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윗을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사울
삼상 18:6-16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삼상 18:6-16 / [다윗을 질투하는 사울] 블레셋 족속의 용사 골리앗을 쳐죽인 다윗이 이스라엘 온 군대를 거느린 사울과 함께 돌아오는데,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왕을 환영하였다. 여인들은 길가에 줄지어 서서 기뻐 뛰며 소고와 ㄱ) 경쇠 소리에 맞추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는데, (ㄱ. 꽹과리) 7) 이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환호하는 노래를 불렀다. `사울왕이 쳐죽인 원수는 수천이지만 다윗이 쳐죽인 원수는 수만이라네!' 8) 사울은 이 노래를 듣고 몹시 기분이 상해 이렇게 투덜대었다. `내게는 겨우 수천 명을 죽인 공로만 돌리고, 다윗에게는 수만명을 죽인 공로를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모자란 것은 왕이 되는 것뿐이겠구나!' 9) 사울은 이때부터 질투하는 심정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되었다. 10) 다음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령을 내려보내시자, 사울이 왕궁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미친 사람처럼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전과같이 수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울이 갑자기 창을 손에 들어 11) 다윗을 벽에 박아버릴 생각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사울 앞에서 두번이나 몸을 피하였다. 12) 다윗이 사울을 살리려고 수금을 탈 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졌으나 실패하자 다윗이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사울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서 떠나가고 다윗편에 서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13)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더 이상 왕궁에 두지 않고, 그를 작은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내보냈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그 부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항상 승리하였다. 14) 여호와께서 언제나 다윗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는 어떤 싸움에 나가든지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15) 다윗이 이렇게 승전하는 것을 보고 사울은 더욱더 그를 두려워하였다. 16) 그러나 온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점점 더 사랑하여 그가 온 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할 때마다 모두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세워진 사람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추악한 사람으로 변질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6-9) 골리앗을 죽인 후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은 상당한 기일이 소요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긴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최종 승리로 마무리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과 다윗을 앞세우고 개선하는 때였습니다. 많은 남녀가 개선하는 사울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비교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은 많고 많은 원수들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을 천과 만을 대구하여 노래했다는 점이 사울 왕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출현으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저하되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10-11) 블레셋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환영행사에서 사울 왕의 마음이 분노와 질투로 타올랐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사울 왕을 진정시켜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수금을 연주하던 다윗을 죽이려 듭니다. 사울이 두 번이나 창을 던져 공격한 것도 그만큼 살인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12-16) 사울의 시도가 실패하고, 사울은 다윗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서 떠나가고 다윗 편에 서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는 버림받고 거절당했고(13:13, 14; 15:26) 반면에 하나님이 동행하여 만사형통하는 다윗을 보면서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 삼아 변방의 일선 지휘관으로 보냅니다. 잦은 전투로 상처를 입거나 죽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아울러 다윗이 정치적 역량이 중앙의 상류 계층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의도와 달리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은 어디를 가든 이기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 싸움터는 다윗 자신을 증명하는 기회가 되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다윗을 점점 더 두려워하게 되고 살인의 동기가 될 질투의 화신으로 점점 더 변해 갔습니다.
적 용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살해 본능에 시달리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나열해보세요.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만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지혜롭고 만사가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시기와 질투가 한사람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면 모든 것이 불건전하게 됩니다. 그의 말이 불건전하게 되고 그의 표정이 불건전하게 되고 그의 생각과 행동이 불건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볼 때 일단 말을 곱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 저변에는 이 시기와 질투가 깔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말을 하는데서부터 비롯됩니다.
호크마 주석
=====18:6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정관사와 더불어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골리앗'(Goliath)을 가리킨다(17:10, 16, 23, 26, 37, 41-43, 48, 51, 57). 따라서 본 전투는 엘라 골짜기의 전투를 가리키는데, 그 전쟁은 골리앗을 죽인 후에도 나머지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는데 상당한 기일이 소요된 대전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전투의 특징은 역시 다윗과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 장면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묘사된 것같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로 그러한 긴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최종 마무리 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과 다윗을 앞세우고 왕성(王城)으로 개선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인들이...노래하며 춤추며 -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여인들의 이러한 가무(歌舞) 행위는 절기나 승전(勝戰) 등의 사유로 매우 기쁠 때 축제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행해졌었다(출 15:20;삿 11:34).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 '소고'(* , 토프)는 영어 성경들에서는 보통 '탬버린'(tambourine)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성경에서는 항상 즐거움 및 기쁨과 관련하여 언급된다(출 15:20;삼하 6:5;사 5:12). 그리고 '경쇠'(* , 솰로쉬)는 '삼중' 또는 '세개'란 뜻으로서, 보통 '트라이앵글'(triangle) 또는 삼현(三鉉) 악기(three-stringed instrument)로 이해된다. 다무튼 소고와 경쇠는 춤이 수반되는 야외 행사에 알맞는 축제용 악기들이다(R. Payne Smith). 환영하는데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환영하는데'라는 의미의 말은 없다. 따라서 틀림없이 여기의 '환영하는데'란 말은 원문에 원래 나와있는 '만나기위하여'(* , 리크라트)라는 단어와, 그리고 '소고'와 '경쇠' 사이에 나타나 있으나 번역 중 생략된 '기쁨으로'(* , 메시므하)라는 단어가 합성 의역(意譯)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위의 두 단어를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소고'와 '경쇠'처럼 마치 악기의 하나같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혹자는 그 단어를 '기쁜 소리로'라고 주석하기도 한다(Stoebe).
=====18:7
뛰놀며 창화하여 - 원문상으로는 이 두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한편 여기의 '뛰놀다'(* , 사하크)는 (1)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다(삿 16:25), (2) 악기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다(삼하 6:5, 21), (3)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장난을 치며 놀다(슷 8:5) 등의 의미로 성경에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쁨에 겨워 음악에 맞춰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창화하다'(* , 아나)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대답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처럼 음악적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서로 주고 받는 형식, 즉 교차적으로 노래하는 교창(交唱)을 가리킨다(21:11;29:5).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여기서 '천천'이나 '만만'은 원문상으로는 다만 '천'(* , 엘레프)과 '만'(* , 레바바)이지만, 우리말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이같이 번역되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울은 그의 천을, 그리고 다윗은 그의 만을 죽였도다!"(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 his ten thousands). 물론 고대 우가릿 문서나 중근동의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천'이나'만'은 모두 '많음'을 상징하는 보편적 숫자라는 점에서 여기 여인들의 노래가 담고 있는 기본 의미는 '우리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은 많고 많은 원수들을 죽이셨도다'란 뜻으로 볼 수 있다(Klein). 그러나 또한편 여인들이 '사울'과 '다윗'을, 그리고 '천'과 '만'을 분명히 상호 대구(對句)하여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여인들의 노래 속에는 분명 당시의 인기도 또는 민심(民心)이 반영된 생생한 백성들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노래는 민심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결국 이러한 백성들의 노래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그의 왕위(王位)를 후임자인 다윗에게 평화적으로 이양하게끔 촉구하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한편, 이 여인들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널리 애송(愛誦)되었기 때문에, 이웃 블레셋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21:11;29:5).
=====18: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 본래 사울은 열방과 같은 무사적(武士的) 왕을 요구한 백성들의 세속적 동기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용맹성에 있어 누구보다도 뛰어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골리앗의 출현 이후 그러한 용맹성에 있어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인정받게 되자, 사울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저하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그만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 결국에는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공동 번역)란 뜻이다. 이렇나 사울의 우려와 불안 기저(基底)에는, 아마도 일찍이 사무엘에 의행 선언되었던 바(13:14;15:28) 자신의 폐위와 후임자의 등장이라는 현실적 문제인식이 깔려있은 듯하다(R. Payne Smith). 실로 이방의 침입자(골리앗)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 가운데서, 왕으로서 사울은 속수 무책인데, 한 목동이 나와서 그 침입자를 제거해 버렸다면, 그것은 곧 왕직(王職)의 이동을 의마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O.V. Gerlach).
=====18:9
사울이...주목하였더라 - 여기서 '주묵하다'(* , 아완)란 말은 '눈'(eye)이란 뜻의 '아인'(* )에서 파생된 말로, 곧 '의심에' 찬 눈으로 관찰하다';란 의미이다(Klein). 즉 이것은 사울이 왕권(王權) 수호 차원에서 다윗을 정치. 군사적으로 경계하고 배타하였다는 뜻이다.
=====18:10
그 이튿날 - 블레셋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공개적이 환영 행사가 벌어진 다음 날을 가리킨다. 그 환영 행사에서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7절)를 통해자신보다 다윗이 더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질투와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고(8절), 결국 그 일로 인해 밤새 잠못이루고 설치는 통에 그 마음은 악신(惡神)이 임하기에 좋은 터전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힘 있게 내리매 - 이 강신(降神) 현상은 차기의 왕으로 예정되어 있던 다윗에 대해 사울이 가지고 있던(9절) 극심한 피해 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위 폐위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선언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때 이같은 현상을 통해 사울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미련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하시려 한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힘있게 내리다'(* , 찰라흐)란 말은 '앞으로 세게 밀다', '터져나오다', '강력하게 다가오다'란 의미로서, 곧 돌진해오듯 힘있게 닥쳐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악신의 적극적인 활동 상태를 시사하는데, 이는 사울에게 최초로 악신이 임했을 때의 상황보다 더 악화된 상태이다. 결국 악신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지는 일로서, 이는 사울의 종말이 가까왔음을 강력히 암시 하는 징조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에 대해서는 16:14 주석을 참조하라.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 여기의 '집'(* , 바이트)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자신의 궁전을 가리킨다(삼하16:21;20:3).한편'야료하는 고로'(* ,이트나베)는 문자적으로는 '예언하다'(prophesy ; KJV, NIV)란 으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말이 재귀적 사역형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교적(異敎的) 성격의 헛소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9:20, 21, 23, 24;왕상 18:29;렘 23:13). 즉 재귀적 사역형의 동사로 표현된 사울의 이같은 야료(惹鬧) 행위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탈인격적(脫人格的) 행위로서,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마치 미친자처럼 마구 말을 내뱉는 '헛소리' 또는 '지껄임'(rave, RSV)을 가리킨다.
=====18:11
창을 던졌으나 - 여기의 '던졌으나'(* , 야텔)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즉 (1) 여기 이 단어를 그 원래 의미인 '던지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 (2) 이 단어의 본래 의미를 '뻗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양 한다는 견해 등잉 있다. 그런데 이 견해 중에서 첫째, 다윗이 그 창끝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사울이 계속 연거푸 두번 다윗을 향해 창을 사용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19:10의 경우와는 달리 (2)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Fay, Keil).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향해 1차 던진 창을 또 집어 재차 던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 때 다윗은 그 용맹과 기지에도 불구하고, 전혀 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다만 사울의 창을 두번 피했다.
=====18:12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 임했다는 사실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이미 넘겨주셨다는 사실까지를 의미한다.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일개 경쟁 상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가리킨다. 이같은 단정은 여기의 '두려워한지라'(* , 야레)는 말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적인 경외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실시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2:12;출 9:20;왕상 18:3). 아무튼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즉 버림받고 거절당한바 된(13:13, 14;15:26) 사울은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만사 형통하는 다윗을 볼 때마다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8:13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백성앞에 출입하며 - 여기서 '천부장' (* - , 사르 알레프, '천 명의 우두머리')은 (1) 내정(內政)을 관장하는 중앙 행정 관리(Lange, Smith) (2) 국경을 지키는 국방 관리(Keil, Klein)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첫째, 당시 사울은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그를 천부장에 임명했으며 둘째, 여기서 '출입하며'라는 말은 성경에서 '전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다'란 의미로 흔히 사용되며(Klein;8:20;민 27:17;삼하 5:24) 섯째, 다음 절(14절)에 '지혜롭게 행하다'라는 단어가 다윗의 군서적 활동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됐다는 점<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 즉 그때 사울은 틀림없이 다윗을 변방의 일선 지휘관으로 보내버림으로써, 잦은 전투로 인해 거의 목숨이 위태하게 되기를 바랐으며, 아울러 다윗의 정치적 역량이 중앙의 상류 계층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18:14,15
지혜홉게 행하니라 - 5절 주석 참조. 사울이...두려워하였으나 - 여기의 '두려워하였으나'(* , 구르)는 12절의 '두려워 한지라'보다 더 강한 의미의 공포심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Driver). 이는 다윗의 형통과 사울의 두려움이 상호 반비례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다윗과 함께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비롯된 사울의 두려움은 악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점차 다윗을 향한 광기적(狂氣的) 증오로 발전된다.
=====18: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이전의 몇몇 경우처럼(11:8;15:4) 여기서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별되어 기록된 것은, 본서가반드시 왕국 분열 이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다만 사울과 다윗의 당대에도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간에 주도권에 관한 알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가...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 '출입하다'(* , 요체 와바)란 말은 직역하면 '나가고 들어오다'(go out and come in, KJV)란 뜻인데, 이는 곧 자신이 맡은 고유한 직무의 수행을 위하여 공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상태를 가리키는 성경의 관용어이다(12:2;29:6;민 27:17;신 31:2;수 14:11;삼하 5:2;왕상 3:7;대하 1:10;렘 37:4;행 1:21). 이런 견지에서 여기의 이 말은 천부장으로서 다윗의 성공적인 군사 역할 수행을 의미한다(5, 14, 15절).
