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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지겨워..지긋지긋해.."
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드는 학생들로 북적이는 식당 건물의 뒷 편.
산을 마주하고 있는 건물 벽에 기대 앉아 조그만 잔돌맹이들을 던지며 중얼거리듯 말하던 마영은 좀 전에도 물리도록 핀 담배를
입에 물곤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찾다가 잡히지 않자 미련없이 담배를 뱉어버리곤 바로 앞으로 기어가는
달팽이를 집어 손등에 올려둔다.
"진짜 지긋지긋하게 보고싶네..나쁜새끼.."
희안과 있을땐 괜히 쌘척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던 마영이지만 수혼과 마주한 시간이 가장 많아서인지
그리움만은 희안의 이상일 것이다.
"니가 빠를까.. 임수혼이 빠를까.."
손 위에서 거의 미동 없이 얌전히 있는 달팽이를 툭툭 건들이는 마영.
그러자 달팽이가 손등을 기어 꿈틀대기 시작한다.
"임수혼도 누가 좀 툭툭 건들여 줬음 좋겠다.. 그 병신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나.."
동문에는 친구 하나 없는 마영이라 이번 수련회가 더 지루하고 의미없게 느껴진다.
그렇게 계속 달팽이를 관찰하고 있던 마영의 귓가에 들려오는 낮익은 목소리 둘.
마영은 그 목소리가 희안과 수권이라는 걸 알아채고 낮게 욕을 뱉으며 귀에 MP3를 꽂는다.
"너 진짜 정신 안차릴래? 언제까지 이럴꺼냐고!"
"..담배있냐."
"너 같은 놈 뭐가 이쁘다고 담배를 나눠 주냐. 남의 경호원 없어진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이 미친놈아.
니가 그 형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맨날 죽을 상을 하고 있는건지 그게 상식상 맞는 행동인지 도대체가..
니가 생각하는 그 새로운 사람 때문에 니 주변에서 항상 힘들 우리들 생각은 안하냐?
내가 아는 차희안은 막나가긴 했어도 이렇게 이기적인 새끼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니가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린 그 임수혼이란 사람
엄청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천마영보다 더. 우리가 니 앞에 무릎까지 꿇는 상황은 오지 않기 바랄 뿐이다
내 친구 차희안아."
열변을 토하며 주머니에 있던 담배 한가치를 건넨 수권은 헬쓱해진 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희안은 그런 수권을 보며 힘 없이 웃어보인다.
"우리병신 말도 많지. 킥킥.. 혼내지마 병신아."
"..널 어떡하니. 핸드폰은 언제 찾아올껀데. 너 연락 안되면 얼마나 불안한지 아냐 내가."
"..언제 찾으러가야 할까 수권아. 나도 모르겠어 언제 가야될지.."
"아 왜 몰라! 그냥 내일이라도 잠깐 가서 핸드폰만 받아가지고 오면 되지! 그 형 여기 근처 학교 다니는 거 같았다며.
이 근처에 학교도 몇 개 안되는데 금방 찾잖아 아니면 계속 전화해 보든가."
수권의 말에 아무말 없이 벽에 기대 서서 담배연기만 내뿜던 희안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멍한 표정으로 담배를 떨어뜨린다.
"니 핸드폰 좀 줘봐."
"전화해 보게?"
핸드폰을 받자마자 앨범에 들어가 이리저리 사진을 돌리던 희안은 해변가에서 숙소로 향하기 전 친구들이 조교들의 눈을 피해
근처 학교 여자들과 사진 찍어오기를 하며 놀던 걸 떠올리며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모야. 앨범? 갑자기 왜?"
수권의 옆에서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찍은 여학생 뒤로 보이는 그 여학생 친구들인 듯 보이는 무리쪽을 계속 쳐다보던 희안은
마른 침을 삼키곤 입을 연다.
"여기..이 뒤에 여자애가 입은 거 교복 맞지."
"그런 거 같던데? 우리 학교애도 이런 거 있잖아 기지배들 입고 다니라고 나온 바지. 우리 학교꺼는 그나마 좀 여자꺼 같은데
여기 애들꺼는 완전 남자 교복 같던데. 갑자기 교복은 왜."
수권의 말에 뭔가 혼란 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희안은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다.
"야..괜찮아..? 갑자기 왜.."
"..가야겠어."
"어딜. 핸드폰 찾으러? 이 밤에?"
"내 핸드폰 이니까 찾으러 가야지. 수혼이 형한테 꼭 물어봐야 할 것도 생겼으니까."
"뭘 물..어.."
저 끝 구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말을 끊고 시선을 옮기는 희안과 수권.
그 둘의 눈에는 정말 야산에서 막 내려온 듯 소름돋을 정도로 살벌한 표정을 짓고 걸어오고 있는 마영이 비춰진다.
