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 사당 금성단 ************
이 곳은 조선 세조때 단종임금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많은 의사들을 제사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 의 누명을 씌워 삭령으로 유배 시켰다가 다시 광주로 이배시켰었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이배 위리안치 되었다.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하여 은밀 히 사방으로 보내 의사·협객들을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 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언 200여년이 지난 숙종 45년(1719) 고을 사람 이기륭이 부사 이명희에게 알리고 단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 경상감사 심성희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位, 오른편에 부사 이보흠위, 왼편에 무명의사위를 모시고 순의비를 세웠다. 이곳에는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현지교통
영주에서 순흥방면 시내버스가 운행됩니다. (1일 20회, 소요시간 20분정도)
금성단 전경
금성대군 [錦城大君, 1426 ~ 1457]
이름은 유(瑜). 모친은 소헌왕후 심씨. 단종의 숙부, 세조의 동생.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437년 방석(芳碩)의 후사가 되었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안치, 그곳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基川) 현감의 고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금성단 정문
단종복위운동 [端宗復位運動]
1453년(단종 1) 10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1455년 윤6월에는 자신의 추종세력인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등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김종서의 당여(黨與)로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있던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으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한편 세조의 왕위찬탈은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 심각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등의 유신(儒臣)들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 · 성승(成勝)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55년 10월(세조 1) 명(明)나라의 책명사(命使)가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를 계기로 56년 6월 1일 창덕궁(昌德宮)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이 갑자기 폐해져서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거사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金)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거사계획을 누설하고,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死六臣)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조는 이 사건 직후 유신들의 중심기관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經筵)을 중지하였으며 새로운 유신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제단(사당)출입문
이보흠 [李甫欽, ? ~ 1457]
본관 영천(永川). 자 경부(敬夫). 호 대전(大田). 시호 충장(忠莊). 부사직(副司直) 이현보(李玄寶)의 아들로,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생. 1429년(세종 1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博士)·사정(司正)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 때에는 장령(掌令)을 지냈다. 1457년 순흥부사로 있을 때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세조에 의해 이곳으로 귀양을 오자, 서로 의기를 투합하여 영남지방의 인사들과 함께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된 후에 처형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寺)와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순난제신(殉難諸臣)〉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금성단
단종복위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그 연루자들을 모신 신단입니다
금성대군 신단비
금성대군 신단
재실
제향및 신단에대한 모든종사를 집행하는 집입니다
금성단 기(記 기록)
금성단조성유래와 목적을 기록한 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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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1.0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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