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두 번의 서울 나들이(2)
<교대역 근처>
중국집에서 3차를 하였다고 말하였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약간 오바를 하였다. 다들 연태고량주를 마셨는데, 오랜만에 마셔보아서 그런지, 나에게는 그것이 싱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독하고 좀 더 찝질한 이과두주를 요청하였다. 삼례에서는 다들 이과두주를 마시거든. 쑤퍼나 아시아 마켓에서는 천원, 중국집에서는 삼천원. 그 다음 날 아침의 일이지만, 내 위장과 내 식도는 나를 책망하고 원망하였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는 우리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아있네!”라고 리드미컬하게 경상도 억양으로 말할 때의 그 ‘살아있다’는 것 말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 날, 거의 동창회를 할 때 모이는 만큼 많은 친구들이 나왔다. 그 중 상당수가 2차에 참석했으며 3차까지 간 사람들도 열댓명은 되었다. 우리보다 9년 위인 3회 선배들은 동창회(동기회)를 아예 없앴다고 한다. 그 선배들은 매사에 시큰둥한 모양이고 모여서 놀아도 흥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아직 그렇게는 되지 않은 것이다. 시끌시끌, 왁자지껄, 분위기도 좋았다. 낄낄거리면서 “술값은 니가 내라”고 하며 서로 술값을 떠넘기기도 하였다. “야, 왜 이래. 요새는 배도 안 들어와.” (정작 계산할 때가 되니, 또 서로 자기가 내겠다면서 싸우더라.)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나도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 시시껄렁한 이야기에 짐짓 핏대를 내기도 하고, 유치한 음담패설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정말 그런 일이 있어나 싶은 옛날 옛적 일을 자세하게 회상해 보기도 하면서 그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어 마음껏 즐겼다.
그 날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그 다음 주 토요일에도 상경하였다. 역시 수서역에서 내려 갈아탔지만 요번에는 교대역으로 왔다. 교대에서 학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학회에서 들은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피노자에 관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 철학자라고 한다.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이성을 존중하면서, 이성을 통해 욕망을 제어하도록 가르쳤다면, 스피노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그야말로 보통의 의미의 욕망, 예컨대 식색(食色)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라고 가르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일은 이성, 욕망, 그리고 이성과 욕망 사이의 관계를 종래의 철학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한 그 일의 세부 내용은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가 멋진 일을 해냈다는 점은 나로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그려낸 것이다. 이 남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그 날 학회에서 나는 뜻밖의, 그리고 대단히 당황스러운 말을 들었다. 스피노자나 철학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일상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것도 사적인 것이었다. 후배 한 사람이 나에게 은밀하게 다가와서, 어느 사모님(어느 선배의 부인)의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 그 사모님이 찾으신다고 알려주었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분이 나를 찾으신다고? 나를 찾으실 일이 없을텐데...... 한 시간쯤 지나서 나는 눈치를 채었다. 그 사모님이 말한 순서대로 말하면 이렇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서울대 생물학과 출신인데, 독일에서 미학(美學)으로 학위를 하였다. 50대 초반. 아버지가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셨다. 대학원 다니는 딸이 하나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였다......
저쪽에는 이미 이쪽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자신이 없어서요.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서, 죄송하게도 거절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렇기는 해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쪽에 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하셨을까? 아니, 나 자신이 나를 소개한다면 뭐라고 말할까? 이사할 때가 되면 집 보러 온 사람에게 안방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내 프로필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누추한 집구석을 구석구석 보여주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일이다. 뻔하다. 현금 15억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을 사람. 수도권에 아파트 하나. 65세이며 자신이 많이 늙었다고 생각함. 정치혐오자. 외로워하지는 않지만 약간 불편해하기는 함...... 이렇게 뜯어보니, 이 사람이 자신이 없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갑자기 내 인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남루하게 느껴졌다. 그 사모님과 통화를 하고 난 후 거울을 보았다. 염색한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니 당연한 일이지만, 양쪽 귀 옆으로 흰 머리카락이 수북이 나와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야 그 전날에도 나와 있었겠지만, 그 때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것이 내 모습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예컨대 나는 서울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오바를 하면서, 아직 살아있네 하는 느낌을 스스로 가진다. 나는 스피노자건 장자(莊子)건, 학문이나 문학에 관심과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또 삼례에 숨겨둔 것으로......(끝)
첫댓글 자신있게 사세요 조영태는 잘난 사람이야 ! 즐거운 설 보내셨지 ?
으이구 못난 영태교수. 일단 만나나 보시지..남자가 쪼잔하게 변명 들이대며 피하기는...
미학이 별거고 철학이 별거인가? 그딴거 다 씨잘데기 없어요 "여자랑 연애 할 때는".. 일단 한번 만나 보시라니까요!!
나는 엇그제부터 그리스인 조르바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데...
플라톤 아카데미 유튜브에 올려져 있어서 공짜....^^
학문이나 문학에만 관심 갖고 있는 교수님 ...... 관심가져볼만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