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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禪(瞑想, jhāna)
“rukkhamūlagahanaṃ pasakkiya, nibbānaṃ hadayasmiṃ opiya.
jhāya gotama mā pamādo , kiṃ te biḷibiḷikā karissatī”ti.
밀림의 깊숙이 나무 아래 들어가서
그대는 열반을 가슴<*hadaya>에 간직하고
고따마여, 참선을 하소서. 방일하지 마소서. <* jhāya mā pamādo>
이렇게 떠들썩해서 그대 무엇을 할 것이요?
jhāya mā pamādo. '방일하지 말고 참선하라.' 참선이란 어떤 의미인가?
참선은 무엇을,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인가?
{“idhāvuso, dhammayogā bhikkhū jhāyī bhikkhū apasādenti —
‘ime pana jhāyinomhā, jhāyinomhāti jhāyanti pajjhāyanti nijjhāyanti avajjhāyanti .
kimime jhāyanti, kintime jhāyanti, kathaṃ ime jhāyantī’ti?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126) 비구들은 참선하는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참선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참선하는 자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참선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참선하고,
도대체 어떻게 참선하는가?'라고,
126) “'법에 열중하는 자들(dhamma-yogā)'이란 법을 설하는 자들(dhamma-kathikā)을 말한다. (AA.iii.379)
iti kho, bhikkhu, desito mayā pariyattibahulo, desito paññattibahulo, desito sajjhāyabahulo,
desito vitakkabahulo, desito dhammavihārī.
yaṃ kho, bhikkhu, satthārā karaṇīyaṃ sāvakānaṃ hitesinā anukampakena anukampaṃ upādāya,
kataṃ vo taṃ mayā.
비구여, 이와 같이 나는 교학을 많이 하는 비구에 대해서 설했고,
[법을] 이해시키는 것을 많이 하는 비구에 대해서 설했고,
반복해서 암송을 많이 하는 비구에 대해서 설했고, 사유를 많이 하는 비구에 대해서 설했고,
(* uttari cassa paññāya atthaṃ pajānāti) 법에 머무는 비구에 대해서 설했다.
비구여, 항상 제자들의 이익을 기원하며 제자들을 연민하는 스승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나는 연민으로 하였다.
etāni, bhikkhu, rukkhamūlāni, etāni suññāgārāni.
jhāyatha bhikkhu, mā pamādattha, mā pacchā vippaṭisārino ahuvattha.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ti.
비구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들이 있다.
참선을 하라. 비구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다.}
Jhāyati,1 [Sk.dhyāyati,dhī; with dhīra,dhīḥ from didheti shine,perceive 빛나다, 인지하다]
參禪(불교) 참선 參 참여할 참 禪 선 선
좌선(坐禪)하여 선도(禪道)를 수행(修行)함. 선도(禪道)를 참구(參究)함.
禪 선 선 선/물려줄 선
1. 선, 좌선(坐禪) 2. 봉선(封禪: 산천에 제사 지내던 일) 3. 선종(禪宗)
4. 불교(佛敎)와 관련(關聯)된 것 5. 좌선하다(坐禪--) 6. 터 닦다
7. 물려주다, 전수하다(傳授--) 8. 양위하다(讓位--) 9. 선위하다(禪位--) 10. 바꾸다
禪(jhāna)
禪(jhāna)의 의미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영역에서는 meditation(명상), contemplation(묵상)으로 번역한다.
contemplation은 라틴어 templum(신전, 성소)와 영어 theory(이론)와 연결되는 어형이라고 한다.
{yo karuṇaṃ jhānaṃ jhāyati, so brahmānaṃ passati 연민하는 禪을 닦는 자는 범천을 본다.}
연민하는 참선을 참선하는 바라문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범천을 보는 것이나
묵상기도(contemplation) 중에 야훼 하느님을 보는 것이나,
'자신 안에 있는 부처를 보는 것'라는 일부 불교의 설명을 연상하여 이렇게 번역했지 싶다.
jhāna를 한역하면서 왜 禪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禪은 높이 쌓은 평평한 단(單)위에 보일 시(示)로 분해되는 단어로
일반적인 의미는 왕위를 양위(封禪)하거나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추정해 보면 제사지내는 것도 자신의 부덕이나 정성을 하늘에 '보이는 것'이고,
양위도 내막은 어떻든 외적으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진정성을 하늘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빠알리로 돌아와서 jhāyati는 산스크리트의 dhyāyati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전에 나오듯이 [shine,perceive] '빛나다, 인지하다.'의 √dhī로도 추정하는 것 같은데
이 단어의 어근이 √jhe/dhe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어근의 의미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jhāyati,(jhe + a)meditates or contemplates
jhāyati,(jhā + ya)burns; to be on fire.
