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용장사를 찾아가는 길
지금, 용장사는 절집은 없고, 터로 추정되는 빈자리만 있다. 그래서 108사 답사계획표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절은 절집보다는 절이 안고 있는 이야기들 때문에 한 번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을 잘 안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면 말들이 달랐다. ‘골짜기를 조금만 오른다’에서 ‘산길이 멀어서 힘들텐데’ 이다.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산 능선에 바위를 기단으로 하는 탑이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제 사문진 나루터의 산책길을 다녀왔다. 매일 만 보를 걷는 것을 생활신조로 살아오다 보니 웬만한 산책길은 힘들지 않다. 어쨌거나 요즘에 걷는 데는 자신감이 생겼다. 날씨가 확 풀어졌다. 아직 새싹이 보이지는 않지만 봄은 머금은 나뭇가지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봄빛이 완연하다. 걷기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저녁에 아내더러, ‘내일은 용기를 내서 경주 남산의 용장사 터를 찾아가 볼까.’라고 했다. 집사람도 좋다고 하면서 ‘내일은 비가 온다던데.’ 한다. 오후 늦게 전국적으로 비가 온 후에 밤부터 꽃샘 추위가 찾아오리라는 예보를 나도 들었다. 내일 아침에 날씨를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아침 날씨는 따뜻했다. 하늘에 구름이 많기는 하였지만 구를 사이로 푸른 하늘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낮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으리라 싶었다. 우리가 내린 결정은, 일찍 출발하여 다녀오자고 했다.
경주 시외 버스 정류장의 앞에서 용장사 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차가 왔다. 시내버스라기 보다는 마을 버스였다. 용장곡 입구까지는 버스가 많았다. 다음 정류소인 이조리에서는 내남면의 여러 골골 마을로 감으로 버스가 뜸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얼마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성격이 매우 털털했다. 승객은 거의가 할머니이고, 간혹 할아버지도 보였다. 기사 아저씨는 ‘할매요, 조심하이소’ ‘천천히 올라와도 되니 천천히 타세요. ’차비를 안 내셨네.‘ ’아이구야 내 정신 봐라 차 타는데 정신을 뻬앗기서,‘라고는 앞으로 나와 돈함에 차비를 넣었다. 나는 고향이 경주이다보니 그들이 나누는 투박한 말들이 싫지 않고, 구수했다.
집사람이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절집 답사를 다니느라 버스를 타면 집사람은 곧잘 기사 아저씨에게 내릴 곳을 묻는다. 오늘도 그랬다. 용장사를 묻는 아내에게 ’용장사는 없는데요. 용장골 입구에 내려드릴테니 가만히 앉아 계세요‘ 한다. 삼릉을 지나자 닿는 첫 마을에서 내리라 한다.
산골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이 용장골이란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올랐다. 등산객들이 벌써 하산하고 있다. 용장사를 물으면 ’그런 절은 없어요.‘에서, ’아, 예, 절은 없고, 터라는 팻말은 있는데, 거기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산이라요.‘ 한다. 거의 능선이 가까이 올라야 한다고 아르켜 주었다.
길의 경사는 완만했다. 골짜기는 봄을 맞으려는 듯 훈훈했고, 진달래며, 이름 모를 꽃까지 피어 있었다. 촌가의 담 너머로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한 매화 망울이 올망졸망 달려있다. 김시습의 호가 매월당이다. 그의 호가 금오산 매화와 관계있다는 글을 읽었으므로 반가웠다.
내가 절집도 없을뿐더러 마을 사람도 잘 모르는 용장사 터를 찾는 이유는 오로지 김시습이 쓴 한국 최소의 소설 금오신화를 그 절에 머물면서 썻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계곡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서 절을 물으니, 절은 없고, 팻말만 있다면서, 한 시간은 좋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쯤에서 설잠교라는 다리를 만나서, 건너서 조금만 더 걸으면 용장사 터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비가 온다는데요. 라며 걱정을 해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천천히 올랐다. 진달래가 피어 있으면 사진도 찍었다. 하산하는 등산객이 점점 많아진다.
안내소에서 아르켜 준대로 한 시간 쯤을 산길을 오르니 눈 앞에 다리가 보인다. 설잠교이다. 이때부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낙비가 올 듯하다. 소나기는 잠시만 피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방을 살펴보니 설잠교 바로 아래에 큰 바위가 굴을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조심조심 그곳으로 가서 바위 굴 안에 몸을 숨겼다. 우르렁 쾅쾅하고는 번갯불이 번쩍했다. 준비해간 점십을 먹으면서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굵은 빗방울은 작은 방울이 되었지만 멎을 기미는 없다. 날씨도 추워진다.
