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돈차르(칭기스칸의 10대조)가 퉁겔릭천을 공격할 때
첨병이 되어 달리다가 임신중인 여자를 붙들어 묻기를
"너는 어느 부족의 여자냐?" 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저는 자르치우드 아단칸의 우리양카이 여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임신한 여자가 보돈차르의 진영에 와서 아들을 낳았는데
보돈차르는 "이 아이는 다른 성을 가진 자의 아들이다." 라고 해서
이름을 자다라다이라고 지었다.
그 아이가 자다란족의 조상이 되었다.
자다라다이의 아들은 투구우데이이며,
투구우데이의 아들은 부리불치루이며,
부리 불치루의 아들은 카라카다안이다.
카라카다안의 아들이 곧 자무카이다.
(출처 몽골비사)
* 바투 (1207-1255)
킵차크한국의 초대 왕 (재위 1243-1255)
1235년에 유럽원정군을 이끌고 서정을 개시하여
1240년에 키예프 공국을 멸하고 러시아 일대를 장악한 후
폴란드에 진입하였다.
1241년 슐레지엔공 하인리히가 이끈 독일제후연합군을 괴멸하였다가
오고데이칸이 사망하자 철군하였다.
이후 벌어진 칸위 다툼때엔 오고데이의 아들 구유크와의 불화로
툴루이의 아들인 뭉케를 지원하였다.
* 카이두 (?-1301)
오고데이한국의 왕 (재위 1248-1301)
구유크칸 사후 툴루이가문이 칸위를 계승하자
영지에서 세력을 키우며 재기를 도모하였다.
이후 차가타이한국을 협박하여 자기 세력하에 넣고
1269년 반쿠빌라이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에 즉위하여
원나라와 30년간에 걸친 내전을 벌였다.
* 가잔 (1271-1304)
일한국의 7대 왕 (재위 1295-1304)
아버지 아르군이 죽은 후 왕위계승을 놓고 일어난 분쟁끝에
사촌 바이두를 처단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아랍인들과의 융합을 꾀하였고
자신의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유럽과의 제휴를 도모하고
서중동의 강국 맘루크왕국과 수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한편으로는 라시드 앗딘에게 명하여 몽골제국의 역사를 저술케 하고
천문학, 의학 등 문화사업을 장려하였다.
* 두와 (?-1306)
차가타이한국의 10대 왕 (재위 1282-1306)
처음에는 카이두의 지배를 받으며 원나라와 싸웠으나
1301년에 카이두가 죽자 즉각 독립을 하여 원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그 후 오고데이한국의 국력이 쇠퇴하자 이를 공격하여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를 추방한후 그 영토를 흡수하고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몽골의 칸 계승이 오고데이 계통에서 툴루이 계통으로 바뀐 후
양가는 크게 대립합니다.
오고데이 가문이 칸위에서 밀려났다고는 하나
오고데이가 받았던 영지인 오고데이한국이 남아있어
툴루이 계통은 항상 후환을 안고 있어야 했지요.
이것이 쿠빌라이칸이 즉위하면서 터져 나옵니다.
이때 쿠빌라이칸은 자기 동생인 아리크부케와 왕위다툼을 하였고
오고데이한국의 카이두(오고데이의 손자)는 이러한 사태를 주시하다
1269년에 본격적으로 몽골제국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차가타이한국을 접수하고 킵차크한국까지 끌어들인 후
대칸의 자리에 올라 끊임없이 쿠빌라이칸을 공격합니다.
이 내전이 무려 30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이 와중에 각 한국들의 반목이 심해져 점차 분열되어갔지요.
오고데이한국은 1301년 카이두가 죽자 내전을 종식하고
원과 화친을 맺었으나 곧 부활한 차가타이한국의 두와에게
흡수되어 버렸고 두와는 중앙아시아에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원나라와 떨어져 나갑니다.
한편 한국중 유일하게 원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일한국도 이무렵
원나라와의 관계를 청산해 버림으로서
몽골의 한국들은 모두 독자적인 국가가 되어버립니다.
코르치가 와서 이르기를
"보돈차르 성조께서 잡아온 여자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자무카와
배가 하나, 양수도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자무카를 떠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제게 전조가 와서 눈으로 보게 했습니다.
담황갈색 황소가 와서 자무카의 주위를 돌며 그의 집 수레를 들이받고,
자무카를 들이받고, 한쪽 뿔이 부러져 짝짝이가 되자
내뿔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자무카쪽으로 울부짖으며
흙을 끼얹고 있습니다.
