는 바다와 같아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언제나 두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회가 계속 성장해야 하는데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나. 성도 수가 더 감소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들입니다. 마귀는 언제든지 마음 언저리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두려움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7:21)“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사54:4)“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사41:10) 고 하십니다. 개역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108회 나옵니다.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은 주님이 우리의 인생길을 책임지고 보장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불안을 주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낙심하게 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모두 내어 맡기십시오. 인생의 성패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2) 용기란 적을 이긴다는 자신감입니다.(삼상 17:45)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자신감 있게 나갔습니다. 다윗은 고도로 훈련 된 실력도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아버지 집에서 목동생활로 잔뼈가 굵었습니다. 들에 양을 몰고 나가면 늑대다 들개 들, 사자가 곰 같은 맹수들이 양을 잡아먹으려 하면 멀리서 맹수들을 죽이고 자신의 양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물매를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틈만 나면 물매 던지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던졌던지 백발백중이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목자들이 있었지만 다윗 만큼 물매를 잘 던지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매던지기 전국 대회를 하면 일들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양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또 하나는 실력을 쌓은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농경사회와 다르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전문가라는 뜻은 그 분야에 실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이 실력을 취득합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나 한국의 박세리, 김미현, 최경주 같은 사람들은 남다른 연습과 노력으로 출중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번 우승을 하고 많은 상금을 탔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듣는 김연아 선수를 보니까 코치가 등에 줄을 매고 수천, 수만 번을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부러지고, 멍들고, 다치면서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학업도, 직장생활도, 사업도, 전문가도, 어떤 일을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다윗은 돌멩이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갔는데 네 개는 스페아였고 실제로 써먹은 것은 한 개 입니다. 단 한 개를 얼굴 전체를 쇠로 마스크한 골리앗을 눈과 눈 사이의 이마를 명중시킨 것입니다. 마치 100미터 거리의 양궁 과녁 10점짜리 까만 렌즈를 마치는 것 같은 고난도의 돌팔매질에 성공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이렇게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자신감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한 신앙은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기술이 출중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승리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갑옷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주겠다는 장검도 거절하였습니다. 사울이 준 놋 투구도 싫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이 평소에 하던 대로 가벼운 옷차림에 매끈한 돌멩이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가 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는 주님을 믿는 백성들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녀의 어려움을 돕지 않겠습니까? 낳아서 키우고 부모가 마지막 눈을 감는 그 날 까지 자녀들을 돕다 갑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저 높은 별을 넘어 이 지상에까지 내려오시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 속조의 제물이 되시고 장사지냈으나 3일 만에 살아나셔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들을 깨우쳐 주시고 복음의 진리를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육신적인 삶까지 모두 돌아 보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고, 지켜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으면 매사에 자신이 생깁니다. 아무리 힘든 때라도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어디가든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성령님이 주시는 용기입니다.(삼상 16:13)
“이날 이후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다윗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입니다. 다윗 마음속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생겼고 골리앗 같은 거인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특히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는 골리앗에 대하여 비분개강(非分開講)하였고 거룩한 의분으로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골리앗과 1:1의 싸움에서 한 방에 넘어트리고 그날 전투를 이스라엘의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하였고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들 심령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고, 믿는 자들의 가정에 함께 하시며 우리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일찍이 다윗과 함께 한 하나님은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시며 전쟁할 때 도우 사 승리하게 하시고 정치할 때 바른 판단과 결단을 하게 하시고,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정책을 펴 나갈 때 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의 정치생명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다윗을 도와주었고 다윗이 위대해 진 까닭은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담대하게 하시는 용기가 있어 힘차게 추진하였고 하는 일 마다 성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올렸고 자신의 삶은 풍성하였던 것입니다.
마취 전문의사가 간호사들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마취 준비가 끝나고 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 밖의 날카로운 비명, 긴급 상황을 알리는 벨소리, “비상! 비상, 모든 장병은 하는 일을 멈추고 급히 집합하라.” 확성기를 통한 부대장의 명령이 내렸습니다. 이날이 1969년 5월18일 육군 제15육군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병사 한 명이 폐결핵, 우울증, 불면증, 만성위염과 신장염, 위 십이지장 궤양을 앓고 있었습니다. 매일 중환자실을 드나들었습니다. 몸무게는 48kg, 너무 몸이 허약했습니다. 앉아 있다가 갑자기 졸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수술 중 죽어도 괜찮으니 수술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병원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한 비상 상황으로 돌연 수술은 취소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수술을 하려 하였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병사는 기도하다 죽겠다는 각오로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37일 만에 수술 없이 완전히 치유됐습니다. 성령의 불이 강하게 임하면서 육군 병원에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목사가 됐습니다. 그분이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봉천동 해오름교회 최낙중 목사님입니다. 3,000명이 넘게 모이는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면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했고 그날부터 다윗은유명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이 이름을 위하여 살면 하나님이 유명하게 만드시며 위대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이후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시려고 광야의 연단을 시킨 후 이스라엘의 왕으로 크게 성공하였고 정치가, 군인, 문학가, 음악가, 영적 지도자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입니다.