< 설 교 >
마음의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1)
사무엘상 18:6-16 / 김형준목사
스무 살에 혜성처럼 나타난 미국 뉴욕발레단의 천재 무용수가 뉴저지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약물과다중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한 여인이 찾아와서 너무나 처절하고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 여인은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를 죽인 것은 바로 이 어미구나. 너희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을 때 그것이 나의 상처가 되어서 그것이 너를 기를 때 너를 때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구나. 알고 보면 네 아버지도 네 할머니의 희생자란다. 내가 화가 나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너에게 욕설하고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슬픈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몸부림치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월터 패트릭 비쉐’라고 하는 천재 무용수였습니다. 그 어머니 패트리샤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아이에게 화가 나면 던지고 때리고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시켰던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유 없는 매질을 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기대했던 이 아들은 기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사실과 고통과 갑작스런 매질 앞에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약물로 망가지고 있다. 될 대로 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할까? 왜 이렇게 행동할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마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습관과 행동, 불행한 길로 가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 내 속의 저주스런 어떤 것이 내 마음과 행동을 몰고 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격 때문에, 또는 기질이 달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섬세하게 우리 자신들을 들어다 보면 과거에 받았던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이것을 ‘상처’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형성되어 남아있게 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상실했을 때 우리에게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내가 가장 사랑 받기를 원했던 그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자신이 짓밟혔을 때, 자기가 가진 귀한 것들과 존재가 위협받을 때도 우리 마음 속에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는 그냥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습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성격의 일부,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데도 내가 모르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생활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주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상처가 있는 사람은 화살처럼 꽂혀있는 자신의 상처의 화살을 뽑아서 화살촉을 더 뾰족하게 만들고 거기다 독을 묻혀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닥치는 대로 화살을 쏘아댑니다. 그것은 독화살입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살게 됩니다.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함께 본 사울 왕, 이 사람은 인격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다가왔던 한 사건으로 인해 사울 왕에게는 상처가 남고 그 상처로 인해 그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울은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는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맹장(猛將)이 있어서 그를 꺽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늘 공부 잘하던 사람, 늘 승리하던 사람이 못하면 자존심이 굉장히 상합니다. 그런데 그 때 나타난 어린 목동 다윗이 나타나서 골리앗을 처치하면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실패할 줄 알았던 사람들,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울을 환영하며 찬양을 했는데 그 찬양의 가사가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사울은 화가 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오늘 우리는 사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사울이 ‘불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정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미워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꼭 꼬투리를 잡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웃는 것도 싫고, 나를 칭찬하는 것도 싫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져 내 감정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만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도 싫어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감정이 상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길을 지나가면 내 마음 속에 이렇게 떠오릅니다. ‘허구헛날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니까 인생이 그 모양이지.’ 그러나 자기와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지나가면 ‘저 사람은 항상 묵상하고 다니면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이 상하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 다윗에 대해 사울은 감정이 상해 있어서 언제나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도 싫고 다윗이 자기 앞에 있는 것도 기분이 나쁩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정인을 볼 때, 또는 그 사람에게서 특정한 모습이 나타날 때 왠지 기분 나쁨이 있고, 그 행동을 볼 때 계속 감정이 상하게 됩니까? 한 사람에 대한 기분 나쁨이 계속 남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상처가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8절 말씀을 보면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감정입니다. 분노를 내어야 할 사람에게, 내어야 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는 것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내지 말아야 될 사람에게, 내어서는 안 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 화는 수그러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멀리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을 가까이 놓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있어서도 시도 때도 없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늘 화가 납니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싸운 후 그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아서 그 때문에 고통스럽고, 무엇인가를 깨뜨려야 해결되었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했다는 것은 ‘아완인’, ‘눈’입니다. 의심의 찬 눈으로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jealous eye'입니다.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상관없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그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어 자유함이 없고 피곤하며, 과도하여져서 신경쇠약에 빠지게 됩니다. 상처는 의심의 눈으로 대상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부부간에 상처가 있어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고정시키면 의부증이나 의처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잘 모릅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의심스러우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십시오.
10절 말씀을 보면 ‘악신이 사울에게 임해’라고 나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 상처를 교두보로 삼아 그 사람을 계속 괴롭힙니다. 섭섭한 것만 생각나게 만들고 자기가 실패한 것만 떠오르게 만듭니다. 외로운 것만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나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 세상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게 만드는 유혹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나라를 구하고 자기를 지켜줬던 다윗을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집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주 나타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하며 백성을 돌아보고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보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못합니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 노릇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를 돌봐야 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바둑이면 바둑, 마작이면 마작, 노름이면 노름, 술이면 술, 자기가 관심을 가진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가장의 역할을 팽개치게 됩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자기 맏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불가능한 일,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게 만듭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라이벌을 소유로 삼으려고 별 짓을 다 합니다. 그것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죽이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사울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상처가 여러분의 삶에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상처가 나를 움직여 가도록 내버려둔다면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평안하고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통과 괴로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이 상처가 있을 때 이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어디서 옵니까?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됩니까? 오늘 이 사울의 상처에 대해서 성경은 몇 가지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 근심의 대상이 아닌 축복의 사람으로 될 수 있을지, 마음의 자유함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말입니다.
사울에게 다가왔던 상처의 원인은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났다고 이야기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과 함께 계실 수 없어 떠난 것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리라고 하셨는데, 전쟁을 치른 후 좋은 양과 소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물어보았을 때 이 좋은 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남겨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사울이 도착하지 않자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지낼 때에 사무엘이 왔습니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 준 율례와 법도 대로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옳은 대로, 내 상처가 말하는 대로, 주위에서 말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울을 떠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내 맘에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2000년 5월 25일, 명문대 고려대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해서 시체를 토막내서 버린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대통령 영부인을 꿈꾸는 명문여대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위에서 신앙이 독실하다고 평가되는 신학교를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연세대 이윤구 박사님이 그 일기를 보고 발췌한 것을 연구해서 책을 냈는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계보는 법 맞으며 배운 것-유치원 때, 운동화 끈 리본 못 묶는다고 맞고 운 것-초등학교 때, 새 컬러TV 조정스위치를 없앴다고 맞은 일, 대변 검사하는 것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밤중에 쫓겨날 뻔한 일-초등학교 3학년, 밥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던진 일, 유리창 금감-초등학교 4학년,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은 일, 무슨 영문인지 모름-초등학교 3학년, 책가방에 동화책 있다고 형과 비교해 혼난 일-초등학교 4학년, 무릎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초등학교 3학년, 전화받은 것 전달도 못한다고 즉흥적으로 구타-초등학교 후반, 중고등학교 전반, 따귀, 손바닥, 과천고등학교도 못 갈 거라며 형과 비교해 문책, 키가 작아 사회생활 하기 힘들것이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고3, 집안 형제들과 비교하여 인격적 모독-현재까지......」
이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그 한마디만 들었더라면...’ 여러분, 어쩌면 이 어머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나 영부인이 되겠다고 꿈을 꾸고 군인과 결혼했는데 꿈을 접게되자, 좌절된 꿈을 그 아들이 이뤄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기대에 못미칠 때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자신도 모르게 미워지고 그것이 자신을 죽이고 자기 아들을 죽게 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신학교를 나왔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그 자녀를 길렀습니까? 에베소 6장 4절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이 자기에게 주어질 때 그 말씀대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상처와 한으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자기 인생을 대할 때 그것은 자기에게도 상처요 남에게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성경은 다윗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은 정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사랑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십여 년 이상 쫓겨다닌 상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처가 자기에게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데, 내가 판단한 대로, 상처 입은 대로, 느끼는 대로, 경험한 대로 하지 않고 그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검증해 보고 그것이 아니었을 때 과감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던져버렸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향해 ‘지혜롭게’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상처를 받았습니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흐르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 속, 내 손과 발, 내 가슴과 머리 속에 나타나게 하십시오. 내 속에서 아무리 옳고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이야기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에는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안될 것 같은데 됩니다. 그것을 성경은 ‘지혜롭게, 지혜롭게’ 살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2)
두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position)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표준새번역에는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에 관심이 있으면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 자리를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할 때 내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기보다 더 왕처럼 존귀함을 받는 다윗이 나타났을 때 사울은 불안했던 것입니다. 자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내가 그래도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한 자리에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분노가 생기고 속상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현장입니다. 대접받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길을 갈 때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자리에 앉느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는가는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 자,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이 자리는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드릴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귀한 위치, 동등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인간의 몸으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 선생의 자리도 포기하고 내려와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자리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후의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 자기에게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편 강도 중에 진실로 주님을 의지하는 우편 강도를 향해서 구원의 마지막 사역을 베푼 것을 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고통스런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셨던 주님, 주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연연하게 될 때 상처와 아픔이 내 삶 속에 찾아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아버지인데....... 내가 어머니인데...... 나를 이렇게 대접해? 나를 이것 밖에 안 봐?' 그 속에 분노가 오고 내가 무시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쫓겨다닐 때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전방 군대에 집회하러 가서 사단 참모장을 만났습니다. 그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회는 육사를 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 속합니다. 김영삼 정권 때 하나회 출신을 한명도 진급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거기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아는데 군인들의 진급에 대한 고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 가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분이 그런 형편에 처했습니다. 매년 진급심사 때마다 얼마다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분이 여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군인은 전쟁도 목적이지만 진급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급에 관심이 없어요.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어떠한 위치에 처했던 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 얼굴 속에 편안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장로 투표와 권사 투표를 하면 교회가 술렁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상처가 된 것입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처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로 가난한 자리에 처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남이 짓밟는 자리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도 있고 병중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 부요한 자리, 위대한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기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때론 우리가 주님처럼 종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짓밟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윗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자신의 가치와 평가의 기준을 사람의 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 말에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의 자리는 누가 세워주는 것입니까?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무명의 한 소년, 이름없는 산골의 소년인 사울을 지명하여서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뽑혔습니다. 주관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동시에 주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고 확신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왕권이 백성들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노래에 따라서 왕이 되고 안 되고, 가치가 높아지고 낮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비교의식은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쫓겨 다녀도 당당했습니다. 짓밟혀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그 하나님을 믿고 당당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부모가 ‘너 참 가치없는 놈이다, 나보고 너 생겨도 어떻게 이렇게 생겼냐? 왜 형보다 못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실패할 수도 있고 두번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저 인간은 안됐어’하는 그 이야기에 여러분의 인격과 가치가 좌우됩니까? 여러분을 누가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나를 존귀하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실패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병들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위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주보를 백만원짜리 수표라고 보십니다. 수표를 구겼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이것을 바닥에 던져서 밟았습니다.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내가 때로는 구겨질 때도 있고 찢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 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취소시키지 않는한 그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내 인생이 때로 구겨지고 부서진다 할지라도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천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바울, 그는 고통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어느 식당 뒤편에 개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방장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 음식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개들이 ‘야 그 주방장 참 맛없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주방장은 그 말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에게도 주고 개에게도 주었습니다. 얼마 뒤 그 주방장은 결국 자리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진정 평가할 그분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개가 말하는 것에 신경을 썼던 주방장이 쫓겨난 것처럼, 심지어 부모가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분명한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사람이 너는 실패했다, 가난하다, 머리 나쁘다, 너는 끝장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의 확신에 거하십시오. 다윗은 전쟁 중에도 잠을 잤으며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자체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미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처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도 내가 생각하는 지식과 기준, 옳다고 판단하는 것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속에 떠오는 생각을 검증하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에 따라 내 삶을 맞춰나가고 고쳐나갈 때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나의 진정한 관심은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 가난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약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남이 이야기한다고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를 매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귀하다고 여기시는데 누가 나에게 가치 없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제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제 그 상처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 마음을 자유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2
삼상 18장 6~16절 / 김형준목사
두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position)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표준새번역에는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에 관심이 있으면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 자리를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할 때 내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기보다 더 왕처럼 존귀함을 받는 다윗이 나타났을 때 사울은 불안했던 것입니다. 자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내가 그래도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한 자리에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분노가 생기고 속상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현장입니다. 대접받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길을 갈 때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자리에 앉느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는가는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 자,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이 자리는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드릴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귀한 위치, 동등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인간의 몸으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 선생의 자리도 포기하고 내려와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자리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후의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 자기에게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편 강도 중에 진실로 주님을 의지하는 우편 강도를 향해서 구원의 마지막 사역을 베푼 것을 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고통스런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셨던 주님, 주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연연하게 될 때 상처와 아픔이 내 삶 속에 찾아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아버지인데....... 내가 어머니인데...... 나를 이렇게 대접해? 나를 이것 밖에 안 봐?' 그 속에 분노가 오고 내가 무시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쫓겨다닐 때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전방 군대에 집회하러 가서 사단 참모장을 만났습니다. 그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회는 육사를 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 속합니다. 김영삼 정권 때 하나회 출신을 한명도 진급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거기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아는데 군인들의 진급에 대한 고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 가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분이 그런 형편에 처했습니다. 매년 진급심사 때마다 얼마다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분이 여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군인은 전쟁도 목적이지만 진급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급에 관심이 없어요.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어떠한 위치에 처했던 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 얼굴 속에 편안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장로 투표와 권사 투표를 하면 교회가 술렁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상처가 된 것입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처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로 가난한 자리에 처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남이 짓밟는 자리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도 있고 병중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 부요한 자리, 위대한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기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때론 우리가 주님처럼 종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짓밟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윗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자신의 가치와 평가의 기준을 사람의 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 말에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의 자리는 누가 세워주는 것입니까?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무명의 한 소년, 이름없는 산골의 소년인 사울을 지명하여서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뽑혔습니다. 주관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동시에 주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고 확신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왕권이 백성들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노래에 따라서 왕이 되고 안 되고, 가치가 높아지고 낮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비교의식은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쫓겨 다녀도 당당했습니다. 짓밟혀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그 하나님을 믿고 당당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부모가 ‘너 참 가치없는 놈이다, 나보고 너 생겨도 어떻게 이렇게 생겼냐? 왜 형보다 못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실패할 수도 있고 두번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저 인간은 안됐어’하는 그 이야기에 여러분의 인격과 가치가 좌우됩니까? 여러분을 누가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나를 존귀하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실패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병들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위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주보를 백만원짜리 수표라고 보십니다. 수표를 구겼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이것을 바닥에 던져서 밟았습니다.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내가 때로는 구겨질 때도 있고 찢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 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취소시키지 않는한 그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내 인생이 때로 구겨지고 부서진다 할지라도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천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바울, 그는 고통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어느 식당 뒤편에 개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방장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 음식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개들이 ‘야 그 주방장 참 맛없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주방장은 그 말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에게도 주고 개에게도 주었습니다. 얼마 뒤 그 주방장은 결국 자리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진정 평가할 그분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개가 말하는 것에 신경을 썼던 주방장이 쫓겨난 것처럼, 심지어 부모가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분명한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사람이 너는 실패했다, 가난하다, 머리 나쁘다, 너는 끝장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의 확신에 거하십시오. 다윗은 전쟁 중에도 잠을 잤으며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자체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미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처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도 내가 생각하는 지식과 기준, 옳다고 판단하는 것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속에 떠오는 생각을 검증하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에 따라 내 삶을 맞춰나가고 고쳐나갈 때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나의 진정한 관심은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 가난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약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남이 이야기한다고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를 매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귀하다고 여기시는데 누가 나에게 가치 없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제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제 그 상처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 마음을 자유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의 아픔
삼상 18장 5~30절 / 한대근목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가면 꽃들이 많이 있는 [로스 알토힐]이라는 마을이 있답니다. 그 거리는 아주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있는데, 그 마을이 꽃마을이 된 데에는 한 우편배달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 마을에는 ‘요한’이라는 우편 배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처럼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우편물을 배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을 15년 동안 살면서 어느 날, 자신의 인생과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에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는 우편 배달 일을 계속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 일을 그만 한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라는 사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 일이 너무나 지겹고 지루한데 어떻게 계속하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면서 보람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 문제로 기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우편 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매일 똑같이 자전거로 마을을 돌며 우편을 배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편행랑 안에 꽃씨를 넣고 다니며 지나가는 집 마당에 꽃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가 지나가는 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거리는 꽃의 거리가 되었고 그가 다닌 마을은 꽃마을이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 우편 배달부의 밝고 건강한 자아상이 마을 전체를 꽃마을로 만든 것입니다. 자아상(self-image)이란 자기 자신을 보는 자세입니다. 자아상은 인간의 행동과 태도를 지배합니다. 자아상은 마치 운전사 같아서 자기 의지대로 인생을 운전해 나갑니다. 건강하고 밝은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 존중하고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자긍심을 갖고 삽니다. 긍정적이고, 대인 관계가 원만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마음껏 활용하며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병든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한숨과 걱정 속에 삽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과 배경을 핑계로 스스로를 계발하고 향상시키는 일을 등한히 합니다. 동시에 심한 열등감에 휩싸여 원인 모를 짜증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세상을 봅니다. 늘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역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이 밥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추앙 받고 존경받던 사울이 다윗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오합지졸로 흩어지는 블레셋 군대를 끝까지 추격하여 진멸하고는 개선장군이 되어서 사울과 함께 돌아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개선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마당에서 노래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사울이 심히 불쾌했습니다. “아니 감히 한 나라의 임금인 나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햇병아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다니”하면서 불쾌한 마음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부터 다윗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울이 그렇게 분노하고 불쾌하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가시 같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다윗의 승리는 곧 자신의 승리요 자신의 영광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입니다. 자기가 세우고 보냈습니다. 지도자의 축복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하고 다윗을 축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계속 승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나라가 강해지고, 결국 임금의 자리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어둡고 병든 자아상은 그 사실이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사울은 끊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울을 추락하게 만든 것은 사울의 ‘병든 자아상’이었습니다. 이 병든 자아상으로 인하여 사울은 몇 가지 병적 증세들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과 비교하면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병든 자아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생애를 비참하게 무너뜨린 사울의 왜곡된 자아상은 어떤 것입니까?
