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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해 보면 그날은 아침부터 일진이 나빴다.
밀린 월세를 겨우 마련해 서랍 속에 숨겨둔 걸 하나뿐인 여동생이 귀신같이 찾아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호는 망연자실 텅 빈 서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석 달 치 집세에 체납된 공과금까지 모두 넣어둔 터라 무려 3백만 원이나 되는 돈이었다.
이걸 마련하느라 요 근래 세 시간 이상을 자본적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 온종일 일하고 퇴근하면 밤부터 새벽까지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해서 틈틈이 모아둔 돈이다.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빚에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입원비, 매달 드는 생활비와 대출이자,
그리고 여동생 주희의 대학등록금까지.. 요즘 정말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동생이라는 것은 걸핏하면 연호의 카드를 훔쳐 명품가방을 사들이거나 생활비로 모은 돈을 들고 며칠씩 집을 나가 다 써버리곤 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은 어릴 때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라 성격이 제멋대로였다.
일이 터질 때 마다 늘 수습하는 건 오빠인 연호의 몫.
이제 스무 살 성인이 되었으니 정신 차릴 만도 하건만 주희는 여전히 사고뭉치 어린애였다.
아침밥도 먹기 전 들이닥친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정설명을 하고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사정도 잘 봐주고 착했던 주인집 아주머니는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이젠 노골적으로 월세를 보증금에서 까버리겠다고 했다.
보증금이라야 몇 백 되지도 않는 반지하 빌라지만 이사할 때 그나마도 없으면 집을 구할 수 없게 된다.
겨우 아주머니를 설득해 며칠 말미를 얻어냈다.
연호는 아침도 거른 채 서둘러 출근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요새 쉬지도 못하고 몸을 혹사시킨 탓인지 예전에 다쳤던 왼쪽 무릎에 조금 통증이 느껴진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고단하면 잊었던 통증이 다시 찾아오고는 했다.
'오늘은 제발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라고 빌며 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출근길 지하철은 콩나무시루 같았다.
게다가 앞에 서 있던 여자의 하이힐에 몇 번이나 발등을 찍히는 바람에 가뜩이나 아픈 다리가 더 욱신거렸다.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쉴 틈이 없었다.
정수기회사 영업직으로 근무하는 연호는 신제품 팜플렛과 오늘 방문해 필터를 점검할 집과 사무실들이 적힌 서류철을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가호호 발품을 팔면서도 그는 틈 날 때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계속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남겼다.
'이놈의 계집애 들어오기만 해봐!
이번에야말로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고 말테다.'
라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5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연호네 집안 사정은 급속히 나빠졌다.
그 전까지 그의 집은 부품 공장을 운영하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었다.
연호도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공장운영을 도왔다.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면 직접 공장에서 일도 했다.
그때 작동 중이던 기계가 파손되어 넘어지면서 그 아래 다리가 끼어 무릎을 다쳤었다.
무릎 뼈가 으스러지는 큰 사고였지만 몇 번이나 수술을 한 끝에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따금 통증 때문에 무릎이 저리고 아파 힘들 때도 있었지만 평소엔 거의 생활하는데 지장 없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공장도 잘 돌아가고, 집안도 넉넉해서 특별한 걱정 없이 살았다.
주희도 그땐 지금처럼 못된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아버지의 부품공장이 납품을 하던 대기업이 도산하며 그 아래 있던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맞은 것이다.
밀린 대금조차 돌려받지 못한 채 힘없이 공장이 넘어갔다.
집도, 차도 차례로 남의 것이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일궈 온 공장이 하루아침에 망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셨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동안 공장을 운영하며 받았던 은행대출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자 남은 가족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한 번도 부족함이란 걸 모르고 지냈던 터라 어머니도, 연호도, 주희도 그런 궁핍한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중에서도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였던 주희가 가장 힘들어했다.
아마 그때부터 어긋났던 것 같다.
연호가 엄하게 다그치고, 극성스럽게 붙잡아 겨우 대학까지는 보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더 제멋대로가 되어 이젠 다루기조차 어려웠다.
그녀는 점점 더 어긋나갔고, 힘들게 등록금을 마련해 입학시킨 학교조차 걸핏하면 빠지곤 했다.