도전하는 새해
삼상 17장 45~50절 / 조상호목사
시중에 이러한 유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독립투사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에게 사정을 합니다. “모세 선배님, 우리가 해방된 지 50년이 되었는데, 일본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된 과학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과학자 5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래서 과학자 5명이 한국 땅에 오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 뉴톤, 에디슨,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 이 다섯 사람입니다.
가장 먼저 갈릴레오는 자기가 연구한 것에 대해서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그가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하다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 현실에 대해서 입바른 소리만 하다가 연구지원금이 중단되어 더 이상 연구를 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한강 주변에서 공공 근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아이삭 뉴톤은 한국에 와서 모 대학교의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졸업논문을 제출했지만, 심사위원인 대학교수들이 오히려 뉴톤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여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논문심사 결과를 손꼽아 기다리던 뉴톤은 영장이 나와 지금은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발명을 많이 해서 특허를 받으러 갔더니, “당신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아서 안돼!”라고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은 대학을 나와 취직을 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작고 몸매도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시집이나 가라고 구박만 받고 있더랍니다. 마지막 남은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잘 하지 못해 계속 대학에 떨어져 만년 재수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머가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주변 상황으로 인해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실망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들먹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현실의 벽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그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동서남북, 앞뒤좌우 어디를 봐도 모든 것이 다 막혀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산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2003년도를 보내고 새롭게 2004년도를 시작하는 새해 첫날 첫 시간에 <도전하는 2004년>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블레셋과의 전쟁이 치열했던지 이스라엘 왕인 사울왕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계속 밀리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군대에 정쟁에 능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골리앗입니다. 4~7절을 보면 그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큰 거인이었습니다. 신장이 무려 6 규빗 한 뼘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거의 3미터에 육박하는 거인이었습니다. 이러한 큰 몸집의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다니던 학교에 유명한 농구선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학농구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하기도 하고, 실업팀들과 겨루는 농구대잔치에서도 실업팀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205Cm로 당시 한국 농구선수 중에 가장 큰 한기범 선수라든지 197Cm의 김유택 선수 같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농구팀 전용버스에 문제가 생겼는지 농구선수들이 교직원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과 함께 교직원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선수들이 덩치가 크니까 좌석 하나에 한 명씩 앉아 갑니다. 뿐만 아니라 긴 다리 때문에 다리들을 버스 중간에 있는 통로로 내놓고 비스듬히 앉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더 놀란 것은 버스에서 함께 내리고 나서 선수들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저도 작은 키는 아닌데, 선수들 가슴 정도밖에 미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얼굴을 돌려 그들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그들 앞을 지나친 후, 너무 궁금해서 살짝 뒤돌아보니까 꼭 산들이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2미터가 조금 넘는 선수들이 이 정도인데, 3미터 정도의 골리앗이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또 그는 자기의 신체만 믿고 전쟁터에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치밀하게 전쟁에 대해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하체에는 다리 보호대를 다는 등, 어느 한 곳도 빠뜨리지 아니하고 온 몸을 가렸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것도 없이 맨 손으로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험할 때에 사용하려고 등 쪽에 단창을 매달아 준비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모습의 골리앗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도전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
사실 우리 인생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을 앞에 두고 사울 왕은 백성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이제 이스라엘에 사는 그 누구라도 골리앗만 꺾을 수 있다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새롭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귀족으로 살았든지, 아니면 평민으로 살았든지 관계없습니다. 설혹 그 사람이 종이나 노예로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골리앗과 싸워보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을 향해 고함이나 한번 질러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골리앗과 싸워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단지 거인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거인을 보고 자기 자신들을 보니까 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 앞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도전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도전하는 사람만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안 되는 이유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신중한 사람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그러한 사람은 비관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생 동안 ‘안 되는 이유’만을 반복해서 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도전해서 실패 볼 수 있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되는 배움이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2004년도에는 무엇을 하든지 미리부터 겁먹지 말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비판하며 용기를 꺾는 사람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요기를 팍팍 꺾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큰 형 엘리압은 다윗을 가리켜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는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서 큰 맘 먹고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시도하는 사람의 기를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엘리압처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판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든지, 약간 교류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낙심케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현대교육방법의 잘못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육은 약점을 찾아내는 훈련만을 많이 시키고 있습니다. 주로 비판하는 것을 위주로 어느 학자는 이렇고, 어느 학자는 저렇다고 하면서 비교하고 비판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방법입니다. 물론 건전한 비판은 학문을 발전케 하고 사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게는 도전정신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날카로운 칼을 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고유의 것을 주장해야 하는데, 자기가 찾은, 자기가 개발한, 자기가 깨달은 것을 주장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냅니다. 그러나 약점을 찾아내서 들추어내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오히려 죄성에 기인한 특성입니다. 가끔 주위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잘 찾아내는 것이 사명입니다.”라고 말을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약점을 들추어내는 것은 마귀가 가져다 준 참소입니다. 현대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니라, 장점을 찾아내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탁월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특징은 비판주의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불러 옵니다. 