수권은 낮게 욕을 뱉으며 일이 복잡해 질 것이 뻔하다는 듯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헝클였고, 희안은 아무 표정 없이 마영을 쳐다본다.
"니 핸드폰 어딨냐."
"서로 핸드폰 찾아 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거 같은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태세에 수권이 희안의 앞을 막아서며 대신 대답했고,
희안을 그런 수권에게 괜찮다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이곤 입을 연다.
"너는 모르는 곳에 있어."
"..임수혼 봤냐."
"응. 밥도 같이 먹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희안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수권과 여전히 시선을 희안에게 고정한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곤 귀에 가져다 대는 마영.
조용한 뒷 뜰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통화음이 울렸고, 계속 꺼져있던 핸드폰이 켜져있는 것에 희안 역시 전화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역시나 마지막에 들려오는 건 수혼의 목소리가 아니다.
몇 차례나 계속 통화를 시도하고 끄고를 반복하다가 딱 여덟 번째 통화에서의 연결음이 끊어질 때 쯤..
- 어..어라.. 모여..받아진건가?
낮선 남자의 목소리가 잠시 울리더니 다시 끊어져 버린 전화.
"..니 핸드폰 어딨냐."
잠긴 목소리로 묻는 마영과 자신의 핸드폰을 받은 수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들고 있던 수권의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거는 희안. 역시나 긴 통화음 끝에 들려오는 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몇 차례나 똑같은 반복이었다.
결국 핸드폰을 든 손을 축 늘어뜨리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서는 희안을 표정없이 노려보던 마영은
순식간에 희안의 얼굴을 가격한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주춤하는 희안.
이에 수권이 마영에게 달려들 기세로 다가갔지만 희안이 수권을 잡아세운다.
"넌 수혼이 형 왜 찾는거냐."
"임수혼 발톱 만큼도 모르는 너 같은 새끼한테 말해줄 생각 없는데."
"말해 줄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는거겠지. 넌 할 말이 없겠지만 난 이유가 없어. 보고싶으니까 찾는거야.
아마 수권이가 그렇게 없어졌어 이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을테니까. 말해봐. 니 이유는 뭔지."
"..당연히.."
"무조건 적인 소유욕같은 거면 이제 버려라 천마영. 수혼이 형은 이제 천씨가문 경호원도 지배인도 아니야 그냥 임수혼이지.
이유도 말 못하고 자기가 왜 그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내 행동 제지당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고
그럴 일도 없을테니까 사사껀껀 시비걸지말고."
그렇게 말하곤 수권과 함께 마영을 지나쳐 가는 희안.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스산히 불어오는 바람이 마영의 머리칼을 흩뜨린다.
"무조건 적인 소유욕이라고.."
쏟아질 듯이 검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올려다보는 마영.
"차희안 넌.. 그 무조건적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 지 모르는 거 같네. 임수혼은 우리한테 무조건적인 충성을 했으니
난 무조건적으로 찾는거다. 잘 봐. 너 같이 물렁대는 새끼가 무조건적인 날 따라올 수 있는지."
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마영은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곤 시내쪽으로 향한다.
.
.
.
"거짓말 한 니 잘못도 크다 뭐.."
주헌의 집과 멀지않은 골목 안.
집으로 돌아가던 수혼과 터덜 거리며 걸어오던 주헌이 마주쳤고, 수혼이 그저 가볍게 인사를 하곤 가던 길을 가자 주헌은
핸드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마치 자기가 더 피해자인냥 말했지만..
예상한 것 보다 더 심하게 표정이 굳는 수혼 때문에 눈치를 보며 계속 힐끔거리 주헌이다.
"야..야.. 표정 좀 풀어라. 그냥 받자마자 끊었다니까.. 아 내가 받고 싶어 받았냐..!..고.. 아씨.. 야 진짜 미안하다 됐냐!"
그렇게 말해도 안절부절 못하며 계속 수혼을 살피는 주헌과 그저 핸드폰 목록을 보며 무미건조한 표정을 내보이는 수혼.
"그리고 넌 무슨 기지배가 남자 번호밖에 없냐. 아니 뭐.. 내가 보고싶어서 본 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본 건데.. 세상에 무슨 저장 된 이름도 좆...아휴.. 말하기도 민망한 걸.."
"제 것이 아닙니다."
"그래. 니 것이 아..응? 뭐? 니 핸드폰 아니라고? 그럼 누구껀데?"
"주헌군이라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줄 수 있습니까."
"미쳤냐 약정도 걸렸고 요금도 밀렸는데. 줘 놓고 치사하게 정지시키거나 할 수도 없을 거 아니여.
