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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었다. 아니, 그 순간의 변덕이 옳다.
<랜덤채팅방에 입장 하셨습니다>
-당신 : 하이
-누군가 : 하이
-당신 : 몇 살?
-누군가 : 19. 그쪽은
-당신 : 21
-누군가 : 남자여자?
-당신 : 원하는 쪽으로?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채팅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마우스에 손을 가져간 순간-
-누군가 : 난 남자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당신 : 여자라고 해둘게
-누군가 : 좋을 대로
-당신 : 고3?
-누군가 : 응
-당신 : 공부 안 해?
-누군가 : 안 해
-당신 : 왜?
또 상대방이 침묵한다. 하지만 이번엔 인내심 있게 기다려본다.
-누군가 : 별로
-당신 : 고민 있으면 말해봐
-누군가 : 싫어
-당신 : 뭐 어때 오늘 지나면 모르는 사이잖아
그래. 난 그래서 이 랜덤채팅을 좋아한다. 변태 같은 자식들이 좀 많아서 그렇지 생각 없이 들어와 우연히 마음 맞는 상대라도 만나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꽤 스트레스가 풀리곤 하니까.
-누군가 : 헤어졌어
-당신 : 여자 친구랑?
-누군가 : 응
-당신 : 왜?
-누군가 : 내가 지를 안 좋아하는 것 같대
-당신 : 좋아했어?
-누군가 : 글쎄
-당신 : 슬퍼?
-누군가 : 아니
근데 왜 고민스러운 걸까? 정말 사랑하던 상대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면서
-당신 : 왜 고민 하는 거야?
-누군가 : 잘해줬다고 생각 했어
-당신 : 응
-누군가 : 근데 다들 언제나 때가 되면 헤어지자고 해
피식 한번 웃는다. 나랑 두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 이 어린놈은 지금 사랑이 뭔지 몰라요- 하고 있다.
-당신 : 네가 좋아하지 않으니까
-누군가 : 그게 중요해?
-누군가 : 난 그래도 남자 친구로서 최선을 다했는데
-누군가 : 좋아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들이랑은 차이를 분명히 두고 소중히 해줬는데?
-당신 : 연애는 둘이서 하는 거야
-누군가 :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신 : 연애는 겉모습만 사귀는 것 같이 연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구
-누군가 : 그럼?
-당신 : 상호간의 감정교류가 필요한 일이지.
-누군가 : 감정교류??
-당신 : 네가 그 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 애는 느끼고 있었던 거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 : 그리고 자신이 널 좋아하는 만큼 보답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힘들었던 거야 그 애는.
어린애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내가 하기 민망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애타는 사랑한번 못해본 어리숙 한 꼬맹이다.
-누군가 : 잘 모르겠어. 왜 그렇게 어려운거야?
-당신 : 그러게.
-누군가 : 당신은 그런 연애를 했어?
했었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당신 :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픈 게 사랑이 맞다면.
-누군가 : 해 봤구나…
-당신 : 걱정 마. 고민 할 필요 없어
-누군가 : 응?
-당신 : 네가 원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 너도 모르는 새 네 마음을 사로잡을 이가 생길 테니.
-누군가 : 나도 모르는 새?
-당신 : 그래
-누군가 : 정말 그럴까?
-당신 : 그래… 그땐 정말 예쁘게 사귀어. 그럼 되는 거야.
-누군가 : 너는?
난?
-누군가 : 지금도 마음 아픈 넌? 또 그런 사람이 생겨?
…….
-누군가 : 너도 잊고 기다릴 거야?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글쎄.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픈 이 순간이 끝나면… 생각해봐야하겠지? 꼬마야.
-당신 : 자. 고등학생은 잘 시간이다
-누군가 : 아직 1시 밖에 안됐어
-당신 : 고등어는 자고도 남을 시간이지
-누군가 : 두 살밖에 차이 안나
-당신 : 난 성인이지.
-누군가 : …
-당신 : 나도 피곤해. 오늘 대화 유익했어. 안녕
창을 끄려는 순간 새로운 말이 올라온다.
-누군가 : 계속 연락하고 싶어
…….
-누군가 : 알려줘. 계속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래서. 어린놈들은 무섭다.
-누군가 : 좀 더 알고 싶어.
무엇을? 네가 모르는 사랑을?
-당신 : ps-soo. msn이야
-누군가 : 아…
-당신 : 그럼.
왜 선뜻 알려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도 궁금했는지 모른다. 내가 실패한 사랑을, 이 어린 꼬마가 상상하는 그대로, 생각만큼 달짝지근한 사랑을 얻어낼 것인가. 그래. 그게 궁금하다.
한 달이 지났다. 마치 바로 그 다음날이라도 말을 걸 것 같았던 그 녀석은 자취를 감췄다. 물론 기다린 건 아니었다. 나 역시도 나름 중간고사를 지나면서 바쁘게 보냈다. 조별과제라던가 레포트 덕에 컴퓨터를 하는 시간은 많았지만 그 녀석에게 알려준 메신저주소는 내가 주로 쓰는 메신저가 아니었기에 동기들과 상의하기 위해 수시로 접속하는 메신저와는 별개로 거의 들어 가보지도 못했다. 한번 생각나 접속해봤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친구추가라던가 쪽지라던지….
그리고 오늘. 그 아이와 처음 대화했던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다. 시험이 끝나고 홈 커밍 데이다 뭐다 바쁜 동아리행사까지 모두 마친 뒤 오늘은 친구들과 간만에 느긋하게 한잔 나눴다. 그리고 느즈막이 자취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새벽 두시다.