비판하면 비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7:1)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상대방에 대해 가했던 과도한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하면 비판한 만큼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4년도에는 남들을 비판하는 자가 아닌, 남들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삶을 사기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부정적인 눈과 입술을 버리고, 긍정적인 눈과 입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으로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도전할 마음조차 먹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린 소년 하나가 도전자로 나섰습니다. 바로 양치기 소년 다윗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주저하고 있는데, 그가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에게 말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저 골리앗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사울왕은 두려워서 떨고 잇는데 반해, 어린 소년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다윗은 골리앗과 맞짱 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 왕이 보기에 다윗은 아무래도 챔피언 감이 아니었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챔피온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에게 골리앗과의 대결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입고 있던 군복을 입히고 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주고 갑옷을 입히고 자신의 칼을 주었지만, 다윗에게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움직이는데 심한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사용하던 막대기 하나 들고 시내에서 주운 다섯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십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를 아십니까? 46절과 47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골리앗에게 도전했습니다. 첫째는 외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블레셋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골리앗 앞에서 믿음이 부족하여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어떤 무기를 가지고 나아갔습니까? 믿음의 무기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다윗은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리앗의 몸집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골리앗의 갑옷이나 놋 투구나, 베틀 채 같이 어마어마하게 큰 창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골리앗이 비장의 무기로 숨기고 있는 단창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던 목사님이 독일군의 맹폭격 때문에 사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교우 가정에 머물며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이미 중립을 선언한 상태이지만, 독일군은 개의치 않고 폭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자,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 집 딸아이가 잘 잤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비행기의 폭격이 두렵지도 않니?”목사님의 이 질문을 받은 어린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무시는데 저까지 안 잘 필요가 있나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고백으로, 그 목사님의 목회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안 주무시는데(시편 121편 4절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라.“를 염두에 둔 표현) 저까지 안 잘 필요가 있나요?”하는 어린 소녀의 고백이 그 목사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낙심 가운데 빠져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낙심은 반비례합니다. 본문의 어린 소년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당당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만 믿고 무모하게 골리앗에게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당당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인 골리앗은 자기 힘만을 의지하고 싸움터에 나간 반면, 어린 소년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싸움터에 나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단 하나의 물매 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그를 쓰러뜨리고, 나중에는 골리앗이 차고 있던 칼로 그의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저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올 한해에 한국의 국민은행에서 광고 컨셉으로 정한 것처럼, ‘Leader is Challenger’라고 생각합니다. 리더는 어려움에도 고난 속에서도,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도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서두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토마스 에디슨의 학력은 초등학교 3개월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초등학교 중퇴자나 실패자라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들로 현대 과학기술의 기초를 세운 발명가 에디슨으로 기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상취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율 40%밖에 안 되는 고환암으로 투병하던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을 사람들이 암 환자라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어서 세계 최고의 사이클 대회인 프랑스 도로일주 사이클대회(투르 드 프랑스) 5연패를 이룬 위대한 선수라고 기억합니다. 그는 모든 스포츠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올해의 남자선수’에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올라, 2년 연속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많은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큰 형 엘리압과 같은 가족들의 예상과 달리, 인간관계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또 사울 왕의 예상과 달리, 지도력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골리앗의 예상과 달리, 능력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4년도 새해에는 문제의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닌 다윗처럼 믿음으로 당당하게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만들어놓은 각종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승리케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현실에 안주해서 안 되는 것만을 앞세우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하십시오. 골리앗은 무너질 것입니다.
생명같이 귀한 우정을 나누는 관계
삼상 17장 55절~18장 5절 / 이명규목사
한국의 사상가였던 고 [함석헌] 선생의 글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미래와 현재의 고독과 죽음의 경우에도 생각과 행동이 떨어지려고 해야 떨어질 수 없는 참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생명적 친구를 갖고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실로 깊은 감명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 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독일의 시인 [에센바흐]는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는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사무엘상 18장 1절에 다시 말하기를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18장 3절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사랑이라는 말은 아하브(kh;a')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 [아하브]라고 하는 사랑은 신약에서는 [아가페]라고 하는 사랑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아가페는 스톨게라고 하는 혈통적 사랑과 구별되고, 필레오라고 하는 우정과도 구별되고, 에로스라고 하는 낭만적인 사랑과 구별되는 곧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여진 말입니다. 희생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정은 우리 생애에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축복입니다.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아론과 훌이 있었고,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다니엘에게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히브리 세 청년이 베드로에게는 요한이 바울에게는 바나바 디모데 실라 누가와 같은 진정한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전도서4:9-10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윗과 요나단이 어떻게 이런 우정을 세워 나갔는가를 보면서 우리도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생명같이 사랑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같이 보면서 우리 모두가 그런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을 세워가기 위해서는)
1.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우정을 갖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는 태도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생명같이 사랑한 우정을 나누는 관계가 된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요 왕위를 계승할 자요, 용사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무명인이요, 평범한 가정 출신의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버지에게도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고, 형들도 다윗을 상당히 멸시했습니다.