1. 비교의식 - 열등감 - 질투
7절부터 9절까지 읽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골리앗과의 한판승, 그리고 블레셋 군대를 진멸시키는 위대한 과업을 이루고 돌아오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한 백성들의 환호는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인 환호와 인기를 얻은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사울보다도 더 많은 공을 세었다고 다윗을 치켜세우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는 사울 왕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과 칭송을 다윗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다”는 표현은 ‘감시의 눈초리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곧 질투하는 눈을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비교하는 눈으로 다윗을 보기 시작합니다.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윗을 향한 질투의 감정이 쌓입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의 생애가 변질되고 왜곡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등감이 생기는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열등감은 비교의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또는 어떤 대상과 자신을 비교하여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열등감이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열등감을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또는 남들보다 예쁘지를 못해서, 또는 태어나고 살아온 환경이 남들보다 좋지 못해서, 남들보다 가난해서,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해서,.......등등, 우리가 사는 삶의 환경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갖게 만듭니다. 물론 열등감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열등감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없다는 것은 의식이 없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등감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열등감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오히려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 생기지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개성 있는 연기자로 자기 길의 개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업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못한 열등한 부분을 보고 자신의 성장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결코 열등감은 우리의 인생을 파멸의 길로 내몰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하지 못한 자아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아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이 생겼을 때에,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그 약점을 비관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비교의 대상, 자기를 열등하게 만든 대상을 향한 질투로 인하여 스스로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질투라고 하는 무서운 감정의 에너지를 발생시킵니다. 자기보다 더 낫다고 하는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울은 급기야 다윗을 죽이기 위해 모두 방법을 강구합니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질투의 감정이 사람을 죽이려는 무서운 죄악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질투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킵니다. 일단 질투의 감정이 생겨나면 나의 장점이 더 이상 계발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좋은 가능성이 모두 사장 될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9장 2절 이하에 보면 그는 아주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키도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의 나귀새끼를 찾아 그 먼길을 여행하면서 불평 한마디하지 않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또한 예의가 바른 사람입니다. 드디어 그가 왕이 되어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서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지혜가 있었고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탁월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등장하면서, 다윗이 백성들 사이에 급부상하자, 사울은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고 심각한 열등감에 빠지면서 사울이 가졌던 모든 장점이 다 사장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는 더 이상 왕으로서의 성숙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임금자리마저도 빼앗길 것이라고 하는 과대망상에 빠져서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한 질투는 자신의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질투하기 시작하면 주야로 질투의 대상밖에는 생각이 안 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시기와 미움, 이런 감정의 늪에서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결국 자신의 일상적 삶의 태도가 다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생각이 마비되고, 행동이 마비되고 삶이 마비됩니다. 일상적인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도 다 잊어버립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왕이 다윗을 죽이러 다니느라 아무 것도 못합니다. 24장에 보면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는데, 사울이 전쟁을 치르다 말고 다윗이 가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을 하다 말고 다윗을 잡으러 쫓아갑니다. 자신의 질투의 감정 앞에서 나라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투는 질투의 대상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감정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질투의 배경에는 악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영적인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과 함께 찾아오는 질투의 감정이 자리잡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열등감과 함께 질투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고 삽니다. 인생의 길에서 질투의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지 못하도록, 열등감과 질투의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비교의식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열등감은 질투라는 무서운 감정적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그것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장점, 내게 주신 은사를 묵상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기 있는 나는 나 일뿐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차인표가 될 수 없고요, 우리 부인이 최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한대근 목사이지 김선도 목사가 될 수 없고, 곽선희 목사가 될 수 없으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더더욱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비참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건강한 자아상을 심어주는 일은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성장계기로 삼을 수 있도록 자아상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 부모와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절대로 비교하지 마시고, 그 아이 자체의 장점을 부각시켜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의 단거리 경주에서 금메달을 따 3관 왕이 된 윌마 루돌프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흑인인데다가 왼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마른 소아마비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세 살부터 여덟 살까지 다리에 보족을 끼우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장애를 가진 딸을 정상아보다 더 건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대로 딸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하나님 우리 딸 윌마도 다른 아이들처럼 걷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부모들의 사랑 가운데서 장애를 가진 것에 대해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다른 아이들처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학교를 다녀오면 지쳐 쓰러질 정도였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47명의 친구들을 물리치고 달리기에서 일등을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테네시주 여자고등학교 육상 대표선수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로마 올림픽 3관 왕이 됩니다. 소아마비 장애인 중 99퍼센트가 마음의 병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들의 병은 대체로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없다며 스스로를 제한해버리는 마음의 병, 어두운 자아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윌마는 부모로부터 건강한 자아상을 물려받았기에 자신이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 성장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자신의 가치를 사장시키는 병든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은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스바랴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베드로전서 2:9-10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목회단상에도 소개했습니다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작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쓴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제목의 동화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 없이 외롭게 살고 있는 다섯 남매에게 그 나라의 왕이 새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섯 남매는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의 재주를 연마합니다. 첫째는 조각, 둘째는 그림, 셋째는 노래, 넷째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똑똑했습니다. 그러나 막내는 마음만 착하지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막내는 네 명의 형제들에게 재주를 배우려고 하지만 모두 귀찮다고 본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낯선 아저씨가 마을을 지나는 것을 보고 막내는 얼른 나귀에게 물을 주고, 아저씨도 쉴 수 있도록 의자를 내주었습니다. 한참을 쉬고 난 아저씨는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마을로 들어갔으나 금새 돌아왔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묻는 막내에게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아무도 왕을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막내를 제외한 네 형제 모두가 왕에게 보여줄 재주를 연마하느라고 남루한 옷차림의 아저씨에게 관심조차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막내는 아저씨가 아버지가 될 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물었습니다. “나 같은 아이도 사랑해주시나요” 그러자 임금님이 막내를 번쩍 안고 말합니다. “너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마음이 있잖아.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친절한 행동에 무척 기뻤단다. 남들처럼 멋지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한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멋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재주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못생겼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잠잠히 바라보시며 기뻐하시고, 행복해하십니다. 여러분이 잘났든 못났든,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많이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생명 자체의 신비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 안에서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49장)
사울의 아픔 ②
삼상 18장 5~30절 / 한대근목사
아름다운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바닷가 높은 벼랑 위에 세워진 이 수도원에는 1000개의 종이 있어서 바람이 불면 1000개의 종들이 어우러져 천상의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서 수도원은 땅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1000개의 종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종소리가 들리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예전처럼 맑고 아름다운 천상의 종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한 순례객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 수도원이 있던 바닷가 언덕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종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람에 파도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는 3개월이나 머물면서 시끄러운 파도소리를 피해 종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습니다. 3개월이 지나도록 종소리를 듣지 못한 이 사람은 이제 종소리 듣는 것을 포기하고 바닷가에 서서 파도가 부딪치는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하얗게 부서지는 광경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귀에 아름다운 천상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끄러운 파도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종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기 위해 시끄러운 파도 소리를 피하던 그가 오히려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종소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가 시끄러운 파도소리를 쫓기 위해 파도소리에 집중하느라고 종소리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 세상의 온갖 소리들에 오염되어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찾아보겠다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울을 추락하게 만든 것은 사울의 ‘병든 자아상’이었습니다. 이 병든 자아상으로 인하여 사울은 몇 가지 병적 증세들이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열등감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시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데 말입니다. 사울의 병든 자아상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지 않고 다윗이 가진 축복을 보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질투의 감정에 노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그것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장점, 내게 주신 은사를 묵상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멋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재주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못생겼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잘났든 못났든,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많이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건강한 자아상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미움과 분노
오늘은 사울을 무너지게 한 두 번째 ‘병적 증상’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0절과 11절을 읽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니라”
사울 왕의 또 다른 아픔은 미움과 분노입니다. 병든 자아상을 가진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보다 더 칭송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을 보면서 다윗을 향한 미움과 함께 다윗을 향한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을 주목하여 모았습니다. 미움의 눈초리, 분노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마음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분노를 “상처를 입거나 모욕을 받았을 때, 유발되는 강한 열정, 불만족의 감정, 통상적 적대감”이라고 정의합니다. 분노는 신경질, 좌절, 고통, 그밖에 불만족을 유발하는 사건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술 취해서 늦게 집에 들어온다. 아내가 살림을 엉망으로 쓴다.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오지 않는다.....등등 수천 가지 사건들이 분노가 일어나게 자극할 수 있고 일단 사건이 일어나면 감정적인 반응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실망, 상처, 거부감, 당혹스러움 같은 감정을 모두 포함하는 감정다발”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악도, 죄도 아닙니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분노를 느끼고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려고 하는 주제는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에 대한 것입니다. 밝고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화를 적절하게 처리할 줄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 처리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함으로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분노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중한 마음이 거부당할 때, 자기 존대가 거부당하는 아픔과 함께 분노가 일어납니다. 분노는 자기를 사랑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원인을 바르게 찾지 못하고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게 될 때,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양을 치는 아벨은 첫 새끼로, 농사 짓는 가인은 땅의 소산인 곡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 가인이 분한 마음에 얼굴 색이 변하였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치솟은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아벨에게 향한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자기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크나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바로 분노로 인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원인을 다윗에게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국 왕위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벨 때문에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분노의 원인을 바르게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분노의 원인을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사울이나, 가인이나 그들이 분노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고,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나, 아벨이 정말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만한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진짜 동기가 무엇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진짜 동기가 무엇입니까? 다윗 때문입니까? 아벨 때문입니까? 정확하게 따지면 그 원인은 사울 속에 있고, 가인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병든 자아상이 문제의 원인, 분노의 원인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자신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지, 그것이 다윗 때문도, 아벨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 밤늦게 전화 연락도 없이 집에 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곧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니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안 나나?”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남편이 염려되고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편이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마음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상한데로 마음이 쏠립니다. “나를 생각해준다면 전화라도 했을 텐데, 집에서 밥해 놓고 기다리는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아마 우리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결혼을 잘못 했어. 어디 들어오기만 해봐라” 이렇게 점점 분노의 덩어리가 크게 마음에 자리를 잡고, 이것이 결국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남편에 대한 배려와 걱정보다는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하는 감정의 동기가 분노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생겨난 분노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비극을 유발하는 감정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자라나서 그 마음에 증오심이 생긴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화살처럼 꽂힙니다. 분노는 이처럼 엄청난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자 [엘미 게이쓰]라는 사람은 감정 분석실험을 통해서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모아서 시험관에 넣고 액체로 냉각시켰더니 침전물이 생겼는데, 화를 냈을 때에는 밤색으로, 고통이나 슬픔가운데 있을 때에는 회색으로, 후회스러운 감정은 복숭아 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분노의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 놀랍게도 그 쥐가 수 분 내에 죽더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사람의 몸에는 독소가 생기며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계속 화를 내면 80명을 죽일 수 있는 독소가 나온다”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분노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분노를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여 말씀하심으로 그 위험성을 일찍이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을 찾아서 읽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당시 유대인들은 살인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임의로 빼앗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대적행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살인에 대해 엄한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무엇인가까지도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살인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에 대해서 분노하고, 형제를 무시하고 욕하는 등,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그 악한 동기들은 곧 살인과 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울이고 가인입니다. 분노가 밖으로 향하면 이렇게 다른 대상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됩니다.
