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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년에 이룩한 영토이다.
왕조도 초로스 가문으로 고증 재현
건국
준가르 칸국은 전신은 오이라트 부였다. 오이라트 부의 에센 타이시가 북원의 칸을 자처하자 몽골의 정치체는 요동쳤다. 그래서 에센 타이시는 암살되었고 오이라트 세력을 숙청하였다.
그래서 북원은 각각의 수백 부족이 각자의 땅을 다스리던 부족연맹체에서 각지에 보르기진 황금씨족 및 귀족이 다스리는 군사적 부체제로 바뀌었다.
그래서 북원에는 할하 부, 튀메드 부, 차하르 부, 호르친 부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각 부의 부족 체제적인 면과 각자 다른 사정, 중앙의 지방 차별 등으로 내적 갈등이 있었다.
이는 명나라의 부패와 약화로 인해 튀메드 부의 군사적 업적과 몽골 초원 및 중앙아시아, 티베트까지의 유목민 규합으로 가려졌다. 이때 오이라트 부족 중 카라쿨라 초로스가 결집시킨 세력은 준가르 부로 정정되어 준가르 칸국의 전신 준가르 부가 탄생했다.
성장
북원의 칸과 할하 부가 중앙집권화 시도 중 실패로 각 부가 각자 도생을 하게 되는 계기가 시작되었고 준가르 부도 이때 떨어져 나갔다.
준가르 부가 있었던 당시 서부 초원의 상황은 성장하는 카자흐 3부, 칸과 지방 세력이 알력 다툼을 하는 차가타이 계통 국가들, 본격적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가 있었고 준가르 부는 눈에 띄는 세력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준가르 부는 호쇼드 부의 산하 세력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초원에선 정치적, 종교적 변동이 탄생했다. 북원의 티베트 불교 지원 이후 티베트 불교는 점차 유목민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하였다. 또한 이슬람의 확장 역시 이에 영향을 주었다. 바로 티베트 불교 종파 중 하나인 겔룩파의 종교 개혁이었다.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티베트는 규합되어야 되며 이를 위해선 무력을 충분히 동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무력으로서 호쇼드 부의 수장이자 황금씨족 방계였던 귀시 칸이 당시 분열되었다가 어느 정도 수습된 티베트 3왕국인 캄, 창, 우를 정복하고 달라이라마에게 대관받으며 호쇼드 칸국이 탄생하였다.
준가르 부의 에르데니 바투르는 티베트 통일 전쟁 당시 업적을 세웠고 강력해진 귀시 칸의 딸과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호쇼드 칸국에 서부 초원의 지배권을 이양 및 인정 받으며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혼란기
준가르 부는 2대 홍타이지(칸국 외 유목지역의 왕 칭호) 에르데니 바투르 사후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배경은 바투르의 과한 혼인 동맹으로 생긴 이복형제들의 왕위 계승 요구였다.
에르데니 바투르는 호쇼드 칸국의 귀시 칸의 딸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및 중원 세력 견제를 위한 할하 부를 포함한 몽골의 다양한 세력과 혼인을 맺어 범 몽골 연맹을 만드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계승전쟁에 외부 세력 개입을 유발했다.
첫번째 왕위계승전쟁은 호쇼드 칸국의 지원 아래 벌어졌으며 셍게가 한타에서 이기면서 소거되었다. 다음으로 2차 왕위계승전쟁은 할하 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며 지원 온 할하 칸을 잡으며 일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와 달리 또 또다른 이복형제인 첸첸이 셍게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며 허무하게 갔다.
혼란기 속 계승 분쟁을 막으려고 출가시킨 동생, 갈단 한을 다시 환속시키며 새로운 홍타이지를 세웠다.
갈단 한은 에르데니 바투르와 귀시 칸의 딸 사이에 나온 자식으로 지배층들이 그를 세운 이유도 호쇼드 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였다.
갈단 한이 홍타이지로 즉위하고 셍게의 복수로 기반이 없단 첸첸과의 내전을 벌였고 쉽게 승리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차기 홍타이지를 노리던 셍게의 아들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호쇼드 칸국과의 친선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셍게의 아들의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고 갈단 한의 군사적 재능과 외교덕에 다행히 진압되었고 준가르 부 내의 갈등은 겨우 종식되었다.
최전성기의 토대, 갈단 한 치세
이 과정에서 준가르 부가 너무 강성해지자 그들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내정간섭을 하려던 호쇼드 칸국은 준가르 부를 침공한다.
한편 갈단 한은 준가르 부의 수장이 되기 이전에 고승으로서 당시의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 모두와 교류를 하고 수학을 한 사이였다. 특히 티베트를 규합하고 강성한 4대 달라이라마의 경우, 갈단의 스승으로서 매우 애착이 있었다. 갈단 한은 이를 이용해 정치적 우위를 점했다.
결국 갈단 한과 준가르 군대는 호쇼드 칸국을 물리치고 오이라트부의 수장직을 찬탈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4대 달라이라마는 갈단 한에게 복슈드 칸 칭호를 받으며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까지 호쇼드로부터 찬탈하였다. 준가르 칸국의 탄생이었다.
