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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악한 계략
삼상 18:17-25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8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21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22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24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5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삼상 18:17-25 /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이제는 사울이 음모까지 꾸몄다. `내 손으로 직접 다윗을 죽일 것 없이 블레셋 족속의 손을 빌려서 그를 죽이도록 하자!' 이런 속셈으로 사울은 다윗에게 부마가 될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자네에게 내 맏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소. 자네는 그 값으로 나의 훌륭한 용사가 되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싸움에 나가 용감하게 싸워 주시오.' 18) 그러나 다윗은 사양하였다. `제가 감히 부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제 집안으로 보나 혈통으로 보나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19) 그러나 정작 2년이 지나서 다윗의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사울은 메랍을 다윗에게 주지 않고 므흘랏 사람 아드라엘에게 아내로 주었다. 20) 그런데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다. 누가 이 소식을 사울에게 전하자 그는 때마침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21) ㄱ) b. 그런데도 사울은 다윗에게 이와 같이 약속하였다. `오늘부터 2년만 지나면 내가 자네를 사위로 맞겠으니, 그동안에 훌륭한 용사로서 전공을 세워 주시오.' a. 또 다시 다윗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내가 또 한 번 다윗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번에는 다윗이 이 올무에 걸려 죽도록 하겠다.' 블레셋 족속이 나를 대신해서 다윗을 죽이도록 하겠다.' (ㄱ. 문맥상 81절 이하로 옮기고 b에서 21절로 간다) 22) 사울이 이번에는 신하를 시켜서 은근히 다윗에게 이런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임금님께서 자네를 얼마나 끔찍히 여기고 계시는지 아시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임금님과 똑같이 자네를 좋아하고 있으니 이제 임금님의 부마가 되시오' 23)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사양하였다. `부마가 되는 영광은 아무나 얻는 줄 아시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입니다.' 24) 신하들이 이 말을 즉시 사울에게 전하자, 25) 사울은 신복들에게 이와 같이 명령하였다. `너희는 다윗에게 가서 `임금님께서는 결코 신부의 값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블레셋 사람의 포경을 백 개만 벗겨 와서 임금님의 적에게 원수를 갚아드리면 그만입니다.' 하고 말해 주어라.' 그러나 사울의 속셈은 여전히 다윗을 블레셋 족속의 손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었다.
다윗을 향한 사울 왕의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치밀하고 추악해가고 있습니다.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17-19)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얻어가자 다윗을 사위로 삼고 자신을 도와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당시 딸과 결혼하려는 자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그에 합당한 예물을 제공해야 했던 당시의 결혼 풍습을 구실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제안은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결혼 예물대신 골리앗을 이긴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공언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울 왕의 숨은 의도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으로 큰 전공을 올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싸움을 빙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다윗을 죽게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순수한 다윗은 겸손한 태도로 왕의 사위 자리를 사양합니다.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20-23) 사울 왕은 자신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단 결혼을 승낙하여 딸 미갈을 다윗을 잡은 올무로 삼으려 했습니다. 먼저 그 사악한 계획은 신하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합니다. 이렇게 자신은 살짝 빠지고 신하들에게 다윗을 설득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먼저 신하들에게 자기도 다윗이 자기의 사위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슬쩍 말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윗은 가난하고 천한 자신이 어떻게 임금님의 사위가 될 수 있겠냐며 사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24-25) 사울 왕은 다윗의 답변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의 표피 일백 개를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합니다. 왕의 복수를 대신한다는 명분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의 이 같은 요구를 다윗이 이루든 못 이루든, 자신의 정적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책입니다. 실패하면 당연히 다윗은 죽는 것이고 성공하더라도 블레셋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쌓아 다윗을 결국은 죽게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지금 사울처럼 겉으로는 정의를 표방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서, 혹은 어떤 유익과 악한 의도로 말하고 행동하며 전화로 속삭이면서 거룩한 공동체 내에서 고함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이 무엇인가 깊이 성찰해보세요.
시기와 질투의 원인은 바르지 못한 자아개념을 가지고 건전치 못한 비교의식에서 생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조금 나은 것이 발견되면 금방 교만해져서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조금모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열등의식에 빠지고 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험담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투로 인해서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험담을 하고 깎아 내리는 죄를 짓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8:17
맏딸 메랍을...주리니 -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 딸을 주리라고 약속했었다(17:25). 그런데 그 약속은 즉시 지켜지지 않고 상당히 지연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1) 사울의 변덕스런 성격과 (2) 다윗의 연소한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점차 크게 받게되고, 그의 나이도 점차 성숙해지자 이제 그 약속을 더이상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때마침 사울은 자신의 약속도 지킬겸 다윗을 제거시킬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약속 이행을 수행코자 한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 이 말은 딸과 결혼하려는 자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그에 합당한 예물을 제공해야 했던 고대 중근동의 결혼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창 29:15-20, 25-27). 따라서 사울 왕은 그러한 결혼 예물 대신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의 적들과 용맹히 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러한 요구는 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결혼 예물대신 골리앗을 이기는 것 자체로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17:25). 그러므로 사울은 아무런 또다른 조건이나 요구없이 자신의 약속을 이행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고, 반면 다윗은 당연히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명예를 누릴 권리가 있었다(F.R. Fay). 용맹을 내어...싸우라 - 여기의 '용맹을 내어'는 문자적으로 '용사가 되어'란 뜻이다. 사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주문은 그로 말미암아 큰 전과(戰果)를 올리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윗으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장(戰場)에서 죽게끔 하려는 음모에 따른것이었다(13절;삼하 11:14, 23-25). 여호와의 싸움 -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뢰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거룩한 전쟁을 가리킨다(25:28;삼하 5:19-23). 그러나 사울이 다윗에게 주문한 여기서의 전쟁은 다윗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사악하고 간교한 음모에 빙자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결코 '여호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생각하기를 - '마음에 이르기를', '스스로 이르기를' 등과 같은 표현으로, 곧 독백(獨白)이나 심중(心中) 의지를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 어법이다.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대게 하리라 - 지난번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다윗을 죽이려 시도하기도 했지만(10, 11절), 이제 이성(理性)을 되찾자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간교한
=====18:18
내가 누구며...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 다윗의 순수하고 겸손한 이 고백은 사울왕의 간교하고 음흉한 제안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즉 사울이 자기 딸을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획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자신과 아비의 집 신분이 사회.정치적으로 비천하고 무명함을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결국 자신이 골리앗과 싸운 이유가 형들이 오해했듯(17:28) 사울 왕이 내건 명예와 부의 보상에 조금도 유혹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실로 다윗은 이전 자신의 목공의 신분을 사랑했을 뿐, 부마(駙馬)의 신분을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를 들어 왕의 자리에까지 올리우신다.
=====18:19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 이것은 기한적인 의미보다는 여건의 성숙을 뜻하는 표현이다. 즉 당시 다윗은 사울의 표면적 주문대로(17절) 블레셋 족속과 용감히 싸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을 것이다.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준 바 되었더라 - 이같은 사울의 처사는 메랍이 다윗을 사랑하지 아니했기 때문(Keil;20절)이라기 보다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심과 그 자신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기인한 것임이 분명하다(Lange). 어쩌면 사울이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로부터 많은 패물을 제공받았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결혼의 불합리성은 결국 이 결혼이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로써 확증되고 말았다(삼하 21:8). 한편 '므홀랏'(Meholath)은 갈릴리 호수 남방 약 37km 지점의 요단 서쪽 강뚝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Stoebe). 그리고 '아드리엘'(Adriel)은 아람어로는 '아스리엘'(대상 5:24;27:19;렘 36:26)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이다.