반대로 분노가 자기 내면을 향해 폭발하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한이 맺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독히 한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교 문화는 속에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밖으로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해서 멸시를 당했습니다. 겸양지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잘 표현하지를 못했습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하고, 슬퍼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됩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남성다움의 모델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다고 해서 여자는 무조건 참아야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느끼는 감정다발들을 속으로 밀어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참지 못하고 불끈불끈 올라오는 분노가 일어나면 자기 수양이 덜 된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책합니다. 화가 났지만 스스로에게 “나 화 안 났어”라고 주문하면서 참고 또 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쌓인 분노가 저수지 둑이 터지듯이 터져 버리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해 공격할 때, 그것이 병이 되어 자기를 죽이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움과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죄를 짓게 만드는 힘과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 그랬고, 사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분노가 일어났을 때, 죄 짓지 않고 그 분노를 처리할 수 있는가? 다음의 다섯 가지 단계를 잘 기억하셔서 분노가 죄로 이어지지 않고 잘 해결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①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하고 소리 내어서 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가 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다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②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기분 내키는 대로하면 반드시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 말은 분노를 쌓아 두라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난 상태에서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언 29:1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고 했습니다.
③분노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타임아웃을 외치고 “지금 내가 왜 화가 났을까?” “과연 지금이 내가 화를 내야 할 상황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정말로 잘못을 했다면 어떻게 잘못했는지 확인하고, 그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판단합니다.
④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반응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선택하려는 행동이 잘못을 잘 처리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상대방과 사랑으로 대면하는 것이고, 그 문제를 그냥 지나쳐버리겠다고 의식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⑤화해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살펴보았다면, 이제 행동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허물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면 그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런 뒤 분노를 하나님께 풀어놓습니다. 만일 잘못한 사람과 사랑으로 대면하기로 선택했다면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반대로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과 대면하기로 결정했다면 부드럽게 대면해야 합니다. 자신이 시험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즉 자신이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즉시 용서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상처받을 수 있고, 또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았을 때, 어느 누구나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사울과 가인은 상대방을 향해 분노를 폭발함으로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사울이나, 가인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분노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21절까지의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 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주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원인이 내게 있든, 상대방에게 있든지, 미움과 분노를 끌어안고 사는 한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로부터의 자유도 주님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앞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다발을 다 내려놓고 참 자유와 기쁨이 있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울의 아픔 ③
삼상 18장 5~30절 / 한대근목사
옛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그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면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섬에 엄한 아버지를 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옛날 아버지들, 특히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은 예절이라는 구실로 자식들을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식사를 할 때에도 아버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숟가락을 들면 큰 사단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이 아이가 한 번은 좋아하는 생선요리에 아버지보다 먼저 젓가락을 댄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격노한 아버지가 생선에 젓가락을 댄 아이의 손을 사정없이 내려쳤습니다. 그러자 그 힘에 퉁겨나간 생선이 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젓가락은 공중제비를 돌았습니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떨어진 젓가락을 다시 들 힘이 없었고, 손은 금방 퉁퉁 부어 올랐습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어머니가 집어준 젓가락으로 꾸역꾸역 밥을 먹었습니다. 얼이 빠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만 나타나면 슬그머니 피합니다. 그 아이 안에 증오와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가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성장하면서 대인공포증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여학생들 앞에선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서른 일곱이 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7년간 유학생활 동안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들과 친해지려고 안달을 하는데, 그는 교수님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교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리고 두려워서 가까이 가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인하여 어떤 권위자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삐뚤어진 자아상을 치유 받고 이제는 한국 교회의 치유상담의 대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정태기 박사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울을 무너뜨린 ‘병든 자아상’에 대해서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급부상과 함께 시작된 사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바로 그의 병든 자아상이 만들어낸 증세들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사울은 끊임없이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동시에 질투의 감정에 노예가 되어 자기를 상실하고 절망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다윗을 향한 미움과 함께 분노가 폭발하면서 다윗을 죽이려는 엄청난 죄악을 도모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 죽일 수 있는 무서운 독소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두려움
오늘은 세 번째로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선 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5절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29절을 봅시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사울의 병든 자아상은 열등감과 분노, 그리고 이제는 두려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단어가 영어에서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갑작스런 재난이나 위험에서 마음이 불안하거나 또한 용기가 없음을 뜻합니다(fear). 또한 거리낌과 혐오의 감정과 사람이나, 어떤 일에 직면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dread), 그리고 좀더 강력한 표현으로 혐오감이나 반감을 수반한 공포(horror) 등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전적인 의미를 통하지 않더라도 본분의 분위기를 보면 사울이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버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났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11).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신다고 하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15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모든 전리품을 불태우고, 진멸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취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서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26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나타난 젊은 청년이 골리앗도 물리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자신의 무능력과 비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의 승승장구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사울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건장하고 성숙한 한 나라의 왕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다윗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분명히 그 사람 뒤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미 그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신다고 하는 선언이 있었던지라 다윗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의 원천이요, 시작이요, 능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사울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울은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울을 추종하고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몇몇에 불과하고 16절에 보듯이 온 이스라엘과 유다, 다시 말해서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지금 사랑을 받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백성들 앞에 출입하였다는 말은 다윗이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받고 있던 그 사랑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고 행복한지 여러분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얼굴 색이 밝아집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얼마든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이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매사에 일을 할 때마다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또 한가지 사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를 다윗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8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여 보는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그의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사람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룬 나라인데, 그것을 다윗에게 넘겨줍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감무쌍하고, 백성들의 칭송을 듣는 다윗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두려움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두려움의 원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하는데서 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염려하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윌로우크릭의 ‘릭 워렌’ 목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4가지 악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두려움은 우리들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재능을 마비시키고 주저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스위스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 폴 트루니에는 “우리 모두는 무한한 잠재력의 보고(寶庫)와 잘 감당할만한 다양한 영역들이 있지만, 두려움이라는 괴물이 그 보고를 향해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했을 때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는 괴물입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들의 대부분은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히 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상대방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 앞에서 자신을 위장하고 자신의 실재 느낌마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린 계집 종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또한 두려움은 헌신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다시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진정한 친밀감을 나누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듯 두려움은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두려움은 우리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언 12:55에 “마음의 근심은 사람을 침울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네 번째, 두려움은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종종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보다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 발생할까 봐 염려하면서 실패를 준비합니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말이 씨가 됩니다. 욥기 3장 25절과 26절에 보면 고난을 당하는 욥의 독백이 나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어떤 이들은 이 고백이 욥이 고난을 받게 된 배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을 묵상하고 실패를 묵상하고, 두려움을 묵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곱씹고 살면 두려운 일이 임합니다. 실패를 묵상하면 실패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물리치고 능력 있게 서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질투의 창을 던지고 버림받은 왕
삼상 18장 6~15절 / 문기태목사
옷가게를 하는 김씨와 맞은 편에서 역시 옷가게를 하는 박씨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싸우고 서로 잘 되는 것을 못보는 사이입니다. 어느날 천사가 김씨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네가 원하면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너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 건너편의 박씨는 네가 받는 복의 두 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떠냐? 그렇게 복을 받기를 원하느냐?" 김씨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비바소 포웰은 말하기를 "교만해지지 않고 우리 자신의 장점을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질투심없이 바라보는 것 역시 아주 어려운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괴로왔던 경험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이 누군가를 칭찬할 때 질투심을 절제할 수 없어서 심술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에 재를 뿌린 일은 없었습니까? 질투의 화신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향한 날카로운 비수를 갈며 해를 입힐 궁리에 집착한 일은 없습니까? 질투는 새롭게 변화되지 못한 옛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질투심의 노예가 되어 추하게 일그러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당시에 가장 높은 지위를 얻은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전투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나라를 구한 화려한 경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교하며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듣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공연히 한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질투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질투하는 대상을 죽이고자 창을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그는 모든 축복을 잃어가며 비참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그렇게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그러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오늘 우리로 하여금 질투심을 경계하고 극복하여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살 것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질투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질투의 원인은 영적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여인들의 노랫소리에서 자극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은 다윗이 적장인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크게 이기고 돌아올 때 너무 기뻐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요즘 월드컵으로 세계가 들썩거립니다. 단지 축구를 이겼을 뿐인데 승리한 나라는 축제 분위기이고 패배한 나라는 초상집입니다. 우리 나라도 강호 폴란드를 이기고 온 나라가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밤새도록 떼로 몰려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목소리가 쉬도록 좋아서 춤을 추며 몰려 다녔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전쟁에 패배하고 망하여 적국의 식민지가 될 상황에서 무명의 장수가 나타나 단숨에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적장은 무명의 장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고 좋았겠습니까? 월드컵 일승도 이렇게 좋은데 이스라엘 국민들은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신났습니다. 사람들이 무공을 세운 장수의 얼굴을 보려고 모두 몰려 나왔습니다. 그 장수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아가 누구의 입에서부터인지도 모르게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런데 모두가 신나서 몰려다니며 응원가를 부를 때 한 사람만은 온 백성들과 함께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질투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저 놈이 없을 때는 내가 인기가 제법 좋았는데 저놈이 나타나 내 인기를 다 가로채었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울로 하여금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한 노래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사울이나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나 다윗이 승리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갑옷도 못 입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 소년 다윗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신 것입니다. 삼상17장46에서 다윗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사람의 눈으로 외적으로 보여지는 대로 다윗을 노래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여지는대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사울이 만약 영적인 판단력과 통찰력이 있어 다윗처럼 하나님이 하셨다는 영적인 시각이 열려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영적인 시각을 선택하는 대신 사람의 말을 들으며 여인들의 그릇된 시각을 채택하였기에 질투심에 끌려다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쓰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시각이 열리고 영적인 청각이 열려 올바른 판단력을 소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질투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 마귀의 형상과 운명을 닮아감.
사울은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며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다윗을 제거하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였더라.' 두 번씩이나 창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갔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습니다. 반면에 사울에게 다윗은 점점 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증거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의 마음에 질투의 독소가 퍼져감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떠나셨습니다. (12) 하나님이 그를 떠나시므로 대신 악신만이 그에게 찾아와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은 두통에 시달리고 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인격은 점점 파탄에 빠지고 질투의 독은 날로 사울의 영혼과 정신을 썩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오래 되지 않아 사울은 아주 추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질투에 사로잡혀 질투의 감정대로 살면 사울처럼 추한 행동을 표출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기위해 혈안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방은 더 높아지고 우리 자신은 점점 추해지고 우리의 인격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질투를 받는 상대방은 오히려 점점 더 잘 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도 멀리 느끼며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대신 악한 사단은 점점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죄악의 도구로 마음대로 이용해 먹을 것입니다.
질투의 결과는 파멸입니다.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루고야 끝이 납니다.
중병에 걸린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큰 병원의 같은 병실에 입원했다. 병실은 아주 작았고,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하나 밖에 없었다. 한 사람은 치료의 과정으로 오후에 한 시간씩 침대 위에 일어나 앉도록 허락을 받았다. 폐에서 어떤 용액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침대가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 앉을 때마다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환자는 하루종일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창가의 환자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바깥 풍경을 맞은 편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창을 통해 호수가 있는 공원이 내다보이는 모양이었다. 호수에는 오리와 백조들이 떠다니고, 아이들이 와서 모이를 던져 주거나 모형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 너머 저편으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한 가지 생각이 그를 사로 잡았다. 왜 창가에 있는 저 사람만이 바깥을 내다보는 즐거움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그는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창가에 있는 환자에게 질투가 났다. 어느날 밤이었다.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는데 창가의 환자가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손을 버둥거리며 간호사 호출 버튼을 찾는 것이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환자의 숨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도.
아침에 간호사는 창가의 환자가 숨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조용히 시신을 치워갔다. 이내 그는 자기 침대를 창가로 옮겨 달라고 했다.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안간힘을 다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창밖을 내다보아야지...' 통증이 느껴졌지만 팔꿈치를 괴고 간신히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언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맞은편 건물의 회색 담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질투의 끝은 허무한 벼랑일 뿐이었다.
3. 질투심이 찾아 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질투를 느낄 때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면 왠만한 병균이 침투해도 저항력이 있어서 쉽게 이깁니다. 그러나 몸이 쇠약한 상태에서는 병균이 몸 안에 침투하면 병이 들고 맙니다. 영적으로도 건강하면 사단이 시기와 질투심을 불어 넣어도 집착하지 않고 쉽게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서는 미미한 사건에도 속아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계속 키우게 됩니다. 결국에 시기심이 우리안에서 너무 커버려 우리 자신은 그 속에 잠기고 마는 것입니다.