그래도 감사해야 할 것은 등에 검을 줄이 그으진 노랑 다람쥐를 만난 일이다. 우리의 토종 다람쥐이다. 내가 수 십 년을 산책해 온 범어동산에서 노란 토종 다람쥐가 없어진지도 십 년 아니 이십 년 쯤 되었었나. 그 뒤에 청설모가 보이더니 청설모가 사라진지도 오래 되었다. 그 다람쥐를 여기서 만나다니. 부처님의 가호라 믿고 감사해야 겠다.
하산하는 등산객에게 용장사를 물으면 모른다는 분도 있었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분도 있었다. 절 터라는 곳의 뒤편으로 산을 더 오르면 마애불도 있고, 목이 없는 석조여래불상도 있고, 능선 위에는 바위를 기단으로 하는 탑도 있습니다. 그 전부를 용장사 터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절터를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등산객의 설명이 아주 친절하다. 석조여래불상이나 삼층 석탑이 통일 신라의 양식임으로 신라시대부터 이곳에 절이 있었다. 조선 초의 김시습이 머물렀다고 하니, 신라시대에서 조선 초까지도 절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김시습이 머문 곳은 절의 본당이 아니고, 암자라고 하니 ---, 지금 용장사를 두고 산 아래 사람들의 설명도 헷갈리는 이유를 알만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때의 고명한 스님이신 대현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용장사에 주재하신 대현스닙은 유가종 스님이다. 그 외에도 이름이 전해오는 신라 스님은 유가종 스님이다. 유가종은 미륵불을 모시는 불교종파이니, 미륵불 신앙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나 전래 되는 말들을 종합하면 용장골의 산 정상 부근 어딘가가 절터가 아닌가 싶다. 절 이름도 잊혀졌으나 1923년의 발굴에서 용장사라는 문자가 쓰여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김시습이 만년에 이 절에 머물렀지만 매월당이 유가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김시습이 이곳에 7년이나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 김시습이 호를 매월(梅月)당이라고 한 것은 금오산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금오산의 금오에는 매월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였다.
내가 굳이 용장사 터를 찾아보고자 한 것은 김시습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여 방방 곡곡을 떠돌다가, 이곳 용장골의 암자에 7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이후 충남 부여의 무량사로 옮겨가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면서 매화가 피던 봄날에 지은 시 한편을 보자.
용장골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있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에 사슴과 함께 잠들었으라
낡은 의자에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억새 처마 밑에서 깰 줄을 모르는구나.
들에는 꽃들이 지고 피는데
한 시간 여가 흘렀다. 굵은 빗방울은 가늘어졌지만 그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바위 굴에서 나왔다. 설잠교를 건너 보았지만, 산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눈으로만 용장사 터라는 곳을 바라보고는 내려오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바윗돌이 깔린 곳이 많아 빗물에 젖어 미끄럽다. 조심조심하면서 내려 왔다. 비가 완전히 멎은 것이 아니다. 굵지는 않았지만 빗줄기는 산을 내려 오는 동안 계속하여 이어졌다. 겉옷부터 젖었지만 스며드는 빗물은 속옷까지 젖게 한다. 삼월의 초봄에 비오는 날의 한기가 몸속을 파고든다.
산 아래에 내려오니 커피집이 있다. 마당에 매화가 피어 있는 집이다. 홀에 들렸으나 봄이라고 난방을 하지 않아 훈훈하지는 않다. 뜨거운 커피로 몸을 데우려 했으나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경주의 콜 택시를 불러서 시외버스 정류소로 나왔다. 차안은 난방이 되어 있어서 몸이 한결 풀렸다.
우리집에 왔다. 따뜻한 우리집, 방안의 훈훈함, 이것이 행복이구나.
첫댓글 저도 그날 남해 금산으로 등산을 갔어요. 비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봄바람의 유혹에 산에 올랐지요. 세찬 비바람이 불었지만 오랜 가뭄 끝이라 얼마나 반갑던지요. 용장사 찾아가는 여정이 눈으로 본듯 그려집니다. 선생님의 열정에 항상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이박사님 제 고향 용장읕
다녀오셨군요 어린 시절 시도 때도 없이 오르던 남산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저 눈에 예 모습이 선하게 지나갑니다. 좋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남산은 수 십 년 동안 답사팀을 따라서, 또 혼자서, 우리 가족과, 수도 없이 올랐습니다. 그렇게 갔었는데도 아직 가보지 못 하였던 곳이 더 많습니다. 갔었더라도, 유적지의 사연을 알고 난 지금에 찾아가면 새롭게 느껴져서 처음 찾아온 듯합니다.
아, 경주 남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