대체 언제쯤이나 되어야 정신을 차리고 살지 걱정이었다.
일하던 공장도 망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자 연호는 당장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직장이 나타나길 기다릴 느긋한 형편도 아니었다.
아름아름 아는 사람을 통해 겨우 소개받은 곳이 지금의 이 정수기회사였다.
이웃에 팔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며 열심히 정수기를 팔아온 게 벌써 5년.
스물일곱에 입사했던 그는 어느새 서른둘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열다섯의 작고 어리던 여동생도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5년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병.. 거기에 옵션으로 말썽꾸러기 여동생까지.
조용하고 평탄하기만 했던 서연호란 사람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달라진 생활에 적응하긴 꽤 힘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그는 엄연히 집안의 가장이었고 당장의 생계는 물론, 남은 가족들의 미래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게 인생이라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학창시절 그는 내성적이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아이였다.
그래서 남에게 머리를 조아린다거나, 억지 웃음으로 비위를 맞추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낯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친한 친구도 거의 없었다.
그랬던 그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 하는 판매영업을 하게 되자 처음엔 적응하지 못해 꽤나 고생했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아야 하니 할 수 없이 성격개조를 해야만 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평소 교류도 뜸하던 친척이며 친구, 이웃에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열심히 실적을 올렸다.
거친 세파에 찌들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매일아침 거울에 비춰 볼 때마다 어쩔 수 없는 한숨이 새어나오지만 잠에서 깨어 눈을 뜬 순간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날씨는 연일 최고기온을 갈아치우며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피어오른다.
땡볕에서 기다린 지 30여분.
벌써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흘러 셔츠 안이 흠뻑 젖어버렸다.
'이렇게 기다리게 할 거면 애초에 커피숍 같은데서 약속을 잡았어야지!'
같은 영업소 직원이 퇴사하며 자신이 계약하기로 했던 의뢰인을 한명 넘겨주었는데 전화로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전화를 걸 때마다 금방 도착한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게 벌써 30분이다.
그렇게 십 여분이 더 지났을 무렵, 의뢰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다른 곳에 가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뜨거운 날씨에 헛걸음하며 기다린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연호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다음 약속날짜를 잡았다.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더니 하는 일 마다 꼬인다.
냉방이 빵빵하게 나오는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을 샀다.
더위를 먹었는지 입맛도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 빈속을 채워야 오후에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면을 먹으며 다이어리를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후에는 비교적 쉬운 일정들뿐이다.
사무실과 빌딩을 돌며 기존에 설치해 둔 정수기의 필터만 점검하면 된다.
돌아다니느라 힘은 좀 들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 영업하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하고 쉬운 일이다.
자판기에서 뽑은 300원짜리 커피를 후식으로 마신 뒤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사무실 여럿을 돌다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가까워온다.
하루 종일 외근한 탓에 아침부터 욱신거리던 무릎이 본격적으로 쑤셔온다.
집에 가면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찜질팩으로 마사지라도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A그룹 본사가 있는 빌딩이었다.
휴게실과 식당에 설치된 다섯 개의 정수기 필터를 점검하면 오늘의 근무는 끝이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10여분을 걷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둘러 빌딩 안으로 들어가 경비원에게 얼굴을 보이고 휴게실로 향했다.
빨리 일을 끝내면 그만큼 퇴근도 빨라진다.
연호의 손길이 바빠졌다.
휴게실과 식당을 차례로 돌며 꼼꼼하게 체크했다. 정기 점검일 전에 교환이나 청소가 필요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지하에 있는 직원식당에서 마지막 검사를 마치고 로비로 올라왔다.
데스크쪽 직원들과 경비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때 한 무리의 양복군단들이 우르르 퇴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외부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설치된 출입구를 아무 걸림 없이 통과해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조금은 .. 아니, 사실은 많이 부러웠다.
값비싼 수트 차림에 하나같이 젊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다.
하긴, 대기업에 입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요즘 이 회사 사원이라면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식당을 예약했다는 둥 2차는 어디라는 둥 하며 지나가는 걸로 보아 회식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양복 무리들이 지나가도록 잠깐 비켜서 있었다. 왠지 휩쓸려 일행처럼 보이는 게 싫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멈춰 섰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너....."
목 안쪽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낮은 음성.