=====18:20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 이때는 다윗과 메랍의 결혼이 깨어진 후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인 듯하다. 메랍과 다윗의 결혼이 약속됐을 때만해도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은 아직 결혼 적령기에 도달치 못했을 것이다.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포착했음으로 인하여 기뻐했다는 뜻이다(17, 21절)=====18:21
딸을...주어서...올무가 되게 하고 - 여기서 '올무'(* , 모케쉬)는 '함정에 빠뜨리다', '덫을 놓다'란 뜻의 '야코쉬'(* )에서 파생한 단어로, 곧 짐승을 잡는 '올가미'(noose)또는 코를 꿰는 '갈고리'(hook)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딸을 이용하면서 까지 다윗을 올가미로 덧씌우려는 사울의 간악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18:22
본절은 작은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는 사울 왕의 제안(21절)에 대하여 다윗이 크게 신뢰하지 않았으며, 사울 자신도 다윗이 그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바로 이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맏딸 메랍의 경우(19절)와는 달리 반드시 이해될 것임을 다윗에게 확신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자신의 설득(21절)과 병행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을 설득케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이 사울의 제안을 신뢰하지 않고 탐탁치 않게 여긴 까닭은 분명 (1) 맏딸 메랍의 경우처럼 미갈과의 결혼도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 때문에 성취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으며(19절) (2) 왕의 딸을 데려올 때 왕엥게 지불해야 할 막대한 '폐백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3, 25절).
=====18:23
왕의 사위 되는 것을...경한 일로 보느냐 - 이것은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제적 부담이 뒤따름을 가리키는 말이다(25절). 그러므로 결국 다윗의 이 말은, 메랍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를 사울 왕의 변덕, 사회적 신분의 차이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왕의 사위가 되기에 합당한 막대한 폐백금 지불 능력의 부재(不在)로 인식했음을 암시해 준다.
=====18:25
폐백...양피 일백 - 여기서 '폐백'(* , 모하르)은 '그 아비에게 돈을 주고 아내를 사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마하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근동에서의 '폐백'은 대개 장인의 요구액 만큼을 사위될 자가 현금.재물로 지불하는 것이 통례였다(De Vaux;창 34:12;출 22:16, 17).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장인될 자의 요구에 따라 그외 다른 것으로도 대치할 수 있었다. 다라서 '양피 일백'은 금전.재물이 아닌 노력 봉사로써 '폐백'을 대신할 수도 있었던 고대의 풍습과 잘 부합된다(창 29:15-30;수 15:16;삿 1:12). 그런데 여기 '양피'(陽皮, foreskin)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包皮)를 말하는 것으로서(창 17:11-14), 이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었다(27절).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 사울의 요구대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벧 경우, 그 행위는 곧 블레셋 족속을 할롑받지 못한 족속이라고 모욕하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다윗이 그 일을 행하게 되면 그는 블레셋 족속의 민족적 분노를 사게 될 것임며, 끝내는 군사적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더욱이 양피를 베는 행위는 대외적인 명분이 서는 공식 전쟁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목적을 위해서 수행되는 전투이므로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만 했다. 결국 사울의 이 같은 제안을 자신의 정적(政敵)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기 위한 주도 면밀한 계책이었다.
< 설 교 >
다윗의 여자들
삼상 18장 17-21절 / 이정선목사
결혼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기능을 수행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족관계인데, 전혀 남남이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능이 바로 결혼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정략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략결혼이라는 것이 지배계층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유력한 집안에서 양자를 들이는 것이 유능한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딸이 없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만, 딸이 있으면 사위를 삼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 들었던 동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위기에 처한 왕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게 공주와 결혼하게 하고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절반을 준다는 것은 최고 권력자인 왕이 제안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던 아하수에로 왕은 왕비 에스더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 5:3). 헤롯 왕도 자기 생일 날 의붓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흥을 돋우자 그렇게 말하지요.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막 6:23). 나라의 절반을 준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는 것이지, 정말로 나라의 절반을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나라의 절반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정말로 줄 수 있는 것은 공주와 결혼시켜 주는 것입니다. 왕이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체로 왕이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지만, 딸을 준다는 것은 왕의 가족으로, 로얄 패밀리로 편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벼슬을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왕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공주와 결혼한다는 것이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골리앗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만났을 때, 사울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자기 딸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삼상 17:25). 이것은 모든 백성에게 공포한 사실로서, 일종의 공약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면 두 말할 것 없이 다윗은 사울의 딸과 결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딸을 주고 싶겠어요? 다윗을 죽이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사울은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미끼로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삼상 18:17). 말하자면 전쟁터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터로 내몰아 적군의 손에 죽게 하려는 것이 사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제안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서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삼상 18:18). 남자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딸 데려가는 값으로 돈을 내야 합니다. 서양의 풍습은 신부에게 지참금을 딸려서 신랑에게 보내는데, 근동에서는 신랑이 신부 데려오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지참금을 많이 가져갈 수 있으면 더 좋은 신랑감을 고를 수 있고, 근동에서는 신부 데려오는 값을 많이 낼 수 있어야 더 예쁜 신부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일푼이었던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7년 동안 신부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신부를 데려오는 값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고, 서로의 동의하에 결정하면 됩니다. 재산이나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그래서 계층간의 결혼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왕의 딸을 데려오려면 돈을 많이 내야 할 테니까요. 그것을 아는 사울도 다윗에게 돈 대신 다른 조건을 제시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사울이 깨뜨립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훌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삼상 18: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라는 것은 공주 메랍과 다윗이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요구했던 것처럼 다윗이 공을 많이 세웠을 것이고, 다윗도 사울의 큰딸 메랍과 결혼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메랍을 엉뚱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버린 것입니다. 약혼을 했는데,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사실은 사울이 다윗에게 딸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지만, 아드리엘은 신부 데려가는 값을 많이 내고 메랍과 결혼했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메랍은 어떤 심경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 그것도 왕인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다윗의 아내가 되었어야 할 메랍은 엉뚱하게도 아드리엘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메랍이 평생 다윗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지, 아니면 다윗을 잊고 남편과 행복하게 살았을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만, 그 결혼의 결말은 너무나도 끔찍한 비극으로 끝납니다. 메랍이 낳은 다섯 아들이 모두 복수극의 희생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3년 연속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3년 연속 기근이면 온 나라가 황폐해졌을 것이 뻔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니 여호와께서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의 무죄한 피를 흘린 것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인데,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어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울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모양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원한이 풀리겠느냐고 했더니,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내주어 죽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자손들이 누가 살아 있는지 찾아보니 메랍의 아들들 다섯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두 명과 함께 그 일곱 명이 사울이 흘린 피를 씻기 위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삼하 21:8-9).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극의 씨앗을 심어서는 안 됩니다. 애초에 사울이 약속대로 메랍을 다윗의 아내로 주었더라면 메랍의 아들들이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혹시라도 지금 내 행동이 미래의 비극의 씨앗이 될 것은 없는지 늘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사울은 다윗의 원망과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아주 좋은 해결책이 생겼습니다. 둘째 달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사울은 미갈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는 것이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한 새로운 조건으로 제시되었습니다(삼상 18:25).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는 것은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라는 것인데, 100명을 죽였다는 증거로 100명의 생식기를 잘라오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려고 하다가 다윗이 죽게 되는 것이 사울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기한이 차기 전에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포피 200개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사울이 어쩔 수 없이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도 사울이 요구한 100명이 아니라 200명을 죽일 만큼 이 결혼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고, 다윗도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한 커플이었을 것입니다.
촌구석에서 양이나 치던 소년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 되고, 거기다가 왕의 사위까지 되었으니, 다윗으로서는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은 셈입니다. 백성들의 인기도 하늘을 찌르고, 군대의 장수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았고, 공주를 아내로 얻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동화 같으면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고 이야기가 끝이 나지요. 그런데 사울이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좋아서 딸을 준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실은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였는데, 그만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딸만 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사울에게 또 악신이 찾아왔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집으로 도망쳤고, 사울은 자객을 다윗의 집에 보냈습니다.
