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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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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사 49:1-7; 요 1:29-42 본문 : 행 15:36-16:10 제목 : “통제자” |
통제자
오늘부터 2차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15장 마지막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36절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던 그 지역으로 다시 가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좀 보자”고 한 것이 두 번째 선교여행의 시작입니다.
첫째, 작은 다툼
그런데 여기 작은 다툼이 생깁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바울은 반대합니다. 마가는 1차 선교여행 때 중간에 이탈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보면 “요한”이라고 나오는데, 이름이 ‘마가 요한’이라서 그렇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보에서 버가로 갈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피치 못한 이유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마가가 돌아간 이유를 들어 그를 다시 데려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이탈한 사람을 바울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데려가려 했는데 의견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의견 충돌은 결국 바나바와 바울을 갈라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갈라서서 가는 경로를 보면 바나바와 마가는 1차 선교여행과 같은 코스를 탑니다. 배 타고 구브로(키프로스)로 간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의 역코스로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1차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코스를 역으로 되짚어 돌아가는 방향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져서 두 그룹이 되었습니다. 39절에 “심히 다투어”라고 했으니 손쉽게 빠이빠이 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격론이 벌어졌고 감정도 상했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상상을 보태기는 했지만 “이렇게 서로의 감정이 상하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싸우면 쉽게 화해하지만 어른의 다툼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열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싸움’이 선한 것일수는 없지만 이 다툼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교회들을 돌보는 손길을 두 배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갔다면 돌아보았을 교회의 수보다, 두 그룹으로 나뉨으로써 더 많은 교회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했을 때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그러나)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5-18)
라고 말한 것은 이런 과거의 경험이 베이스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죄조차 사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때가 있는데 2차 선교여행의 출발에서 일어난 이 일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삼등분 했을 때, 이 사건을 일의 첫 번째의 것으로 둡시다.
둘째, 디모데의 할례
바울은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수리아 지역과 길리기아 지역을 거쳐(15:41)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릅니다. 루스드라는 1차 선교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의 코스에서 도착했던 곳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설교에서 들었을 때는,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쳤고,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쓰스와 허메(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14장). 그리고 이어서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한 사람들에게 돌로 침을 받아서 죽었다고 버려졌던 곳이 바로 루스드라입니다.
16장 앞부분을 보면 루스드라에는 “디모데”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디모데전/후서가 있으니 익숙한 이름이실 것입니다. 16장 1절 말씀을 보면 디모데는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인 사람이었고, 2절에 보면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마도 이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디모데를 “데려가려고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을까요?
우리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1.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
1) 우선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봅니다.
갈라디아서 2장 3절과 4절에서 그는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를 율법 행위로만 지키는 일은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종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2) 이를 조금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7:19-20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그렇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할례 받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는 의식’으로서의 할례는 의미상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식들은 ‘그 율법의 의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 성취’가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의미가 모두 성취되고 난 후에는 그 껍데기가 되는 의식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그렇게 복음이 성취되었는데도 껍데기에 집착하면, 오히려 그것이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이 복음을 가로막는 것”(갈 4:11)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할례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가르쳤습니다.
3) 보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사도행전 15장에서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입니다. 우리가 이전 설교들에서 살폈지만, 예루살렘 공의회는 “새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준수해야 하느냐?”의 문제, 곧 구체적 문제 자체로 말하자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아니다”라고 답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이 바로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시피 사도행전 15장 12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 자신이 열렬하게 할례를 준수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설명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할례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미 만 천하에 공표된 후였습니다. 할례를 고수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그러면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까?
디모데가 “헬라인 디도”와 다른 점은 무엇이고, 또 고린도전서의 가르침대로 “할례는 아무것도 아닌데”, 또 직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할례는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했습니까?
본문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16장 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를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할례를 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다” 했습니다. 즉 동네 사람들이 모두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이유는 ‘복음 전파의 용이성’ 때문입니다. 할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당시 그들이 살고 있었던 주변의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디모데의 아버지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겠지요. 디모데의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이방인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거나, 어쩌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어머니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에 부분 부분 디모데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디모데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나오는 본문은 디모데후서 1장 말씀에서입니다.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니까 디모데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유대교로 본격적으로 개종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었을 수도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3절의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와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의 배경입니다.
즉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그리스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디모데는 ‘아버지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 알려져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 유대인 공동체의 사람들 속에 훨씬 더 동질감을 느껴지게 하고, 그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기에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복음 전파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유대인 공동체에 더 접근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베푸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들의 루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일행의 선교 여행 루트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16장의 나머지 부분, 곧 10절까지 이야기입니다.