시편27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은 그리 훌륭한 가정 배경도 없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이런 신분적인 차이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지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던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준 공로자였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18장 7절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며 칭송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울왕은 마음이 불쾌하여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잠정적인 라이벌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정을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출신, 가문, 직장, 학교 등의 배경을 통해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교회를 진멸하기 원했던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에도 아무도 사울을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나중에 위대한 선교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로마서 15:7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실 때 그리스도로 인하여 무조건 받아 주셨습니다. 사랑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우정을 세워가기 위한 첫 번째 원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2.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요나단과 다윗이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을 나눈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18:1절 말씀입니다.
“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연락되어’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는 ‘to knit'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같은 성질의 것이 함께 짜여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요나단과 다윗 간에 마음이 일치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결탁되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우정이란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119:63절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라는 말씀을 볼 때 요나단과 다윗은 용기를 가진 믿음의 용사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말씀을 지키는 믿음이 같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 받아들여야 하지만 특별히 연락되는 같이 잘 짜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쉽게 마음이 연락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의 우정은 더욱 놀랍게 이루어져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속담에도 '부모를 팔아 친구를 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친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친구는 어릴 때나 젊을 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언27:17절 말씀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
터키 속담엔, ‘그 사람됨을 알고자하면 그의 친구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는 제 2의 재산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그 어떤 재산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교회가 될 뿐 아니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생명 같이 사랑하는 우정을 나누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병법의 기본은 적을 흩어버린 다음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교회를 약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교회를 분열케 만든 다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틈타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하나됨을 막는 요인 중의 하나가 각자의 자존심일 가능성이 큽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것을 ‘으깬 감자’라고 말합니다. 감자를 완전히 으깨야지만 하나가 됩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안 보려고 하고 내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까 하나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희생입니다. 자신이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유익이 없다 해도 다른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다고 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길입니다.
일본의 여류 작가 중에 [미우라 아야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인데 이분이 결혼을 하고 난 다음 부업으로 구멍가게를 하나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아주 친절해서 그런지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되었나봅니다. 매일 트럭으로 물건을 받아와도 금세 다 팔려버렸습니다. 너무 장사가 잘되니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장사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를 잘 믿는 그 남편이 [아야꼬]한테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소, 우리 가게가 너무 장사가 잘 되어 우리 이웃의 가게들이 문을 다 닫을 지경이 되었고,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소,”
그러면서 부부가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게만 잘 되어서 가장 소중한 이웃과의 사랑의 줄이 끊어지는 일이 없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의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런 다음날부터 가게에는 상품을 3분의 1 정도만 갖추어놓았다고 합니다. 구색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가게가 다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시간이 좀 남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이 [미우라 아아꼬]가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빙점]입니다. 이 소설이 현상 응모에 당선되어 가게를 꾸리면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하고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 됨을 지키면 그 다음에 우리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부분에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 되는 것을 막는 마귀의 모든 유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의 관계를 키워가는 성도들이 되고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같이 사랑의 관계를 키워가는 세 번째 원리는)
3. 서로 신실해야 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음직하다’ 혹은 ‘믿을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믿을만하다는 것은 약속을 잘 지킬 때에 성립되는 말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고 난 후 언약을 맺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그 당시에 언약을 하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친구로서 공개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우정에 정말 충성심이 있는가, 서로에게 약속한 대로 신실한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시련기가 오게 됩니다.
사울이 요나단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로부터 다윗에 대한 모든 음모를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비방하고 다윗을 몰락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이 시점에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감성적으로 동조를 하면서 사울과 함께 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그의 아버지인데다 사실상 다윗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인기와 명성이 오를수록 요나단의 인기와 명성은 하락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두 사람은 경쟁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인기를 상실하고 있고,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요나단은 쉽게 동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신뢰했습니다. 오히려 요나단은 다윗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을 뿐 아니라 사울 앞에서 다윗을 보호하고 변명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미래를 다윗에게 맡기며 언약을 맺습니다. 삼상20:14-15 절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하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윗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는데 도 불구하고 다윗을 경쟁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세우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신뢰하여 자신의 미래를 다윗의 손에 맡겼습니다. 자기 자녀들까지도 돌봐 줄 것을 다윗에게 부탁했습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이 언약을 잊지 않고 신실하게 지킵니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온 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안정이 되었을 때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생각하여 사울 집안의 남은 자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복하려는 줄 알고 긴장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뚝발이가 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왕의 밥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합니다. 사울의 재산을 다 찾아 그에게 돌려줍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저버리지 않고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를 어려움은 잘 다루지만 높아질 때 잘 처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필가이자 역사가인 토머스 칼라일이 말하기를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의 시절에 잘 처신하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다윗은 왕이 되고, 대 내외적으로 나라가 안정이 되었을 때 요나단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었던 것입니다.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세 번째 원리는 서로 신실해야 합니다.
(생명같이 사랑의 관계를 키워가는 네 번째 원리는)
4. 서로 진실해야 한다.
요나단은 다윗과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개방하고 비밀이 없는 진실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8:4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이 말씀 속에는 깊은 뜻과 교훈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왕자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군복과 칼과 활과 띠고 그리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줬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친구에게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자신의 삶을 숨기는 것이 없이 다 내 놓았습니다.
