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 제42졸업 서해권)
가을이 오면 학교가는 오봉관 신작로에 무리지어 핀 코스모스가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분홍 하양 빨강색을 칠하고 무슨 말이라도 걸어 오듯 살랑이던 코스모스들의 자태는 아득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리움으로 다가
온다. 10월 초, 추수를 앞둔 들녁은 황금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필때 쯤 이면 가락국민학교
를 시작으로 덕도, 해포, 삼광국민학교에도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이마에 흰띠를 동여매고 다른 날보다 일찍 나섰다. 밤새 살짝 비 맞은 코스모스 무리들이 한층 이쁜 모습으로 살
랑인다. 교문앞은 칡장사 아저씨와 삶은 연뿌리장사 아줌마가 선점하고있다. 흰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맨 구름
과자 아저씨의 양철통이 쉴새없이 돌아가며 연신 하얀 솜사탕을 피어낸다. 교문에 기대고 앉은 똥과자 아저씨가
피운 연탄불은 아이들의 쪽자가 올라 오기를 기다리고있고, 평소 말이없던 죽동마을 복구형 엿가락소리가 신바
람이 나는 날이 기도하다. 철지난 아이스케키통은 분주히 아이케이~키를 외친다.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는 살랑이
는 코스모스를 등지고 시루떡파는 주름많은 할머니가 앉았다. 고추잠자리 날으는 파란하늘에 뭉개구름이 눈부시
다. 만국기가 나부끼는 운동장에 들어 서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났다.
검은색 바탕에 흰줄이 두개난 팬티와 흰색러닝을 입은 나는 운동장 이쪽에서 저쪽으로 힘껏 뛰어보았다.
어제밤 내린비로 운동장 여기저기는 물이 고여 질척이긴 하나 이웃 장씨 고무신집에서 새로 사준 검정운동화가
빛나는 날이다. 운동장 교단에 올라선 문성은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국민체조로 부터 운동회는 시작되고 경
쾌한 행진곡에 열을지어 아치형 개선문으로 들어와 청군 백군으로 갈라져 앉았다. 응원단장 6학년 형의 "백군이
겨라" 청군이겨라 ~``~ 외치는 선창구호가 우렁차다. 이날은 선생님들도 주름잡은 흰색운동복에 흰색 창모자를
쓰고 있다.
학년별 달리기 출발선에 선 우리는 이태호선생님의 화약총을 바라보다가 "땅" 하는 소리에 힘차게 달려나갔다.
교장선생님과 면장님 지서장님 우체국장님 지역 유지들이 앉아 있는 본부석 앞에서 등수가 갈렸다. 1,2,3등은 깃
대를 들고 서있는 6학년 형님들 뒤로가서 쪼구려앉았고, 4등으로 들어온 나는 힘없이 응원석으로 뛰어들어가 백
군자리에 앉았다. 상을 탄 친구들은 월계수안에 "賞"자가 크게 찍힌 공책을 엄마 누나에게 맡기고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본부석 책상앞에는 그 날 찬조금을 낸 어른들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적힌 길다란 먹글씨 종이가 펄럭이고 있다.
운동회하는 날 점심시간은 엄마들이 정성껏 싸온 특별식을 먹는 날인데, 우리집은 천막을 치고 국밥장사를 하였
다. 중절모에 흰색두루마기를 걸치고 빤짝이는 구두를 신은 친구아버지와 댕댕이 무늬 양장을 곱게차려 입은 누
나들 사이에 정겹게 앉은 같은반 친구의 눈앞에 찬합속에 양두콩을 섞은 찰밥과 김밥, 고추장으로 뽁은 오징어 껍
데기 계란 후라이들을 친구엄마는 차려놓는다. 침만 꼴깍이다 천막에서 누나가 점심이라며 떠주는 소고기국 한
그릇을 들고 천막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얼런 밥을 말아서 먹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오후가 되자 5~6학년 누나들은 김만택, 심선옥선생님의 지도아래 오랫동안 연습한 부채춤에 쪽두리는 빛나고 장
단소리가 흥겹다. 부채춤이 끝나자 서동진선생님의 호각소리에 5~6학년 형들이 뛰어 나가 질서있게 덤블링 마스
게임을 진행하였다. 청군이 오자미 던지기에서 이기자 개선문옆에 크다란 점수판에 청군의 점수가 올라갔다. 청
군은 879점 백군은 895점 아슬아슬하게 백군이 청군을 앞서고 있었다. 이어서 운동장한가운데 5~6학년 기마전
이벌어졌다. 먼지와 함성으로 운동장은 백마고지 전투처럼 치열하다. 백군들의 기마가 허물어지고 청군이 이겼
다. 청군은 기마를 탄체로 대렬을 정비하여 만세를 불렀고 백군은 풀죽은 자세로 박수를 보낸다. 우리동내 구성
태형이 청군 게시판에 또 점수를 올려놓는다.