연호는 눈만 끔뻑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짙은 남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연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와 어울려 지나치던 무리들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연호를 주목한다.
"혹시...서 연호?.."
연호는 당황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아닌데요!"
그리고는 쫓기는 사람처럼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뒤통수로 꽂히는 남자의 시선이 날카로웠지만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 빌딩을 빠져나오자마자 역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젠장, 오늘 일진 진짜 더럽네!'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폼으로 들어서자마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놀랬는지 이렇게 달렸는데도 무릎이 아픈 걸 느끼지 못했다.
벌써 12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을까...
그의 쓸데없이 뛰어난 기억력에 박수라도 보내주고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다.
평생 죽을 때 까지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마주치고 말았다.
눈 뜨며 시작된 불행은 해가 지도록 계속되고 있나보다.
+++
운수 사나운 날은 되도록 운전을 안하는 게 좋지만 주희가 들고 튄 집세를 마련하려면 밤에도 부지런히 대리운전을 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아르바이트 가기 전 잠깐 눈을 붙였다.
하지만 온종일 피곤했을 텐데도 어쩐지 잠이 안 온다.
억지로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마주쳤던 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멋있었는데 성인이 된 지금 어른스러움이 더해진 탓인지 성숙미 까지 물씬 풍겨 더 근사해져 버렸다.
'.. 젠장..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연호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차며 돌아누웠다.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한번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은 좀처럼 떨쳐내기 힘들다.
정도원.
그는 연호의 첫사랑이었다.
첫 키스, 첫 경험 그리고 첫 실연...
처음이란 단어가 들어간 거의 대부분의 일을 정도원 그와 함께 치뤘다.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수많은 기억들의 주인공.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들이다.
이제 더 이상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요동치던 풋풋한 열 일곱이 아니다.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지금 와서 얼핏 마주친 걸로 이렇게 머릿속이 뒤죽박죽 될 필요는 없다.
우연히 한번 스쳤다 해서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
앞으로 동료에게 담당 구역을 바꿔달라고 하면 이렇게 갑작스레 마주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연호는 별일 아니라며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쉬는 둥 마는 둥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점점 취해 비틀거릴 시간이 다가온다.
연호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일을 알선해주는 대리운전업체에서 첫 일거리가 올 때 까지 괜히 별 볼일 없는 밤거리를 서성였다.
밤 10시가 넘어 11시가 다 돼 가도록 아직 첫손님도 나타나지 않는다.
휴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이라 한잔하는 사람들이 많을 법도 하건만 어째 개시도 못했다.
그렇게 자정이 다 되도록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캔커피만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다.
막 다음날로 넘어가려는 시각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안내원이 알려준 손님의 위치를 기억하며 연호는 서둘러 달려갔다.
다행히 연호가 서성이던 유흥가 근처 술집이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대낮처럼 환한 네온사인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술집 입구에 전화로 들은 검은 세단이 보인다.
차 주변으로 양복 입은 젊은 남자들과 정장 차림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다.
"너무해요, 팀장님. 3차 가자니까요~"
"미안, 미안. 이쯤에서 봐줘. 이틀 밤이나 샜더니 지금도 비몽사몽이야."
"칫..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팀장님."
"팀장님, 월요일에 봬요"
서로 인사를 나누는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대리운전..."
차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던 연호가 순간 멈칫한다.
"이런, 또 만났네."
짐짓 놀란 듯한 눈으로 연호를 돌아다 본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아까도 마주쳤던 정도원이었다.
재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연호는 황당함에 할 말도 잊었다.
"일단 출발할까?"
도원이 웃으며 뒷좌석에 올라탄다.
연호도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서둘러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자 도원이 차 유리를 내리며 일행들에게 다음 주에 보자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도원이 있는 마케팅1팀의 직원들이었다. 오늘은 얼마 전 출시한 신상품이 히트 친 걸 축하하는 회식이 있었다.
다들 3차에 4차까지 가자고 졸라대는 걸 겨우 만류하고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부른 대리운전 기사로 서연호가 나타날 줄 꿈에도 몰랐다.
아까 마주친 것도 정말 큰 우연이었는데 또 한번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그와의 인연이 유별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2년 만에 본 얼굴이다. 그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예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연호를 보자 신기하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옛날 일이야 어찌됐든 그를 다시 만난게 도원은 반가웠다. 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똥 씹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난폭하게 차를 몰고 있다.