그들이 우정을 세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서로 간에 진정한 개방, 솔직함이,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을 다 보여 줄 때 자칫하면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며 위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또 잘못하면 이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우리가 내 삶을 개방하려면 내 자신을 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서 주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 자신을 개방할 때 위험이 따를 수도 있고, 상처 입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 우정은 한 단계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폴 투리니에] 는 그 비밀에 관리를 중심으로 한 인간 성숙의 발달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단계는 어린이의 삶의 단계로, 이 단계는 비밀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비밀을 절대로 간직할 수가 없어요. 아빠 이건 비밀이야! 해놓고 그 다음에 금새 그 비밀을 말해 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비밀을 간직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른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어른 아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춘기의 단계로, 이 단계는 비밀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춘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비밀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에게 얘기 안하고 비밀이 생겨요.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발전 단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의 자녀들은 비밀을 간직하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좋은 친구를 갖게 되면 건강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안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인의 단계입니다. 이 성숙한 성인의 단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됩니다. 저는 부부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약점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좌절도 나누고 실패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부부관계입니다. 특별한 친구죠.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이성 배우자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동성관계의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 또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고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비밀이 없이 서로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피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깊이 있게 삶을 나누는 친구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그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밀을 말할 수가 있다라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뭡니까? 신뢰에요.
신뢰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죠. 비밀을 말했다가는 큰일 나잖아요.
그런데 신뢰 할만하다! 라는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약점, 내 인생의 실패, 내가 숨기고 있는 내 인생의 갈등, 이런 속 깊은 자기의 내면을 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친구를 구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교회라는 공동체야 말로 우리가 좋은 신앙의 친구를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마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해 갖고는 그런 친구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굉장히 중요한 목표를 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Cell Church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작은 소그룹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것을 내어 놓아도 내가 비판되지 않고 오히려 이해 될 수 있고, 서로 신뢰하고 비밀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소그룹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 이런 나눔의 마당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변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눔이 없이는 안 됩니다. 이런 나눔이 없이는. 우리가 자기의 마음을 오픈 하지 못할 때, 열지 못할 때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더 깊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저는 가장 불행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생각해요.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는 그런 참극의 주인공이 였던 아돌프 히틀러. 그런데 한 히틀러의 전기 작가는 그의 불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불행은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한 전기 작가가 그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났어요. 히틀러의 친구 될만한 사람이 있느냐? 꼭 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아주 가까이 지내던 사람, 그래서 히틀러는 이 사람을 매우 중용했습니다. 군수물자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인터뷰하고 얘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런 얘기를 나중에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친구가 한 얘기에요. 그 엘버트 스피어라는 히틀러하고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었고 나중에 같이 내각의 참모로 일했던 그 엘버트 스피어 라는 사람이 한 얘기입니다. 그대로 제가 읽겠습니다.
그에게 즉 히틀러에게 단 한명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히틀러는 환상가였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했을 뿐 이였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정을 거부하였고, 매사에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는 피했다. 심지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 하는 것 조차도, 그는 거부했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의 투사체에 불과했다. 이 우정을 거부했던 사람, 이것이 바로 히틀러 의 불행이였다 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눔이 정말 건강한 우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우리 속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이러한 비밀을 나누는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우정은 깊은 의미의 우정으로 피상적인 우정이 아니라, 정말 깊은 우정으로 자라갈수가 있다. 라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비밀을 너희들과 나누겠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야.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진실되게 개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친구입니까?
어떤 친구입니까?
주일 날 와서 인사만 하는 친구입니까?