뿔 없는 담황갈색 황소가 큰 집을 위로 들어올려 끌며
테무진의 뒤에서 포효해대면서 큰길을 따라올때
하늘과 땅이 상의하여 테무진을 나라의 주인되게 하라고
하여 나라를 싣고온다고 하는 전조를 제 눈으로
보게하여 제게 계시합니다.
테무진이여! 그대가 나라의 주인이 되면, 제가 길조를 보고 옳게
예언을 한 공으로 저에게 어떤 상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테무진이 "정말로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그대를 만호로 삼겠다!"
라고 하자
코르치는 "이러한 도리를 예언한 제가 만호가 된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만호를 삼고, 나라의 아름답고 훌륭한 처녀들을
마음대로 취하게 해서 30명의 여자를 거느리게 해 주십시오!
또한 제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면대하여 들으십시오!"
라고 요구하였다.
투마드족의 보토쿠이타르군(타얼휘부인)과의 전투가 나오겠네요.
투마드족은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규모가 작은 민족임에도
산세를 잘 활용해 칭기스칸을 상당히 애먹인 민족이었습니다.
덕분에 호에룬의 양자이자 칭기스칸이 아끼던 4준중의 하나인
보로클이 투마드족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기까지 하지요.
이때 칭기스칸은 그때까지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르베이독신에게 투마드족 정벌을 일임합니다.
두르베이독신은 사전에 치밀하게 인근 지형을 조사하고
투마드족의 초병을 교묘하게 따돌려
기습전을 전개하여 투마드족을 박살내 버리지요.
이후 두르베이독신은 죽은 보로클을 대신해
칭기스칸의 주요 장수중 하나가 되어
아랍동부지방 및 인도 공격의 총수로 활약합니다
칭기스칸은 오래전에 코르치(드라마상에선 훠얼치로 나옴...)에게
약속한 대로 투마드족 여자들 가운데서 차지하라고 합니다.
이에 코르치는 투마드족에 찾아가서 막 강탈을 하는데
아닌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호색한의 습격을 받은 투마드족의
여족장 보토쿠이타르군은 즉각 코르치를 공격하여 감금시킵니다.
여자 밝히다가 여족장에게 호되게 당한 거죠.
이에 칭기스칸은 오이라트족장 쿠두카베키를 보내
사태를 원활히 해결하려 하지만 열이 오를대로 오른 보토쿠이는
쿠두카베키까지 감금시켜 버립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니 칭기스칸은 보로클을 보내어
투마드족을 쳤는데 워낙 산세가 우거진 지역인 탓에
보로클은 투마드족의 매복작전에 걸려 전사합니다.
그리하여 칭기스칸은 두르베이독신에게 병력을 줘 출전시켰고
두르베이독신은 투마드족의 초병들을 속이며
교묘히 진군해 투마드족을 궤멸시켜 버립니다.
그 후 칭기스칸은 투마드족 포로 100명을
보로클의 유족들에게 주고 코르치에게 30명의 미녀를 줍니다.
고생은 했지만 결국 소원은 성취한거죠
* 메르키트와의 마지막 전투와 메르키트족장 톡토아베키의 전사
* 나이만왕자 쿠추르크와의 격전과 쿠추르크의 서요 망명
* 2차에 걸친 서하와의 전투와 서하 양종의 항복
* 아르슬란칸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의 항복
* 투마드족과의 전투와 4준 보로클의 전사
칭기스칸의 2차즉위이후 바로 금나라와의 전투로 뛰어넘는 바람에
그 사이에 벌어진 주요 전투를 많이 빼먹은듯 하네요
칭기스칸이 2차즉위(1206년)를 한 이후에도
도망친 나이만의 쿠추르크를 비롯해 군소부족과 전투를 계속합니다.
여기서 상당히 고전을 하여 투마드족과 전투를 치를때
4준의 한명이자 호에룬의 양자인 보로클을 잃기도 합니다.
참고로 코르치가 꿈에도 그리던(?) 미녀30명을 얻는것도
이때의 일이지요...
금나라와의 전면전은 칭기스칸이 곳곳의 유목민과 서하를 평정하여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1211년부터 시작합니다.
칭기스칸이 서방으로 출정하면서 탕구트(서하)의 부르칸(신종 이준욱)에게
사신을 보내 "그대는 내 우익이 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르타울(흐와리즘) 사람들에게 내 황금굴레를 끊기고
단호하게 출정하고 있으니 우익이 되어 출전하라!"
고 하자 부르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참모 아샤감부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칸이 다 무엇이냐?"
라고 하면서 원병을 주기는 커녕 모욕을 주면서 사신을 쫓아냈다.
