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영안실에서의 참회
어제 경남창원시에서 살고 계시던 재종숙(7촌)께서 별세했다는 비보(悲報)를 받고서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 글 적습니다.
비보를 접하고 창원의 파티마 병원 영안실을 찾아 갔더니, 지난해 추석을 얼마 앞 둔 시점에 삼종동생이 “형님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오래 살지는 못하실 것 같은데 병풍이나 하나 쓰 주실 수 있는지요?” 하는 부탁을 받고, 한쪽 면 육폭에 반야심경을 예서체로, 그리고 뒷면의 8면에는 화엄경(華嚴經) 약찬게(略纂偈)를 행서체로 쓰서 줬는데, 삼종제는 이미 일 년 전에 예감을 했었던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아저씨는 향년 78세로 1남 4녀의 장남으로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금지옥엽 같은 존재로 유년기를 보내셨고. 그 당시 철도고등학교를 졸업을 했었고, 풍체와 용모도 빼어나 배우 신성일을 뺨칠 정도로 준수했었는데도 불구하고, 평생을 직장 없이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 의존하는 삶을 일관하시다 생을 마감하셨답니다.
우리 가까운 10촌 이내의 집안에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동일 행렬(行列)의 집안어른으로는 삼종숙이 세 분이 계셨는데, 이 네 분이 계손(繼孫)을 이어면서 각자 독자(獨子)로 온상의 채소처럼 성장한 탓에 가장(家長)으로서의 방임(放任)과 타인과 타협이 안 되는 인격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로 아내와 자식들, 즉 저를 비롯한 8총 동생들 모두는 춘궁기(春窮期) 보리 고개시절을 꿈 대신 허기진 배를 달래는 기억만 있을 뿐이랍니다.
6촌지간인 어른 네 명 중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고인께서는 2남 2녀의를 뒀는데, 저에겐 8촌 동생뻘이 되는데, 아버지의 방임(放任)으로 어려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고, 교육혜택도 소외되어 어렵 살이 자수성가하여 살고 있답니다.
고인이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부터는 재종숙모님의 노점상 수입이 줄면서 용돈이 감소하자 아들딸에게 용돈을 요구하며 잦은 투정을 부린다고 명절에 저를 만나면 “아버지 때문에 못살겠다.”는 동생들의 푸념과, “영감과 자식들 틈새에서 말 못할 고초를 겪는다.”는 재종숙모님의 하소연을 여러 번 들었답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그런 현실을 접할 때 마다 왜? ‘우리 집안 어른들은 한 결 같이 아내와 자식에 대해서 그렇게 무심, 무정한 가장(家長)이었을까?’를 생각지 않을 수 없어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근원(根源)을 찾아보았답니다.
우리 집안의 내력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율곡 이이선생님과 함께 과거에 급제를 하여 홍문관(弘文館)교리(敎理) 벼슬을 지낸 12대조 함자가 윤문(允(文)인 할아버지께서 노년에 낙향하여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의 내 고향인 경남 밀양시 하남고을로 12대째 살고 있는 셈입니다.
11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장악원(掌樂院) 정(正), 10대조 할아버지께서는 형조참의(刑曹參議) 9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오위도총부(五衛都總部) 총감(摠監) 등 막강한 가세(家勢)가 6대 후손인 고조부까지는 면면(綿綿)이 이어졌다는 얘기를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었답니다.
그 후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르기까지 평균 1남 4~5녀라는 남아 희귀 성비불균형으로 할아버지들은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철저한 과보호로 나약하고 이기적 인격의 마마보이로 성장하여 안하무인의 인격으로 복을 짓키는커녕 물려준 재산을 도박과 음주로 탕진하여 결국 아녀자와 자식들에게 가혹한 생활고를 감내(堪耐)게 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집안의 과거 내력과 현실을 놓고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의 저의 입장에서 과거 할머니, 아버지, 형님께서 들려주신 증조부 생전에 있었던 부끄러운 이야기는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답니다.
[어느 장날이었는데 이웃 동네 머슴들이 장에서 과음을 하고, 우리 동내 앞을 지나면서 고성방가로 소란을 피웠는데, 증조부께서 글을 읽다가 머슴을 시켜서 누군지를 확인한 결과 윗동네 아무개 집 머슴들이라고 답하니, 증조부께서 그 주인을 호출하여 식솔들 단속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우리 집 머슴들을 시켜 곤장을 쳐서 실신시켰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설을 우리 형님은 지금도 공공연하게 자랑함을 보면서 이조 500년 유교이념이 세상을 지배했던 그 시절 양반 조상님들의 과혹한 행포의 악업(惡業)들이 그동안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한 근원적 악업(惡業)과보(果報)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 조상님들을 대신하여 저는 참회(懺悔)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을 아는 저는 1남 3녀의 자식을 뒀는데, 세 번째로 낳은 하나인 아들역시 부친과 삼종숙님들의 생애를 모델을 삼다보니 반대급부로 아들은 사소한 잘못에도 가혹한 문책으로 엄하게 키워왔던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랍니다.