천국의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신실해야 합니다. 서로 신뢰하고 서로에게 충성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진실해야 합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고, 진정한 격려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내 옆에 있음으로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우정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교제가 천국의 삶을 누리고 천국을 경험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승리가 주는 선물
임병익목사 / 삼상 17:55-18:5
오늘은 사무엘상 17장 55절에서 18장 5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승리가 주는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의 내용은 청년 다윗이 무장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물맷돌 몇 개를 가지고 당시 현대 무기로 완전무장한 골리앗 대장을 쳐부시고 승리했더니 온갖 선물이 쏟아져 들어 왔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져도 되는 싸움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되는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요 악의 영들에 대한 악령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되는 싸움입니다. 지면 모든 것을 잃고 승리하면 본문이 약속하는 온갖 선물이 다 쏟아집니다. 옛날 이야기 중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선비 하나가 큰 강을 건너가는 데 노를 한참 저어가다 선비가 뱃사공에게 물었답니다. 뱃사공 자네는 천문학을 아는가? 나는 천문학이 무슨 말인지도 모릅니다. 자네는 인생의 삼분의 일은 헛살았구만, 할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습니다. 조금가다가 또 자네 인생 철학을 아는가 묻습니다. 인생철학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네 인생 삼분의 이는 헛살었구만 그럽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급류가 몰아 칩니다. 그래서 배가 뒤집혔습니다. 사공은 헤엄 잘치지만 선비는 헤엄 못치고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공이 하는 말이 여보게 선비, 자네 헤엄칠 줄 아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네는 인생전부를 헛살았구만,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이 꾸며낸 이야기 이지만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조금 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겁니다. 자랑하다가 배가 뒤집혔습니다. 헤엄을 칠줄 모르니 인생을 헛사는 겁니다. 우리가 급류가 몰아치는 강을 건너가는 것처럼 세상을 살며 믿음생활할 때 믿음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헛사는 겁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온갖 선물이 있으나 실패한 사람은 모두 잃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을따라서 승리가 주는 선물에 대하여 깊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I. 영광의 선물(17:55-58)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고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고 나라는 완전히 틀을 잡고 그의 명성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시편 한편을 지었는데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의 상급이로다. (시127:3)라고 하였습니다. 이말은 우리는 사업을 하고 싶은데 할것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응답으로 사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주신 사업입니다. 이쯤되면 개업예배를 드리면서도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업은 꼭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업은 투자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투자를 많이 해야 합니다. 투자한 것이 백배 천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가진 사람은 꼭 성공합니다. 그 기업이 잘되면 성공했다하고 실패하면 망했다고합니다. 솔로몬의 시를 보면 아들과 딸이 기업이라는 겁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아들 딸을 기를 때 꼭 믿음으로 길러야 됩니다. 아들 딸을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합니다. 아들 딸들이 잘되어 성공하면 내 성공이요 실패하면 내 실패라는 겁니다. 이런의미에서 김창인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입니다. 삼 남매를 받아 기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업을 받았습니다.그래서 아들 딸들이 잘되면 상급이되기도 합니다. 영광이 부모에게 돌아옵니다. 55절에서 58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왕이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움을 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원수의 나라입니다. 몇 천년을 두고 앙숙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다윗은 아주 앳된 소년인데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습니다. 형 셋이 전쟁에 나갔는데 먹을 것을 가지고 형과 상관들에게 주며 편안한 지 알아보고 오라는 겁니다.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은 키가 구척입니다. 창 을 들고 나왔는데 배틀채 같습니다. 어머 어마한 장수입니다. 그리고 한 번 싸워볼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는 겁니다.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거침없이 하나님을 욕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욕하면 자식은 정말 못참습니다. 우리 아들 녀석이 중학교 3학년때 선생님이 "너는 목사의 아들인데 왜 이래" 그랬더니 씩씩거리며 잘못했으면 내가 잘못했지 우리 아버지는 왜 건드리느냐고 야단이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내가 가서 해치우겠다고 합니다. 골리앗은 당시 현대 장비로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다윗은 갑옷도 하나 입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자나 곰이 양을 헤치러 오면 물맷돌로 때려잡던 잡았던 실력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나갔습니다. 물맷돌로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골리앗이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빼서 목을 잘랐습니다. 그때 사울이 저렇게 훌륭한 청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오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기뻐합니다. 사울왕 앞으로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가지고 나갔을 때 사울이 묻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냐고 아버지를 묻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훌륭한 아들의 승리와 성공후에 영광은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다읫의 승리의 영광을 아버지가 다받게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것 모두 승리 성공해도 믿음에 실패하면 그 사람은 실패한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인생이 승리하고 믿음도 승리합니다. 결국 다윗이 승리하고 받은 선물은 영광입니다.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승리하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II. 사랑의 선물(18:1-4)
사랑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첫째로 관심이 사랑입니다. 저 남자혹은 저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 날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내 남편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을 안 가지면 그것은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입니다. 머리방에 가서 현대 스타일로 파마를 하고 왔는데도 남편이 몰라보고 관심도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 머리 멋진데 하면 사랑의 고백이라고 보아도됩니다. 관심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이해를 해줍니다. 또 책임을 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은 다 내탓이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전부 당신의 탓이라 그럽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되면 주는 겁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겁니다. 교회에서 사랑없다하는 사람은 절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받을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만많고 남의 조상에 한 번을 안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주는 겁니다. 18장 1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합니다. 마음이 통하면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됩니다. 통하지않는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2절에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울왕도 다윗을 사랑합니다. 집에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는 겁니다. 둘째로 사랑은 헤어지기 싫어합니다. 항상 붙어 있고 싶어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옆에 두고 싶어 하십니다. 3절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하게 되면 언약을 맺습니다. 4절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네쩨로 사랑은 주는것입니다.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에게 요나단이 모든 것을 줍니다.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줍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받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패배했다고 하면 이런 선물은 없었을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온갖 선물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천년동안 나라가 없어 가는 곳 마다 멸시와 천대, 죽음을 당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조상들이 살던 땅, 하나님께서 허락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옵니다. 