이 소식을 들은 칭기스칸은
"우리가 무엇때문에 아샤감부 같은 자에게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그자들을 치는데 어려울게 뭐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다른곳을 향해 진격해야 하니 그대로 두겠다!"
라고 하였다.
금나라와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른 후
칭기스칸은 오트랄 태수 이나르추크가 사신들을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서정을 시작합니다.
이때 강력한 제국이었던 서요는 나이만의 쿠추르크가
쿠데타를 일으켜 주민들에게 네스토리우스교(기독교의 종파)를
억지로 강요하는 등 실정을 하여 사실상 붕괴상태에 있었기에
칭기스칸에게 가장 큰 적은 이란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흐와리즘왕국이었습니다.
흐와리즘왕국은 본시 셀주크왕국의 일개 지방관원에 불과했던
곳이었는데 셀주크왕국이 쇠퇴하자
서요와 손잡고 셀주크의 산자르를 대파하고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합니다.
그 후 타카스 때에 이르러서는 셀주크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란, 중앙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그 뒤를 이은 무하마드는 서요를 격파하고 카라한조를 멸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인 할리파(칼리프) 자리까지 노리지요.
딱 승승장구하고 있는 타이밍에 오트랄 사건을 일으켜
몽골과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1219년 당시 이슬람세계는 종주국인 아바스왕조가 쇠퇴하여
아라비아 반도에 얌전히 박혀있고
셀주크왕국이 무너지고 아유브도 살라알딘이 죽은 후 분열상태에 있어
사실상 흐와리즘 왕국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칭기스칸은 이러한 강적 흐와리즘 왕국을 무너뜨림으로써
훗날의 일한국, 티무르제국에 이르는 몽골출신의 이슬람세계 강국의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출처 몽골비사
테무진을 칭기스칸으로 추대했던
알탄, 쿠차르베키, 샤차베키 모두 뒤에 칭기스칸을
배신하다 모두 비명횡사하고 말지요.
그리고 통일이후 칭기스칸의 2차즉위를 거행했던
쿠쿠추 테브텡게리 또한
칭기스칸의 아우 카사르, 테무게와 알력을 벌이다
등뼈를 꺾여 죽음을 당하였으니
칭기스칸은 이상하게 자신을 추대한 사람과
항시 악연을 가지는 듯 합니다.
칭기스칸은 주변민족정복 과정에서 위구르인의 문자를 받아들입니다.
그 후 몽골은 각지의 언어를 토대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고 쿠빌라이가 제정한 파스파문자를 비롯한
토드, 소욤보 등 수많은 문자를 만들어냅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위그루문자를 모방한 몽골 비치크로
현대에까지 몽골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현대 몽골의 공식문자는 러시아의 끼릴문자이지만
몽골비치크를 쓰는 곳이 상당수 있음)
하지만 이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쓰는 문자로
어두, 어중, 어말의 표기가 제각각 다르고
o,u의 구분이 어려운 등 문제가 많았지요.
그래서 오고데이, 우구데이 같이 책마다 사람이름 표기가 다른 것입니다
칭기스칸은 1189년 당시 몽골 내부도 통일하지 못하고
암바가이칸의 후손인 타이치우드족이 불참한 가운데서
몇몇 부족장들의 추대만 받고서도 대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센은 몽골전체는 물론이고
동쪽으로는 여진, 서쪽으로는 투르키스탄까지 제압하고
명황제까지 생포하는 쾌거를 거두었음에도
그놈의 신분 하나때문에 합법적으로 대칸이 되지 못하고
쿠데타로 해결하려다 패망하고 말지요.
그야말로 신분 하나가 두 영웅의 운명을 좌우해 버린듯 합니다.
에센 (1407-1455)
오이라트의 부족장(재위1439-1455)
원나라의 칸(재위1452-1455)
1439년 아버지 토곤이 죽자 족장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에 앞서 토곤은 타이핑, 바투바르도 등 오이라트 내부의 정적들을 물리치고
원나라의 아다이칸을 살해하였지만
칭기스칸의 후예만이 칸을 계승한다는 전통을 깨지 못하고
쿠빌라이의 후손인 톡토부카를 타이산칸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타이시라는 호칭을 사용하였고 에센도 이를 물려받았다.
그후 에센은 하미, 사주, 우리양카이를 점령하고 여진족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위그루인과 친교를 유지하여 이들의 경제력을 십분 이용하였고
명나라에도 압박을 가해 물자를 요구하였다.
이에 명조정에서 무역을 제한하고 1449년에 영종이 직접
50만을 이끌고 진군해 오자 이를 토목보에서 맞아 싸워 대파하고
영종을 사로잡았다.