그럼에도 갈단 한은 호쇼드 칸의 딸과 혼인을 맺으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고 티베트 지역과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서부 초원의 패자가 되고 준가르 칸국은 야르칸트 칸국으로부터 칸의 구호 요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야르칸트 칸국은 흑산당, 백산당과 칸 세 세력이 각축을 벌이다 결국 흑산당의 승리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갈단 한은 칸과 백산당 구원을 위한 흑산당 토벌을 개시하였고 전쟁이 발발했다.
준가르 칸국은 흑산당 토벌과 함께 야르칸트 칸국을 초토화시켰고 칸 복위가 아닌 백산당을 대리 통치자로 세워 속국화시켰다. 이에 대해 위구르인과 무슬림, 유목민 세력이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나 당시 키르기즈인들이 키르기즈 칸국 이후 다시 규합된 카라 키르기즈가 이 혼란을 틈타 침공하여 보호가 필요했다.
준가르 칸국은 이에 대해 카라 키르기즈를 침공해 1차 키르기즈 전쟁을 벌여 키르기즈인들을 학살하고 영토를 황폐화했다. 그리고 준가르 세력은 더 넘어를 보았다.
바로 카자흐 세력이었다. 카자흐 칸국은 느슨한 4 울루스의 연맹이었는데 러시아의 노가이 칸국 정복 이후 위협을 느껴 규합되어지며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준가르 칸국은 두 가지를 고려하고 카자흐를 침공하였다. 첫째는 카자흐가 강성해지기 전 싹을 자르는 것이고 둘째는 바로 러시아와의 친선이었다.
러시아와의 친선이 매우 중요했는데 당시 러시아와 같이 사이가 안 좋았던 청나라 견제를 위함이었다. 그리고 강성한 청나라를 상대로 1차 나선정벌을 퇴패시킨 러시아의 군사 기술과 전술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결국 준가르와 카자흐의 악연이 시작되었고 1차 카자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카자흐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준가르 칸국은 러시아와 통하는 길을 얻어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준가르에 수많은 화기와 대포를 팔았고 군사고문을 보내어 훈련시켰다. 준가르 칸국은 강력한 기병과 포병을 가진 강력한 제국이 되었고 대외 간섭을 늘리고 청나라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갈단 한은 할하 부에 계승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 침공해 영향권을 세우고 야르칸트 칸국 때와 같이 속국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위협을 느낀 할하 부는 청나라에 대원 옥새를 바치고 입조하며 영토적으론 준가르 영향권, 외교적으론 청의 영향권이 되며 준가르-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최전성기의 완성, 체왕 랍탄 치세
청나라는 할하 부 구원을 위해 준가르를 침공했고 준가르 칸국 내부 및 영향권들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특히 준가르 칸국의 지위와 영향력을 하사하고 인정해주는 티베트 지역이 크게 반응하였다. 특히 갈단 한의 정치적 지지자인 4대 달라이라마의 노환으로 돌아가며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 청나라 강희제의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공세, 친청파인 5대 달라이라마 등극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갈단 한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었고 준가르 내부에서는 대안 세력이 등장 및 성장했다.
바로 셍게의 아들로서 갈단 한에 대해 계승 반란을 일으킨 체왕 랍탄이었다. 그는 청과의 화친 및 입조를 주장하고 내부를 안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강희제는 그에게 지지 선언을 하였고 청과의 전쟁에서 일진일퇴를 하다 청의 반격으로 위기에 빠진 대부분의 준가르 원정군에선 갈단 한을 배반하고 탈영해 준가르로 돌아와 체왕 랍탄을 지지했다.
갈단 한의 병사는 거의 5 분의 1로 줄었고 갈단 한은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암살당하며 체왕 랍탄이 칸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 청나라는 아쉽고 불리하고 준가르 칸국은 유리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체왕 랍탄의 즉위 당시 준가르 칸국은 청나라의 지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자세를 낟춰 입조하였고 준가르의 대부분 군사력이 온전히 체왕 랍탄에 속하게 되어 강성하였다. 청나라 입장에선 명분도 없고 강성해 치기도 애매하고 완전한 복속도 힘들었다. 그에 반해 문제는 몽골 및 티베트에 대한 준가르 칸국의 영향권은 변함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강희제는 몽골과 티베트 영향권을 두고 준가르와 경쟁하며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런 유리한 상황이 준가르 칸국을 갉아 먹었다. 먼저 2차 카자흐 전쟁으로 땅을 정복하며 서부 초원지대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에 대해선 달라이라마 계승 개입, 몽골에 군사 주둔 강화로 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대해서도 소규모 부족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며 러시아의 시베리아 경영과 청나라의 천명에 도전하게 된다.