그곳에 살던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 1차 중동전쟁, 제 2차 전쟁, 제 3차 전쟁을 치르고 이스라엘 나라가 지금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웅 한 사람이 탄생했습니다. 그 사람은 애꾸눈 모세 다이안장군입니다. 독립전쟁때 눈에 부상을 당했기때문입니다. 모세 장군은 믿음이 좋고 군사전략이 능합니다. 주위에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비롯해서 아랍국가가 이스라엘을 쓰러뜨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합해 300만 입니다. 아랍국은 3억 입니다. 싸움이 안 됩니다. 또 전세계의 회교도들이 뒷받침을 해 주는데 그 사람들까지 합하면 6억이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정확하게 대답해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에 물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300만이고 아랍은 3억인데 전쟁하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뭍습니다. 컴퓨터가 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군이 우리은 하나님을 믿고 싸우겠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전쟁을 안합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이 지난 월요일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6일 동안의 전쟁을 끝내려고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래야 다음 안식일을 지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이 곧 육일 전쟁입니다. 애굽을 물리치고 수에즈운하 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꿈이요 소원이었던 예루살렘을 완전히 회복시켰습니다. 시리아 골란고원까지 가서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를 확보해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성전벽에 기대서서 얼마나 통곡하고 기뻐했습니까? 이때 모세 다이안 장군은 열세에 놓여 있는 군대를 거느리고 승리하며 영웅이되었습니다. 이처럼 승리한 자는 백성들이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합니다. 신앙의 싸움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물붓듯이 쏟아집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아이안장군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III. 자랑의 선물(18:5)
사람들 중에는 자랑을 늘어놓고 청부를 맡은양 떠들어대기도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많다고 자랑하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배운 것이 많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즉 높은자리에 앉았다는뜻입니다. 그리고 어떤사람은 미모를 자랑하면서 은근히 남을 깔보기도합니다. 사실은 별것이 아닌데도 그러니 착각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아들딸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다닙니다. 자랑할만한 자녀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자녀를 자랑하고 다니니 가관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자랑하기도합니다. 이상의 모든 자랑은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자화자찬입니다. 문제는 남이 자랑해주고 하나님이 자랑해 주어야 참자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병들어 누워서 사람 구실을 못해도 귀하게 여깁니다. 가난해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으로 꼭 대접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지만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랑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여자가 낳은자 중에 제일 큰자라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되었기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자랑거리고 민족의 자랑입니다.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18장 5절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승리하고 돌아온 청년 다윗을 요즘으로 말하면 참모총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랑합니다. 다윗이 참모총장이 된 것을 왕을 시중드는 신하들도 자랑합니다.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습니다. 온 백성들이 군대의 장을 삼은 것을 그렇게 자랑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도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꼈겠지만 아버지와 가정에도 큰 자랑거리 되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앞에 자랑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앞에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또 누구에게든지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기때문입니다. 즉 자랑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그는 영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또 사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선물들은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기에 영광스럽나니 여러분들은 오늘의 다윗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내것이 되게하라
삼상 17:55-18:5 / 유일무목사
1. 여러분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기회는 일생에 세 번 온다 ”
저도 살아오면서 이 말을 꽤 여러번 들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이 말을 말했는지, 왜 기회는 네 번, 다섯 번도 아니고 세 번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크고 좋은 기회가 내 일생에 여러 차례 온다는 것을 말이죠.
돌이켜 보니까 제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내 인생을 확 바꿀만한 그런 기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를 가고 학교에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와서 숙제하고 그 다음 날 또 다시 학교를 가고... 이런 일상의 반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을 때 이런 저런 기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까 어떤 기회는 그것이 나에게 좋은 기회였는지도 모르고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됐던 그런 기회도 있었습니다.
내가 만났던 기회중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기회를 저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그것이 예수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기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인생에 어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붙잡아서 성공했던 한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이 골리앗을 쳐 죽이고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담겨 있는 사무엘상 17장은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전체를 합쳐서도 가장 긴 장(章)입니다. 가장 길다고 해서 무슨 여러 가지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 한 가지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유명해서 교회를 웬만큼 다닌 분들은 물론이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은 분들조차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죠.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뛰어들게 된 배경,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력 비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하는 과정,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끝낸 후 그가 한 행동 특히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면서 둘이 주고 받았던 말까지 이렇게 길게 이렇게 상세하게 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무엘서 기자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를 이렇게 공을 들여서 전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단순한 싸움 아니라 이 싸움을 통해서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데뷔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합니다. 저 시골 들판에서 양을 치던 무명한 목동 outsider 가 이스라엘 역사의 한 복판에 서게 되는, 다윗이“인싸”가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왕이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다윗이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베들레헴 촌구석 들판에서 양을 치던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늘구멍 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단 일을 시작하시면 하나님이 일을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일단 일을 진행하시면 하나님은 그 일을 끝까지 성취하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람 편에서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말도 안 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왕이 되는 첫 단추를 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중요했던 거죠. 그래서 사무엘서 기자는 길게 그래서 상세하게 기록했던 거죠.
여러분 하나님은 다윗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 모두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기회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러분 이것 아세요. 기회가 우리에게 올 때 가면을 쓰고 옵니다. 기회가 우리에게 올 때“내가 기회입니다. 나를 붙잡으세요”그렇게 동네방네 떠들면서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금방 붙잡을 수 있죠. 그런데 기회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가면을 쓰고 옵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그것이 기회인지를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기회였던 거죠.