에센은 영종을 볼모로 명과의 협상을 진행하려 했으나
명나라는 영종의 아우를 경태제로 옹립하였고
이에 격분한 에센은 즉각 북경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지만 고전하여
즉각 명조정과 협상을 하여 1450년에 영종을 송환하였다.
이무렵 에센에 눌려 허울뿐인 칸위만 지키던
타이산칸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에센을 제거하려 하자
에센은 1452년에 타이산칸을 죽이고 원황실을 도륙하였다.
그 후 자신이 직접 칸위에 올라 대원천성가한(大元天聖可汗)을 자칭하였지만
1455년 부하 아라크친상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어
오이라트세력은 무너지고 다시 몽골의 지배권은 원황실로 넘어갔다.
다얀칸 (1464-1517)
(참고: 칭기스칸에 나온 나이만 부족의 멍청한 칸하고는 다른 사람입니다)
원나라의 칸(재위1470-1517)
원나라 황족인 불후지농의 아들. 본명은 바투문크.
1467년에 원나라 칸인 만둘칸이 죽고 다음 칸위가 정해지지 않자
만둘칸의 왕후 만두하이의 지지를 받아
경쟁자인 만둘칸의 숙부 바얀문크를 물리치고
1470년 7세의 어린나이로 칸의 자리에 올라
칸호를 다얀(大元)이라 칭하였다.
당시 몽골내부에는 오이라트의 에센의 후손 이브라힘이
세력권을 형성하여 원나라를 위협하였는데
다얀칸은 즉각 이브라힘 토벌에 나서
오이라트 세력을 박멸하고 몽골일대를 재통일하였다.
그 후 정복한 영토의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차하르만호, 우리양카이만호, 몽골진만호, 영사포만호
등 우익 3만호를 신설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대해서는 화전양면정책을 펼쳐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게 하였고
1497년에 중국을 침공하여 요동, 감숙 일대로 진군,
북경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1509년에 영지개혁에 불만을 품은 몽골진만호 코스와
오르도스만호 만둘라이아카라쿠가 반역을 획책하자 이를 소탕하고
오르도스 지방은 자신의 3남 바르스볼드,
투메드는 손자 알탄에게 관장하게 하는 등
영지를 황족위주로 재개편하였다.
알탄칸 (1507-1582)
원나라의 황족.
다얀칸의 아들 바르스볼드조논칸의 둘째아들로
1509년 다얀칸으로부터 투메드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후 다얀칸, 조논칸이 잇달아 사망하자
실질적인 원나라의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명나라와 마시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확보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는데
점차 명나라와의 통상이 난항을 겪고
때마침 명나라로부터 귀순해온 무장들의 부추김을 받자
1541년 명나라를 침공하였다.
알탄칸이 이끈 원나라군은 태원을 점령하고 산서, 하북일대를 유린하였고
1550년에는 북경까지 육박하여 북경을 포위하였다가
중국 곳곳에서 구원병들이 밀려오자 철수하였다.
1552년에는 오이라트를 공격하여 카라코룸을 수복하고
청해, 티벳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1570년에 손자 바간나기와 불화하여 바간나기가 명나라에 투항하였는데
한번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던 명나라는 이를 통해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알탄칸에게 명나라에서 원나라로 도망친 조전과 바간나기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알탄칸은 이를 받아들여 교환에 응하였고
명나라는 대동, 선화 지방에 마시를 개설하여 원나라와의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의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1571년에는 명나라로부터 순의왕의 칭호를 받았다.
1578년에 티벳의 라마교 고승인 소남걈초를 초빙하여
그에게 달라이라마의 칭호를 주고 몽골곳곳에 라마교사원을 건립하는 등
라마교 보급에 공헌하였다.
리그덴칸 (1592-1634)
원나라의 마지막칸. (재위1603-1634)
보얀체첸칸의 아들 망구스의 장남으로
1603년 보얀체첸칸이 사망하자 칸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알단칸 이래 발전을 거듭해온 라마교 보급에 힘써
라마교 경전을 몽골어로 번역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다.
하지만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여 몽골을 압박하였고
몽골내부에서도 분열이 가속화되어
칭기스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인 코르친부족이
후금과 연대하여 그 세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에 리그덴칸은 1626년에 코르친을 공격하였지만
코르친을 지원한 후금의 홍타시에게 대패하였다.
이로인해 각부족들이 원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고
리그덴칸은 1627년에 반기를 든 하라친, 투메드 부족을
격파하고 명나라와의 세폐를 독점하면서 세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홍타시의 몽골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원나라는 끝내 후금에게 괴멸되었고
리그덴칸은 청해지방으로 퇴각하였다가 1634년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 후 1635년 몽골일대를 제압한 홍타시는
항복한 몽골부족으로 부터 복드세첸칸의 존호를 받고
원나라 칸을 겸임하여 청나라 황제들이 대대로 물려받게 되지만
칭기스칸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나라의 왕통은
리그덴칸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였다.
