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두 번의 서울 나들이(1)
<천호역 근처>
결혼식장은 천호역 근처에 있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올라와 수서역에서 내렸으며 거기에서 전철로 갈아탄 후 다시 천호역에서 내렸다. 거지 발싸개처럼 나달나달해진 지하철 노선도를 지갑에서 꺼내 한참을 연구하였다. 낯이 설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는 올라오지만, 서울이 낯설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이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 나에게는 서울이 세상이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라고 할 때의 ‘세상’, ‘이제 일어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라고 할 때의 ‘세상’. 그러나 서울이란 무엇인가? 서울이란 서울 사람들일테니, 나에게 서울이란 서울 사는 친구들이다.
친구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독도에 가서 아기를 출산하는 것에 관하여 듣기도 하였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전념하는 것에 관하여 듣기도 하였다. 모두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지금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른 것들이다. 기발하지도 않고 흥미진진하지도 않지만, 나에게 여태 선명하게, 혹은 지나치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돈 이야기. 30억이라니...... 나를 보고 30억 부자라고 하였다. 내가 받을 연금을 생각해 보면, 나는 현금 30억을 가진 자와 같다는 것이다. 나는 우쭐해졌다. 그러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나와 2차를 하는 자리 — 전집 — 에 가서는, 나는 기가 죽고 말았다. 얼마 전에 결혼시킨 아들이 4억 5천 짜리 아파트를 샀단다. 그 아파트가 지금은 7억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그 말을 듣기 이전에 나는 이미 기가 죽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일군 전 재산이라는 게...... 아까 그 30억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내가 차분히 암산을 해보니, 그 반도 안될 듯하다.
몇 해 전부터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가 “운동? 요즘 운동량이 많이 줄었어”이다. 이 날도 이 말을 여러 번 하였다. 누구는 내가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누구는 내가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말하였다. 염색 이야기도 하였다. 흰 머리카락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까맣게 염색을 하면 자기 눈에 자기가 젊게 보이고 스스로 젊게 느껴져서 좋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하였다. 귀찮기는 하다. 삼례에서는 캇트에 염색까지 해서 1만 5천원밖에 하지 않지만, 나는 거의 2개월은 되어야 이발소에 간다.
좌냐, 우냐 하는 이야기, 즉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2차를 한 전집에서의 일이다. 우리 친구들 중에서 진보 입장을 취하는 친구는 한 명밖에 없지만,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한 친구는, 우리 친구들은 그런 싸움을 해도 밉지 않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서도 말하였지만, 나는, 몇 해 전에 우리 친구들이 대부분 보수쪽에 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크게 놀랐었다. 그렇다면 나는 진보쪽인가? 한 친구는 내가 호남쪽에 직장을 두고 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내 입장을 양해해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진보쪽이 아니다. 보수쪽도 아니다. 내가 속한 서울의 공부 모임 역시 보수쪽이다. 얼마 전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도 나를 놀라게 하였다. 최근의 식사 자리에서 공부 모임의 젊은 후배들이 입을 모아 진보 정권을 비난하였다. 어떤 사람은 문재인이 치매라고 말하였다. 나는 거의 역정을 내었다. 내 직장에서는 거꾸로 보수를 비난하는 말을 듣게 되어있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동일하게 반응한다. 나는 중도인가? 아니다. 나는 정치혐오자이다. 나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나는 정치 이야기 혐오자이기도 하다.
누가 물었다. 3차를 한 중국집에서였다. “외롭지 않니?” 기습적인 질문이다. 나는, 내가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예상 문제에 들어있지 않았던 문제가 나온 셈이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외로운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여자가 없어서 불편한 적은 가끔씩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 가령 삼례예술문화촌에서는 가끔 좋은 공연을 (무료로) 하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이런 사실을 알고 우리 과의 한 교수 부부가 나를 동반해 준 적도 있다. 그 때에는 동학 혁명을 주제로 한 창작 판소리 공연을 보았다. 삼례천 철교 위에 세워진 삼례 예술 열차에서는 주말이면 통기타 공연을 하는데, 나는 그 근처까지 갔다가도 마치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돌아나오곤 하였다. 아, 이런 것도 있다. 며칠 전에 아래층 여자가 올라와, 자기네 배수관에서 누수가 된다면서 윗층에 사는 나더러 책임을 지라고 말하였다. 부당한 요구로 들렸지만, 내가 여자를 맞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3차를 하는 바로 그 시간에도 이 여자가 전화를 하여 졸라대었다. 이런 시시한 일을 내 대신 처리해줄 사람, 어디 없나? 사실, 나는 평생을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나는 이사 같은 큰일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었다.
2020년, 이것이 나에게 빚인가, 재산인가? 어떻게 살아낼지 쩔쩔매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용케 잡은 기회인 듯 아끼고 아껴쓰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할 것인가? 하여간 나는 서울 지역 아파트값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늙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보수도 미워하고 진보도 미워하면서, 외로워하면서, 아니 약간 불편해하면서 한 해를 살아갈 모양이다. 그렇게 예단할 수 있는 것은, 오랜만에 상경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 중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2020년 내 삶의 전부라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어떤 친구는, 어째서 서울에 자주 올라오지 않느냐면서, 삼례에 뭔가 좋은 것을 숨겨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계속)
첫댓글 그날 천호동에서 귀가후 내 마누라 가로되 "영태씨 얼굴이 굉장히 좋아졌어 뭔가가 있나...?" 혹시 삼례에 숨겨둔 것이....?? ㅎㅎㅎ 모처럼 만나서 반가웠어 !
눈치가 빠르시구나, 마여사님. 자리 깔아드리자.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