물론 그 과정에 할머니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 중에 “미운자식은 밥을 많이 주고, 귀한 자식일수록 매를 많이 다스려야 한다.” 는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저의 자녀교육관이 신세대에 속하는 아내의 동물적 모성본능과 배치(背馳)되면서 많은 갈등을 겼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들은 내세울 만큼 훌륭하지는 않지만 자기 몫은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저녁 고인의 빈소에서 상주인 두 명의 동생에게 이런 말을 전했답니다.
“동생들 내 말 잘 들어라.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너희들이 아버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지내고,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빈 방을 정리할 때면 아마도 하늘이 통째로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들이 내 말의 진의를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1988년 10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임지 복귀를 위해 밀양역에서 기차가 발차하는 순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비통한 부정(父情)에 흔들리는 기차 화장실로 들어가서 숨죽이며 오열을 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생전에 그렇게 무능, 무정한 아버지로 비참한 가난을 물려준 아버지였지만 지금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나신다면 나는 아버지 발바닥에 오체(五體)투지(投地)하여 통곡하며 용서를 빌고 또 빌고 싶은 심정과 “자욕양이(자욕양이친불대(子欲養而親不待)라는 고사의 이미를 뼈저리게 되새기는 저는 그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어제 아내와 아들을 대동하고 조문을 하면서 아들에게 지난날 집안 대소가의 내력과 함께 왜? 아버지가 너희들을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키웠는지를 이해시키려 했더니 아들이 하는 말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고인은 한 줌의 제가 되어 영원한 이생을 하직하게 되겠지요. 이제 평소에 그 분의 삶을 자식교육의 본보기로 삼았던 부끄러운 제 자신을 질책하는 “옴 살바못자 못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을 일심으로 읊을까 합니다.
부디 마지막 가시는 길목에 서서 극락왕생정토에 안착하기를 염원하는 지극정성의 장엄열불과 연꽃 등불을 밝혀 드리리라 거듭거듭 다짐을 해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창원 파티마 병원 영안실에서 못난 재종질 수진 박영국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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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진 거사님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저희 집안도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요...남아 선호, 장자 우선의 사회가 낳은 폐해이겠지요.허나 잘난 부모든 못난 부모든 부모님은 우리의 기둥이시고 가림막이더군요..당신만 아시고 자식들에게 호령하시던 시아버님이 돌아 가시고 나서야 그 빈 자리의 허전함과 든든함을 알았으니 큰 불효였지요..어른들의 잘못된 부분은 개선해 가면서 또 요즘 세태의 아이들의 어려움을 살펴 가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옳은 몫을 할 수 있도록 현명하게 자식들 키워 내는게 저의 몫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고인의 극락왕생을 발원 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미지 법우님의 댓글을 대하면서 다시 한 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시네요. 오늘 마산시립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다비를 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납골당에 봉안을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부모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여겼던 동생들이 발인식을 할 때며 화구로 시신이 들어가는 순간 그리고 봉안식을 하는 순근마다 통곡하는 동생들을 지켜보면서 미우나 고우나 부모의 빈자리는 크다는 것을 몸소 실감하면서 내 스스로를 뉘우친 참회진언과 가신분을 위해서 광명진언을 여러 번 읊었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저역시 참회진언을 외웁니다. 옴살바못자모지사다야사바하._()_
자비로운 부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여러 분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은 제가 앞으로 더욱더 참된 불제자로 거듭 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정진을 하겠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거사님의 글들은 참 인생살이가 느껴집니다. 돌아가신 분 부디극락왕생하시기를 진심으로바라는 마음입니다.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김여래성 부처님 매우 고맙고 감사합니다. 매번 영가를 보낼 때 홀가분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무언가 여운이 남는 것 같은 분위기도 있는 법인데 오늘 저는 물론 상주들 모두가 모든 행사를 마치고 하나 같이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고들 하니 우리 아저씨는 극락왕생를 하리라 믿습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거사님의 글을 읽으며 내 자식들의 교육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세간의 비행청소년들의 탈선현장을 접하노라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 줘야 하는 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언제나 반겨주시는 원봉 부처님,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삼종숙의 장례를 치르면서 제가 돌아 가신 부친을 비롯한 삼종숙님들의 삶을 모델을 삼아 내 자식들에게 과혹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고집했던 것도 하나의 집착이라 생각을 해 보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생에 있어 리허설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억울한 생각도 하겠되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30대 초반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참으로 후회없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있는데 말입니다.
저도 수진거사님과 같은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허나 그때 또 돌아보면 부족한점이 느껴질꺼란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미완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들구요...
이 세상 인연맺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예행연습이 없는 우리네 인생길 날마다 날마다 참회하며 공부합니다..수진거사님 참회하시는 마음에 합장드리며 재종숙님 부디 왕생극락하시길 발원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