아룩타이 (?-1434)
원나라의 무장.
오이라트의 마흐무트에 대항하면서
1408년에 울지티무르칸을 원나라의 칸으로 옹립하였다.
1409년 명나라 구복이 10만병력으로 침공해오자
이를 켈루렌강에서 전멸시켰다.
이에 영락제가 1410년에 직접 50만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패하여 퇴각하였고 도중에 울지티무르칸은
마흐무트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후 아룩타이는 흩어진 세력을 재정비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1414년 마흐무트가 영락제와 격전을 벌여 큰 손실을 보자
1416년 오이라트를 공격하여 마흐무트를 제거하였다.
세력을 회복한 아룩타이는 명나라와 다시 일전을 벌였고
정면대결을 피하고 치고빠지는 전략을 구사하여
명나라군의 손실을 가중시켰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영락제는 1421년에 북경으로 천도하였고
아룩타이도 우그츠칸(구이리치)의 아들 아다이칸을 옹립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명나라와 일전을 계속하였다.
1424년에 영락제는 원나라 원정에서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하고
철수하는 도중에 사망하여 원나라와 명나라의 일전은 일단락 되었지만
마흐무트의 아들 토곤이 이틈을 노려 오이라트 부족을 다시 재건하였다.
이에 아룩타이는 다시 오이라트와 접전을 벌였으나
1434년에 토곤에게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몽골고원에서 원나라 세력이 쇠퇴하고
토곤, 에센에 이끄는 오이라트제국의 시대가 이어졌다.
조리그트칸 (1359-1392)
원나라의 칸. (재위1388-1392)
쿠빌라이의 동생 아리크부카의 후손으로 본명은 이수데르.
아리크부카 이래로 몽골 서부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1388년 토쿠스테무르칸이 명나라 장수 남옥에게
패하여 퇴각하자 오이라트족과 함께
톨강 인근에서 이를 기습해 토쿠스테무르칸을 죽이고
칸위에 올라 조리그트칸을 칭하였다.
이로인하여 아리크부카계통과 쿠빌라이계통의 분란이 심화되고
오이라트족의 세력이 확대되어
이후 원나라는 장기간 혼란을 되풀이하였다.
하여간 이놈의 툴루이가때문에 몽골이 망했어. 툴루이가가 제일 무능한 집안인데.
칭기스칸의 사신을 학살한
흐와리즘 오트랄태수 이나르추크의 이름이 또
중국식인 헤얼칸으로 나오는군요.
몽골사람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계속 하더니
이젠 중국과 떨어져 있는 투르크, 아랍 사람들 이름까지
이렇게 표현하네요.
분명 칭기스칸에 대한 책자가 시중에 많아
원어 이름을 참고하기 쉬울텐데 KBS에서는 이런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중국에서 가져온 정체불명의 이름만
나열하고 있으니 실망스럽습니다.
* 자무카의 동생을 죽인 인물...
역사기록: 주치다르말라
드라마내용: 제르메
* 이번 방영분에서 투마드족을 제압한 인물...
역사기록: 두르베이독신
드라마내용: 나야
국내사극에서도 배역수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했던 역사적 사실을
이미 등장한 배역이 대신 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외국 사극도 그러는 경향이 있네요.
나이만 다얀칸의 아들인 쿠추르크는
우유부단한 아버지와는 180도 다르게 막나가는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몽골군에 겁을 먹자
자기 아버지에게 막말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해
나이만이 패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지요.
그 후에 쿠추르크는 몽골군에 쫓겨 서요로 도망쳤고
서요황제 야율직노고의 사위가 됩니다.
하지만 몽골군에게 밀리다 보니 어쩔수 없이 온 것이고
본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기에 쿠추르크는
자신을 받아준 야율직노고를 배신해 왕위를 찬탈합니다.
당시 서요는 거란출신의 인물들은 불교,
대부분의 주민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는데
쿠추르크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도였기에
왕위에 오르고 나서 이들과 충돌을 빚게 됩니다.
이에 쿠추르크는 강력한 종교탄압으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독재정치를 감행하여 민심을 크게 잃습니다.
덕분에 서요는 제베가 거느린 2만의 몽골 선봉대가 공격해 오자
제대로된 반격도 못하고 붕괴되고 쿠추르크또한 전사하고 말지요.