졸업생 달리기가 있다는 안내방송이 여러차례 울려퍼진다. 국밥 장사를 하다가 잠시 틈을 낸 우리형님도 달리기
출발선에 줄을섰다. 맨발로 나온 사람 꼬쟁이 팬티 차림의 청년도 출발선에 서있다. 달리기 라인 굽어진 데는 5~6
학년 형들이 등을 지고 앉았다. 땅소리가 떨어지자 운동장을 가로 질러 결승선에 들어오는 얌체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형님은 2등과 차이를 내면서 여유롭게 일등으로 들어왔다. 표지에 "賞"자가 크게 찍힌 두툼한 공책을 탔다.
잠시후 졸업생 마라톤이 있으니 졸업생 여러분의 많은 참가를 바란다는 안내방송이 오랫동안 울려퍼진다. 마라
톤상품은 1등이 백솥, 큰 양재기, 호마이카 밥상, 빨래비누 등 등으로 상품이 푸짐하다.
교문을 나가서 들길을 달려 반환점인 전산마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인데 무명천 팬티에 맨발, 다소 새련되
고 폿때나는 유니폼을 입은 객지청년들이 참가하여 운동장 복판에서 발목을 돌리고 허리를 푸는 등 나름대로 준
비운동을 한뒤 몇겹으로 출발선에 섰다. 땅! 하는 출발 신호에 우루루 출발하여 교문을 나서지만 반환점을 돌아
서 완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마을에서 신기고개 넘어가는 언덕에 살던 형님친구(김영곤)가 보무도 당당하게 일등으로 교문을 들어 서고
는 고개를 약간 우측으로 돌려 운동장을 여유있게 한바퀴 돌고 있다. 사람들의 환호와 손뼉소리로 요란하다. 성
원의 보답인양 한쪽손을 가끔 흔들며 결승점에서 흰색 테이프를 끊었다. 1등 상으로 큰 백솥을 타갔다.
운동회의 하일라이트 청군백군 릴레이 총소리가 울렸다. 청군 백군이 따라 붙었다가 차이가 났다가 아슬아슬했
다. 마음이 앞서엎어지면 안되는데... 목이 터져라 지르는 함성은 파란하늘아래 운동장을 뒤덮었다. 식만마을에
사는 황성도선배가 고정마을 주성길선배를 막판에 앞질러 백군이 이겼다.
가락, 덕도국민학교 운동회 전날 우리집은 무척바쁜 날이된다. 일년중 면민들에게 가장 큰 잔치이던 중학교운동
회날과 이학교 저학교 운동회시기에는 목돈을 벌기 위해 우리집은 국밥장사에 온 가족이 동원되었다. 형님은
김해읍에 소고기국밥 부산물을 사러가고, 엄마와 큰누나는 음식을 장만했다. 문어,오징어를 데치고 큰솥에 밥
을 지을때 작은 심부름을 했고, 큰누나는 쉴새없이 웃골 샘에 식수를 여다 날랐다. 아버지는 마을회관에서 큰천
막과 바람막이 포장과 멍석, 수저와 호마이카판을 빌려왔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우리집앞에서 생선팔던 용탁이
아저매 일본적산가옥에 살던 방구쟁이 아저매, 안동내 밀양때기 아저매가 잠시잠시 일손을 도와주기도 했다.
운동회 전날 형님이 운동장 한쪽 장사할 자리를 잡아놓고, 아침일찍 리어커에 천막과 포장 음식재료들을 싣고갔
다. 천막을 치고 지주목에 바람막이 포장을 두루고 맨땅에는 멍석을 쭉깔아 마을회관에서 빌린 탁자와 둥근판 사
각판들을 멍석위에 진열하였다. 멍석위에 퍼질고 앉은 어른들의 술잔이 오가고 점심시간이 가까워 지면서 국밥
퍼는 엄마 손과 안주를 준비하는 누나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안면장사라 지역유지들과 면장님 지서장님 등 이런분들이 찾아와 천막의 중앙넓은 자리에 앉아 환담을 할때 형님은 잔 심부름하기 바쁘다.
우리집은 면소재지마을 죽림에서 이런저런 가게를 오래하여 안면때문인지 운동회날 포장을 치고 음식을 팔던 미
향식당이나 다른 국밥집보다 손님이 많았다. 운동회가 끝나고, 텅빈 운동장에서 국밥장사 뒷설겆이 물건들을 정
리하여 코스모스무리지어 핀 오봉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던 저녁무렵은 무척이나 공허했다. 몇일이 지나고
오봉관 코스모스 길을 따라 초선대로 소풍을 갔다 오면 그해 가을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