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적 순 례 (史跡巡禮)
史跡 230호 유관순열사 유적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史跡 303호 남원 광한루원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각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史跡 272호 남원 만인 의총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史跡 158호 문무대왕 릉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史跡 134호 제주 삼성혈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史跡 480호 제주 목관아지 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史跡 135호 부여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史跡 5호 부여 부소산성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史跡 383호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1년(1633)에 건립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史跡 302호 순천시 낙안읍성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塔. 碑. 鐘. 國寶 國寶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조선(朝鮮) 세조(世祖) 11년(1465)에 세운 원각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폐사(廢寺)되어 현재 이 탑과 비(碑)만 남아 있다.
國寶 20호 불국사 다보탑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國寶 21호 불국사 삼층 석탑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불국사(佛國寺)대웅전(大雄殿) 앞뜰에 동서로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國寶 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이 탑은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建立)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유일한 7층의 거탑(巨塔)으로 높이 14.5m이다.
國寶 11호 미륵사지 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탑의 건립연대는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源樣式)으로서 목탑(木塔)이 석탑(石塔)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國寶 30호분황사 석탑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이 석탑(石塔)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탑이 세워진 것은 분황사(芬皇寺) 창건(創建)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으로 보고 있다,
國寶 16호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경북 안동시 법흥동 8 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塼塔)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7m, 기단너비 7.75m이다.
國寶 35 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은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어머니와 관련되는 전설을 지닌 석탑으로 탑 조성에 있어 착상이 기발하고 조각이 우수한 점 등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사자탑 가운데 이를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게 한다.
國寶 40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서 원 위치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기단은 단층 토축(土築)이다.
國寶 48 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이 석탑은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 주로 유행했던 다각다층석탑(多角多層石塔)의 하나로 고려초기(高麗初期) 석탑을 대표하는 것이다.
國寶 86호 경천사십층석탑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이 탑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 부소산(扶蘇山) 경천사터(敬天寺址)에 있던 것으로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4년 (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이 탑을 본따 만든 것이다.
國寶 213호 금동대탑 금동탑이나 청동탑은 절의 중심적인 존재라기보다 건물 안에 모셔두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일반적인 탑이라기보다 하나의 공예품, 혹은 공예탑으로 볼 수 있다.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제법 큰 규모이다.
國寶 100호 남계원칠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國寶 101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國寶 289호 익산왕궁리5층석탑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國寶 102호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國寶 130호 선산죽장동오층석탑 선산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어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0m에 이른다.
國寶 187호 봉감모전오층석탑 경주 영양군 산해동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붙여졌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國寶 57호 쌍봉사 철감선사탑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 쌍봉사 쌍봉사 경내의 북쪽에 있는 이 탑은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新羅)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이다. 건조연대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8년(868)으로 추정된다.
國寶 5호 법주사쌍사자석등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신라(新羅) 석등(石燈) 중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그 조성년대(造成年代)는 성덕왕(聖德王)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國寶 3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國寶 7호 봉선 홍경사 사적갈비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봉선홍경사지(奉先弘慶寺址)가 있었던 곳은 인가(人家)도 드물었으며 잡초가 우거져 가끔 도적이 출몰하여 행인이 곤란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창사(創寺)를 명(命)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감독으로 동왕(同王) 12년(1021)에 200여칸을 완공하였다. 비를 세운 연대는 절을 세운 지 5년 뒤의 일이다.
國寶 8호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이 석비는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때 당(唐)나라에 수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郎慧和尙) 무염(無染)(801∼888)을 위해 세워진 탑비로 전체높이 4.55m, 비신높이 2.52m, 너비 1.5m로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최대(最大)의 것이다.
國寶 25호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이 비석(碑石)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661)에 무열왕(武烈王)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碑)의 대석(臺石)이었던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위에 얹혔던 이수(이首)만이 남아 있다.
國寶 64호 법주사 석연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법주사 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 중의 하나이다. 동자주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石欄干) 동자주와 유사하다. 연지의 조법은 정교하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대표가 될 만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國寶 198호 단양신라적성비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國寶 205호 중원 고구려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國寶 29호 성덕대왕 신종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國寶 280호 성거산천흥사동종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國寶 120호 용주사 범종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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