공주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얻은 미갈도 행복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그 남편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이에 끼어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를 따르면 남편이 죽게 되고, 남편을 도우면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어느 편을 선택해도 미갈은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면 아내는 참 곤란할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등할 때, 남편들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대체로 어머니 편을 듭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아내한테 원망과 미움을 받게 돼요. 여자들은 대체로 남편 편을 듭니다. 누가 더 잘하는 것 같습니까?
어차피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남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를 선택해야 하고, 여자도 아버지 대신 남편을 선택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이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선택하게 되면 결혼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결혼생활은 한번 어려워지면 회복되기가 힘들어요. 남편이나 아내를 선택하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섭섭해 하시겠지요.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서 결혼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지, 방향을 거꾸로 돌려서 다시 부모에게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내들을 불러서 도망갈 계획을 말합니다. 라반이 지금까지 자기에게 얼마나 부당하게 했는지 말하고, 그래서 이제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라헬과 레아가 그럽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창 31:15). 그러면서 야곱에게 계획대로 도망가자고 합니다. 만약에 아내들이 아버지 편을 들어가지고 반대를 했더라면 야곱이 도망을 갈 수 있겠습니까? 아내의 써포트가 없으면 남자가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자들은 선택을 잘 해요. 남자들이 문제지요.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편을 든다고 하면서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아내의 써포트를 스스로 내버리는 꼴이 되지요. 그렇다고 어머니의 써포트로 인생을 살고 가정을 꾸려나갈 것입니까?
미갈 역시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다윗을 창문으로 달아내려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침대에다 인형을 뉘어놓고 다윗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는 다윗이 병들었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9:12-14). 그렇게 아침까지 시간을 벌어서 다윗이 무사히 도망치도록 한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사랑이 전부입니다. 낙랑공주가 호동왕자의 부탁을 받고 자명고를 찢어서 낙랑이 고구려에 망했다는 이야기는 여자에게는 나라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갈의 사랑이 다윗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미갈과 다윗은 그러나 행복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자가 되었고, 사울은 자기 뜻을 거스른 미갈을 발디라는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버렸습니다(삼상 25:44).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남편을 선택함으로써 남편의 목숨은 구했지만, 남편과 헤어지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미갈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합니다.
한편 다윗은 도망자가 되었지만 자기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아내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미갈은 첫사랑이었습니다. 한시도 미갈을 잊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침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은 유다 지파의 추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과 전쟁을 하는데, 갈수록 이스보셋의 힘은 약해지고 다윗은 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다윗에게 항복을 하겠다고 협상을 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협상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미갈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삼하 3:13). 물론 다윗이 미갈을 데려오라는 것은 사울에 의해 빼앗겼던 자신의 권리, 원래 왕의 사위였던 그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갈을 데려오는데, 남편 발디가 울면서 따라옵니다(삼하 3:15-16). 이것도 참 못 봐줄 비극적인 장면이군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괴롭게 됩니다. 이 발디라는 남자도 얼마나 많은 돈을 내고 미갈을 아내로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다윗이 쫓겨났다고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무리수를 두었으니,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 것도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다시 만난 다윗과 미갈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요,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같이 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같이 지내고 즐겁고 좋은 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미갈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망자로 살면서 다른 아내들을 얻었던 다윗과,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미갈은, 그동안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생겨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를 하지만, 사실 통일이 되어도 큰 문제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나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미갈의 위기였습니다. 함께 동고동락을 한 사람들은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 보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서로 사랑했던 다윗과 미갈은 이제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위기가 마침내 폭발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데, 다윗이 얼마나 좋았던지 온 백성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미갈이 그 꼴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입니다(삼하 6:16).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백성들 앞에서 저 꼴이 뭐냐고요? 미갈로서는 다윗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그토록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자기 성으로 들여오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춤을 추는 것인데, 미갈로서는 그게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고요. 이렇게 다윗과 미갈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미갈은 마음속으로 품었던 그 불만을 다윗에게 쏟아내고 말았습니다(삼하 6:20). 사실 다윗으로서는 미갈이 아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고, 다른 아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미갈이 첫사랑이었고, 목숨을 걸고 블레셋 사람들을 200명이나 죽이고 얻은 첫 번째 아내였고, 미갈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기에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곁에 두고 싶었지만, 이제 미갈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다윗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최후통첩이요, 부부관계의 파경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어요(삼하 6:23). 결국 미갈도 슬픈 인생을 살다 갔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왜 만났을까 싶을 정도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다윗과 미갈도 서로 사랑했지만, 사랑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울이라는 최대의 방해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악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여러분이 선택할 수 없는 비극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련과 난관이 들이닥쳐도 믿음과 지혜로 잘 극복하고 승리해서 아름답고 복된 가정을 다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한 인생
이영무목사 / 삼상 18장 17-19절
우리 전통적인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의 인사는 좀 달라야 할 거 같아요. 여러분은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 왜 내가 복 받은 사람인가?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예수님은 전능자시고 예수님은 힘이 있으시고 여러분의 인생에 동행하시면서 여러분을 도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능력의 한해, 새해의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거스틴에게 어느 날 제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최고의 덕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최고의 덕은 겸손일세.” 라고 말했습니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큰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또 말합니다. “역시 두 번째도 겸손일세.” 제자는 의아스럽다는 눈치로 세 번째 묻습니다. “그럼 세 번째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세 번째도 역시 최고의 덕은 겸손일세.”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믿습니까? 요즘 세태는 어떻습니까? 자기를 많이 들어내는 사람이 남보다 얼굴도 많이 알리고 또 승진도 빨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선주자들도 얼굴을 많이 알리는 사람일수록 인기가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남시장 이재명씨 같은 분은 튀는 발언을 많이 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발언을 해서 인기를 몰려고 해서 그도 정말 잘 몰랐던 분이지만, 요즘 갑자기 이렇게 이름이 오르내리더라고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PR(public relation)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들어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풍조입니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면접할 때, 당신이 이것을 잘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 겸손하게 “저는 그것을 잘 못하는데요.” 라고 대답하면 “그럼 우리 회사에 해당이 안 되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뭐든지 시켜 주십시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드러내고 과장되게 자신을 부풀리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인정해 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인간적인 면 보다는 사람의 능력을 더 중시하는 시대가 현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겸손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퇴보하는 인생의 변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성경에는 어떤 이야기가 소개됩니까? 사울왕이 다윗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을 내 사위로 삼고 싶다. 내 큰 딸 메랍을 자네에게 줄 테니까, 자네가 용기를 다하여서 저 블레셋을 무찌르게!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게. 자네를 내 사위로 삼겠네.’ 이 다윗은 이 놀라운 기회를 사양합니다. “왕이시여, 저는 신분이 너무 밑천하고 저의 집안은 아무 이름도 없는 무명의 집안입니다. 제가 누구며, 저의 집안이 누구입니까? 왕의 사위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겸손하게 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기회가 온다면 이런 기회를 잡겠습니까? 안 잡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에게 20대 청년인데, 이제 회사에 갓 출근을 했는데 사장님이 부르더니 “자네는 아주 능력도 있고 성실해 보여 내 사위로 삼고 싶네!” 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어요. (◌◌◌집사님 같으면 어떤 선택을 하겠어요? 그냥 넙죽 잡겠어요 아니면 일단은 한번 거절해 보시겠어요? 넙죽잡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잘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최은정 집사님한테 혼날까봐 그러지만,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한줄로 내가 압니다.) 여러분 일생에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게 아닙니다.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신분 상승의 기회입니다. 신분 상승의 기회. (우리 최강식 안수집사님이 운영하는 회사의 여직원이 아주 참해서 세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의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다. 그래서 그 여사원이 사장님께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바보가 아닌 한 그는 어찌 보면 유명한 집안의 출신이 아닌데 이제 천재일우의 기회를 왜 놓치려고 하는가? 이런 기회라면 덥석 잡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다윗은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아닐까요? 너무 순수하고 때묻지 않아서 그런 대답을 했을까요? 여러분 요즘 사회 보세요? 행정고시나 사법고시에 생명을 거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량진에 가면 고시학원에 벌써 5년째 10년째 어떤 한 목표를 가지고 달려드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나이가 40이 다 되도 사법고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요? 