게다가 다시 못돌려 받을 수도 있다매. 참나.. 그런 미친놈이 어딨냐."
주헌의 말을 듣고있던 수혼은 계속 핸드폰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입을 뗀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조용한 골목안에 울려퍼지는 수혼의 목소리.
가을날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고 수혼을 쳐다보던 주헌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너 이쁘단 말 들어 봤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군요."
"헹. 말 돌리는 거 보니까 한 번도 못들어 봤네. 그치? 하긴.. 너 같이 고목고목한 기지배가 남자친구 한 번 사겨 봤을리도 없고. 그치?"
대답없이 빤히 주헌을 올려다 보는 수혼을 한동안 내려다 보던 주헌은 이내 헛기침을 하곤 손으로 수혼의 머리를 꾹 누른다.
"그..그렇게 쳐다보면 이..이뻐 보일 줄 아..아냐?! 뭐야..여보세요?"
전화가 왔는지 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는 주헌.
전화 반대편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주헌의 친구들이 다 모여있는 듯 했다.
"나?..음...나 임수혼이랑 있슈."
- 뭐냐 너..큭큭큭..
"다..닥쳐 병신아. 끊어!"
- 야 오늘 동문 여자애들이랑 놀기로 했으니까 30분 뒤에 공터로 와. 그나마 우리 중에 봐 줄 만한 얼굴이 너 밖에 없으니까
뺄 생각 마라 집까지 쫒아갈테니까.
"미친거 아니냐.. 나 잘생긴 건 알겠는데 형님이 지금 많이 피곤해."
- 피곤하다는 새끼가 이 밤 중에 왜 임수혼님과 함께 계실까~ 응? 큭큭.. 늦지 말구 와 자기. 뿅.
"여..여보세요? 야! 아씨.."
주헌은 신경질 적으로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아무말 없이 서 있는 수혼을 툭 친다.
"야. 나 잘생겼냐?"
"원하시는 대답을 해 드릴까요. 아니면 사실대로 말씀 드릴까요."
"와 너 진짜.. 무슨 뜻이냐 이 기지배가 진짜. 아오. 그 때 너랑 같이 있던 그 놈이 나보다 더 멋있냐."
"보름달이 환하게 떳습니다."
계속 말을 돌리는 수혼을 마음에 안든다는 듯 쳐다보던 주헌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수혼의 말에 괜히 가슴이 쿵 하며
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곳에서 저 보름달을 몇 회나 더 볼 수 있을까요. 제 삶이지만 어떻게 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저에겐 부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곳은 잠시 정착하여 지내려고 큰 계획 없이 온 곳이지만 머무르는 동안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했습니다.
주헌군은 제 전학 첫 날 부터 절 못마땅하게 보시는 듯 하면서도 매번 뒤에서 챙겨주시는 덕에 마음이 참 따듯했습니다
저 보름달처럼 말입니다. 초승달 보다도 더 춥던 저의 마음이 어느덧 만월이 되었으나 저는 마음껏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떠나고 나면 이 곳 사람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헌군은 가끔 제 생각 해 주실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그 그리움이라는 것이 깊어지기 전에 떠날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저의 빈자리 때문에 아파하는 걸 반복하게 할 순 없으니까 말이죠."
싱긋 웃으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 놓는 수혼.
슬픔이 가득 차 흘러내릴 것 같이 투명한 수혼의 눈을 바라보던 주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천천히 수혼과 입술을 겹친다.
수혼이 여자라는 걸 아는 사람과의 첫 키스..
잠시 후 주헌은 정신이 들었는지 입술을 떼고 고개를 확 돌린다.
"아.. 아..그러니까...아...나는.."
"사과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모르지만 사과는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 허공에 시선을 두고 당황한 듯 보이던 주헌은 그렇게 말하는 수혼에게 다시금 시선을 옮겼고,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나 기계적인 모습과 말투에 주먹을 꽉 쥐어 보인다.
"화..안나?"
"화를 내야 할 일입니까."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주헌의 물음에 오래 전 계윤이 자신의 입술을 훔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손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댄다.
"이런 건 참.. 어렵군요."
"넌 무슨 기지배가..참..이런 상황에 그걸 대답이라고 하고 앉았냐."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말하는 주헌을 웃으며 쳐다보던 수혼은 골목 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맞네. ..여자."
그 곳엔 가로등을 등 지고 있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첫댓글 캬~~드뎌 !!!
넌..계윤이지?
글 감사합니다
수혼이의 마음은 어떤색으로 펼쳐저 있으려나.....
하루탱이님, 조는태양님, 발라드7님, 돼랑이맘님 감사합니다! 우리 수혼이가 얼른 방황을 멈추고 돌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ㅎㅎㅎ
누구일까요???
...왠지 희안이일 거 같은 예감?=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