同音異義는 '(불로) 태우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종종 언어적 펀이 많은 것으로 짐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라는 번역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同音異義가 아니라 같은 어원에 의해 어둠을 불로 밝히듯이
'태우다' 그래서 '밝히다, 드러내다.'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so kāmarāgaṃyeva antaraṃ katvā jhāyati pajjhāyati nijjhāyati avajjhāyati,
그는 감각적 욕망을 안에 품고,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간절히 생각한다.
so pathavimpi nissāya jhāyati, āpampi nissāya jhāyati,
tejampi nissāya jhāyati, vāyampi nissāya jhāyati,
그는 땅을 대상으로<*의지하여/기대어> 골똘히 생각하고, 물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불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바람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ākāsānañcāyatanampi nissāya jhāyati, viññāṇañcāyatanampi nissāya jhāyati,
ākiñcaññāyatanampi nissāya jhāyat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mpi nissāya jhāyati,
공무변처를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식무변처를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무소유처를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비상비비상처를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idhalokampi nissāya jhāyati, paralokampi nissāya jhāyati,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issāya jhāyati.
evaṃ kho, saddha, purisakhaḷuṅkajhāyitaṃ hoti.
이 세상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한다.
산다여,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 같은 사람은 이와 같이 골똘히 생각한다.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trāpi saññā vibhūtā hoti.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분명하다.
... pe ...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issāya na jhāyati; jhāyati ca pana.
이 세상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지 않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대상으로 골똘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
√jhe와 관련된 여러 빠알리 용례에서 눈에 띄는 것이 nijjhānakkhanti와 upanijjhāyati이다.
이중 접두사(upa-ni)가 이 단어에 어떤 영향을 미쳐 '凝視'라는 의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뚫어지게 쳐다본다.'라는 의미에 걸맞은 문장이 나타난다.
하나는 증오하고 싫어하여 '째려본다.'라는 어감으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빤히 쳐다본다.'라는 어감으로 사용된 문장이다.
이와 같다면 upa-ni-j-jhāyati에는 '보다'라는 어원이 숨어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타락해 버린 자'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를 응시한다.
santi, bhikkhave, manopadosikā nāma devā,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i.
mātugāmassa cakkhunā cakkhuṃ upanijjhāyati pekkhati
자기의 눈으로 여자의 눈을 깊이 응시하고 쳐다본다.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i.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하였다.
itthī ca purisaṃ ativelaṃ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ṃ.
AI. "여성은 남성을 과도하게 응시하고, 남성은 여성을 (과도하게 凝視한다)."
upanijjhāyati,[upa + nijjhāyati] to meditate upon,consider,look at,reflect on
pekkhati:[pa + ikkh + a] sees; looks at.
AI. 그는 찬성자와 반대자 둘 다를 납득시키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고려하고, 만족시킬 능력이 있다.
paṭibalo hoti ubho atthapaccatthike saññāpetuṃ paññāpetuṃ nijjhāpetuṃ pekkhetuṃ pasādetuṃ;
그는 양쪽이 서로를 잘 알게 하고 설득하게 하고 보게 하고 신뢰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다'와 관련 있는 [인도-유렵어]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없을까 하여 찾아보았지만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다만 theater/theatre(theatrum 극장 ← theaomai 보다/응시하다)
Theaomai is a Greek word that means "to behold, look upon, view attentively, or contemplate".