그걸 위해서 투자했으니까요 ‘내가 검사가 되고 판사가되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는데, 내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다윗의 천한 신분도 문제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왜? 다윗은 이미 골리앗을 무찔렀어요. 그리고 백성들에게 사울왕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뭐 집안이 중요합니까? 현재 인기가 중요한 거지. 인기만 있으면 대통령도 되는 시대인데. 안 그렇습니까? 오늘 다윗은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이 사울의 제안을 사양하게 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바로 하나님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속에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그 다윗은 내가 누구오니까?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무엘상 18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나는 그럴 자격도 없고 나는 그런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그런 명문 집안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살던 시대는 신분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입니다. 양치는 목동은 평민에 불과하고 천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왕족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을 정확하게 다윗은 알 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속에 겸손함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실은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양치는 목동으로도 그는 얼마든지 만족했고 그 생활이 그에게 행복했습니다. 굳이 내가 중앙사회에 나가고 내가 어떤 세상에 나가서 어떤 명예를 얻고, 이런 데는 전혀 욕심이 관심이 없던 젊은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전쟁터에 온 것은 때를 노리다가 달려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터에 오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가 있는 세 형들의 먹을 것을 갖다 주려 전쟁터에 왔다가 그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군대와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사실 다윗의 손에는 칼도 없었습니다. 군복도 없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경험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뛰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무능함을 잘 압니다. 자기가 칼을 훈련했다든가 무애가 뛰어난다든가 이런 것, 다윗은 잘 알아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깐 내가 골리앗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그 순간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 그러니깐 다윗은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중하게 왕의 부마되기를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윗처럼 겸손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부족함을 바로 본 것처럼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런 사람을 이 시대에 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부족을 알고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심을 부어주셔서 그를 위대하게 쓰시는 능력의 하나님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교만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매우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했을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교만이 들어옵니다. 뱀에 의해서 유혹을 받고 결국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인간은 범죄하게 됩니다. 그 범죄 한 결과가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함 때문에 범죄 한 인간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허영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자신을 부풀리고 남에게 앞세우고 그 능력을 쌓습니다. 자신의 스펙을 쌓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어디를 내밀어도 부끄럼 없는 이력서를 만들려고 경쟁하며 자랍니다. 유치원 때부터 남에게 지면 안 되는 거야, 너는 실패자가 되는 거야, 너는 남보다 남보다 뛰어나야해. 이렇게 가정에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경쟁심에 똘똘 뭉쳐서 그리고 자신을 포장하여 누가 물어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너무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만은, 그 원인은 교만과 죄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을 보십시오. 오늘 사울은 어떻습니까? 경쟁심에 똘똘 뭉쳐서 자신보다 잘난 다윗을 보니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를 제거해야 해,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그를 내 쫓아 보내야 해. 이것이 타락한 사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미끼로 해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다윗을 블레셋에 의해서 죽임당하고자 하는 이런 엄청난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이 내용을 모른다면 만약 사울을 칭송했을 것입니다. 보라고, “저 사울왕은 얼마나 위대 하냐, 자기의 사위까지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게 하지 않느냐? 얼마나 훌륭한 왕이냐”라고 사울을 존경합니다. 사울은 그런 계산까지 하는 아주 매우 치밀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교만한 존재가 되고 타락함으로써 지옥으로 빠져 들어갈 때 우리 하나님은 너무 마음이 아프셔서 그래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누추한 몸을 입고, 인간의 누추한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은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진정 겸손의 모델이 되십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대로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보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고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여서 그것을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을 보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세요.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윗을 들어서 위해한 장수가 되게 하고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별은 바로 메시아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베드로전서 5장 6절 말씀을 자막에서 한번 읽어볼까요?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아멘. 그렇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겸손하게 낮췄더니 하나님이 때가 되니 그를 높이 올려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의 이런 제안이 음모인지, 선한 의도인지 간파했을지 안했을지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그것이 좋은 의도로 보았더라도 다윗은 사양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그 제안을 사양함으로써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여인 사울의 딸 메랍과 결혼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왕의 딸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여인과 사는 것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난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 행복이지 아무리 왕의 사위가 된다한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다윗은 겸손함으로 그 함정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피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끼를 던진다고 덥석 물으면 돼요? 안돼요? 안됩니다. 어리석은 고기들은 미끼만 보고 덥석 물었다가 결국은 강태공에게 잡혀가지고 제사상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수많은 미끼들이 존재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돼요. 자신을 볼 줄 알아야 돼요. “아 나는 아직 저런 준비가 안 돼 있어. 난 아직 저런 그릇이 안 돼. 내가 사양해야지.” 그럴 때 그 함정,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나 정도면 저 정도는 돼야지.”하고 덥석 물었다가는 그것이 망하는 길일수도 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다윗만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다윗을 다윗으로만 보았습니다. 다윗 이상으로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다윗은 위대하구나, 참 운이 좋은 젊은이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영적 눈이 닫혀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왜? ‘이 모든 성경은 곧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오늘 성경을 읽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성경을 100독 하고 200독 하고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100독, 200독 한사람은 자칫하면 그것이 자랑이 되고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너는 성경 몇 독 했느냐?” “아유, 집사가 10독도 못해가지고 그게 무슨 집사야. 적어도 나 정도, 100독 정도는 해야지.” 뭐예요? 여러분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성경통독이라면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성경을 100독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더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을 100독 했다면 예수님을 더 닮아서 예수님처럼 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추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인자’라고 말했어요. ‘인자’, ‘sun of man'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물론 다니엘서에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신의 아들 ‘신자’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한번도. 그는 늘 자신을 가리켜서 인자라고 말했어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 물 로 주려 함이라. 인자란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극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아들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은 육체를 입고 계시지만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생존하시는 것은 얼마나 불편 했을까 한번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여러분. 당신의 전능하심을 숨기고 자신의 위대하심을 포기하고 그 화려한 옷을 벗고 인간의 누추한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33년의 생에를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어느 날 하루 사람이 아닌 개로 살아간다면 불편할까요? 편안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죠.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여러분이 하루 종일 개로 살아본다면 개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밥을 제대로 주나, 배고프다고 짖으면 시끄럽다고 두드려 패지, 이 개 팔자가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예요. 여러분 인간이 개가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을 살아가려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여러분 그거 한번 생각해보신적 있으세요? 더더욱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은 어떠한 삶을 사셨어요? 모욕과 조롱과 비난을 늘 체험하셨어요. 심지어 군병들이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어요. 누가 여러분의 머리를 볼펜으로 때리면 참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머리를 갈대로 맞고. 심지어 군병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까지도 뱉었습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왜 그 고난과 모욕을 참으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참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도 위대한데 그분은 우리 대신 그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수치와 모욕과 비난을 몸소 감내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할 때 놀라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었지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을 지나가시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요.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 말씀 같이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칭찬하면서 ‘네가 복이 있다.’라고 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정확히 몰랐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했으나 다 틀린 대답입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네게 그 지혜를 주셨지만 ‘너는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출세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위대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아는 것이 복인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복 받은 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히 아느냐, 그분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 엘리야가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가장 큰 복 중에 복이 영생이 아닙니까? 영원히 사는 복이 얼마나 위대한 복입니까? 그런데 누가 그 복을 차지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그 영생의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정확히 아는 그 사람이 세상의 권세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아멘. 