2) 질투를 느낄 때 시각을 바꾸어 합니다.
여인들의 시각에서 성경적인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울의 시각에서 다윗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며 눈에 보여지는대로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고 사람을 칭송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하셨다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웃의 성공에 대해 칭찬해도 시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사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도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 주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묻어두지 않고 활용하여 주님께 이문을 남겨 드리면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만큼 많이 남기지 못했다고 주님이 비난하시지 않습니다.
이처럼 질투를 느낄 때 내 눈이 잘 못 보고 잇음을 깨닫고 보는 방향을 바꾸면 사단에게 속지 않을 것입니다.
3) 질투를 느낄 때 영혼이 병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질투의 영에 사로잡히면 내가 손해봅니다. 평안을 잃고 웃음이 사라집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쓸데 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정신적으로도 지치며 영적으로도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사울이 얼마나 출중한 인물이었습니까? 그 사울이 질투에 사로잡히면서 급속도로 변질되지 않습니까? 인격과 영혼을 팔아 먹으면서까지도 질투에 완전히 파괴되는 파멸의 길을 걷지 않습니까?
잠언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분도 노도 무섭지만 투기앞에는 상대가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질투심많은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제일인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더 높이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한 마리 생겼습니다. 그가 미워서 사냥군에게 찾아가 저 독수리를 죽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냥군이 흔쾌히 알았노라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는 너무 높이 날기때문에 네 깃털 하나만 주면 화살에 달아서 쏘아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꺼이 뽑아 주었습니다. 그 후 사냥꾼은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고 계속 독수리의 깃털을 요구했습니다. 결국은 너무 많은 깃털을 뽑아 주어 날아갈 수 없게 되어 사냥꾼에게 산채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에프 비 마이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유명한 무디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명성을 듣고 그리고 다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캠벨 모간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런던으로 목회지를 옮긴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교인들이 수근수근하였습니다. 교인들을 다 뺏길까봐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초조하고 질투심마저 올라왔습니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교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쯤 기도를 하다보니 그의 기도가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 캠벨 모간을 더욱 복주십시옵소서 그의 교회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오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만큼 꽉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로 오게 해 주시옵소서." 정말 기도응답이 되었습니다. 당대에 세 목사님은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고 그 교회들은 사람들로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연합하여 런던과 영국을 복음화하는 일에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누구나 질투의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감정대로 끌려다니면 결국 사울처럼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울처럼 질투의 창을 던지기 보다는 상대를 깍아내리고 헐뜯고 허물을 찾아 들추는 식의 보이지 않는 창을 던지기 보다는 하나님앞에 나아가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자신이 시기와 질투심을 심어주며 파괴시키려는 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노라고 굴복하지 않고 물리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오히려 질투심을 일으키는 상대방을 축복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인들
삼상 18장 6절 / 이성희목사
서론
지난 성탄절 기간 수요기도회 시간에 주일학교 연합 성탄축하가 있었습니다. 유치부 아이들이 나와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어느 부부가 요셉과 마리아가 되어 아기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것으로 연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눈여겨 본 사람들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남자가 아기를 안는 것이 편안해졌고 도리어 정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남녀의 성별 역할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주간 서울에 많은 눈이 왔습니다. 1937년 기상청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눈인 25.8센티의 눈이 왔다고 합니다. 눈이 온 다음 날 저녁에 아내와 함께 강변을 걸었습니다. 눈 위에 이미 발자국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장난치느라 눈에 엎어진 자국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무개가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글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 같으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철수♡영희’라고 써놓을 텐데 요즘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영희♡철수’라고 써놓았습니다. 여자가 더 적극적인 시대를 맞았습니다. 사랑고백이나 청혼 등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주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이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제는 위풍당당이라는 용어도 여성적 용어로 변화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우리 시대는 바야흐로 여성시대입니다. 학자들은 19세기를 여성의 재발견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일컫는 요즘은 여성의 위치나 기능이 극대화 되는 시대입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는 ‘위미노믹스’(Women Economics) 시대라고 했습니다. 여성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전자제품 특히 가전제품들은 컬러로 승부합니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성능보다 스타일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옛날에 가전제품은 거의 흰색이 아니면 검은색인데 요즘은 무지갯빛 가습기, 그린 마우스, 오렌지색 노트북 등이 인기입니다. 이런 컬러도 여성이 선택권을 쥐고 있습니다.
여성이 역할이 증대되고, 모든 면에서 여성이 기능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노동의 질을 말할 때 따지는 섬세성이나 전자기술도 이제는 여성 중심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IT 강국이 아니라 IT 패권국이라고 합니다. 패션이나, 문화나, 감성시대나, 생명공학(BT)나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유리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관련 통계수치는 아직도 열악합니다. 지구상의 주인 있는 땅 가운데 여성의 소유는 1%에 불과합니다. 유엔 회원국 192개국 가운데 여성이 지도자인 나라는 12개국밖에 없습니다.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기를 낳다 죽는 여성이 하루 평균 1,440명으로 1분당 1명꼴입니다.
오늘 여전도회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인들을 살펴보면서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여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출애굽기에 나오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을 것입니다.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에 아들이면 죽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에게는 히브리 여인들은 건강해서 산파들이 가기 전에 이미 아기를 해산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조상들이 하나님께 달라고 한 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12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인 정탄꾼들을 살려준 라합은 하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살려준 라합을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신약성경의 여인들 가운데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라는 여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안고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을 그렇게 기다리다가 축복하였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다비다라고 하는 도르가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는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여인은 죽었지만 시체를 씻어 다락에 두었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이 여인을 살려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금방 장사를 지내지만 이 여인은 장사를 지내지 않고 두었습니다. 다비다는 사람에게만 사랑과 존귀를 받았을까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여인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여인들입니다. 그 외도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여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역사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돋보이는 교회입니다. ‘애국지사 16인 열전’에도 6명이 여성입니다. 애국심과 신앙심이 대단한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우리교회 여성들이 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인이 어떤 여인일까요?
첫째, 은혜를 아는 여인들이었습니다.
2절과 3절 상반절에는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명되는 여인들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을 텐데 다들 어디가고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겼을까요?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는데 성경에는 먹은 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병든 자들과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은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은 자들이 다 어디 갔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사람 가운데는 고침을 받은 사람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잊은 자들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열 명의 한센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아홉 사람은 다 가버리고 한 사람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일은 인격이며 신앙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인격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말’입니다. 보답 혹은 보응이란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카리스’입니다. 기쁨이란 말, ‘카라’에서 나온 파생어입니다. ‘카리스’ 즉 은혜는 ‘유카리스타’ 즉 감사라는 답을 요구합니다. 은혜는 감사로 보답해야 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절친한 친구였던 필립 멜랑히톤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준 것을 기억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괴테는 “은혜를 잊는 것은 항상 약점이다. 유능한 이로서 은혜를 잊은 이가 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감사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룟유다와 시저의 친구이면서 암살자인 브루터스 즉 스승과 친구를 배반한 자를 지옥의 제일 밑창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섹스피어는 “배반자는 겨울의 삭풍보다 더 차다”고 하였습니다. 은혜에 대한 배반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편 103:1-2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화답을 보세요. 시편 116:12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떻게 하면 보답할까 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야곱은 형님을 속이고 멀리 삼촌의 집으로 도망하였다가 다시 형님을 만나러 돌아옵니다. 창세기 33:8에는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형님께 말합니다. 33:10에는 “형님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합니다. 그는 형님의 은혜를 갚으려고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창세기 32:14-15에는 형님께 드릴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젓 나는 약대 30과 그 새끼,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 그 새끼가 10”이라고 했습니다. 이 많은 떼를 형님께 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에서는 “이 떼는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을 때에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에서는 다시 “나도 족하니 그냥 두라”고 했지만 야곱은 “형님께 은혜를 얻었으면 이 예물 받으소서”라고 합니다. 그는 이전에도 형님께 은혜를 입고 있었고 지금도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호주 원주민들의 부메랑이라는 사냥도구가 있습니다. 던지면 다시 내 손으로 날아옵니다. ‘부메랑 원리’란 내가 던지면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선행을 베풀면 그 선행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이솝 이야기 가운데 ‘사자와 생쥐’는 죽을 것을 살려준 사자를 자시 생쥐가 사자를 살려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은혜를 아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둘째, 물질을 쓸 줄 아는 여인들이었습니다.
3절 하반절에는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고 합니다. 섬기는 방법은 많지만 물질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물질 문제였을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12제자들은 한 결 같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3년의 공생애 사역은 여인들의 물질적인 후원으로 가능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먹여 살린 것입니다.
물질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존법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우선이 아니라 차선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신앙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보세요. 먼저 말씀이 있은 후에 물질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을 보세요. 먼저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질세계의 모든 것을 더하셨습니다.
역대상 29:11에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알고 드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형에게 유업을 나누어주게 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하시면서 12:15에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라는 별명이 붙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책망하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자기를 위한 재산이 될 때에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에는 좋은 부자도 많이 등장합니다. 다윗도 부자였습니다. 욥은 당대에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반면에 나쁜 부자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나쁜 부자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쁜 부자입니다. 자신들이 겉으로는 부자였지만 속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였습니다.
요즘 TV 광고에 ‘사백년 만석꾼 경주 최부자 집이 존경받는 건 그들이 재산이 아닌 나누는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귀족의 명예를 정하는 건 그들의 권력이 아닌 그들의 헌신 때문이었습니다’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물질, 지식, 건강,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이 내가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가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은 나눌 때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계수입니다. 0-1 사이의 값 가지며, 0.4이상이면 상당히 불평등한 것이고, 0.6이상이면 매우 불평등한 것입니다. 2005년도 세계통계자료에 의하면 지니계수 1위는 브라질로 0.59이고, 2위는 멕시코로 0.55이고, 3위는 미국으로 0.41이고, 4위는 중국으로 0.40입니다. 지니계수가 높다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니계수는 높을수록 안 좋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빈익빈부익부’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의 소득의 6.85배였지만, 재작년에는 7.66배입니다. 아마 작년에는 더 격차가 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미 카리브 해의 아이티의 지진은 지구촌 모두의 아픔입니다. 지구의 온난화와 기후의 변화로 말미암아 어딘가가 큰 일이 날 텐데 그 곳에 난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그들이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고통은 함께 나누어야 할 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의 물질과, 기도와, 마음이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계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발아래에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 아까운 물질을 다 쏟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허비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려고하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물질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잘 쓴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왔던 수로보니게 여인, 성전의 헌금궤에 두 렙돈을 넣었던 과부, 옥합을 깨트린 여인 등입니다. 이런 여인들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고 물질도 제대로 쓸 줄 아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물질을 드리는 원칙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께 하듯, 주께 드리듯 하라’고 합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습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물질을 쓸 줄 모르는 사람도 성경에는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보세요. 나봇이라는 가난한 사람의 포도밭을 억지로 빼앗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나왔던 젊은 관원을 보세요. 부자였지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했을 때 돌아가 버리고 말지 않습니까? 그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돈을 잘 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밭을 팔아서 얼마는 감추어두고 베드로에게 가지고 와서 밭을 판 값 전부라고 하다가 남편과 아내가 함께 죽었습니다. 드리기는 싫고 명예는 얻고 싶은 욕심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찬송에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이 찬송처럼 모두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부자의 자세입니다.
결론
크리스천 재정관리 원칙이 있습니다. ‘ 째는 재물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한다. 둘째는 재정 계획을 세우고 예산안을 수립하라. 셋째는 빚을 청산하라. 넷째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적 원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성경대로 물질을 대하면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욥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자녀가 죽고, 재물이 없어지고, 몸에 병이 들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이 하나님 것인 것을 믿고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낌없이 다 드립시다. 이런 성공자들이 됩시다.
모든 여성들이 은혜를 바로 알고 물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여인이 됩시다. 감성의 시대, 섬세성의 시대, 나노의 시대, 모든 면에서 여성이 유리한 시대는 여성들의 책임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은혜로 물질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여성의 역할을 잘 하는 여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열등감을 치유해 주십니다
임현수목사 / 삼상 18:6-16
카니발 장군 초상화에 대하여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카니발 장군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불러 자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화가는 장군의 명을 받고 카니발 장군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드디어 초상화가 완성되는 날, 그 초상화를 손에 든 카니발 장군은 그 자리에서 그 화가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를 죽였을까요? 카니발은 한쪽 눈을 전쟁에서 잃고 한쪽 눈밖에 없는 외눈박이였습니다. 그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열등감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카니발 장군은 또 다른 화가를 불렀습니다. 그 화가는 먼젓번의 화가가 왜 죽은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어떻게 그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옆모습만을 그렸습니다. 카니발 장군은 옆모습의 자기 초상화를 받아 들자 말자 너무나 기뻐하면서 그 화가에게 푸짐한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고 열등감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약점을 지적 하는 것은 아픈 상처를 또 다시 건드리 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키 작은 사람에게...왜 그리 키가 작아? 그래보세요. 그래 넌 얼마나 커서 그러니? 뚱뚱한 사람에게...왜 그렇게 살이쪘어? 요즘 왜 그렇게 뚱뚱해졌어? 밥사준적있어?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에게...왜 대학교 안나왔냐고? 누구는 공부하고 싶지 않나? 노처녀에게... 왜 아직도 시집을 못 갔느냐고? 시집을 못간 것이 아니라 안간거다. 가난이 한이 된 사람에게 ...거지 같이 산다고 하면 안됩니다.