√the-(Greek) / √jhe-(Pāḷi) / √dhe-(Saṃskṛtā)}라는 실마리는 찾았지만
언어 의미의 변형은 거의 대부분 그 맥락을 찾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禪(jhāna)도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냄'이라는 의미로 읽으면서도
이런 것을 통칭하는 '수행'이라는 일반적인 표현도 포함하는 의미에서
이미 많이 받아들여진 '참선 (수행)'이라고 표기하지만
의미가 드러나지 않으면 {드러남 → 드러내 보임 → 봄}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해서 사용한다.
{‘saddakaṇṭakā kho pana jhānā’ vuttā bhagavatā.
세존께서는 소리는 禪의 가시라고 말씀하셨다.
paṭhamassa jhānassa saddo kaṇṭako
초선에 든 자에게 소리는 가시다.
bhūtapubbaṃ, bhante, cattāro satthāro nānādiṭṭhikā nānākhantikā nānārucikā,
tasmiṃ āvasathāgāre vāsaṃ upagacchuṃ”.
세존이시여, 전에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지고 각각 다른 신념을 가지고
각각 다른 취향을 가진 네 분의 스승들이 그 공회당에 머물기 위해서 왔습니다.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391)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압니까?”
391) “(1) 어떤 자는 남을 믿고 그 '믿음(saddhā)'을 통해서 그가 말한 것을 사실(bhūta)이라고 받아들인다. (2) 어떤 자는 앉아서 생각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이론(kāraṇa)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좋아함(ruci)'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3) 어떤 자는 '오랫동안 이것이 사실이라고 전해 들었다.' 라면서 '구전(anussava)'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4) 어떤 자는 일으킨 생각(vitakka)을 통해서 어떤 이론을 확립한다. 이렇게 하여 '이것이 옳다.'라고 '이론적인 생각(ākāra-parivitakka)'을 받아들인다. (5) 어떤 자는 생각을 하다가 어떤 견해가 떠오르면 그 이론을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 '사색하여 얻은 견해(dṭṭhi-nijjhāna-kkhanti)'를 받아들인다.
장로는 이러한 이론들을 모두 내던지고 자기 스스로의 지혜(paccakkha-ñāṇa)를 통해서 통찰한 것(paṭividdha-bhāva)을 질문하면서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라고 말한 것이다.”(SA.ii.122)
여기에 나타나는 남의 이론(kāraṇa)을 인정하는 다섯 가지 토대는 본서 제4권 「방법이 있는가 경」(S35:153) §3 이하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다섯과 셋 경」 (M102/ii.233~234) §§14~16에서 세존께서는 이 다섯 가지를 토대로 과거에 관한 16가지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계신다. 『맛지마 니까야』「데와다하 경」(M101/ii.218)도 참조할 것.
이것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paccattam eva ñāṇa)'와는 대조가 된다.
자세한 논의는 Jayatilleke,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pp.182~188, 274~276을 참조할 것.
눈으로 형색을 본 뒤 안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으면 …
안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면
'내 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다.'라고 꿰뚫어 아는데도
이러한 법들이 믿음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함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구전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이론적인 생각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사색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초불}
"내적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을 때,
'내 안에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다'고 그는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이 믿음으로, 선호로, 전통으로, 추론으로,
또는 견해에 대한 숙고의 인내로 알아야 할 것들입니까?" {AI}
asantaṃ vā ajjhattaṃ rāgadosamohaṃ, natthi me ajjhattaṃ rāgadosamohoti pajānāti.
api nume, bhikkhave, dhammā saddhāya vā veditabbā, ruciyā vā veditabbā,
anussavena vā veditabbā, ākāraparivitakkena vā veditabb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vā veditabbā”ti?
“no hetaṃ, bhante”.
안에 貪瞋癡가 없으면, '내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확실히 안다.