여러분 천주교 가톨릭에서는 ‘누구든지 풀면 풀리고 매면 매일 것이다.’ 라는 말은 교황인 베드로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능력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나의 힘이고 나의 능력이고 나의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가장 겸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만 인간의 누추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다.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교만했던 사울은 결혼을 미끼로 다윗을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다윗의 겸손이 그 위험을 피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다윗도 겸손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빌립보서가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자청해서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이 방치하셨겠습니까? 빌립보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이르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아멘.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높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겸손한 자들을 들어서 올리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이 세대 사람들을 자신을 드러내고 스펙을 쌓길 원합니다. 자랑하길 좋아하고 자신을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해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외모와 능력을 자랑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이 땅에 살지만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겸손을 바라보는 자가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낮아지시고 겸손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성도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숨기면 망할 것 같고 실패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인생을 예수님처럼 존귀와 영광의 관으로 씌워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다시 그를 높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사람들도 지혜로운 자들은 겸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츠빙글리라는 종교개혁자가 있는데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중에 한 동료와 사사건건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서 충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 친구는 왜 나하고 늘 생각이 다를까?’ 이것이 늘 갈등이고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그가 산책을 하다가 조그만 도랑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 도랑에 외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도랑이 꽤 깊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주 날카롭게 생긴 염소 두 마리가 하필이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쳐들고 눈을 째려보면서 전혀 양보할 기세가 아닙니다. ‘아 오늘 재미있는 구경을 보겠구나. 이렇게 둘 다 싸우다가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째려보니 한 마리의 염소가 자리에 딱 엎드리고 바닥에 딱 엎드려서 서 있던 염소가 그 엎드린 염소 등을 밝고 유유히 건너갔습니다. 엎드렸던 염소가 일어나더니 자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츠빙글리가 겸손에 지혜가 있구나! 둘이 맞대응을 하면 둘이 다 물에 빠질텐데. 하나가 겸손히 자신을 낮추니까 다른 사람이 걸어가고 자신도 무사히 다리를 건너갈 수 있었구나. 큰 지혜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겸손한 자를 찾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오산학교에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남의 집의 머슴살이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면 주인이 밤새 사용한 냄새나는 오강을 가져다가 밥그릇처럼 반짝반짝하게 깨끗하게 닦아서 물기 없이 마루위에 올려놨습니다. 매일 그 일을 반복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이 감동을 받습니다. ‘저런 모습은 내가 처음보는구나. 저 친구는 머슴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야.’ 그 주인은 청년에게 돈을 대주었습니다. 평양숭실학교에 중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본에 유학을 보내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와서 오산학교에 선생님이 되고 나중에는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조만식 장로입니다. 언젠가 그의 제자들이 조만식 장로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남의 집 머슴 출신인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학교에 교장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여보게들, 자네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거든 오강을 닦는 사람이 되게나. 오강을 닦는 사람이 되게 나. 그러면 세상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께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오강 닦는 사람이 됩시다.” 누가 오강을 닦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자청해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사회에서 오강을 닦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능력을 주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본 받는 사람은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자신의 능력이 없어도 예수님이 주시는 힘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가난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가 붙잡고 있던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 승리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 충만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나도 그 겸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내 인생을 이끌어가도록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고 연약한 성도를 무시하지 않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며, 주장하지 않는 자로 겸손함으로 새해를 살아가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들어 쓰시고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겸손의 지혜와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한 사랑
이영무목사 / 삼상 18장 20-21절
과거에 우리 조선시대만 해도 연인들의 결혼은 사랑으로 결혼되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좋아하고 깊게 사랑해도 사랑은 결혼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대부들의 가문은 자신의 가문의 유익을 위해 결혼을 이용했습니다. 가문의 유익을 위해 집안의 어른들이 두 청춘 남녀의 그 깊고 애절한 사랑에 상관없이 신분이 같아야 했고 가문이 좋아야 했고 정치적 사상이 같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사랑은 순순함이 점점 사라집니다. 오늘 이 시대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진정성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사울왕은 첫째 딸 메랍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결국 지키지 않았습니다. 진짜 다윗이 자신의 사위가 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시기가 되니 사울은 약속을 깨고 메랍을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아드리엘)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흐르고 사울왕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용기와 백성을 위한 헌신적인 행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왕은 자신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자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진짜 다윗이 좋아서가 아니라 결혼을 미끼로 자신의 적인 다윗을 또 한번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20절입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좋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은 사울왕의 그 숨은 정략적 음모를 소개합니다. 21절입니다.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이미 사울왕은 일찍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결혼을 미끼로 다윗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사울은 정말 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딸의 결혼을 미끼로 삼고 그 딸을 미끼의 재료로 삼고자 하는 파렴치한 아버지였습니다. 자신의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딸이 불행해지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속이 뻔히 드려다 보이는 사울의 제안에 다윗은 절대로 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결혼을 미끼로 삼아 정적인 다윗을 블레셋의 손을 빌어 헤치고자 한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로 다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사울의 정략적인 제안은 또 한번 다윗의 생명을 위협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사울왕의 맏딸 메랍을 통해 사울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위를 삼겠다고 하는지 그 의도를 간파하였습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의도를 몰랐다면 다윗은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울왕은 계속해서 다윗을 결혼을 미끼로 죽이려고 하는데 아무리 미갈의 다윗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결정이 될 수 있습니다. 미갈과 가까이 해서도 안 됩니다. 사울 왕에게 속아서 결혼하면 미갈도 불행해지고 다윗도 죽게 됩니다. 결국 미갈이 다윗을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리고 다윗도 미갈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면 사울왕은 더욱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에 쾌재를 부르게 됩니다.
21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고 말했을 때 다윗을 그 결혼을 반대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다윗은 왜 모든 음모를 간파했으면서도 왜 이 말을 거절하지 않았을까요? 다윗도 정치적인 야망을 가졌기에 사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다윗은 그것이 자신을 묶는 올무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미갈 과의 사랑에 깊이 빠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 안에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도 아니고 자기중심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부어주신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사랑은 변질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이기적인 사랑이 되었습니다. 주는 사랑이 아니라 받고자하는 사랑으로 변해갔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손해 보는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손해 보는 장사만이 아니라 손해 보는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정적 다윗을 제거하려는 사울의 마음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그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 사랑인지 너무나도 잘 압니다. 너무나도 힘든 고비가 있을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왕의 다시 사위가 되어 달라는 그 말에는 분명히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음에도 다윗은 미갈과의 깊어지는 사랑 때문에 미갈과의 사랑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갈과의 사랑은 모두를 다 태워버릴 수 있는 위험한 불장난일 될 수 도 있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그 소문이 왕궁담을 넘어 온 이스라엘에 번져갔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는 다는 소식도 톱뉴스로 전국에 퍼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을 걱정하며 메랍과의 결혼처럼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며 결혼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고 미갈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음에도 미갈과 사랑에 빠지는 다윗의 모습은 오랜만에 들려오는 신선한 사랑의 이야기가 됩니다. 정적의 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위험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애절한 사랑이라고 모든 사람은 감탄합니다. 다윗의 사랑은 거짓이 없는 진정한 사랑이었고 가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앞날만을 위한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미갈만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진짜 사랑이란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자신의 인생이 올무에 걸리고 희생당해야 하는 그 순간에도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의 진실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여줄 그 사랑의 그림자가 됩니다. 다윗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 범죄 하여 죽어가는 우리 인간을 사랑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몰라서 우리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모든 결과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죽어가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다가 죽더라도 개의치 않으시고 인간을 끝까지 사랑해주십니다.