열등감의 결과들: 고립감, 자신감의 결여, 사회적 격리, 비사교성, 의존적 성격, 자포자기,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불안정, 질투(비난 의식), 대인 관계의 결여, 자기비판, 권위 의식에 기댐, 의기소침, 용서를 못함, 수용성의 부족,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투덜거리는 행위
열등감의 단어를 처음 창안한 사람이 Alfred Adler입니다. 애들러가 말하기를 <인간은 계속적으로 열등감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상황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열등감에서 벗어 나기가 어렵다는 말 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이 말하기를 "열등감 치유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이것은 열등감 치유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열등감이 생기는 이유들: 환경문제, 경제적 능력의 차이, 사랑 받지 못함, 학벌..공부 못하는 것, 신체적인 조건 때문, 장애인, 뚱뚱한 몸, 외모 콤플렉스, 인정 받지 못하는 것 등입니다.
미국의 한 갤럽연구소가 "당신은 당신의 외모에 만족하십니까?" 하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남자들 가운데 만족한다는 사람은 28%였고, 여자들은 13%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바꾸겠다고 한 사람 이 남자가 94%, 여자는 무려 99%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조사보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비롯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맥스웰 맬츠(Maxwell Maltz)는 현대인의 95% 정도가 이런 저런 모양의 열등감을 느끼며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이 왜 열등감을 갖게 되고, 또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망한 대표적인 사람은 사울왕일 것 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이 왜 열등감에 빠졌는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서 열등감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1. 열등감은 비교의식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않을 때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부터가 과도한 경쟁 시스템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은 남과 비교하는 것을 배우며 자라납니다. 그래서 외모나 재능, 가정환경, 학벌 등등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여러분,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교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기 보다 조금만 못하게 보이면 이상한 우월의식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조금만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금방 기가 죽고 열등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월감 과 열등감은 결국 건강치 못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과 비교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의 자유를 찾을 수 없습 니다. 왜냐하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이 세상에 반드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왜 다윗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고 틈만 나면 죽이려고 합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쳐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부터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승전가를 부르며 개선하면서부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이 수 천명의 적군과 상대하는 장수라면, 다윗은 수만 명의 적군들을 무찌른 용장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문제는 이 순간부터 만사를 다윗과 비교하면서 병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일시적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 아니라 열등감이 완전히 사울의 마음을 지배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얼마든지 선정(善政) 을 베풀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지만 자꾸만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삼상 9:2에 보면, 사울이 얼마나 잘 생겼던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나 더 컸다고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사울이 다윗에게 모자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에 비교의식이 싹튼 후부터 그의 삶은 하루도 편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부분을 확대하고 왜곡해서 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비교의식으로 생긴 열등감이 사울 자신은 물론이고 사울의 집안전체에 큰 비극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열등감에서 해방 받기 원하신다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억조창생(億兆蒼生) 가운데 유일무이한 분입니다. 70억 인구 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나의 모습, 나의 말씨, 나의 성격,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독창적으로 지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상품은 대량생산을 해서 얼마 나 많이 팔리느냐, 즉 효용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작품은 예술성과 창조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희소가치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그래서 엡 2: 10은 말씀합니 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공동번역과 새번역에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도 귀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주셨습니다!
창 1: 27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만드셨 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담겨져 있습 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열등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데, 우리 자신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진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공을 드려서 만드신 유일무이한 예술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창조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나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말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창조적 자아형성이라 고 부릅니다. 창조 신앙에 의한 자기 가치 발견...구속신앙에 의한 자기 가능성을 신뢰하십시오. 나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없습니다.
2. 열등감은 악신에 사로잡힐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열등감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삼상 18:10)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악신이 사울 위에 힘있게 내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증오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에게 창을 두 번씩이나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악신이 사울을 사로잡을 때마다 이상한 열등감이 그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무엘 상에 보면 악신이 사울 위에 내렸다는 말씀이 모두 여섯 차례나 나옵니다(16: 14; 16: 15; 16: 16; 16: 23; 18: 10; 19: 9). 악신이 그를 사로잡아서 열등감과 질투심과 증오심이 불일 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몇년 전 한국 과천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은석이라고 하는 한 대학생이 자기 부모를 죽이고 욕실에서 토막내어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학생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데는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귀신 잡는 군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꼭 귀신 잡듯이 대했습니다. 툭하면 윽박지르고, 때리고, 구박하고, 멸시하고, 집에서 쫓아내고 꼭 귀신 다루듯이 취급했습니다. 이러니 아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신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를 새벽 1시에 망치로 죽이고 또 건너방에 가서 아버지를 죽이고 시신을 토막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천하보다 귀한 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지 않고 항상 귀신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귀신 들린 아들이 귀신에 덮어 쓰여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전쟁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방심해서 안됩니다. 악령이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열등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자신감을 갖고 늘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열등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깁니다.
다윗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낀 사울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열등감이 없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생겨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일어나도 큰 무서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등감에 사로잡힌 순간부터 자신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려 628가지 정도의 공포증(phobia)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두려움에 약한 존재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인공포증이란 잘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할 때, 학교에서 발표를 한다거나 선생님과 말씀을 나눌 때 직장에서는 상사와의 대화나 브리핑을 할 때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리고 하여 그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공중 기도, 사회, 간증, 발표할 때 긴장합니다.
자기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적면공포(赤面恐怖), 엘리베이터 등 좁은 장소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폐소공포(閉所恐怖), 높은 빌딩이나 사다리 등을 몹시 두려워하는 고소공포(高所恐怖), 버스 등 교통수단을 이용하게 되면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이를 이용할 수 없는 교통수단공포증, '도로횡단공포증' (dromophobia), 소·뱀·개·거미 등 특정동물을 몹시 두려워하는 동물공포, 매독·암 등 악성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질병공포, 오른쪽 다리가 약간 마비되는 듯한 증세에 병적인 공포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늘 "이러다간 한 순간에 마비될거야"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모임에 참석했는데 식사 도중 오른 쪽 다리를 슬쩍 꼬집어 보던 그는 "결국 내 다리가 마비되고 말았어"라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귓속말을 건넸습니다. "여보, 지금 꼬집고 있는 것은 당신 다리가 아니라 제 다리예요"
객관적으로는 결코 이상하지 않은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얼굴이 추하다고 생각하는 추모공포(醜貌恐怖) 넓은 장소,공공장소나 군중 속에 있을 때 공포를 느끼는 것 광장 공포증 ... 세상 만사가 모조리 두려운 것이 '만사 공포증'이며, '공포'라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꽉 끼치는 증세가 '공포 공포증'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두 부류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시대는 유난히 염려가 많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염려란 아무 유익이 없는 것 입니다. 어느 분은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흔들의자에 앉아 보십시오. 그리고 흔들어 보십시오. 아무리 흔들어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가 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는 우리 심령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흔들어 놓기만 할 뿐, 앞으로 결코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개인의 성숙을 막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 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으시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야말로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능력 받으시고, 사랑과 근신의 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본문 8-9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사울이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에게 열등감을 느낀 사울이 만사를 비관적이고 극단적으로 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데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넘볼 것이라고 미리 가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저렇게 용맹무쌍한 신하가 있으니 앞으로 전쟁이 나도 걱정이 없겠구나!" 그러나 사울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만사를 부정적으로 왜곡해서 생각합니다.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기만 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불안해집니 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과민반응 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의 열등감은 이렇게 두려움과 범벅이 되어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병적인 것으로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언제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시46:2-3)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어떻게 이런 담대함이 가능할까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개가 낯선 사람을 볼 때 짖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들이나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개는 짖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의부증이나 의처증에 왜 시달립니 까? 그 마음에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눈길,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혹 이야기만 해도 마치 자기를 왕따 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자기에 대해서 나쁜 말이라도 하고 있지 않나 피해망상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두려움을 제거할 때 열등감도 사라집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송명희씨가 작사한 복음성가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가 뛰어나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없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유 없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 이 역시 교만 못지 않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이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를 학대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열등감은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불만족하고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곧 우리를 지으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승리하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의 적, 열등감입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해서 성형수술을 수백만 달러를 들여서 해도 소용없습니다. 내부에 있는 자아상을 성형수술하기 전까지 외부의 성형수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성형수술 해주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혹시 열등감이 있으십니까?
마음의 의사되신 예수님께 맡겨보세요! 말씀과 성령의 메스로 여러분의 마음을 수술해서 건강한 마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열등감이 주인 노릇하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말끔히 고쳐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환난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은 환난 중에 도와주십니다.
1)사무엘을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에벤에셀(도움의 돌)
(삼상7:10-14)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 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2)하나님은 다윗을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말씀이 시편에서 17회 나옵니다.
(시28:7)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3)하나님이 앗수르 군대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46편의 배경은 앗수르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이 보호받은 사건입니다. 주전 701년 강대국 앗수르 산헤립왕은 그의 군대를 유다에 보내어 예루살렘을 포위하 고 히스기야 왕의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으로 부터 하나님을 모욕하고 유다를 위협하는 편지를 받자, 그 편지를 성전에 들고 가서 하나님 앞에 그 편지를 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유다왕국을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천사들이 앗수르 군대를 쳐서 185,000명이나 멸절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35절-36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 할 때 도와주십니다. 우리도 히스기야 왕처럼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유 통에 빠진 두 마리의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우유 통에 빠진 한 개구리는 pessimist(비관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살아나갈 희망을 일직암치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금방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개구리 한 마리는 optimist(낙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며 밤새 우유 통 안에서 해엄을 쳤습니다. 개구리가 밤새 헤엄을 치는 동안에 우유가 점점 굳어져서 치즈로 변해갔습니다. 개구리는 뒷발로 이 굳어진 치즈를 차면서 jump해서 우유 통 밖으로 뛰어나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는 어떠한 어려운 문제에도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에게 피함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얻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열등감이 있으십니까? 마음의 의사되신 예수님께 맡겨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기도> 주님 몰라서 짜증내고,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나를 깊은 죄악의 수렁에서 건지시고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성령 주시고 축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모습이대로 나아갑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서.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자존감
이정익목사 / 삼상 18:6-9, 고전 15:9-10
오늘은 성폭력 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순간 실수가 평생 멍에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 오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엊그제 어느 가수가 자살을 기도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조그만 문제만 부딪쳐도 문제 해결방법으로 너무 쉽게 죽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되면 너무 쉽게 내가 포기하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자존감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자존감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자존감(self value)을 자긍심이라고도 말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을 사랑하는 수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자존감이 건강해야 합니다. 이 자존감이 약하거나 너무 높으면 좋지 않습니다. 이 자존감이 너무 약하면 자기를 비하하고 무시하고 비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높으면 자신을 너무 과신하려 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가끔 보면 너무 자신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존감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자신을 과신하여 교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자존감이 너무 약하거나 너무 과해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 보이고 우월감을 표시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 기죽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자존감이 건장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안에는 또 다른 내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내안의 나를 self 즉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자아가 예수를 모를 때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됩니다. 그래서 이 자아를 옛 자아라고 하고 자기 중심적 자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자아가 예수를 알게 되면 내 자아가 변화를 받아 자기를 부인하는 건강한 자아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때부터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세상을 자신 있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안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군가를 섬기고 나누고 헌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분은 누구하고도 관계가 좋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런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가 병들거나 빈약하면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기를 비굴하게 비하하고 무시하게 되고 또 하나는 교만으로 나타나 자기를 자꾸만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하와 교만은 같은 말입니다. 동전으로 말하면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존감이 건강한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 자신을 사울과 비교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자존감과 자아가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지를 보시겠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별로 나타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목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될 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그의 성격이나 인간됨이나 자질이나 내면의 수준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사울의 병든 자아를 적나라하게 보고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블레셋에게는 골리앗이라는 걸출한 장수가 있습니다. 골리앗은 크다는 뜻의 대명사입니다. 키가 6규빗 한 뼘입니다. 한 규빗은 4.5cm입니다. 한 뼘은 13cm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키가 2m 83cm라는 말입니다. 갑옷 무게만도 오천 세겔이니까 57.5kg입니다. 창자루 길이가 베틀채 같았고 창의 무게가 600세겔이니까 7kg입니다. 당시 전쟁은 일대일로 싸워 이기는 편이 다 가져가는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도 그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했고 상대가 없었습니다. 사울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진을 치고 대치상태에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차 전쟁터에 나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의분에 흥분한 다윗이 돌멩이를 들고 나아가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개선하고 돌아옵니다. 그때 여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개선군을 맞이하면서 춤추며 노래를 하였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사울의 병든 자아를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인들이 춤추며 부른 노래 가사가 7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크게 노할 것 까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듣고 사울이 성경을 보면 대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내면세계가 아주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울은 성격장애인이었고 자존감이 아주 낮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얼마나 자아가 깊이 병들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여기 사울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장면을 보십시오,
사울의 비교의식
여기 사울은 지금 여인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듣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삼상 18장 8절을 보면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라고 말씀합니다. 사울로 하여금 노하게 만든 노랫말이 “천천이요 만만”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그 말에 그렇게까지 분노할 일이 아닙니다. 그 말에 분노한 것은 평소 사울의 자존감의 수준이 아주 낮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 분노가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은 모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다윗이 출현함으로 이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오늘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다윗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에게 있는데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쉽게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때부터 다윗과 등을 집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문제는 자기의 자존감 수준이 낮아서 스스로 비교해서 분노하고는 문제의 원인을 다윗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비교함 때문입니다. 이 비교함에서 사울은 인격 장애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비교의식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옛날보다 풍요롭게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나 보다 더 잘 사는 사람에게 나를 비교하니까 나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고 만족하겠습니까. 나도 잘 났습니다. 그러면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보다 더 잘난 사람이 옆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옆에만 서면 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고 만족하겠습니까. 나도 지금 잘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옆에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비교하니까 나는 지금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만족하겠습니까. 오늘은 이 비교의식이 문제입니다. 한 가정안에서도 잘 살고 못 사는 동서끼리 형제끼리 서로 비교를 하니까 비굴함이 나오고 스스로 초라해 지는 것입니다. 비교하면 이 비굴한 자존감이 발동하게 됩니다. 이웃과 비교하고 동창생과 비교하니까 이 비교가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고 자존감을 낮아지게 하고 비굴하게 하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최고였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병들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나타났습니다. 백성들의 이목이 다윗에게로 집중되고 다윗에게 더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를 듣자마자 사울이 다윗에 대한 증오심으로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병든 자아가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교하는 것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는 한 내 자존감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삶에 감사함도 만족함도 행복함도 내 삶의 소중함도 모르게 됩니다. 지금 이 사울의 모습이 곧 내 모습입니다.