별 생각 없이 메신저에 접속하던 나는 문득 그 애 생각이 났다. 그래서 msn에도 같이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그리곤 인터넷 창을 켜서 메일을 확인한 뒤 다시 메신저 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sjh1224@msn.com' 님께서 친구요청을 하셨습니다]
이 계정에서 보는 오랜만의 친구추가였다.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을 누르고 다른 작업을 하려는데 ‘띠링’ 하고 컴퓨터가 울리더니 대화창이 뜬다.
-지후 : 오랜만이네
지후라… 본명일까? 닉네임을 본명으로 하는 녀석도 있나.
-바쁨 : 네가… 그?
-지후 : 응
-바쁨 : 지금 새벽 두시야
술기운이 돈다. 제법 마신 양이 꽤 되는지라 멀쩡히 타자치고 있을만한 여유는 없다.
-지후 : 기다렸어
-바쁨 : 나를?
-지후 : 응.
-바쁨 : 한 달 동안 뭐하다
-지후 : 나 기다렸어?
내가 왜.
-지후 : 계속 생각 했었어
-바쁨 : 뭘?
-지후 ; 네가 한말
사랑?
-지후 : 그런데. 아직 모르겠어
-지후 : 또 헤어졌어
…….
-지후 : 이번에도 물어봤어. 근데
-지후 : 똑같아. 나한테 자신이 도대체 무슨 존재냐고 묻더라.
이 꼬마….
-지후 : 네가 한말 열심히 생각했어. 그래서
-지후 : 이번엔 내가 먼저 고백 했어
이건 또 의외다
-지후 : 보고 있어?
-바쁨 : 응
내가 조용하자 불안했는지 묻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왠지 모르게… 상대방의 표정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왜일까.
-지후 : 너랑 얘기하고 나서 만났는데 괜찮았어. 맘에 들었어
-지후 : 그래서 사귀자고 했어
-지후 : 달라질 줄 알았어. 근데…
-바쁨 : 아니었어?
-지후 : 모르겠어. 그치만 적어도 네가 말한 두근거림은 없었어
감히 이 상대에 대해 추측하건대 꽤나 얼굴이 잘생긴 모양이다. 이런 미성숙한 정신을 가지고도 여자가 끊이질 않는다니. 게다가 사귀자고 말 한번 건넸는데 냉큼 사귀어?
-지후 : 그래서 널 기다렸어
-바쁨 : 걔랑 잘되면 난 생각도 안 났겠지?
이런. 무심코 본심이 나갔다.
-지후 : 무슨 뜻이야?
-바쁨 : 아냐
-지후 : 무슨 뜻이야
-바쁨 : 날 왜 기다렸어
-지후 : 무슨 뜻이냐니까
호오. 그 꼬마 제법 고집 피울 줄 안다.
-바쁨 : 사랑이 궁금하지 않으면 내게 말 걸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거야
내말에 대답이 없다. 뭐, 그렇지 않겠는가. 단 한번 만난,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다. 연락하든 말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저 잊어버리면 그만.
-지후 : 그럴지도
상큼하게 대답하는 고등어 녀석. 쿨 하기까지 하군.
- 지후 : 그렇지 않을지도
……. 뭐라는 거야.
-바쁨 :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기다린 용건은? 지금 꽤나 피곤해서
-지후 : 술 마셨어?
…. 어떻게 알았지
-바쁨 : 아니
-지후 : 거짓말
-바쁨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후 : 달라
-바쁨 : 뭐가
-지후 : 이전이랑.
뭐가 다르다는 걸까. 많이 마시긴 했지만 이성이 날아가진 않았다. 그때만큼 정신이 말짱한데.
-지후 : 전보다 생각하지 않고 말해
-바쁨 : 무슨 소리야
-지후 : 빨라. 대답
하?……. 그랬던가. 나도 잘 몰랐다. 본래 뭐든 대답하기 전에 한번 씩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채팅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술마시면 좀 변하는걸까?
-바쁨 : 그래. 술 마셨어
-지후 : 많이?
-바쁨 : 제법
-지후 : 왜?
-바쁨 : 그냥
-지후 : 아직 아파?
순간 심장이 옥죈다. 무슨 소린지 머리가 받아들이기 전에 몸이 반응했다. 젠장…
-지후 : 왜?
순진한 녀석은 또 묻는다. 왜 아프냐고?
-바쁨 : 그러게. 왜 난 아직 아플까
-지후 : 아프지 마
하하…. 아프지 말라니…. 어째서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지후 : 울지 마
내가 울긴 언제 울었다고 울지 말래. 내가 보이기라도 하니?
-지후 : 울지 말라니까.
안 운다니까…
-지후 : 술 마시고 혼자 울면 청승맞아. 울지 마
저 순진한 고등어는 정말 뭐가 보이는 건지 끊임없이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 되버렸다. 그럼에도 속이 꽉꽉 막혀버린 듯 울음하나 나오지 않는데, 그게 더 서러워진다. 그날이후로 눈물 같은 거 이미 말라버렸다.
-지후 : 오늘은 들어줄게.
쟤가 정말 뭐라고 하는 거야… 네 얘기 하고 싶어서 기다린 주제에.
-바쁨 : 왜 기다렸어
-지후 : 뭐든 오늘은 내가 들어줄게
그 말이. 마법처럼 내 눈에 박힌다.
*오랜만에 돌아온 인소닷에 올리는 첫글입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내용에 기재된 메신저 주소는 실제주소와 상관이 없습니다.
첫댓글 잘봤어요 ㅎㅎ
기대하고 있을게요 ㅎㅎ
오 새롭네요 ㅋㅋ 재미있어요 기대할게요~^^
으음...만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