1) 우리 인간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우리 인간의 사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자 그 엄청난 고난을 자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지 절대로 하나님보다 열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에 어떤 어려움과 위기가 와도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적인 완벽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때 유대의 종교지도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비판하고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다 거짓말이라고요.
3) 예수님이 설교할 때나 설교가 끝나면 그들은 주저 없이 공격합니다. 예수님이 설교 중에 망신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설교하면 그 설교가 틀린 것을 증명하면서 악의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설교 때문에 가장 많은 위협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만 심한 고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살려주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에 봉변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날마다 이런 치욕과 모욕의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11절의 말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온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설교하다가 완악한 유대인들이 쳐놓은 올무에 걸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죽이라고 하면 여자는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설교가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설교대로 여자를 살려주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여자는 살고 예수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기로에서 자신이 살고자 선택하지 않습니다. 모든 위험의 부담을 다 감수하시고 예수님은 도박과 같이 보일수도 있는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두가 그 현장을 떠납니다. 그리고 간음한 여자와 예수님만 그곳에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사랑하셔서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잡혀 끌려와 수치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무서워 떨며 울고 있는 가련한 여자에게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간음한 여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 끈질긴 훼방가운데서도 올무에 빠지면서도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잘 나가는 크리스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수와 교제했던 그 애인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불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해서 그를 끝까지 사랑해주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랑은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사랑입니다. 누군가 사랑하면 자신의 희생이 따라야하고 위험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처음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 죄인 된 인간을 위하여 자신이 대신 죽어야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죄인 된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변치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유익을 사랑하는 자로 타락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사랑의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짐승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자신만 사랑하는 자로 변했습니다.
2) 이렇게 인간들이 변해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고 만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끊임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3) 다윗은 미갈과 결혼하고 이후 수년 후에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미갈을 다른 곳으로 재혼시켰습니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다윗이 중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다시 미갈을 찾아내어 자신의 왕궁에 불러들이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은 군인이었지만 사랑에 있어서만은 모든 정적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을 했습니다.
4) 우리 인간은 사랑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 도구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이 올무에 걸려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의 그 숭고한 그 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죄인을 위해 자신은 죽음에 이르고 사랑하는 자를 살리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꼭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배우게 되면 예수님처럼 사랑하려고 하는 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란 누구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이익이 되면 사랑하고 이익이 안 되면 사랑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이후에 자신이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사랑으로 남을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1) 우리 성도들도 때때로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성도의 마음이 세상의 탐욕스런 사랑으로 채워지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합니다.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의 사랑으로 무장해서 이기적인 본성으로 남을 괴롭히고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2)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 거룩한 성도가 되고 예수님의 성도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3)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교회에도 가정에도 직장에도 사랑이 넘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서로의 허물도 단점도 덮어주고 가려주는 자로 인해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랑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이기적인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선택하겠습니까?
4) 다윗과 같이 미갈을 사랑하는 것이 올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다윗의 인격이 훌륭하거나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다윗이 올무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미갈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 사랑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가 그런 진실한 사랑을 이웃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5) 그러나 예수님의 그 사랑의 깊은 맛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교회에서도 사자와 같이 무서운 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아는 자는 항상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과 날마다 처절하게 싸우면서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세상적인 사랑이 자신 안에 머물지 않도록 예수님의 영으로 세상과 싸웁니다. 이런 성도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에 충만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기둥이 되고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6) 우리의 사랑은 현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수많은 성도들은 오늘도 주방의 식기를 닦고 교회를 청소하고 바로 내세에서, 천국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고 예수님의 몸을 씻어 드리는 상급과 복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힘들고 어려운 저 식당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모든 분들은 예수님에게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내세에 복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와서 식사하고 가시면서 말했습니다. “이 교회 남자들이 식기 닦는 것 참 보기 좋습니다.” 우리 교회는 남신도 또는 장로님들이 식기를 닦습니다. 그것을 닦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면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오직 내 마음에 가득차고 내 삶에 가득차서 만나는 모든 자에게 내안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요?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읽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생명양식으로 읽으십시오. 그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성경을 읽고 또 묵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에 베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몸에 베여있는 성도들로서 그런 가르침이 성경에 다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히 우리 몸에 베여지는 그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예수님처럼 말하고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야 합니다. 우리는 결단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면 마귀는 제일 싫어합니다. 마귀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마귀가 좋아하지 않고 예배를 드려도 마귀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게 됩니다. 마귀는 싫어하고 마귀는 우리 인생에서 종적을 감춥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그 충만한 사랑으로 진실한 사랑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한주간도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면서 우리 가정에, 민족에, 열방에 그 사랑을 흘러 보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존귀한 인생
삼상 18장 22~23절 / 이영무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어 합니다. 이왕이면 존귀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성공을 위해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어느 순간에 자신을 결정적인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성공한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싶어 하고 권력자들과 교제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성공한 사람들은 높이 올라가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만 해도 에스컬레이터(신분상승)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주식투자의 귀재인 “워렌 버핏”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현존하는 주식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 투자의 귀재에게 한수 가르침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2000년부터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3시간+몇명을 대동하는 것도 가능)를 경매에 부쳤습니다. 작년 점심식사 경매가 346만달러(약40억3400만원)에 낙찰되었습니다. 40억을 식사 한 끼에 투자해서라도 투자의 정보를 얻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워렌 버핏”은 그 동안 식사경매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 200억이 넘는데 그 돈을 전량 자선단체에 기부해왔습니다.
혹시 저와의 식사에 100만원을 투자할 분이 없습니까?(10만원도 괜찮습니다.) 무엇인가 신앙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저한테서는 별로 얻을 정보가 없다고 생각해서 투자할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도 자선단체에 기부할 마음이 있는데요?
사람들은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가 자신이 높아지고 자신이 잘되는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성공한 사람과는 시간을 내서 만나고 싶어 하지만 어릴 적 친구가 천하고 보잘 것 없다면 그런 친구를 위해 시간을 내어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 역행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왕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다윗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둘째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다윗을 제거 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22절입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은 자신의 최 측근들에게 자신이 다윗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모든 신하들 역시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거짓말을 다윗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진심이 아닌 거짓을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신하들이 전하여준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낮고 천한자이기에 사울 왕의 사위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23절입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왜 다윗은 신하들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가난하고 천하다는 말을 조금도 숨김없이 거침없이 하였을까요? 아무리 자신의 집안이 가난해도 천해도 지금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입니다.
비록 천하고 가난한 자 일지라도 혼사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다윗은 왜 자신을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낮추어 말합니까? 자신의 가난함과 미천함을 굳이 밝혀야 했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오히려 숨기려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다윗은 사울왕의 의도를 정확히 알았기에 자신이 올무에 빠지지 않으려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었던 것일까요? 다윗의 마음은 높아지려는 야망은 있는데 다윗 자신이 왕의 술수와 궤계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은 정치에 있어서는 사울왕보다 더 고단수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이 던진 미끼에 빠지지 않도록 솔직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답변하게 하십니다.
1) 사울왕의 의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기뻐하고 신하들은 다윗을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하면 다윗은 자신이 왕궁에서 존귀한 자라고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사위로 맞이하려는 것으로 착각하여 매우 높아진(왕의 사위가된)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기뻐하며 자만에 빠지고 만족하고 권력에 취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되면 사울왕이 어떤 일을 시켜도 그 일에 대한 경계심이 아니라 충성심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사울왕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위까지 희생시키는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울로서는 전쟁에 내보내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는다면 일거양득입니다.
- 이런 사울의 정적 제거 기법에 다윗은 속아 넘어가야 하고 다윗은 사울의 의도를 모른 채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이 모든 사울의 음모를 다윗이 알았기에 자신을 낮고 천한자라고 점잖게 정중하게 사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은 사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큰 권세를 얻고자 자신을 일부러 천하다고 낮추는 권모술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 둘째 공주인 미갈과 결혼해서 왕궁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는 야망가가 아니었습니다.