러시아는 준가르에 대해서 완전히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청 전쟁 이후 국경선이 확립된 이후로는 러시아 개척자와 상인 주도하에 수교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청과 표면상 거의 조공 같은 모습으로 국경 무역과 밀무역을 시작했다. 그래서 완화된 청과의 관계 속에서 준가르와의 외교와 무역은 이익이 감소되어갔다. 그리고 서부 초원지대와 시베리아를 두고 경쟁할 수 있기에 선을 긋던 중 분열된 3개의 카자흐 오르다들은 타협 끝에 스스로 러시아의 속국으로 들어갔다. 러시아의 보호를 위해 충성을 맹세했고 러시아는 바로 준가르와 단교했다.
결국 준가르 칸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갔고 강희제는 티베트에서 달라이라마 계승 문제를 바탕으로 몽골과 티베트 수호를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2차 준가르 청 전쟁이 발발했다.
준가르 칸국은 러시아제 화기와 강력한 기병대로 청나라를 상대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준가르 칸국은 한계점이 있었다. 첫째로 인구 문제이다.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 인구 모두 열세였고 내부엔 불충하고 불만이 많은 이민족이 많았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자주국방이 아니었다. 화기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해서 아직은 부족한 청나라와 달리 화기의 성능은 확실하나 러시아의 수출에 의존한 준가르 칸국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준가르의 화기 보급은 한계가 되었고 결국 청나라와의 한타에서 크게 깨지며 화기를 전부 잃게 되었다. 이에 맞춰 피지배 민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결국 체왕 랍탄은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청나라의 몽골과 티베트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고 조공 관계를 재정립했다. 준가르 칸국의 짧은 최전성기와 최대 영토가 지나가고 영토는 신장 지역에 국한된다.
3차 준가르 청 전쟁 전기와 쇠퇴기
체왕 랍탄 사후 준가르 칸국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원인은 앞서 보았듯이 계승 전쟁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앞서 본 급변한 해외 정세 역시 준가르 칸국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결국 칸국 직위도 잃고 준가르 홍타이지국으로 회귀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한 정복 전쟁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해 영토를 더욱 축소시켰다.
일단 계승 전쟁의 경우, 앞서서도 제대로 된 계승법이 아닌 암살과 외부 개입, 내부 지배층의 지지로 이루어졌기에 혼란은 눈에 보였다. 결국 체왕 랍탄의 아들들도 서로 죽이다가 최후의 아들도 암살당하며 혼란은 시작되었다. 심지어 이젠 초로스 가문만이 아닌 호쇼드 가문인 아무르사나까지 개입하며 개판이 되었다.
이 와중엔 준가르의 영역인 신장 지역과 서부 초원은 카슈가르에서 발흥한 '호자'라는 종교 지도자가 이끄는 수피즘 이슬람으로 통합되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준가르의 이슬람 지역을 해방시키고자 군사를 보냈다. 그리고 이를 위구르인들이 호응하며 준가르의 지방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는 정복 군주인 건륭제가 즉위하여 전방으로 전쟁을 하였다. 결국 건륭제는 준가르에 선전포고를 하며 최후의 3차 준가르 청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때 즉위하고 있던 준가르의 지도자는 다와치로 전 지도자의 조카로 쿠데타로 계승하였고 인망이 없었다.
이때 3차 준가르 청 전쟁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다와치 포위 전쟁, 후기는 준가르 대학살이다. 다와치 포위 전쟁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첫째는 아무르사나 같은 반대파의 청나라에 협조하고 다와치의 병사들도 청나라에 항복하는 등 준가르인들의 국론 분열때문이었다. 둘째는 준가르 칸국의 피지배민들의 청군 환영이었다. 준가르의 통치에 신물이 나 종교지도자인 호자가 직접 청군을 환영하고 길을 열어주며 다와치에게 가게 하였다.
결국 수도와 다와치 앞에 성한 청나라 대군이 왔고 다와치는 항복한 뒤 폐위되었다.
3차 준가르 청 전쟁 후기와 멸망
아무르사나는 청나라에게 나라를 팔며 청의 속국으로서라도 준가르 칸국의 절대적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그런데 바램과 달리 청은 청 치하 몽골식 통치처럼 4등분하는 4칸 체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이에 아무르사나는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준가르와 싸울 대로 싸운 청나라는 쉽게 승리했다. 청나라는 이 반란으로 인해 포용 불가로 결정하고 준가르 세력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기에서 보았듯이 신장 지배에 준가르 세력이 필요없음을 실감하고 직접 지배를 하고자 하였다.
결국 청은 준가르 세력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씨를 마르게 하려고 했다. 거의 대다수를 없앴으나 완전히 지우는 건 역시 힘들었다. 그러나 이때 생긴 준가르 잔존세력과 디아스포라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바로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인의 복수였다. 키르기즈인들은 중가리아와 청나라 변경을 속속히 뒤지며 죽였고 카자흐인들은 본인들의 영토를 넘어온 세력들을 유목민으로서 다 죽일 때까지 계속 쫓아다니며 지속적으로 죽였다.
결국 준가르 제국의 과도한 확장과 내정간섭은 견제와 복수를 불러와 완전히 그들을 역사에서 지워지게 만들었다.
첫댓글 이런 장문의 글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진짜 장문이다
준가르 칸국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썼으니깐유
정성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