비구들이여, 그럼에도 그 법들을 믿음으로 알아야 할 것이거나,
選好에 의해서 알아야 할 것이거나, 傳承(들음)에 의해서 알아야 할 것이거나,
行相의 진행에 대한 追論적 생각에 의해서 알아야 할 것이거나,
드러난 것<*nijjhāna>을 容認(納得)되는<*khanti> 견해<*意`見/認知>에 의해서 알아야 하는가?}
asantaṃ: a (부정) + santa (있는, 현재분사) : √as (있다) : 형용사, 중성 단수 대격 : 없는
vā: 불변화사: 또는
ajjhattaṃ: adhi (안에) + atta (자아) : 부사 : 내적으로
rāgadosamohaṃ: rāga (탐욕) + dosa (분노) + moha (어리석음) : 복합어, 중성 단수 대격
natthi: na (부정) + atthi (있다) : √as (있다) : 동사, 3인칭 단수 현재
me: 인칭대명사 1인칭 단수 여격/속격 : 나의
pajānāti: pa (완전히) + √jñā (알다) : 동사, 3인칭 단수 현재 : 알아차린다
api nu: 의문을 나타내는 불변화사들
bhikkhave: √bhikṣ (구걸하다) : 명사, 남성 복수 호격 : 비구들이여
dhammā: √dhṛ (지탱하다) : 명사, 남성 복수 주격 : 법들, 현상들
saddhāya: √śraddhā (믿다) : 명사, 여성 단수 도구격 : 믿음으로
veditabbā: √vid (알다) : 미래수동분사, 남성 복수 주격 : 알아야 할
ruciyā: √ruc (좋아하다) : 명사, 여성 단수 도구격 : 선호로
anussavena anu (따라서) + √śru (듣다) : 명사, 남성 단수 도구격 : 전통으로
ākāraparivitakkena: ākāra (형태) + pari (완전히) + vitakka (사고)
: 복합어, 남성 단수 도구격 : 추론으로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diṭṭhi (견해) + nijjhāna (숙고) + khanti (인내)
: 복합어, 여성 단수 도구격 : 견해에 대한 숙고의 인내로
“sutameva pure āsi, dhammo cakkhumatānubuddho.
sāhaṃ dāni sakkhi jānāmi, munino desayato sugatassa.
눈을 가지신 분께서 법을 깨달으셨다고
전에는 단지 제가 듣기만을 했습니다.
선서이신 성인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이제 제가 두 눈으로 직접 알게 되었습니다.
“ye ca kho ariye dhamme, khantiyā upasamena upetā.
pahāya mānusaṃ dehaṃ, devakāya paripūressantī”ti.
그러나 참으로 성스러운 법에 귀의하여
묵묵히 따르고205) 고요히 따르는 자들
인간의 몸 버린 뒤에 신의 몸을 성취하리.” {132}
205) '묵묵히 따름'으로 옮긴 원어는 khanti인데 인욕으로 옮겨지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부처님 말씀을 지혜로 살펴보고 그것을 좋아하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므로 이렇게 옮겼다. 복주서에서는 지혜로 묵묵히 따름(ñāṇa-khanti)으로 해석하고 있다.(SAȚ.i.103) 이것은 '법을 사색하기를 좋아함을 뜻하는 dhamma-nijjhāna-khanti(M70 §23)나 '견해를 사색하기를 좋아함'으로 옮길 수 있는 diṭṭhi-nijjhāna-khanti(A3:65 등에서는 이 합성어를 사색하여 얻은 견해로 의역을 하였음)로도 나타나는데, 이곳의 khanti도 이러한 뜻이다.
마하나마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 세존이시다.'라고
부처님께 전일하면서도 지극히 청정한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전일하면서도 지극히 청정한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전일하면서도 지극히 청정한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미소짓는 통찰지도 전광석화와 같은 통찰지도 해탈도 구족하지 못했다.
api cassa ime dhammā honti — saddhindriyaṃ ... pe ... paññindriyaṃ.
그렇지만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이라는 이런 법들이 있다.
tathāgatap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그리고 그는 여래가 설한 법들을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한다.
ayampi kho, mahānāma, puggalo agantā nirayaṃ agantā
tiracchānayoniṃ agantā pettivisayaṃ agant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마하나마여, 이러한 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고, 축생의 모태에 가지 않고,
아귀계에 가지 않고,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에 가지 않는다.
Okkanti-saṃyutta (S25) 六六法<* 內外識觸受想思愛界蘊- 59법>
“cakkhuṃ, bhikkhave,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sotaṃ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ghānaṃ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jivhā aniccā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
kāyo anicco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mano anicco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코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몸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마노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yaṃ vuccati — ‘dhammānusārī,
비구들이여,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448) 이러한 법들을 인정하는 자를 일러
법을 따르는 자449)라 한다.
