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지맥(峨口枝脈)과 실직국(悉直國)의 흔적
아구지맥 답사시 △818.1m봉에서 돌성(?) 일부를 발견하고
궁금증으로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던중 만난 반가운 자료들이라 이곳에 옮겨둡니다.
어쩌면 아구지맥상 △818.1m봉의 돌성흔적이 실직국 안일왕(安逸王)이 쌓았다는
산성이 맞다면..[아휴~! 가슴떨려~!]
이곳 △818.1봉이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문헌상의 안일왕산(安逸王山)입니다..
아래글들을 읽어 보시고 맞나 안맞나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 잃어버린 왕국-실직국(1) [출처:삼척시립 박물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합니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습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습니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습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 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기지화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답니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입니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 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삼척지역의 실직국시대 유적으로는
원덕읍 노경리의 초기철기시대유적과
북평항만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 및 돌톱 구슬 토기 등이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관동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 3월 29일 삼척시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 시립박물관 제1전시실(선사·역사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실직국 ; 청동기-철기시대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장국가
실직 = 쇠직이. 쇠=悉, 직=지킴이(삼직, 문지기, 고직 등)
삼척은 사철과 철광석 산지. 군사요충지.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
※ BC4세기말-BC3세기초 ; 중국 연나라-한반도(서북부) 철기유입
위만조선( BC194- BC108). 한사군 - 한반도 전역에 철기문화확산
동해안북부; 임둔군 통치-BC82폐지,낙랑동도위부,AD30
원삼국시대(BC100-AD100) 다양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 생산. 철을 화폐처럼 사용,
변한 진한에서 낙랑, 대방, 왜에 철 공급
♣ 잃어버린 왕국-실직국(2)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합니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합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사량,본피,모량,한지,습비)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한기부)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갑니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통치를 받습니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더)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됩니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실직국 관련 참고 자료
- [울진군지]. [울릉군지]. [삼척시지]. [삼국사기], 울진문화 제6호(울진문화원,1991),
[실직문화]제3-4집 (삼척문화원,1992-3)
고전국역총서:신증동국여지승람
내용 :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인 본서는 세종조로부터 중종조에 걸쳐
여러 번 수정과 증보를 거듭하여 편찬한 것으로
처음 세종조에 유회·신장이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고
<뒤에 세종실록에 수록>,
성종 9년에는 양성지가 팔도지지(八道地志)를 만드는 한편
따로 동국승람(東國勝覽)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기본으로 하여 노사신·강희맹·성임·양성지 등이 총재가 되어
송 나라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의 체재를 모방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완성하였으며, 다시 성종 16년 김종직 등이
여기에 수정을 가하였다.
그 후 연산군 3년 성현·임사홍 등이 다시 교정과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고,
중종조에 와서 다시 이행·홍언필 등이 중종 25년 동국여지승람에 대한 교정과 증보를
완료하였는데, 이 증보판이 곧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울진현(蔚珍縣)
동쪽은 해안까지 9리, 서쪽은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81리,
남쪽은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48리, 북쪽은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44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다. 고우이군(古?爾郡)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을 삼았으며 고려조에서는 강등하여 현으로 하고
영(令)을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각 1인.
【군명】 선사(仙?)ㆍ우진야ㆍ고우이.
【성씨】본현 임(林)ㆍ장(張)ㆍ정(鄭)ㆍ방(方)ㆍ유(劉), 민(閔) 영천(榮川).
『신증』【풍속】 농상(農桑)을 힘쓴다.
【산천】 안일왕산(安逸王山) 고을 서쪽 4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반이산(潘伊山) 고을 서쪽 58리에 있다. 잠산(蠶山) 고을 남쪽 41리에 있다.
백암산(白岩山) 고을 서쪽 46리에 있다. 숙을비산(宿乙庇山)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전반인산(全反仁山)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죽진산(竹津山)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항출도산(恒出道山) 고을 북쪽 39리에 있다. 가을현(加乙峴) 고을 북쪽 44리에 있다.
바다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죽변곶(竹邊串)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약사진(藥師津)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전천(前川) 고을 남쪽 1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