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산리는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아담한 동네다. 태안 시내에서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방면으로 십리 쯤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나룻배 조형물이 보이고, 왼 편으로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농로가 나온다. 농로를 따라 삼백 미터 쯤 더 가면 한옥 한 채가 보인다. 집 뒤편으로 이백년이 훨씬 넘은 팽나무가 지붕을 덮고 팽나무를 가운데 두고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가 집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집 앞 쪽으로는 잘 손질된 향나무가 아치를 이루면서 집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맞이한다. 향나무 그늘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서면 너 댓 평쯤 되는 안마당에 금잔디가 깔려있다. 그곳이 우리 집이다.
이 집은 친정 큰 오라버니, 한천희 씨가 평생 동안 가슴으로 지은 집이다. 서까래, 대들보, 장지문의 문살 등 무엇 하나 남의 손을 빌린 게 없다. 농사를 지으며 틈나는 대로 손수 지은 이 집이 한 때는 인근에서 제일 멋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큰 올케는 불만이 많았다.
넓은 대청마루는 여름이면 시원해 좋기는 하지만 겨울이 되면 난방장치가 되어있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농번기에는 그야말로 천덕꾸러기다. 게으른 아낙네에게야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깔끔한 그녀에게는 늘 골칫거리였다. 조석으로 걸레질을 해야 하고 가끔씩 기름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엌은 위로 다락을 둔 까닭에 천장이 낮아 답답하다. 그녀는 한천희 씨만 곁에 있으면 토씨하나 안 틀린 같은 말로 구시렁대곤 했다.
“으이그, 이왕 질 거 요즘 식으루 지면 워디 덧나남? 개갈 안나”
한천희 씨는 소리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앞동산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안사람의 잔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한천희 씨는 없는 집의 팔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다. 아버지는 나무장사를 하셨다. 일이 없을 때는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고 친구와 어울려 팔도유랑을 즐겼다. 어머니는 바다로 나가 조개를 캐고, 고동을 따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밤에는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였다. 어머니의 짐을 덜어 드리려 열일곱의 나이에 동네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집짓는 일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꼼꼼한 그는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 여기저기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늘어나는 땅마지기에 일이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올케를 만났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올케도 잘 견뎌나갔다. 한천희 씨는 서른이 지나서야 친구를 사귀고, 다시 몇 년 후 살림이 펴기 시작하자 술과 담배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대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허튼 짓 한 번 안하고 열심히 일만 한 그에게 하늘이 무너질 일이 생겼다. 아내가 위암판정을 받은 것이다. 평소 완벽하고 깔끔한 성격 탓에 스스로 자신을 힘들게 했던 올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만하다가 식사 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그녀의 식사량은 웬만한 장정들 못지않았다. 그런데도 살이 붙지 않자 동네사람들은 성질이 고약해서 그렇다고 수근 거렸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시부모 공양하고 네 살짜리 막내 시누이를 업어 키운 그녀에게 성질이 고약하다고 한다면 그건 억지리라.
사형선고와도 같은 의사의 진단은 우리 모두에게 절망이었다.
“내가 뭘 잘 뭇 헌겨? 나 헌티 이런 일이 생겨도 되는겨? 하필 왜 나여? 허구헌 날 식구들만 위혔어. 정내미 떨어져. 넌덜머리 나. 이럴 거였으면 넘들처럼 이쁜 옷도 사 입구 맛난 것도 맘껏 사먹으면서 놀러두 댕겼을 거여. 이게 뭐랴. 도대체 뭐허자는 거랴?”
몇 날 며칠을 울부짖는 올케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 간절히 기도만 할 뿐이었다. 이런 결과가 식구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기에 발견되어 절제부위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의식이 돌아온 올케는 퇴원을 해도 남산리 집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시부모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발병원인에 시아버지도 한 몫을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녀의 시아버지는 사실 그렇지 못했다.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당신만 아는 특이한 노인네였다. 게다가 큰며느리한테만은 매사에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었다. 그 까닭은 올케의 성姓이 기奇씨인데 한韓씨와는 옛부터 한 뿌리라 하여 혼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담이 오갈 때 종중에서 반대가 심했는데도 한천희 씨는 결혼을 강행했고 그것이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한천희 씨는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팔십 노부모를 남산리에 남겨둔 채 태안 시내에 급히 집을 장만한 다음 안사람을 데리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요양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젊어서부터 고생만 시킨 것이 죄스러워 마치 용서를 구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사람의 말을 듣고 분가를 한 한천희 씨가 다른 형제들은 영 마뜩찮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만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안사람은 수술 후 오년 쯤 지나자 한천희씨의 지극정성과 자신의 굳건한 의지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남산으로 돌아오는 걸 두려워했다. 한천희 씨 역시 환갑이 다 된 작고 허약한 아내를 위해주고 싶은 심정이 앞섰을 것이다.
그가 대형 트랙터로 농사일을 시작한 지 이십여 년, 열심히 살아 온 덕에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못 배운 한을 장학 사업으로 풀어야겠다며 몇 몇 뜻있는 이들과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그는 남산 집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든다. 농기계가 그곳에 있으니 그것을 가져다 일을 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늙은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해서이다. 노부모와 같이 점심도 먹고, 식곤증이 오면 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워 낮잠도 자고, 취미로 모아 온 수석을 손질하곤 한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일이 없지만 기계라는 게 잠시 틈만 보여도 표가 나는 거라며 손질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한천희 씨는 자기가 가슴으로 지은 집을 차마 떠나지는 못한 것 같다.
요즘 한천희 씨 얼굴을 보면 편안함이 묻어있다. 전보다 웃음도 많아졌다.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산 한천희 씨 내외에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밖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 번개까지 치네요... 갑자기 울오빠 생각 나는 것이... 내 마음 같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