유럽 지도를 펴놓고 보면, 당시에 바울이 있었던 루스드라에서는 바로 그 옆 지역이 ‘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가 있는 아시아 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구역들 중 ‘아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마도 당연히 루스드라에서 출발하면 바울은 근처에 있던 아시아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지속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합니다.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 지역을 북쪽으로 빙 둘러서 에게 해의 동편에 있던 무시아 지역에 도착합니다. 이것이 7절에 나옵니다. 여기는 소아시아의 북단 가장 끝 지역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비두니아는 당시 바울이 있던 곳에서 더 북쪽 지역,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이 있는, 흑해의 남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에는 후대에 기독교 도시로 유명해진 니케아와 칼케돈과 같은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7절 뒷부분에 나와 있듯이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결국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출발하여 근처인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북쪽으로 올라갔고, 더 북쪽으로 가려고 비두니아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다시 또 성령님께서 막으셔서 진로를 서쪽으로 잡습니다. 그리로 가게 된 이유는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밤중에 환상이 보였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에게 해 동부에 있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인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같은 도시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에게해 서쪽 지역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아테네와 고린도, 오늘날로 치면 그리스의 도시들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울의 루트
바울의 루트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그를 통해 세워지게 되는 교회, 그를 통해 전파되는 복음이 ‘대단히 성령님을 통하여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여러 사건들이 나오고, 또 성령님의 간섭이나 등장하심들이 없지 않지만, 여기 이 본문만큼 구체하고 세심하게, 또 이렇게 짧은 타이밍 안에 잦게 나타난 예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신 경우가 가끔 나타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주 관여하시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약간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간접적’이라면, 여기서는 대단히 ‘직접적’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들
이제 이 세 가지 사건들을 놓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숙고해 볼 수 있는 점들을 생각해 봅시다. 물론 개개의 사건들이 개개의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사건을 보면서 “저렇게 위대한 사람들도 싸우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나는 다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비록 우리는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디모데의 할례를 통해서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일은 무엇보다 ‘핵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줍니다.
어떤 주석은 바울이 여기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기로 결정한 것은 “더 높은 일관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즉 어떤 때는 할례를 주고, 어떤 때는 할례를 주지 않은 것은 일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일관성”인 “삶의 모든 활동들과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데” 두는 것, 혹은 “다른 모든 유익을 가장 중요한 복음의 유익에 종속시키는 것”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여행 루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보여줍니다. 복음 전파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지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이 말씀에서는 바울의 뜻과 성령님의 뜻이 충돌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도, 우리 생각에는 비두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도, 교회는 성령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주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바울의 뜻대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후 주도적으로 길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세 스펙트럼
그런데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아시아로 가거나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에는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훨씬 더 나쁜 사건처럼 보이는, 갈등과 불화가 일어나서 결국 팀이 깨지고 갈라지게 만든 이 의견 불일치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셋째 사건에서처럼만 간섭하셨으면, 팀이 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집이 아무리 세고, 바나바의 고집 또한 그에 못지 않다고 해도, 과연 이 신실한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때처럼, 나타나 말씀하셨다면, 과연 둘이 끝까지 싸웠을까요? 만약에 정말 하나님께서 바울이 가려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셔서, 바나바에게 나타나서 ‘마가도 데리고 가지 말고’, ‘구브로로 가는 길 대신에 육로로 북쪽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으면, 바나바가 끝까지 자기 뜻을 세우면서 성령님께 반대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건 바나바건 자기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여겨도, 그들이 고집이 아무리 센 사람들이었어도,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는 것에는 반대하셨던 성령님이 바울과 바나바가 싸울 때는 나타나시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 세 사건이 ‘세 가지 양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점진적 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아주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황입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는 일에는 ‘절대적 진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마 데리고 갔어도, 데리고 가지 않았어도, 어느쪽이든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바울은 나중에 마가를 끝까지 반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철회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사건을 알고서 디모데후서 4장 11절 말씀을 읽으면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입니다.
딤후 4:6-11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은 순교하기 거의 직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합니다. 아마 그때쯤의 바울은 오늘 본문의 이 상황을 돌아보면서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진 후에 ‘바나바의 경로’를 추적하지 않고 ‘바울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만 보아서는 바울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여러 주석에서 “누가는 바울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같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를 생각해 보면 바울이 옳았는지, 바나바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어느 쪽이었든 괜찮았을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자주 만나는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사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쪽도 저쪽도 좋은 사건에서, 간섭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다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여 더 많은 선교를 이루셨습니다.
2) 두 번째 사건인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일은 이보다는 약간 더 규정적인 사건입니다. 여기는 첫 번째 사건보다는 좀 더 ‘진리의 문제’가 관여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할례를 주는 일은 큰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갈라디아서에 의해도, 고린도전서에 의해도, 또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할례를 행하는 일은, 어쩌면 복음의 가르침에 큰 위해가 될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정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바울에게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는 문제는 한편으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세 사건을 동시에 놓고 보면 중간에 있는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중요하고 규정적인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문제 같아 보이는 문제입니다.