위기조성
그런데 불행한 것은 사울의 이 낮은 자존감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그의 삶에 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의 낮은 자존감의 결과는 결국 각종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사울은 다윗이 두려워졌습니다. 다윗이 자꾸만 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울이 다윗 앞에 서기만 하면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서 다윗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있으면 여인들이 춤추며 노래할 말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은 왕권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미치기 시작합니다. 18장8절을 보면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지금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또 사울은 지금 주어진 상황 그리고 환경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사울에게 다윗 같은 부하가 생겼습니다. 용기 있고 용맹스럽고 자질을 갖춘 아주 유능한 부하가 내게 생겼습니다. 그 부하를 잘만 활용하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늘 사울이 처한 위기를 막아준 것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아닙니까. 사울에게 있어서 다윗이 얼마나 고마운 부하요 참모입니까. 사울이 다윗을 잘만 활용하면 자신의 왕권을 오해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병든 자아가 병든 자존감이 그 좋은 환경을 부정적으로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또 사울은 다윗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장차 다윗은 사울에게 충신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곁에서 든든히 지켜줄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재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윗 같은 인재를 곁에 두면 얼마나 왕권을 든든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에게 무섭게 질투하고 마침내 다윗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예뻐서가 아니고 다윗을 가까이 두었다가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지금 그 좋은 환경을 얼마나 위험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울이 그만큼 자아가 병들었고 자존감이 낮아서 입니다.
또 사울은 마침내 성격 장애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윗을 여러 번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피신을 다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살려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사울이 회개하고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또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사울이 마침내 이렇게 성격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그의 자존감이 그만큼 병들고 낮아서 그렇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울은 마침내 불안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늘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고 긴장에 빠져 살아갑니다. 블레셋과 또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때 누굴 찾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무당집으로 가서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올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때 사울은 먹지도 못하고 목말라 기진맥진 하였다고(삼상 28장)말씀합니다. 지금 사울의 심리가 극도로 불안이 극심한 상황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울의 자존감과 자아가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 병은 다윗과 비교의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 비교의식은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자존감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 위기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갑니다. 자존감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렇게 좋은 참모 다윗이 생겼고 아주 좋은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불행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감
사울의 자존감은 이렇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그 좋은 환경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아주 불행한 환경으로 악화시켰습니다. 다윗 같은 충신이 주어졌는데도 선용하지 못하고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병든 자존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존감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존감도 변화 받게 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변화 받지 아니하면 내 자존감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아야 건강한 자아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를 초월하게 되고 나를 넘게 되고 나를 극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내가 치유 받고 남들과 비교하는 것을 극복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인정하게 되고 그를 섬기게 됩니다.
사울이 자신의 자존감과 자아가 건전하게 변화를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사울은 다윗 같은 유능한 신하를 곁에 두고 왕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사위로 두고 잘 후원해 주었더라면 무난하게 자신의 왕권을 그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왕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의 병든 자존감을 보게 됩니다. 사울의 보잘 것 없는 자존감을 보면서 곧 나의 자존감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건강한 사람입니까.
나의 자존감은 반듯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이 자존감이 건강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한때 병든 자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고 핍박하려고 혈안이었고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자기의 뜻에 반하는 집단은 무섭게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의 자아가 자존감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존감이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변화된 것이 병든 자아를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너의 생각을 존중하게 되었고 너의 입장도 배려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병든 자아와 자존감이 건강하게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렇게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자아이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십니까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 삼상 18:6-16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분은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본인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믿음의 소유자가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의 주어는 바로 나입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의 약해지고, 나의 믿음의 약해질 때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라는 말을 자신 있게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라는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라고 답변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라는 말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체가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요,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비록 내 마음이 약해지고 나의 믿음이 약해져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사실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지만, 더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은 내가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나의 결정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사항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가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애굽에서 애굽왕의 시위대장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또 그리고 그 시위대장의 부인이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웁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갑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기구하고 불행한 그리고 아주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은 놀라운 삶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여러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상인들의 손에서 애굽의 시위대장 집에 종으로 팔려 가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창세기 39장 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뿐만 아니라 요셉의 주인인 시위대장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고 압니다. 창세기 39장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시위대장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지만 요셉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창세기 39장 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심지어는 간수장이 감옥에게 있는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깐 요셉에게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형통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이 요셉을 믿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또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의 안부를 살펴보려고 형들에게 갑니다. 이 때 다윗의 나이는 10대 중반에서 후반의 나이입니다. 청소년입니다. 그는 거기서 이방 블레셋의 골리앗의 장군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는 형들과 주변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맷돌로 골리앗 장군의 쳐서 쓰러뜨립니다.
이 일로 인해서 다윗이 사울왕의 부름을 받고 사울의 곁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다윗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니깐 사울 왕이 다윗을 두려워 합니다. 사무엘상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니깐, 다윗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4절,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사울왕도 보고 알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8절,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힘이 강해지고 번성합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나니이 다윗과 함깨 하시니깐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 다윗을 신임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고 결단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큰 과제 입니다. 과제를 띄어 넘어, 하나님의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우리의 삶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 할렐루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환경이 어렵고 힘들때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래서야 하나님이 어떻게 그 사람과 함께 하시지를 않습니다.
요셉은 10대 중반에 억울하게 부모도 모르게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거기서 종살이를 합니다. 죄짓자고 유혹하는 주인의 부인의 제의를 거절하고 감옥에 갑니다. 인간적으로 펄펄 뛸 정도로 억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셉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했을 때 요셉은 거절하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창세기 39장 9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10세 중반의 나이에 무시무시한 블레셋 골리아 장군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이토록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고 조롱을 받는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고 좋을 때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힘들 때에도 어려울 때에도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도 언제든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비결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꿈을 꾸었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부모님과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팔려가서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나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서 생활할 때나 요셉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시편 105편 17-19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는 말씀은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까지 견디면서 하나님을 바라봤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불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왕의 곁으로 불림을 받고 난 후로 다윗의 이름의 점점 유명해집니다. 백성들의 찬사가 대단합니다. 시기가 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를 합니다. 사울 왕 곁에서 수금을 타는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집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죽이려고 구석구석까지 사울왕은 추격을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럽고 힘들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왔지만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자기가 억울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은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왕을 죽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은 시편 62편 5절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연단의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요셉은 연단의 과정을 잘 통과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괜히 꿈을 꾸게 했다가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게 하신 하나님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애굽에 팔아버린 형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관용으로 안아 주었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후에도 자기를 모함해서 감옥에 보낸 시위대장의 아내를 고발하거나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오로지 15년 정도의 연단과 시험의 과정을 잘 견디고 통과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단도 주시고 힘든 훈련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쳐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냥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꿈이 성취될 때 까지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윗은 십대시절 자신이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지만 사무엘에게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37세가 될 때까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은 기다림과 인내와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림과 인내와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연단을 받아야 했을까요?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다듬어 지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윗은 20년 가까이 도망자 생활을 했고, 아둘람 동굴에서 400명과 함께 공동체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블레셋에서 망명생활도 했습니다. 이 모든 기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은 다윗을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로 준비 시키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이요 바램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사랑합시다.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나에게 다가오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맏음으로 잘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정금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이서영목사(제자들교회) / 삼상 18:6~9
다윗은 초기에 큰 걸림돌을 두 개 만납니다. 적국의 골리앗 장군과 아군의 사울 왕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걸림돌이 다윗이 왕이 되는데 큰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어준 것입니다.
무명의 다윗, 전쟁터에 있는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왔던 소년이 골리앗을 만났기 때문에 발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골리앗이 나타나자 이스라엘은 왕부터 시작해서 장군도 병사도 모두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용감하게 나서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각 성읍에서 나와서 크게 환영했습니다. 여러 가지 악기를 들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윗은 골리앗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에서 왕보다 더 유명 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적군인 블레셋에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목동일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도, 형들도 우습게 여겼습니다. 전쟁터에 왔을 때 큰 형 엘리압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느냐? 들에 있는 양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가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한 것을 안다.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구나!” 하면서 화를 내었습니다. 아무도 다윗을 대단한 인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시당했습니다.
심지어 싸움을 싸우러 나간 골리앗도 다윗을 코 흘리게 정도로 우습게 봤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내가 개인 줄 알고 막대기를 들고 나와서 나와 싸우려느냐?”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당신은 칼로 싸우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싸운다. 그러나 나는 만군의 하나님, 다시 말해 전 세계의 모든 군사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이름으로 싸운다.” 거대한 골리앗은 큰 소리만 “뻥뻥” 쳤을 뿐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픽” 쓰러졌습니다. 조롱했던 다윗의 물매 막대기와 물매 돌 한 개에 맥없이 쓰러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걸림돌이 크면 클수록 큰 디딤돌이 되어 큰 발판이 되어줍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든 굉장히 큰 거대한 걸림돌이었기에 다윗을 일약 유명 스타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세계적인 시인인 바이런이 말한 것처럼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까 유명해진 것입니다. 다윗은 어제까지만 해도 들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시골뜨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을 쓰러뜨린 오늘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스타가 된 것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이 사울 왕과 다윗을 환영하러 나왔습니다. 여인들은 악기를 두드리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짧은 노래였지만 사울 왕과 다윗의 미래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사울 왕은 이 노래를 듣고 불쾌해 하고 심히 노하기까지 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이날 후로 사울 왕은 다윗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앞에 새로운 걸림돌이 하나 등장한 것입니다.
여자 친구들끼리 질투가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10대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 20대는 성형수술을 표시나지 않게 해서 더 예뻐진 친구, 30대는 공부도 못하고 모든 점이 자기보다 뒤쳐졌는데 시집 좋은데 가서 잘 나가는 친구, 40대는 밤낮 놀러 다니고 골프를 치면서도 자식은 좋은 대학에 들어간 친구, 50대는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친구, 60대는 건강하고 돈이 많은 친구, 70대는 자녀가 잘 효도하고 남편은 건강한 친구, 80대는 그 친구가 아직도 살아 있는 친구라고 합니다. 친구가 잘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나보다 남이 더 잘 되는 것은 못 봐줍니다. 이것이 시기심입니다.
그런데 시기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시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죄의 본성을 반드시 타고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시기심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시기심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 억제하느냐, 아니면 그 시기심이 나는 대로 행동에 옮겨 버리느냐 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며 멀리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성도요 죄가 주는 유혹에 따라 죄에 대한 감각도 없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사람이 세상 사람입니다. 이 태도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시기심으로 상대방이 흔들 때 이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시기심으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때 잘 극복해야 합니다. 다윗이 무명일 때는 아무도 흔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보다 잘 나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유명해지자 흔드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다윗이 전쟁에 나갈 때 군복도 주고, 칼도 주고, 투구와 갑옷까지 준 사울 왕이었습니다. 친절하게 배려해주던 사울 왕이 시기심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사울 왕은 걸핏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시기심 때문에 사울 왕은 내려가고 추락했습니다. 사울 왕은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국정을 뒤로하고 군사를 동원해서 전국을 돌면서 다윗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럴수록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더욱 더 유명해졌습니다. 다윗을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아무 존재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대적할수록 다윗의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점점 더 뜨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올라가고 상승하는 사람, 세워지고 높여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껄끄러운 사울 왕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 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큰 걸림돌을 만났으므로 그것이 발판이 되어준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걸림돌이 디딤돌이 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쳐부술 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적군에게는 단호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아군인 사울 왕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서 광야에서 다닐 때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위기 속에서도, 위협 속에서도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과 함께 한 것입니다. 걸림돌이 디딤돌로 바뀌어 발판이 되어준 것은 하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걸림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나답게 만들고 더욱 더 존귀한 자리로 올라가도록 만드는 디딤돌입니다. 괴롭히고, 분통이 터지게 만들고, 두려움을 줄지라도 결국은 발판이 되어줍니다. 적군의 골리앗과 같은 걸림돌, 아군의 사울 왕과 같은 걸림돌은 모두 발판이 되어 줍니다. 나의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 걸림돌이 많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 가운데 걸림돌이 있습니다. 걸림돌이 걸림돌로 그대로 있으면 부흥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걸림돌을 극복하면 디딤돌이 되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부흥이 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만나는 그 어떤 걸림돌이든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꿋꿋이 살아가면 결국 자고나면 유명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고 참아내고, 때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어 우리가 가는 길에 발판이 되어 줄 것입니다. 신앙의 거목들과 신앙의 스타들은 훼방꾼인 걸림돌을 극복하고 디딤돌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골리앗과 같은 걸림돌과 사울 왕과 같은 걸림돌을 발판으로 삼아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그 걸림돌은 우리의 디딤돌이 되어 우리를 그곳에 올려다 줄 것입니다.
