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은 1919년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표곡 "굳세어라 금순아" 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요이자,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1951년 1.4 후퇴 직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血肉 금순이가
굳세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의
"굳세어라 금순아" 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수이자,
부산이 낳은 "제1세대 가수"인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현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유명한 현인은
불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베사메 무쵸" 등 1천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 이다.
부산 영도에서 출생 현인은,
아버지 현 명근과 어머니 오 봉식의 2남 1녀 중 맏이로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다.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의 영주 소학교로 옮겼으며,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
1931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와 일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일본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고 한다.
현인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 이에 상심해, 아버지가 권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현인은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을 포기하고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 - 현 도쿄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관립(官立) 우에노 음악학교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인 소프라노 윤 심덕,
바이올리니스트 홍 난파, 동요 작곡가 윤 극영 등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입학이 허용 될 정도로
조선의 음악 엘리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5개 국어 능수능란한 인텔리 가수...
그러나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신문 보급소에서
신문포장 일을 하는 등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재학 당시에는 음악이론보다는
재즈나 샹송을 좋아했으며,
방송국에 드나들며 최신 음악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4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성악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가 된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황해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상하이와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악극단 활동을 했으며,
텐진의 클럽 "신태양" 에서 샹송 등
외국가요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현인은
음악활동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작곡가 박시춘과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미8군과 악극단을 오가며 활동하다
1947년 서울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영화 "자유부인" 개봉 축하공연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다.
그 자리에서 아직 음반 취입도 하지 않은
"신라의 달밤" 을 불러 "아홉 번 앙코르" 기록을
세웠다.
결국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취입곡으로 데뷔, 데뷔곡이 빅 히트를 한다.
이국적인 멜로디, 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데뷔곡 "신라의 달밤" 의 인기를 몰아
1949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등장,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베사메 무쵸' 등을 번안해 노래함으로써,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1952년에는 "장밋빛 인생" 등을 불러
샹송 붐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으로 징용간
젊은이들의 망향을 그린 "고향만리",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사람들의
그리움을 노래한 "비 내리는 고모령",
전쟁 중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전우여 잘 자라" 등은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한 민족의 노래이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 준 희망의 노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현인은 부산에서
동아극장 은방울 악극단의 '은방울 쇼'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 영화배우 황정자,
최은희 등과 활동을 함께 하는 한편,
"현인과 그 악단" 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
1952년에는 신청년 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 에
남인수, 김정구, 신카나리아, 이난영 등과
출연하기도 했다.
영도다리에 노래비와 동상,
1967년 문화공보부 공로상을 받았으며,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1996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대상(문화훈장·1999년) 등을
수상했으며, 2002년 4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는
현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노래비는 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로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으로,
노래비 앞에는 현인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