- 만약 다윗이 정치 권력에 맛을 들였다면 결국 백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3) 다윗은 권세 지향적인 자가 아니기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신하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다윗은 가식 없는 자였고 자신의 처지를 이용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또 자신의 처지를 불편해하며 숨기려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 다윗은 솔직히 자신의 처지가 왕의 사위가 될 만 한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밝혔습니다.
- 왜냐하면 다윗은 권세와 높아지려는 본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은 이런 부분은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렀던 것보다 더 훌륭한 태도였습니다.
- 혼사에 대한 다윗의 분명하고 솔직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감 없이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더 사랑하셨고 후에 그를 더 존귀한 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다윗만큼 훌륭한 왕을 우리는 아직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 다윗은 사울왕이 던진 미끼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왕의 사위가 되고 싶어서 미갈 과의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미갈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의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 사울왕은 자신과 자신의 신하들이 권력지향적인 해바라기성 인물들인지라 다윗도 그러하리라 짐작했지만 다윗은 결혼을 이용해서 그런 권력이나 신분상승을 꽤하려는 저급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5) 사기를 당하려면 일천만원을 투자하면 세달 후에 2천만원이 된다는 말에 유혹을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유혹에 넘어가면 사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사기란 욕심을 갖고 있는 자가 돈의 유혹을 느끼면 사기를 당합니다. 그러나 사기를 치려고 해도 욕심이 없고 유혹을 느끼지 않으면 아무리 천하의 사기꾼이라도 사기를 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 사기의 모든 근원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 사울왕은 왕의 사위라는 존귀한 자리로 다윗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다윗 자신은 비천한자고 왕의 사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인정하면서 사울과 신하들의 모든 술수와 궤계를 물리칩니다.
6) 이번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사울의 신하들조차도 다윗은 사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매우 순수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다윗을 더욱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다윗은 왕궁밖의 백성들에게만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울의 신하들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울왕은 더욱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 같이 천한 존재로 떨어졌습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창조한 흔적은 남아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욕망은 짐승의 수준으로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 천한 인생을 살아야 하고 죽어서도 지옥으로 떨어져야 하는 천한 영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 많고 더러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존귀한 인간이 되도록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 예수님의 의로 다시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끊임없는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다시 존귀한 존재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가난함과 비천함을 밝히는 다윗의 모습은 다윗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다윗의 모습은 바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낮추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크고 화려하고 높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주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기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가장 낮고 천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나사렛은 지금으로 말하면 유대인에게 달동네 같은 곳입니다. 갈릴리 나사렛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해서 밭도 돈도 없이 사는 천박한 지역으로 사람들은 무시당했습니다. 가난하고 천해서 버림받은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나사렛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역에서 공생애 직전까지 거주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낮고 보잘 것 없고 천하고 가난한 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아무 권세도 없는 비천한 곳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그 모습은 정복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대신 죽어야할 자신을 낮추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소리를 외치는데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폈습니다. 그런 행위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함께 찬양하기보다 분노했습니다. 천하고 천한 저 갈릴리 출신 예수가 예루살렘 출신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저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예수님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환영은 예루살렘 출신의 종교지도자들이 받아야 하는데 천하고 천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이 환영을 받으니 그들은 속이 상하고 분노했습니다.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저가 도대체 누구냐?” 마태복음 21장 10~11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물어본 것은 예수님을 망신 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천한 출신인가를 확인시켜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이 얼마나 천한지 보잘 것이 없는지 무리들에게 주입시켰습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망신주고 헐뜯는 일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자신을 낮추어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5절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우리 예수님은 이 죽어가는 땅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귀한 왕으로 이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십니다. 세상의 존귀한 왕이라면 어떤 모습으로 입성하실까요? 아마도 가장 화려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입성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황금마차를 탄 것도 아니고 화려한 백마를 탄 것도 아니고 고작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나귀새끼는 누가 보아도 존귀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타는 것이 나귀입니다. 그런 나귀새끼를 존귀하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우리 예수님이 별 볼일 없는 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존귀하게 포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존귀하게 입성을 하지 못해도 백성은 알아보고 나뭇가지를 들고 겉옷을 펴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했습니다. 백성들이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높이는 것은 모든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살려주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존귀해 지기 위해서 자신을 세상의 왕들처럼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존귀해지기 위해 화려한 왕복을 입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에게는 가장 존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존귀함은 그의 겉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귀함은 그분의 고귀한 사역이었고 그분의 숭고한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지만은 이 땅에서 가장 죄 많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천한 자들을 가까이 했던 바로 그 부분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하였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존귀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고 발악을 하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가까이 하심으로 가장 존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존귀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귀한 보석과 인맥과 학력을 가지고 마냥 자신을 존귀한 것으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가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님은 이미 존귀한 삶을 사셨고 존귀한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더 이상 존귀해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그분의 존귀함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학위나 권력, 명예, 부귀를 얻어서 자신의 존귀함을 들어내려고 합니다. 예전의 한 기업가가 국회의원 정치인 검찰과 가까워지려다가 나중에 존귀케 되기는커녕 자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존귀한 자들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자들의 결말은 실망으로 비통함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존귀한 자로서 자신의 존귀함을 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자들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비통해하지 않습니다. 배신으로 인하여 아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세상의 존귀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예수님의 존귀함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채워짐으로 우리도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존귀함으로 가장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멀리하면 우리는 존귀함에서 멀어집니다. 세상 권력자들과 가까이하면 우리가 들었던 자살한 기업인처럼 뼈아픈 배신으로 인해 후회와 아픔이 우리 삶속에 홍수같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간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 누구와 만나야 하고 가까워 져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돈 있는 자나 힘 있는 자와 가까워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워지려면 이 땅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들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그들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려고 노력할 때에 오히려 우리는 반대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낮추어야 하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아래로 더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낮은 데로 내려간다고 해도 심지어 천한 자들로 우리의 친구를 삼는 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시면 하루 아침에 존귀한 인생이 되고 하루 아침에 높아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높아지는 것을 지향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교회에서 영혼이 병들고 마음이 아픈 자들에게로 향하여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찾아가는 사람이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이런 자는 하찮은 사업을 해도 예수님께는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이런 자의 자녀는 좋은 학벌이 있든 없든 예수님께서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은 학벌, 배경 없이 존귀한 자가 될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 없이 언제든지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천하든지 귀하든지 남은 인생을 다 존귀한 자로 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비천하게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가장 존귀한 자가 되어 가장 존귀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낮고 천한 자들로 다 친구를 삼으면 예수님처럼 존귀한 자가 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한 자와 가까워지기 전에 반드시 예수님과 먼저 가까워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잘 기록된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로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예수님을 성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학력과 인맥과 돈과 권력이 없어도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만들어주시면 청소부라고 할지라도 주변에서 존경받는 자가 됩니다. 시장에서 순대를 팔아도 주변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됩니다.