이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진 흐와리즘과 더불어
중앙아시아+아랍계의 양대 강국으로 번성하던 서요가
칭기스칸 본대가 오기도 전에 박살나 버린 것입니다
오이라트족은 몽골서부에 살던 민족으로
쿠두카베키 시절에 다른 12부족과 함께 자무카를 구르칸으로 추대하여
칭기스칸에게 대항했다가 패주합니다.
이때 메르키트, 타타르 등의 부족들은 끝까지 항전하다 패망하지만
오이라트는 칭기스칸과 화친을 성사시켜 명맥을 유지합니다.
쿠두카베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칭기스칸과 사돈관계까지 맺음으로서
나이만족이 사라진 서몽골에서 지위를 탄탄히 구축해 나갑니다.
이후 오이라트족은 원나라 조정과 계속 친밀을 유지해 가면서
14세기에 들면서 서몽골의 강자로 부상해 나갑니다.
한편으로는 쿠빌라이에게 밀린 아리크부카의 후손들과도
연대를 하여 1388년 원나라가 명에게 밀리자
쿠빌라이 가문을 치고 아리크부카 가문의 이수데르를 옹립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에까지 세력을 확대합니다.
몽골인들은 중국인을 키타드 혹은 햐타드 라고 부릅니다.
키타드는 다름아닌 거란에서 나온 말로서
10-12세기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요나라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망하였지만
몽골인은 여전히 금나라까지 키타드 라고 호칭하였지요.
이것이 계속 이어지다 나중엔 아예 중국인을 뜻하는 말로 변질됩니다.
중국인의 입장에선 자기들이 업신여기던 이민족의 이름이
어쩌다가 자기 자신을 뜻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 무하마드 샤
흐와리즘왕국의 왕.
서요, 델리술탄왕국을 압박하고
가즈니왕조를 멸해 흐와리즘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오트랄 사건을 계기로 몽골군이 공격해오자
방만한 전술을 펼치다 오트랄,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주요 도시를 잃고 패주하던 중 카스피해 근방에서 병사함
* 자라르딘
무하마드의 아들로 무하마드 사후 흐와리즘 국왕을 계승함.
몽골군에 끝까지 항전하여 3만의 몽골군을 괴멸시키는 위력을 발휘함.
뒤에 몽골군의 끈질진 추격에 쫓겨 위험을 무릅쓰고 인더스강을 도하한 후
각지를 전전하며 몽골군과 싸우던중 서이란에서 암살당함.
* 토가차크
무하마드의 외숙.
몽골군이 침공하자 5만 병력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사수하였으나 끝내 괴멸당함.
* 이나르추크
오트랄태수로 몽골의 사신단을 학살하여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5개월동안 오트랄성을 사수하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자신은 포로가 되어 눈에 끓는 은액을 붓는 형벌을 당해 죽음.
* 티무르말리크
흐와리즘의 용장.
몽골군이 침공해오자 하천 일대에 진을 치고 스스로 선봉에 서서
활을 쏘며 독전하여 몽골군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
잡설.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중국식으로 창씨개명 당할까요?
칭기스칸은 나이만을 멸한 후 주치에게 서쪽부족을 토벌하게 합니다.
이때 서쪽부족 중 하나인 오이라트족의 수장 쿠두카베키(후두허)는
본시 자무카와 함께 칭기스칸에게 대항했던 인물이었지만
주치가 공격해오자 싸우지도 않고 1만을 이끌고 투항합니다.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고 가장 먼저 투항하였기에
칭기스칸은 서부의 부족장 중 쿠두카베키를 가장 우대하여
쿠두카베키의 장남 투룰치에게 주치의 딸을,
차남 이날치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냅니다.
그리고 투마드족과의 전투에서 코르치가 생포되자
쿠두카베키는 서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갔다가 자신도 생포당합니다.
그 후 칭기스칸 휘하의 용장 두르베이독신이 투마드족을 격파하고
여족장 보토쿠이타르군(타얼휘)를 생포하여 쿠두카베키는 풀려났고
칭기스칸은 자신의 사신으로 갔다가 곤경에 빠진것을 감안해
보토쿠이타르군을 쿠두카베키에게 보냅니다.
여기엔 코르치의 방자한 행동으로 벌어진 전투로 인해
돌아선 서부의 민심을 정략결혼으로 해결해 보자는
칭기스칸의 의도도 있었습니다.
일을 벌인 장본인 코르치에게 보냈다면
서부의 민심이 오히려 더 나빠지겠지요?
그리고 흐와리즘왕국의 역사는 30년이 아니라
거의 1백년이 넘습니다.
