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의 눈동자 (외 3편)
손택수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은 위험인물은 아니다 더 좋은 노동조건을 위해 쟁의를 하는 사람도 결국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속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루종일 구름이나 보고 할일 없이 떠도는 그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소유의 욕망 없이도 저리 똑똑하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 혼자서 중얼거리는 행인들로 가득찬 지하철역에서도 그의 중얼거림만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 허공을 향해 중얼중얼 말풍선을 불듯 심리 상담과 힐링과 명상이 네온 간판으로 휘황하게 점멸하는 거리 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찼다.
눈물 봉분 —동탄 5
신춘 등과 스무 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관직을 제수받고 사은숙배한 뒤 화성도 동탄 돌모루 왕릉으로 왔다 왕릉은 왕릉인데 눈물의 왕*을 모신 누릉(淚陵)인지라 낯선 타지에서 눈물깨나 쏟을 것이라고 다들 고개를 흔들었으나 죽음을 마주하는 청직을 어찌 사양할 수 있을까 미관말직이긴 해도 함께 온 능졸이 불쌍놈 같은 허우대와는 달리 그 심성이 딴은 심산유곡처럼 깊은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적잖이 의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실 우리는 싯줄이나 읊으며 떠돌면서 경화사족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질시하며 미천한 신세타령을 함께한 도반으로서 눈물만큼은 그 누구보다 곡진하게 흘려본 내력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능역에 들어선 문학관 맞은편엔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러브호텔과 룸살롱과 주점이 즐비하고, 문학관 뒤편엔 나지막하지만 새소리 깊게 울리는 오솔길을 품은 산이 어깨를 내어주고 있다 문학관을 제실로 하여 밤이면 도로를 건너다 골절상을 당하는 풀벌레 소리를 받아 적고, 주점을 헤치고 검은 도로를 건너오는 사람들의 참배를 기다린다 더러는 폐차 직전의 나귀를 타고 덜덜덜 남향도호부 매향까지 가서 신도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능졸이나 나나 허술한 데가 많아 근방의 호족들 서리배들로부터 수차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눈물을 봉분으로 섬기는 일에 어찌 소홀함이 있을까 오호라 종구품 움직인들 어떠랴 눈물을 고배율 렌즈처럼 닦아 하늘을 보자꾸나 경술년 중추절 앞 벌초를 하고 내려오는 잠시 몸에 밴 풀내를 따라오는 나비 날개를 능참봉 견장처럼 슬쩍 달아도 보았던가
* 노작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순간의 발행인
나는 순간의 발행인,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소리로 공기를 떨게 하여 고막을 때렸을 때를 기억하지
공기는 물방울처럼 떨다가 귓속을 찰랑거렸다네 그 소리가 가장 잘 울릴 수 있도록 우물처럼 깊어지던 귀, 그 귓속에선 오직 듣는 일 하나만으로도 충만할 줄 알았지
사과, 하면 사과즙이 흘렀고 배, 하면 배꽃이 피던 그때 나도 공기가 되어 진동했지 사라져가는 소리들을 붙들고 싶어서 사라지게 그냥 내버려둘 줄 알았지
공기는 아무것도 기록하질 않지 허공이 성대가 되도록, 바람이 혀가 되도록, 입술 모양만 봐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눈도 팔도 머리카락도 살갗도 다 소리를 위해 집중하지
그뿐이라네 나는 매 순간 마감에 쫓기며 살지 구름을 인터뷰하고 후박나무 잎사귀를 치는 빗소리와 막 귀향한 천 년 전의 바람으로 특집란을 꾸리지 계간도 월간도 주간도 일간도 다 순간으로 하지
잡지박물관에도 도서관 정기열람실에도 아직 입주하지 못했지만 나는 또 한 순간의 열렬한 독자, 순간을 정기 구독한다는 건 하루 중 아니 한 달 중 잠시라도 내 숨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라네
가끔씩은 펜을 놓고 소리를 내어보지 허공 속에 발행한 페이지를 위하여 어쩌면 저 공기 속에 오래전에 떠나보낸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고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2022.10 ---------------------- 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