존귀하게 대려고 대제사장이 될 필요도 없고 교황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존귀한 인생이 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존귀한 자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지만 예수님이 인정하는 존귀한 자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 해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찾고 구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죽어서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존귀한 인생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겸손을 체질화하고 인격화해야 합니다
삼상 18:17-30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사울의 집요한 다윗 살해 음모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17절에 사울은 다윗에게 “맏딸 메랍을 아내로 줄테니 블레셋과 싸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라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그럴듯한 표면상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당시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 죽게 하려는 사울의 계략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표면상의 이유, 곧 명분이 좋다고 해서 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좋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명분이 개인의 사욕에서 비롯된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성도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명분을 내세워 헌금을 강요하거나 다른 교회의 성도를 자기 교회에 출석하게 하는 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정치인은 지역 주민을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뇌물을 받거나 자기의 이익을 취하다가 발각되어 언론에 보도됩니다.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좋은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그 명분이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분이 있으면 설사 그 일이 악한 일일지라도 과감하게 진행하고, 명분이 없으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랜 유교의 전통을 가진 우리 사회에서는 체면과 명분을 최고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명분만을 보고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명분이 사람이 세운 것인지 하나님의 선한 뜻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불의한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사울의 모습을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신앙과 삶의 명분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인지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8절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신 이유에 대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민족의 영웅이자 구원자였습니다. 그리고 17:25에서, 사울은 이미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자신의 딸을 주어 부마로 삼고,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의 딸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부마로 삼아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이것은 다윗이 사울의 간계를 피하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사울이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때, 사울에게 가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항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의 몸에 늘 겸손함이 배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겸손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인격화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겸손한 그를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고 큰일을 행한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겸손한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어 겸손이 몸에 밴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신다면, 다윗처럼 겸손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도록 늘 힘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무엇을 갖추기 전에 먼저 겸손을 갖추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0절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21절 이하에 자기 딸의 사랑조차도 죄를 짓는 방편으로 이용합니다. 사울은 이미 양심이 마비되어 죄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사울을 지배하고 노예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짓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그 죄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22절에 사울은 다윗에게 “모든 신하가 너를 사랑하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8절에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이쯤 되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오히려 신하들 앞에서 다윗 죽이는 일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29절에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게 된 사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들도 사랑하는 다윗을 끝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영안이 가려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높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일단 영안이 가려지만 사울처럼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자신만 못보게 됩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도 꼭 죽을 꾀를 냅니다. 머리를 쓴다고 쓰는데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속셈을 다 알아채도록 씁니다. 그래서 망하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다윗은 30절에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을 체질화하고 인격화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불의한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사울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윗처럼 겸손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도록 늘 힘쓰시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일꾼으로서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하여 날마다 선한 열매를 맺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삼상 18장 17-30절 / 코너스턴장로교회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서 매번 승리했습니다. 이에 다윗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고,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신망도 커져갔습니다. 하루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말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사울이 죽인 사람은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수만 명이다!”가 됩니다. 여인들이 부른 이 노랫소리가 사울의 마음을 몹시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이라더니 내게는 고작 수천 명뿐이라는구나. 그가 더 가질 것은 이제 이 나라밖에 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사울은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어떻게 하면 다윗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사울의 충성스러운 신하고, 뛰어난 장수인데 사울이 그만 다윗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버려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다윗을 죽일 수 있는 방법으로 다윗에게 자기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습니다. 대신 이 결혼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공적을 쌓아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의 격렬한 전투 중에 죽게 되면,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다윗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검은 속내를 감춘 채, 사울은 다윗을 위하는 척 거짓 행동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삼상 18: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다윗 여호와를 위하여 블레셋과 싸우십시오!” 이렇게 사울은 다윗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서 선동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만일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한 종 다윗이 출전하기를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을 사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은 손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다윗이 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딸 메랍까지도 수단과 도구로 활용하려 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탐욕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수단화하고 도구화 합니다.
사실 이전에 사울은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자는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보상을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에게 그의 딸을 주지 않음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왕의 사위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주장하며, 다윗에게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이면 그 때는 진정으로 왕의 사위가 것을 제안한 것이죠. 사울의 검은 속내가 담긴 제안을 들은 다윗은 세 가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첫째, 자신은 능력이 작은 자이다. 둘째, 자신의 지나온 삶을 보면 작은 사람이다. 셋째, 자신의 가문도 작은 가문이다. “내가 누구며”, “나의 삶이 무엇이며”,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로 자신은 왕의 사위가 될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의 딸 메랍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지금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빠트리려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겸손함이 사울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죠.
이후 사울은 자신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사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구실 삼아 다윗을 죽일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다윗을 치게 만들려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또 다시 자신의 사위가 될 기회를 제안하였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자신은 가난하고 비천하여 왕의 사위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고 답변했습니다. 다윗의 말을 다른 이를 통해 전해들은 사울은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 사람 일백 명을 죽이고 그 포피를 증거로 가져오는 것을 신부값으로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와 같은 제안을 통해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가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죠. 그러나 사울의 예상과 다르게 다윗은 사울이 요구한 것보다 2배나 많은 이백개의 포피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함을 증명했으며, 하나님은 사울 왕의 간사한 계획을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사울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하고 계심을 또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고,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 염려하여 다윗을 자신의 평생 원수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다윗은 사울의 모든 신하들 중 가장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다윗의 이름은 매우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다윗을 두려워한 사울은, 그만 질투심과 시기에 눈이 멀어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사울은 자신을 가장 아껴주는 다윗과 원수가 되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세워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가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높여 주시고 많은 이들 가운데 으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울과 같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죄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존귀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께는 높여 주십니다. 코의 호흡이 끊기면 사라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영혼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결혼
삼상 18:17-30 /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다윗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사울의 불신실
사울은 골리앗을 이긴 군사에게 딸을 준다고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딸을 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물을 준다 하였지만 그것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삼상 18:17) '내 맏딸 메랍을 네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하라'라고 말합니다. 참 뻔뻔합니다. 불신실합니다. 다윗에게 딸을 마땅히 주었어야 하는데 여전히 주지 않았으면서 다시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딸과의 결혼이라는 조건을 골리앗을 무찌르는데 이용하였고 이번에는 다윗을 죽이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용만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또 약속을 어겼습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삼상 18:19)
다윗은 사울이 내건 조건에 합당하게 열심히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두 번이나 약속했던 자신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삼상 18:21)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고도 또 다시 다윗에게 약속을 말합니다. 이전에 자신이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사과도 없습니다. 본래는 이전에 자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둘째 딸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어떤 조건을 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또 조건을 다는 것은 그가 이전에 한 약속에 대해 전혀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실하지 못한 모습이고 악한 모습입니다.
사울이 둘째 딸을 주겠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윗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딸을 이용하였습니다. 딸의 사랑과 다윗의 신실함을 이용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이 신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신실함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합니다. 불신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2. 다윗의 신실함
사울의 제안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응답하는 다윗은 신실하였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삼상 18:23)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실제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큰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빈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결혼을 위해서는 신랑이 내야 하는 돈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지불할 돈이 없음을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결혼에 대해 빈말이 아니라 신실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삼상 18:25)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과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마 다윗은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힘을 다하여 신실하게 행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원한 것보다 더 많이 행했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삼상 18:27)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에게 드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포피 100개를 원하였으나 다윗은 200개를 드렸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실을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신실하게 행합니다.
다윗의 경우 사울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약속을 두 번이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전의 것에 대해 신실을 요구하며 자신이 신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전의 사울의 신실하지 못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비신실함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행해야 하는 신실을 끝싸지 지켰습니다.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다윗은 미갈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신실함으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비신실함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세상의 불신실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닮아 불신실함을 따라가지 말고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삼상 18: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신실한 모습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사울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신실하지 못하였으면 서로 싸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진흙탕 싸움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를 탓하는 진흙탕 싸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신실함으로 불신실함과 신실함의 싸움이 되었고 신실함이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드러났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라고 말합니다. 신실함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실할 떄 사랑스럽습니다. 신실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변심과 거짓에 편승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다윗처럼 언제나 늘 신실해야 합니다.
다윗이 결혼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 과정에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습니다. 결혼을 자신의 정적인 다윗을 죽이는데 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신실하였습니다. 사울의 불신실함에 불신실함으로 대하지 않았고 신실함으로 대하였습니다. 그것을 신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떄 약속을 지키십시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우리가 약속을 어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끝까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신실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니 우리도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