3) 세 번째 사건은 가장 규정적입니다. 곽에 딱 끼어 들어맞아 있습니다. 비록 이유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 때문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아무런 여지도’ 없습니다. 바울이 제아무리 아시아에서, 혹은 비두니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제아무리 멋진 계획을 세우고 또 그로 인하여 마음이 부풀었어도,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좌절시키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안 된다, 이쪽으로 가거라.”
그러니까 이 세 번째 사건은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여줍니다. 여지가 없습니다. 첫째 사건이 가장 유동적이고, 둘째 사건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한다면, 셋째 사건은 빼도 박도 못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명하고, 신자는 이를 이행치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그러면 이 세 종류의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유사한 상황들을 만납니다.
어떤 일은 ‘우리의 자유’가 끝까지 장악하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을까?”라던가, “아이에게 피아노 학원이 좋을까, 미술 학원이 좋을까?”같은 문제는 완전히 나이브한 문제입니다. 반면 어떤 일은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문제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여러 종류의 상황들을 마치 여기 선교 여행을 떠난 바울의 일행들처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갖가지 정황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장악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의 문제이든 완전하게 컨트롤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1)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일은 규정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불화를 일으키고 다툰, 소위 말하자면 ‘죄를 저지른’ 사건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이었지만 이들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악의 상황들 속에서조차’ 주권을 잃지 않으십니다. 상황은 통제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볼 때에는 통제불가능하게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악감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바나바가 갔던 구브로에,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회심한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만약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북쪽으로 가버렸다면 구브로에서 믿지 않았을 사람이, 그들의 불화 때문에 믿게 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런 죄악의 상황들 속에서도 일단의 문제 모두를 정확하게 통제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2) 디모데의 할례 사건과 같이, 신학이 얽혀 있고, 동시에 복음 전하기 용이한 당시 사람들의 형편이 얽혀 있는 문제에서도, 하나님은 전혀 주도권을 잃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지식과 명철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디모데의 할례’라고 하는 한편으로는 신학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 상황적인 문제에서, 바울에게 굉장한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비방받을 수 있는 ‘비일관성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대단히 파격적이어서, 심지어 20세기, 21세기인 지금에 와서조차 여전히 “이때의 바울은 대단히 일관성 없게 행동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는 신학자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정도의 비일관된 행동, 파격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바울은 자기가 비난했던 베드로의 행동과 유사해 보이는 행동, 곧 베드로가 식사 자리에 이방인들과 함께 있다가 피한 것을 두고 바울 자신이 비난했듯이, “왜 당신도 역시 상황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라고 비난 받기 십상인 결정을 하고 또 밀어부친 것입니까? 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하고, 디도에게는 할례를 하지 않은 이런 불합리해 보이는 일을 한 것입니까?
이 모든 것 배후에 ‘사건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의 모든 판단력, 그의 모든 통찰력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3)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심으로써 상황을 정확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경험에서나 우리 교회가 겪은 일들 중에서도 그런 때가 혹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드러나는 바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마음을 줍니까?
하나님을 독재자로 인식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모두 통제하시니 나는 할 일이 없어”라고 말하게 만듭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도감’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저를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집니까? 제가 집니다. 제가 항상 성도들에게 말하는 ‘자율’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마음껏 자유롭게 하십시오. 책임은 전부 직분자들이 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짊어지는 짐입니다. 회사에서 간부가 되고, 학교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장사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모든 부분에서 책임을 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결정의 문제를 맞닥뜨릴 때, “내가 다 결정하니 참 좋아”라고만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들수록 엄마나 아빠가 보고싶을 때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자기를 품어줄 수 있고 대신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스승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복잡한 문제를 만날 때 해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의 이런 마음은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까?
우리의 ‘존재의 본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대기업의 회장도, 자신이 결정한 무시무시한 결정을 마음속 깊숙이에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결정일수록, 책임이 커질수록, 사실은 우리 마음속 저 깊숙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너무나 가혹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자살하는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어렵고 쉽고에 관계 없이, 그 일이 더 규정적이냐 덜 규정적이냐에 관계 없이, 심지어는 가장 나쁜 상황으로 내가 잘못 운전해 들어가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지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투른 운전 기사 같아서 인생이라는 차를 이상한 길목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가장 극악한 상황으로 내가 실수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고, ‘그것까지도 모두’ 통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말씀 시편 139편 말씀입니다.
시 139:8-12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아멘!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가장 어두운 곳에도 함께 계시면서 나의 인생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도 결코 그분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을 놀래킬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