448) “'충분히 사색하여(mattaso nijjhānaṃ khamanti)'란 적합하게 관찰하면서 사색한다(pamāṇato olokanaṁ khamanti)는 말이다.”(SA.ii.346)
여기서 충분히로 옮긴 mattaso와 적합하게로 옮긴 pamāṇato는 제한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특히 pamāṇa는 무량으로 옮기는 appamāṇa의 반대가 되는 단어이다.(본서 제4권 「소라고둥 불기 경」(S42:8) §17의 주해참조) 그러므로 어느 '정도로만 사색하여'로 옮길 수 있다. 역자는 보디 스님의 'a sufficient degree'라는 번역을 존중하여 이렇게 옮겼다.
“관찰(olokana)이란 사성제의 관통(sacca-abhisamaya)이라 불리는 봄[見, dassana]을 뜻한다.”(SAȚ.ii.245)
사성제의 관통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XII.92~103을 참조할 것. 관통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449) '법을 따르는 자(dhamma-anusāri)'에 대해서는 본경 §4 '믿음을 따르는 자'의 주해를 참조할 것.
450) 본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예류자는 분명히 예류자가 되는 길(도)에 있는 자들, 즉 믿음을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와 구분된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법을 믿고 확신하여(saddahati, adhimuccati) 법을 받아들이는 자요, 법을 따르는 자는 통찰지로 법을 정려하는(nijjhānaṃ khamati) 자이다. 그러나 예류자는 법을 직접 알고 보는(jānāti, passati)자이다.
* nijjhānaṃ이란 66법(총59법)이라 불리는 법들을 무상하고 등으로
말씀하신 맥락에 의해 드러남을 의미하고 그래서 納得하고 이해(意`見)하게 된다.
olokana,(nt.) [see oloketi] looking,looking at,sight Sdhp.479 (mukhass’)
oloketi,[BSk.avalokayati or apaloketi] to look at,to look down or over to,to examine,
contemplate,inspect,consider J.I,85,108 (nakkhattaṁ)
so na uddhaṃ ulloketi, na adho oloketi;
그분은 위로 올려다보거나 아래로 내려다보거나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적합하게 관찰하면서 사색한다(pamāṇato olokanaṁ khamanti)
제한적으로(아는 만큼) '내려다 봄'을 容認한다/許容된다/納得한다.
마노는 무상하다고 意로써 見한다(認知한다). /그래서 ~ 라고 이해한다.
66법(59법)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라고 이해한다. 말귀를 알아듣는다.
반면에 예류자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라는 것을
자내증(아빈냐) 즉 직접 알고 보는(jānāti, passati)이다.
yo manassa nirodho vūpasamo atthaṅgamo,
dukkhasseso nirodho, rogānaṃ vūpasamo, jarāmaraṇassa atthaṅgamo”ti.
마노가 소멸하고 가라앉고 사라지는 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이 소멸하고 병들이 가라앉고 늙음 ·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yo manasmiṃ chandarāgo, cittasseso upakkileso.
마노에 대한 욕탐은 마음의 오염원이다.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imesu chasu ṭhānesu cetaso upakkileso pahīno hoti,
nekkhammaninnañcassa cittaṃ hoti.
nekkhammaparibhāvitaṃ cittaṃ kammaniyaṃ khāyati,
abhiññā sacchikaraṇīyesu dhammesū”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들 여섯 가지 경우<*眼~意> 대한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면 그의 마음은 출리(出離)로 기울고, 457)
출리를 철저히 닦은 마음은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해야 하는 법들에458) 적합하게 된다.”