저는 특히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골리앗이란 가면을 쓰고 찾아온 하나님의 기회를 다윗이 어떻게 자신의 기회로 잡을 수 있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3. 1) 첫째,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양을 지키는 일에 하루 하루 성실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다윗이 평소에 양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그가 했던 물매돌 던지는 연습이 쌓이고 쌓여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결정적인 기회가 됐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막대기와 물매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40절입니다.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
이건 전쟁터에서 싸우러 나가는 용사의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더욱이 상대방은 천하장사 골리앗입니다. 본문 4절서부터 7절까지를 읽어 보면 골리앗은 키서부터, 그가 입은 갑옷 그리고 자기 앞에 방패 든 사람까지..그 어느 곳 하나 공격할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완벽한 방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수 앞에 다윗이 막대기 하나, 물매돌 5개를 들고 나간다구요? 이게 말이 됩니까...이것은 말 그대로 목동이 양을 지키러 나가는 모습입니다. 실제가 또 그렇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늘 그가 하던대로 사자나 곰을 잡으러 간다고 생각하고 나왔습니다. 34-35절, 다윗의 말을 들어 보세요.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다윗은 왜 물매돌이 5개 입니까. 물매돌을 1개만 준비하면 안 될까요? 다윗이 물매돌을 하나만 준비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가 있었는데 다윗이 믿음이 없어서 5개까지 준비했던 것을 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다윗이 물매돌을 5개를 준비했던 이유는 평소에 다윗이 양을 지키면서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그 새끼를 물어가면 다윗이 그것을 따라가서 새끼들을 건져내기 위하여 물매돌을 던지는데 보통 5개를 던지면 그중에 한 개는 정확히 맞췄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물매돌을 다섯 개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한 개만 준비하면 믿음이고 다섯 개를 준비하면 믿음이 아닌가요...그렇게 속단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미 막대기와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그 자체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빨리 달리면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물매돌 하나를 꺼내 골리앗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 날아간 물매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물매돌은 빠를 경우 시속 270km의 속도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작은 ktx가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던진 물매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은 다윗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우연히 어쩌다가 맞춘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훈련과 연습을 통해 가지고 있는 실력을 하나님이 붙잡아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하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붙잡아서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자기가 평소에 연습하고 훈련한 물매돌 던지는 일이 나중에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될 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평소에 양을 지키는 일을 하며 그저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기회를 잡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양을 지키면서 시간을 때운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채운 사람입니다. 다윗은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내 기회로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나에게는 운명적인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불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니 나에게는 운명적인 기회가 다 끝났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이미 내 주변에 지금도 좌악 깔렸는데 내가 기회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날 동안에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대하시길 바랍니다. 자기를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준비되면 하나님이 기회를 보는 눈을 열어주시고 기회를 붙잡게 하실 것입니다.
2) 둘째로 다윗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찾아온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물매돌 5개를 던지면 그중의 1개는 맞추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준비한 그 실력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게 전부일까요.
이스라엘 군대 중에는 다윗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아뇨. 분명히 이스라엘 군대 중에는 다윗보다도 물매돌 던지는 실력이 더 나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쓰셨다는 거죠. 왜죠? 다윗은 실력도 있었지만 그 실력 위에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재능을 가졌을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재능을 키워서 쓰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이 가졌던 믿음의 알맹이가 뭐죠.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보다도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믿음입니다. 36절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다윗의 말은 골리앗을 짐승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군인들은 골리앗을 어떻게 봤습니까? 다른 군인들은 골리앗을 하나님 보다도 크게 봤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할 때 다윗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26절입니다.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
다윗은 크신 하나님의 이름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의 입에서 모욕을 받을 때 그것을 못 견뎌 했습니다. 골리앗이 컸지만 다윗은 골리앗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가면 쓴 기회가 내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처럼 보이는 코로나 백신을 맞었습니다.
필리핀은 백신을 국민들이 선택해서 맞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는대로 맞어야 했습니다.
저는 필리핀 신문 몇 개를 비교해 보면서 가능한 중국산 시노백을 피하고 미국산 화이자 백신이 많이 들어오는 때를 좋지도 않은 머리를 가지고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냥 마카티 시청에 백신 신청을 했습니다.
마카티 시청으로 부터 백신 맞으로 오라는 문자를 받고 지정된 장소로 갔습니다. 접수하는 직원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시노백 백신인데 괜찮겠냐...시노백을 정말 맞으려느냐..”
직원이“final decision”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시노백 백신 진짜 맞을 거냐?”
제가“yes”라고 대답했더니 주먹손을 마주치면서 접수를 해 줬습니다. 어쨌든지 시노백 백신을 맞고 나오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화이자를 믿었구나. 화이자 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러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없게도 하시고 있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알고 나와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5.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운이 나빠서 내 인생에는 기회가 없었다고 그래서 나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운이 좋아서 기회를 잘 잡았다고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회는 운이 아닙니다. 기회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크고 작은 기회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기회가 고난과 실패의 가면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못 볼 뿐입니다. 기회가 불가능과 황당함의 가면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못 볼 뿐입니다. 기회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가면 쓴 기회를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내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