꼴찌가 첫째 될 때
삼상 18:6~12 / 양은익목사
오늘 제목은 ‘나중 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눅 13:30절의 말씀에서 따왔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꼴찌가 첫째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는 것에는 본인 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꼴찌가 첫째가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면 문제가 좀 심각해집니다. 잘 된 것에 대해서 축하해 주는 게 맞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A. 슈바이처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같은 상황에 대입해 보면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자신의 운명과 삶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닙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것을 좋게 봐주지 못하다가 삶을 망가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울이 다윗을 치열하게 추적하면서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다윗 죽이기에 사울은 모든 것을 다 겁니다.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사울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요, 다윗은 그의 사위입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납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아들인 요나단과도 친합니다. 사울을 밀어내려는 어떤 역모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유를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승리를 축하하는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이 무너집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8절입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말고 무엇이냐 하고, 9절.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런 마음을 우리는 질투, 시기라고 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반응이 사울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분명히 왕 사울을 환영했다고 했고, 여인들이 부른 노래가 사울을 다윗과 비교해서 사울을 폄하하기 위해 부른 노래가 아닌데도 시기의 마음이 들어간 사울에게는 그렇게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운문 규칙(평행법)에 의하면 첫 행에 숫자가 사용되면 다음 행에는 처음 숫자보다 큰 숫자를 쓰게 됩니다. 처음에 천을 사용했기에 다음 행에 만을 사용한 것이고, 노래의 전체적인 의미는 승리를 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치열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유치한 것 같지만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중 된 자가 사람들의 칭송과 갈채를 받는 것에 속이 쓰렸던 것입니다. 10절 이하에도 나오지만 시기가 지배하는 순간 악령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발작을 하면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창을 던져 버립니다.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사울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시기는 갑자기 들어오고, 온갖 것들이 다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내린 시기의 정의가 하나 있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기뻐하고, 행운에는 애통하는 것’이다. 너의 불행은 내 기쁨이고, 너의 성공은 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봐 주지 못하는 게 시기입니다. 사울이 이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윗을 볼 때 좋은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데 시기가 막고 있습니다. 18장에 보면 전부 다윗을 좋아합니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물론이고, 사울의 딸인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신하들과 백성들 전부 다윗을 좋게 봅니다. 딱 한 사람 질투의 마음이 들어간 사울만 다윗을 배척합니다.
타자의 잘 됨과 성공을 기뻐하는 게 성숙인데, 시기가 들어가면 깨져 버립니다. 시기는 시기의 대상이 가까이에 위험합니다. 시기는 시기하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기는 미움을 만들고, 미움은 험담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질투는 질투하는 대상에게 매이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쫓고 있는 사울이 쫓기는 다윗에게 묶여 있습니다. 때로 질투가 원인이 돼서 더 분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투와 시기의 결과는 안 좋게 끝납니다. 벗어나야 됩니다. 어떻게 벗어나면 좋겠습니까?
나중 된 자가 먼저 돼서 마음이 안 좋을 때 기억해 두십시오. ① 놀라지 말자 ② 시기하지 말자. ③ 인정하고 밀어주자. 이 세 가지 마음입니다.
(1) 놀라지 말자.
꼴찌가 첫째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놀랍니다. 마치 계속 별 볼 일 없는 자로 남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놀라는 게 질투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군가 변화되는 걸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는 대신 축해해 주십시오.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것이 최고의 환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리에서 부름받았다는 것을 잊으며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부른 받은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인데 사람들의 변화에 놀라는 것은 격에 맞지 않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이로 고정시켜 놓게 되면 거기서 독한 시기의 싹이 자라게 됩니다.
(2) 시기하지 말자.
사촌이 땅을 사든, 옆집 애가 일등 하든 시기는 사절하십시오. 잠14:30절 말씀처럼 시기하는 순간 뼈가 썩게 됩니다. 시기의 결과는 얼마나 치명적이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시기의 결과는 뼈 아픔입니다.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 요셉과 그 형들. 한나와 브닌나.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 시기로 인해 뼈아픈 일들을 겪었습니다.
시기 사회라고 불릴 정도로 시기가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시기하지 않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시기가 없는 데가 없습니다. 교회와 신앙인들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기하지 말자는 정답만 가지고는 뿌리 깊게 박혀있는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봐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인지 제대로 봐야 합니다. 신자들은 질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실 텐데 속 쓰려 가면서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의 질투와 시기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사울의 질투 보십시오. 겉으로 보면 여인들의 노래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울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하나님을 떠난 그에게 시기는 너무나 쉽게 찾아왔던 겁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부족한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기대하시는 것은 업적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뇌성 마비로 부족한 것 많았던 송명희 시인의 찬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잘난 것, 잘하는 것으로만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잘못하는 것, 실패한 것, 부족한 것,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그런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회복돼야 하고,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없는 가장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아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인정하고 밀어주자.
우리가 할 일은 시기가 아니라 인정과 밀어줌입니다. 세례요한의 말 기억나십니까?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요한이 주님보다 선배고, 인기도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시기하지 않고 기꺼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밀어 줍니다. 시기는 자신을 죽이고, 너를 죽이지만 인정과 밀어줌은 다 살립니다.
질투와 시기의 짙은 안개가 가야 할 길을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속상하게 하게 하고, 그늘지게 만듭니다. 삶에서 거둬 내십시오.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말고, 시기하지 마십시다. 시기가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만이 가지는 명예로움입니다. 이런 넉넉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III): '열등감'
삼상 18장 6~16절 / 김흥규목사
저는 나이가 들면서 그림을 좋아하게 됩니다. 특히 동양화를 좋아하게 됩니다. 물론 그림 그리는 일에는 소질이 없지만 감상하는 일을 즐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미술평론가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이 쓴 「화인열전(畵人列傳)」(The Biographies of Great Artists in Chosun Dynasty)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중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람의 화가가 있습니다. 최북(崔北, 1712-86)이라는 조선시대 화가입니다.
최북은 흔히 최칠칠(崔七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아주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독특했던지 한 번은 어떤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구했는데 최북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 양반은 자기의 권세를 앞세워 최북에게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최북은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스스로 애꾸눈이 되었으며, 결국 일생 동안 한 쪽 눈에만 안경을 낀 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야화 때문에 사람들은 최북을 조선의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흐는 자기의 귀를 스스로 자른 화가입니다.) 최북은 사람들이 자기 그림이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일체 그림을 그려주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주변 사람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최북의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들이 많습니다.
유홍준 선생은 최북이 일생동안 기인(奇人)으로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한 이유가 순전히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최북은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 계급의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열등감을 그림으로 풀려 했으며, 또 당시의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기행으로 분풀이를 퍼부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천재적인 화가로 태어났지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아상이 비뚤어져 열등감이 주인이 되어서 살다보니 사사건건 이웃과 충돌하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한 갤럽연구소가 "당신은 당신의 외모에 만족하십니까?" 하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남자들 가운데 만족한다는 사람은 28%였고, 여자들은 13%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바꾸겠다고 한 사람이 남자가 94%, 여자는 무려 99%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조사보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비롯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맥스웰 맬츠(Maxwell Maltz)는 현대인의 95% 정도가 이런 저런 모양의 열등감을 느끼며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시리즈 설교의 세 번째 주제로 '열등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열등감을 갖게 되고, 또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열등감 때문에 망한 사람을 들라하면 사울왕이 첫 번째로 떠오릅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이 왜 열등감에 빠졌는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서 열등감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1. 열등감은 비교함으로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않을 때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부터가 과도한 경쟁 시스템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은 남과 비교하는 것을 배우며 자라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자신이 나아야지만 안심이 되는 세상 속에 살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나 재능, 가정환경, 학벌 등등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1년에 한 두 번씩 꼭 부모님의 학력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비밀리에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 학생들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모님이 대학 나온 학생들 손들어 봐!"로 시작해서 "부모님이 아무 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 손들어 봐!"로 대개 끝이 납니다. 이런 일이 있는 날은 부모님이 제법 교육을 잘 받은 친구들은 기가 높아집니다. 그러나 저처럼 부모님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친구들은 아주 기가 죽고 열등감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교야말로 열등감의 씨앗입니다. 비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쓸데없이 교만해지고 또 어처구니없는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조금만 못하게 보이면 이상한 우월의식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조금만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금방 기가 죽고 열등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월감과 열등감은 결국 한 뿌리에서부터 나옵니다. 건강치 못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의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이 세상에 반드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왜 다윗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고 틈만 나면 죽이려고 합니까? 다윗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서 뭔가 열등감이 생기니까 그 때부터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승전가를 부르며 개선하면서부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왕과 그 일행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여자들이 온 성에서 나와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사울왕을 환영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내용이 수상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이 수 천명의 적군과 상대하는 장수라면, 다윗은 수만 명의 적군들을 무찌른 용장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보다 더 위대하다는 노래였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왕인 자기보다도 신하인 다윗이 더 위대한 영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사울과 같은 처지에 빠질 경우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문제는 이 순간부터 만사를 다윗과 비교하면서 병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일시적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 아니라 열등감이 완전히 사울의 마음을 지배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얼마든지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지만 자꾸만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삼상 9: 2에 보면, 사울이 얼마나 잘 생겼던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나 더 컸다고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사울이 다윗에게 모자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에 비교의식이 싹튼 후부터 그의 삶은 하루도 편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부분을 확대하고 왜곡해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판단이 흐려지고 악수(惡手)를 두게 됩니다. 결국 비교의식으로 생긴 열등감이 사울 자신은 물론이고 사울가(家) 전체에 큰 비극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억조창생 가운데 유일무이한 분입니다. 62억 인구 중에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모습, 여러분의 말씨, 여러분의 성격,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독창적으로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상품은 대량생산을 해서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 즉 효용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작품은 예술성과 창조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희소가치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그래서 엡 2: 10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는 구절은 한글판 공동번역과 새번역에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유일무이한 작품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도 귀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주셨습니다!
창 1:27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열등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속에 숨어 있는데, 우리 자신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진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공을 드려서 만드신 유일무이한 예술작품이기 때문입니다!
2. 열등감은 악신에 사로잡힐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열등감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악신이 사울 위에 힘있게 내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증오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에게 창을 두 번씩이나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악신이 사울을 사로잡을 때마다 이상한 열등감이 그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가 사무엘 상을 연구해 보니까 악신이 사울 위에 내렸다는 말씀이 모두 여섯 차례나 나옵니다(16: 14; 16: 15; 16: 16; 16: 23; 18: 10; 19: 9). 악신이 그를 사로잡아서 열등감과 질투심과 증오심이 불일 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한국 과천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은석이라고 하는 한 대학생이 자기 부모를 죽이고 욕실에서 토막내어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학생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데는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귀신 잡는 군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꼭 귀신 잡듯이 대했습니다. 툭하면 윽박지르고, 때리고, 구박하고, 멸시하고, 집에서 쫓아내고 꼭 귀신 다루듯이 취급했습니다. 이러니 아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를 새벽 1시에 망치로 죽이고 또 건너방에 가서 아버지를 죽이고 시신을 토막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천하보다 귀한 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지 않고 항상 귀신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귀신 들린 아들이 귀신에 덮어 쓰여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전쟁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방심해서 안됩니다. 악령이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열등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자신감을 갖고 늘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열등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깁니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 열등감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다윗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낀 사울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열등감이 없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생겨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일어나도 큰 무서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등감에 사로잡힌 순간부터 자신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본문 8-9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사울이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에게 열등감을 느낀 사울이 만사를 비관적이고 극단적으로 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데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넘볼 것이라고 미리 가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저렇게 용맹무쌍한 신하가 있으니 앞으로 전쟁이 나도 걱정이 없겠구나!" 그러나 사울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만사를 부정적이고 왜곡해서 생각합니다.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기만 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불안해집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과민반응을 하게 됩니다. 전체를 보지 않고 한 부분만 확대해서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 사울의 열등감은 이렇게 두려움과 범벅이 되어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병적인 것으로 되어 갔습니다.
개가 낯선 사람을 볼 때 짖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들이나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개는 짖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의부증이나 의처증에 왜 시달립니까? 그 마음에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눈길,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혹 이야기만 해도 마치 자기를 왕따 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자기에 대해서 나쁜 말이라도 하고 있지 않나 피해망상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두려움을 제거할 때 열등감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합니다. 목욕탕에 가서 옷을 벗으면 다 그렇고 그런 똑같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든 거지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벌거숭이입니다. 군대에 처음 입소한 병사들에게 머리를 깎이고 군복을 입혀 놓으면 세상에서 그가 무엇을 했던지 다 똑같은 군인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누구도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하지 않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송명희씨가 작사한 복음성가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가 뛰어나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없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쓸데없이 우월감을 느끼는 것, 분명히 교만이며 버려야 할 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유 없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 이 역시 교만 못지 않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이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를 학대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열등감은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불만족하고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곧 우리를 지으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미노스 피자가게에서 배달을 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성실하고 훌륭하게 일을 했던지 손님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루는 이 젊은이가 일하는 모습에 반한 어떤 손님이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피자가게 주인에게 전화해서 칭찬을 좀 하려고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이름은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테오도르 루스벨트(1858-1919)는 미국의 26대 대통령으로서 유명한 분입니다. 손님이 "그것 참 유명한 이름이로구나"--"That's quite a famous name"--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러자 배달하는 청년은 무척 심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이름은 아주 유명한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거의 3년 동안 피자 배달을 하고 있습니다."--"That's right. It should be. I've been delivering in this neighborhood for almost three years now." 얼마나 건강하고 멋진 자아상을 가진 청년입니까? 피자 배달을 하면서도 미국 대통령 못지 않은 긍지를 갖고 일한다는 사실이!
맺는 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승리하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의 적, 열등감입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해서 성형수술을 수백만 달러를 들여서 해도 소용없습니다. 내부에 있는 자아상을 성형수술하기 전까지 외부의 성형수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성형수술 해주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혹시 열등감이 있으십니까? 마음의 의사되신 예수님께 맡겨보세요! 말씀과 성령의 메스로 여러분의 마음을 수술해서 건강한 마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열등감이 주인 노릇하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말끔히 고쳐주실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