457) “'그의 마음은 출리로 기울고'에서, '출리로 기욺(nekkhamma-ninna)'이라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으로 기운다(nava-lokuttara-dhamma-ninna)는 말이다. 여기서 '마음(citta)'이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마음(samatha-vipassanā-citta)이다.”(SA.ii.347)
458)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해야 하는 법들에(abhiññā sacchikaraṇīyesu dhammesu)'라는 것은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를 통해서 최상으로 안 뒤에 실현해야 하는 법들인 여섯 가지 신통의 지혜(육신통)의 법(chaḷ-abhiññā-dhamma)들에라는 뜻이다.”(SA.ii.347)
nekkhamma(出離)가 nekkamma의 속어 형태이다.
nekkhamma 출리(出離)란 욕계를 벗어남(불환과)을 의미하고
abhiññā 최상의 지혜란 自證(본인이 직접 목격함)을 의미한다.
“'참선을 하라(jhāyatha)'는 것은 대상을 명상하는 것(ārammaṇ-ūpanijjhāna)으로 38가지 대상을, 특징을 명상하는 것(lakkhaṇ-upanijjhāna)으로 무더기[蘊], 감각장소[處] 등을 무상 등으로 명상한다는 말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증장시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MA.i.195)
여기서 말하는 38가지 대상은 38가지 명상주제(kammaṭṭhāna)를 말한다.
“accharāsaṅghātamattampi ce, bhikkhave, bhikkhu mettācittaṃ āsevati;
ayaṃ vuccati, bhikkhave —
‘bhikkhu arittajjhāno viharati satthusāsanakaro ovādapatikaro, amoghaṃ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ko pana vādo ye naṃ bahulīkarontī”ti!
비구들이여, 만약 비구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받들어 행하면 그를 일러 비구라 한다.
그의 선(禪)은 헛되지 않으며, 위의로써 머물고, 스승의 교법을 받들고, 교훈을 받아들이며,
백성들이 주는 보람된 공양을 먹는다.
그러니 자애의 마음을 많이 공부짓는 자들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만큼이라도 초선(初禪)을 닦는다면 … 二禪, 三禪, 四禪,
慈心解脫, 悲心解脫, 喜心解脫, 捨心解脫, 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
8승처, 8해탈, 10편처, 부정상 등, 10수념, 등.
그를 일러 비구라 부른다. 그의 선(禪)은 헛되지 않으며 …
‘yaṃnūnāhaṃ appāṇakaṃyeva jhānaṃ jhāyeyyan’ti. '나는 숨을 쉬지 않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요가가 수행이라는 의미도 쓰이듯이 禪도 수행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고
또는 三昧라는 의미와도 쓰이는 것 같다.
혼자 말로 속내를 드러내다./완전히 연소하다./절망하다.
비구들이여, 위빳시 왕자는 거기 내전에서 괴로움과 슬픔으로 번민하였다.
'아, 참으로 태어난 자에겐 반드시 늙음이 오나니
그 태어남이란 것이 참으로 혐오스럽구나!32)’라고 하면서.
tatra sudaṃ, bhikkhave, vipassī kumāro antepuraṃ gato dukkhī dummano pajjhāyati —
‘dhiratthu kira, bho, jāti nāma, yatra hi nāma jātassa jarā paññāyissatī’ti!
투덜거리다. 낙담하다./열불이 나다. ujjhāyati khīyati vipāceti expressing great annoyance
devatā, ānanda, ujjhāyanti —
‘dūrā ca vatamha āgatā tathāgataṃ dassanāya.
kadāci karahaci tathāgatā loke uppajjanti arahanto sammāsambuddhā.
ajjeva rattiyā pacchime yāme tathāgatassa parinibbānaṃ bhavissati.
ayañca mahesakkho bhikkhu bhagavato purato ṭhito ovārento,
na mayaṃ labhāma pacchime kāle tathāgataṃ dassanāyā’”ti.
아난다여, 신들은 이렇게 푸념하고 있다.
'우리는 참으로 여래를 친견하기 위해서 멀리서 왔다.
참으로 드물게 여래 · 아라한 · 정등각께서는 세상에 태어나신다.
오늘 밤 삼경에 그런 여래의 반열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큰 위력을 가진 비구가 세존의 앞에 서서 막고 있어서,
우리는 마지막 [임종] 시간에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구나.'라고.
imesaṃ yakkhānaṃ mahāyakkhānaṃ senāpatīnaṃ mahāsenāpatīnaṃ
ujjhāpetabbaṃ vikkanditabbaṃ viravitabbaṃ —
‘ayaṃ yakkho gaṇhāti, ayaṃ yakkho āvisati, ayaṃ yakkho heṭheti, ayaṃ yakkho viheṭheti,
ayaṃ yakkho hiṃsati, ayaṃ yakkho vihiṃsati, ayaṃ yakkho na muñcatī’ti.
