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6월 3일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은 귀빈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빠져나갔다.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혁명군에 맞서다가 만주로 퇴각하던 중이었다. 다음날 새벽 장쭤린이 탄 열차는 선양(瀋陽)부근 황고둔(皇姑屯)에서 폭파당했고 그는 사망했다. ‘장쭤린 폭살사건’ 또는 ‘황고둔 사건’으로 불리던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고급 참모 고모토(河本大作) 대좌(大佐)가 주도했다. 현장 지휘자는 독립수비대 중대장 도미야(東宮鐵男)였고, 서울 용산의 조선상주군 공병대 기리하라(桐原貞壽)가 200㎏의 화약을 반출해 사용했다. 고모토는 장쭤린 폭살로 만주의 치안이 악화되면 그를 명분으로 관동군이 출동해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킬 계획이었다. 마침 6월 3일이 생일이었던 아들 장쉐량(張學良·1901~2001)은 베이징에서 소식을 듣고 사병 차림으로 비밀리에 선양으로 귀환했다. 장쉐량은 관동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해 12월 29일 오전 7시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오색기(五色旗)를 장제스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로 일제히 바꾸어 다는 역치(易幟)를 단행했다.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총리는 당초 일왕 히로히토에게 “고모토 대좌의 소행”이라고 보고하고 책임자 처벌을 공언했으나 군부의 반발로 흐지부지되면서 그 무능과 일본의 침략 야욕만 드러났다.
장쭤린을 폭살시키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에는 참모 이타가키(板垣征四郞) 대좌와 이시하라(石原莞爾) 중좌 등이 총리에게 보고도 않고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외교 수단으로 해결하자는 장제스의 권유에 따라 장쉐량의 동북군은 산해관(山海關) 밖으로 퇴각했다. 게다가 ‘외적과 싸우려면 먼저 내부를 평정해야 한다(攘外必先安內)’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홍군 토벌에 나서야 했다. 장쉐량은 1936년 12월 홍군 토벌을 독려하러 온 총사령관 장제스를 억류하고, ‘공산당 토벌 중지, 일치항일(停止剿共, 一同抗日)’을 주장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절멸의 위기에 몰렸던 공산당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했고 끝내 대륙을 석권했다. 서안사변은 장쉐량의 두 번째 역치(易幟)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이처럼 예상치 못하게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쉽게 승패를 점칠 수 없다. 중국이 장쉐량의 대만 고택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에 나섰다 한다. 억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