흐와리즘은 본시 셀주크투르크의 지방정권이었는데
11세기말에 셀주크투르크가 쇠퇴하자 거의 독립왕국처럼 행동했고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야율대석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요를 건국하자
이와 합세해 셀주크투르크를 붕괴시키고
지금의 이란 일대에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칭기스칸이 사르타울(흐와리즘) 사람들에게 우쿠나를 비롯한
100명의 사절단을 암살당하자
"내 황금굴레를 사르타울 사람들에게 어찌 끊겼는가?
우쿠나를 비롯한 100명의 사절단의 원수를 갚고 복수를 하러
사르타울로 출정하겠다!"
라고 할때 거기서 이수이카툰이 칭기스칸에게 진언했다.
"칸께서는 높은 고개를 넘어, 넓은 강들을 건너
긴 원정을 하여 여러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생명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큰 나무같은 당신의 몸이 기울어가면
난마같은 당신의 나라를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큰 기둥같은 당신의 몸이 쓰러져가면
새떼같은 당신의 나라를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당신이 낳으신 네 준마같은 아들들 가운데
누구를 말씀하시렵니까?
아들들, 아우들, 여러 평민들, 저희들 못난 것들에게도
중요성이 이해되고 있을 때
제가 깨달은 바를 제언하게 되었습니다.
분부를 알게 하소서."
라고 하뢰니 칭기스칸이
"카툰도 사람이지만 이수이의 말이 옳다.
어느 누구도, 아우들, 아들들 너희들도, 보르추, 무카리 등도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나도 선대로부터 칸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다.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고 있었다."
라고 하였다.
(출처 몽골비사)
자라르웃딘 (?-1231)
흐와리즘왕국의 마지막왕(재위1220-1231)
무하마드의 아들로 1219년 몽골군이 침공해 오자
군사를 집중시켜 몽골군과 대적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무하마드는 이 주장을 묵살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하였고 흐와리즘군은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당해
오트랄,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무하마드는 1220년에 서쪽으로 퇴각하던 중
카스피해 근방에서 사망하였고
자라르웃딘이 그 뒤를 이어받아 몽골군에 계속 항전하였다.
그는 병력을 가즈니로 옮겨 흐와리즘의 잔존세력을 규합하였고
파르반에서 호에룬의 양자 시기쿠두쿠가 이끄는
3만의 몽골군을 대파하였다.
하지만 몽골군이 계속 증원되어 공격해와
인더스강까지 밀리게 되었고 격전끝에 탈출하여
다시 서페르시아 지방으로 이주하여 몽골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
1231년에 쿠르드족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솔직히 시치후투후가 이끄는 3만군이 아무리 몽골이라지만 3배가 넘는 11만 호라즘군을 이기는건 힘들
칭기스칸의 가문은 대를 이어오면서 여러개의 씨족으로 나뉘어집니다.
불과 칭기스칸과 촌수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친족마저
다른 씨족으로 불릴 정도이니 조금만 촌수가 차이가 나도 완전히
남이 되어버려 우리나라와 같은 본관이나 문중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굳이 칭기스칸의 성씨를 찾는다면 보르지긴씨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도 씨족의 개념이지 완전한 성씨라고는 하기 힘듭니다
* 주르킨족
샤차베키: 테무진의 6촌으로 1189년 알탄, 쿠차르베키와 함께
. . . . . . . 테무진을 칭기스칸으로 추대하는데 협조한다.
. . . . . . . 그 후 칭기스칸과 반목하여 타타르정벌때 외면하였고
. . . . . . . 칭기스칸이 보낸 사자들을 모욕하여 전쟁을 치르다
. . . . . . . 대패하고 처형된다.
부리보코: 샤차베키 휘하의 용장으로 칭기스칸의 동생 베르구테이와
. . . . . . . 난투극을 별여 원한을 사서 뒤에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메르키트족
톡토아베키: 이수게이와의 원한으로 테무진을 공격해
. . . . . . . . 보르테를 납치하지만
. . . . . . . . 자무카, 토릴칸과 연합한 테무진에게 대패한다.
. . . . . . . . 1201년 코이덴전투에서 패하고
. . . . . . . . 토릴칸의 공격을 받아 바르구진으로 쫓겨난다.
다일우슨: 메르키트 지도자의 한명으로 칭기스칸에게 패한 후
. . . . . . . 자기 딸인 쿠란을 칭기스칸에게 보낸다.
* 타타르족
메그진세울트: 타타르부족장으로 1196년 칭기스칸의 공격을
. . . . . . . . . . 받아 전사한다.
자린부카: 1201년 타타르부족을 이끌고 자무카와 합세해
. . . . . . . 칭기스칸과 맞서다 대패하고
. . . . . . . 1202년에 네무르게스에서 궤멸당한다.