"투잡족인 줄 몰랐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도원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연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꿈쩍하지 않았다.
"경비원한테 물어보니 정수기 관리한다며? 그럼 대리운전은 아르바이트?"
평소 수다스런 성격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말이 없으니 이쪽에서 계속 지껄일 수밖에 없다.
연호는 여전히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 운전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말야..."
조금 머뭇거리는 말투로 도원이 물었다.
"나 아직 주소 말 안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순간 연호는 아차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중간에 차가 멈추자 뒤따르던 차들이 깜짝 놀라 크락션을 눌러댄다.
연호는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동창한테 웬 존댓말이야. 편하게 말해."
"...... 주소를 말씀해 주세요."
딱딱하게 선을 긋는 연호의 태도에 도원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순순히 주소를 말했다.
연호는 차를 돌려 도원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한참을 침묵 속에 달리던 중 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옛친구에게 말을 걸 듯 아무렇지 않게 안부 인사를 건네는 도원이 연호는 못마땅했다.
옛날 일은 까맣게 잊은 걸까? 어떻게 저렇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는 척을 할 수 있지?
연호는 도원의 무신경함에 짜증이 났다.
첫 사랑의 실패는 연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 후로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할 만큼...
하지만 상대방에겐 그저 사소한 옛 기억일 뿐인가 보다.
"여전하군. 기분이 나쁘면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안했지."
마치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에 연호가 발끈했다.
"그쪽이야 말로 여전하군. 상대방 기분은 무시한 채 제멋대로 지껄이는 버릇 말야."
지지 않고 받아치는 연호를 보며 도원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아는 척을 하네. 계속 무시하기에 혹시 내가 누군지 잊었나 했지."
왠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들려 연호는 또 화가 치밀었다.
'잊어?! 정도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내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놈의 이름을 말야!'
버럭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때마침 깜빡이도 없이 끼어든 옆 차량을 향해 큰 소리로 욕을 날려주었다.
"휘유~ 세월이 흐르긴 했나보다. 고상하고 얌전하던 서연호 입에서 쌍욕이 나올 줄이야."
"원하시면 손님께도 한번 시원하게 해드릴까요?"
연호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심상치 않은 말투로 내뱉자 도원이 낮게 웃음을 지으며 손 사레를 친다.
밤이 깊었는데도 도로정체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가속페달을 마구 밟으며 달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앞 뒤 차들로 꽉 막힌 채 거북이걸음만 하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목적지에 도착해 이 불편한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연호는 차를 몰았다.
그렇게 20여분을 달려 겨우 도원의 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2만원 입니다."
"서울전역은 만원이라고 광고하지 않았었나?"
"시끄러워! 그럼 다음부턴 그런 싸구려 업체로 연락하던가! 길에서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할 걸!"
빨리 돈이나 내고 눈앞에서 사라져! 라는 외침까지 덧붙이려다 참았다.
"자, 여기 요금. 그리고 내 명함"
돈과 함께 하얀 종이가 딸려온다.
"오랜만이잖아. 다음에 술이나 한잔 하자. 옛일은 다 털어버리고."
"아, 예. 감사합니다, 손님."
연호는 도원의 손에서 빼앗듯이 돈을 낚아채고는 곧바로 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 보란 듯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버렸다.
'술이나 한잔 하자고? 옛 일은 털어버려?
하! 편리해서 좋군.
미안하지만 난 두 번 다시 네 놈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여전히 차 옆에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도원이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연호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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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데코에요.
너무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미흡하지만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기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삭막하고 텁텁한 느낌. 전 이런게 좋더라구요. 성실연재 해주세요^*^ 내일 다시 오게뜸ㅋ
성실연재라는 말이 가슴에 콱!! 꽂히네요..^^ 노력할게요~
꺄아!!!!!!!!>< 반가워요 데코님><ㅎㅎㅎㅎㅎㅎㅎ
와아~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기대할께요~~^^
조금만.. 해주세요..하..하.. ^^
우와! 오랜만에 들렸는데, 데코님의 글이 있다니!! 데코님의 글은 언제나 너무 좋아요!!!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