다음과 같은 약카들과 큰 약카들과 약카들의 장군들과 대장군들에게
알리고 외치고 소리 질러야 합니다.
‘이 약카가 붙잡는다. 이 약카가 들어온다. 이 약카가 괴롭힌다. 이 약카가 애를 먹인다.
이 약카가 해를 끼친다. 이 약카가 해코지한다. 이 약카가 놓아주지 않는다.’라고.
sutaṃ kho pana metaṃ brāhmaṇānaṃ vuddhānaṃ mahallakānaṃ
ācariyapācariyānaṃ bhāsamānānaṃ —
‘yo vassike cattāro māse paṭisallīyati, karuṇaṃ jhānaṃ jhāyati,
so brahmānaṃ passati brahmunā sākaccheti brahmunā sallapati brahmunā mantetī’ti.
yaṃnūnāhaṃ vassike cattāro māse paṭisallīyeyyaṃ, karuṇaṃ jhānaṃ jhāyeyyan”ti.
그러나 나는 늙고 나이 든, 스승들의 전통을 가진 바라문들이
‘우기철 넉 달 동안 홀로 앉아 연민하는 禪을 닦는 자는
범천을 보고 범천과 토론하고 범천과 이야기하고 범천과 상의하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 나는 우기철 넉 달 동안 홀로 앉아 연민하는 禪을 닦으리라.'라고.
brahmunā manteti 범천과 상의하게 된다. mantajjhāyaka 만뜨라를 읊는 자
Jhāyaka,(adj.) meditator(one who makes a fire)
ajjhāyaka:m. [Sk. adhyāyaka] 學習者,讀誦者,諷誦者.
nijjhāna-khanti 이해(to understand, 드러남을 허용한다.)
{nijjhānaṃ khamanti}나 {diṭṭhi-nijjhānakkhanti}에서의
{khanti/khamanti}는
'忍辱, 堪耐, 容忍, 容認, 許容'이라는 어감에서 후자에 속하는 의미이다.
{ni-j-jhāna}는
'드러나다, 드러나서 보이다, 納得, 理解, 보다.'라는 어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diṭṭhi-nijjhānakkhanti} 자신의 견해가 아닌
여래가 설한 법들을 (통찰지로 충분히<*적당히>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한다.
tathāgatap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法은 아는 만큼 드러남<示/單 nijjhānaṃ>을 許容<khanti>한다.)
(이러한 법들<*66의 無常 등>을 納得, 理解하여 받아들이는 자를 일러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yaṃ vuccati — ‘dhammānusārī,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반면에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pajānāti evaṃ passati, ayaṃ vuccati —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을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자를 흐름에 든 자[預流者]라 하나니,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paccattameva ñāṇaṃ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12연기를 아는 자라는 경문도 있다.
첫댓글
속내를 드러내다. 빠알리(pāḷi) jhāna
PIE *dʰyeh₂- → 산스크리트어 dhyā- (어간) + 명사형 접미사 -na → dhyāna (명상).
laryngeal h₂가 장모음 ā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
PIE *dʰyeh₂- → 그리스어 sêma
그리스어 σῆμα (sêma, 상징/표지)
음운적 변화:
PIE *dʰyeh₂- → 그리스어 sêma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 문헌에서 확인).
dʰ- → 그리스어 *s-*로 전환 (예: dʰeh₁- → 라틴어 faciō vs. 그리스어 τίθημι).
laryngeal h₂의 영향으로 장모음 ē가 형성된 것으로 분석.
의미적 변용:
"의도하다" → "표시하다"로 확장.
예: 전쟁에서의 무덤 표지나 언어적 상징 (플라톤 철학에서 "의미의 단위"로 사용됨).
이 변환은 "생각을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에서 "표시"로의 의미적 전이를 반영.
<생각 드러내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