예케체렌: 1202년 타타르멸망 이후 칭기스칸이 타타르부족
. . . . . . . 학살명령을 내리자 베르구테이에게 이 정보를 먼저 알아내
. . . . . . . 몽골군과 격전을 벌인다.
. . . . . . . 뒤에 그의 두 딸 이수이, 이수겐이 칭기스칸의 아내가 된다.
* 케레이트족
토릴칸: 이수게이와 의형제로 칭기스칸과 동맹을 맺어
. . . . . 타타르정벌과 코이덴 전투때 도움을 준다.
. . . . . 그 후 자무카와 아들 셍굼의 책동으로
. . . . . 칭기스칸과 불화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 . . . . 패하고 도주중에 나이만족 척후병에게 살해된다.
닐카셍굼: 토릴칸의 아들로 칭기스칸을 경계하여
. . . . . . 아버지를 설득해 칭기스칸을 공격하다가
. . . . . . 패한 후 서하로 달아난다.
* 나이만족
부이룩칸: 1201년 코이덴전투때 자무카편에 서서 출전하다가
. . . . . . 사술을 동원하는 등 술책을 부리지만 대패한다.
다얀칸: 토릴칸을 살해한 후 자무카를 받아들여 함께
. . . . . 칭기스칸에게 맞서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 . . . . 전면전을 펼치지 않고 이리저리 물러서다가
. . . . . 1204년 나쿠전투에서 대패하여 처형된다.
쿠크세우사브락: 나이만족의 용장으로 셍굼이 이끈 케레이트군을
. . . . . . . . . . . 크게 격파한다.
쿠추르크: 다얀칸의 아들로 자꾸 전면전을 회피하는
. . . . . . 자기 아버지를 질타하였고 나이만족이 무너지자
. . . . . . 서요로 망명하여 서요왕의 사위가 된다.
. . . . . . 그 후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지만
. . . . . . 서정에 나선 칭기스칸에게 패한다.
본토로 밀려난 몽골은 15세기에 이르러 혼란을 수습하고
울지티무르칸(중국측 기록의 본아실리)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맞서게 됩니다.
이에 영락제는 구복에게 10만 병력을 주고 이를 치게 했으나
구복의 병력은 그대로 몰살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영락제는 자기가 직접 5차례에 걸쳐 몽골을 공격했으나
울지티무르칸의 뒤를 이은 아다이칸의 치고빠지기 식의 전략에
이렇다할 전과도 못세우고
철군도중 영락제가 병사함으로써 영락제의 북벌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막을 내리고 맙니다
칭기스칸은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배하면서
막내에게 유산을 상속한다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상속합니다.
그런데 정작 칸의 자리는 셋째인 오고데이가 물려받지요.
그래서 오고데이는 자기 동생의 영지에서 즉위한 격이 되어서
툴루이의 존재에 부담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오고데이는 1232년에 툴루이가 가진 몽골본토에 대한 권한을
강제로 빼앗고 몽골본토를 직접 통치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문에 오고데이가계와 툴루이가계의 불화가 점점커졌고
오고데이가 사망한 후 양가문은 극렬한 내전을 펼칩니다.
이때 서방원정에서 돌아온 바투가 툴루이가문을 지원하여
툴루이의 아들 문크가 칸위에 오르지만
칸위에서 밀려난 오고데이가문은 차가타이한국과 결탁하여
문크,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 내전은 오고데이의 손자 카이두에 의해 극렬히 전개되어
쿠빌라이가 사망한 이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원나라는 1388년 토쿠스테무르칸이 이슈데르에게 살해됨으로써
왕통이 쿠빌라이계에서 아리크부카계로 넘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국호를 원에서 타타르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중국측 기록으로 정작 몽골의 기록엔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바로 원왕조 계승의 주체를 놓고 명나라가 원나라를
자기 선행왕조로 만들기 위해 진짜 원나라의 후예들을
소외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원사를 서술하면서 순제 토곤테무르칸까지만
원나라의 역사로 놓고 나머지는 그대로 날려버립니다.
거기도 모자라 명나라는 예전부터 중국이 북방민족을 부르던 호칭인
타타르를 차용하여 자기멋대로 가져다 붙인 것입니다.
실상 몽골의 역사기록은 중국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편이고
북방민족에 대한 연구를 대부분 중국측 사료에 의존하다 보니
이런 중국의 억지로 만들어진 국호가
진짜 몽골의 국호인양 알려지게 된 것이지요
첫댓글 이런건 동양사 게시판으로;;
대단하십니다;; 동양사 쪽으로 넣는 편이 좋겠지만..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