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이란 태를 묻는 곳을 말한다. 전국 곳곳에는 태봉, 태실, 태장, 태묘라는 지명이 더러 보인다.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후 나오는 태반을 묻은 장소라서 얻은 이름이다. 더러는 양반 사대부집 자녀들의 태를 묻은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왕손들의 태를 묻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묻은 역사는 ‘삼국사기’에 처음 보인다.
후면을 둘러싸고 있는 서신산 자락 가운데 볼록한 산이 태봉이다.
이곳에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처 만명이 임신한지 20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고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으니 신으로 화하였으므로 이를 태령산이라 하였다.”는 신라 김유신의 장태 기록이 보이듯이 태를 묻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풍속이다.
이 풍습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그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의 태봉은 그 위치가 기록 및 구전으로 전해질뿐 태실유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산에 있다. 사적 제444호로 지정된 이곳에 가려면 왜관에서 33번 국도를 타고 성주 월항면에 들어서면 도로 우측에 ‘세종대왕 왕자태실 12㎞’라고 적은 태실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크고 작은 몇 개의 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들어서면 최근에 만든 높은 저수지의 둑을 만난다.
저수지를 돌아 오르면 저수지 때문에 명당길지의 형국이 흐트러지긴 했어도 수려한 산세가 사방을 둘러싼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다. 멀리서는 정상부만 모습을 보이던 서진산(742m)의 연맥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서로 이어져 사방을 감싸주는 가운데에 막 피어오를 꽃봉오리 같은 둥근 봉우리 하나가 볼록 솟아있다. 이곳이 태실이 있는 태봉산이다.
이 봉우리 백호 쪽에는 서진산 여러 골짜기에서 얻어낸 물이 계곡을 이루면서 태봉산을 감싸며 돌아 흐르고, 청룡 쪽에서 얻어낸 적지 않은 물도 태봉산을 감싸고 흘러내려 태봉산 앞에서 백호쪽 큰물과 합수하여 하나의 파구를 이룬다. 풍수를 아는 사람이면 누가 보아도 명당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지세이기에 이 봉우리가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이 있는 태봉산임을 짐작하게 한다.
19기의 태실이 2열로 배치되어 있다.
봉우리 정상 명당길지에 '사적444호'로 보존 '비운의 왕' 단종의 태와 '아픔의 흔적'도 남아
볼록한 봉우리의 왼편 모퉁이를 돌면 인촌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 탓에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였고, 주차장 옆으로 태봉산을 오르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태봉을 만드는 용맥이다. 봉우리 정상에는 짐작대로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태봉에서 살펴보면 서진산에서 이곳 혈처에 이르는 주룡의 기세 변화가 정말 대단하다. 속리산에서 대 길지를 만든 백두대간은 추풍령을 넘어 삼도봉과 대덕산, 우두령, 수도산, 백마산, 영암산을 지나 태봉의 주산인 서진산을 만들었다. 서신산 주룡은 남으로 흘러내려 태봉을 만들고는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산천정기를 단단하게 뭉쳐 놓았다. 태봉이 바로 한 산맥의 용진처가 된 연유이다.
혈은 이러한 곳에 만들어지지만 태실을 조성하면서 산 정상을 평탄하게 깎아 놓았기 때문에 혈장의 구성 요건들이 훼손되어 어느 곳이 진혈처(眞穴處)인지 지금으로선 분간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태실을 조성하기 전의 이곳은 풍수에서 대길지라고 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태실수호 사찰인 선석사.
세종대왕 왕자태실은 남아 있는 태실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낳은 18명의 아들 중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17명의 아들과 원손인 단종의 태를 묻은 곳이다.
세종대왕은 본처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8명의 대군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의 왕자를 두었다. 이 중 세자였던 문종을 제외한 왕자들의 태실을 모두 이곳 서진산 자락의 태봉산에 모아 놓았다. 태실은 그 건립연대가 세종20년부터 24년(1438~1442년)간이며, 태실의 배치는 입구에서 보아 뒷줄에는 소헌왕후가 낳은 진양(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원평대군, 영흥대군의 태실 7기와 영흥대군과 약간 떨어진 뒤로 세손인 단종의 태실을 두었다. 앞줄에는 후궁의 소생들인 화의군, 계양군, 의창군, 한남군, 밀성군, 수춘군, 익현군, 영풍군, 장(璋), 거(담양군), 당(영해군)의 태실을 두었다.
태실의 모양은 마치 작은 부도를 닮았다. 지하에 태항아리와 태지명를 안치한 석함을 묻고, 그 위에 연화문을 장식한 방형의 지대석, 다시 그 위에 중동석과 뚜껑을 얹었다. 그 앞에는 태비(胎碑)를 세웠다.
현재 금성대군을 비롯한 안평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태실은 석함만 있을 뿐 다른 석조물은 훼손되었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에게 협력하지 않고 반대한 대군과 군들의 태항아리 등을 파서 산 아래로 굴려버린 것을 다시 수습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의 17왕자와 원손의 태를 묻었다면 태실이 모두 18기라야 정상인데 이곳의 태실은 19기다. 이는 태실 중 영해군의 이름이 장(璋)에서 당(?)으로 고쳐지자 태실을 다시 세운 탓이다.
서민들이야 태를 태워 물에 뿌리거나 밭고랑에 묻어버리지만 지체 높은 사대부나 왕실에서는 태를 왜 명당길지에 묻었을까? 풍수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라 태 역시도 유골과 같이 중요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배경에는 풍수사상이 만연해 있던 조선시대에 명당길지를 모두 왕실에서 차지할 의도도 숨어 있었다. 백성이나 왕실이 모두 풍수사상을 신봉하던 시대였던 만큼 일반 백성이 왕후지지(王后之地)와 같은 좋은 길지를 찾아 쓰면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된다고 왕실에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으로 태실을 조성한 것이리라.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있는 성주의 태봉산도 원래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을 세종대왕 때 왕자들의 태실자리로 왕실에서 봉표하자, 이장경의 후손인 이정녕은 당시 풍수학제조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조상 유택이 있는 이 길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태실도국 안에 있는 분묘를 보고하지 않았다가 귀양을 가는 등 파문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경향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를 묻은 또 다른 의도는 왕실과 일반 백성간의 유대 강화다.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도성과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도 왕실이 가깝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거기다가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세금과 노역을 덜어주는 혜택까지 주어 왕족의 태실을 서로 자기 고장에 모시려는 경쟁심을 유발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도 깔려 있었다.
세존대왕 왕자태실 아래에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선석사가 있다. 이곳에 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을 수호하는 절이 되었다. 산사의 태장불경소리가 태실을 가득 메우니 역사의 향기를 새롭게 한다.
첫댓글 어릴 때 자주 소풍 다니던 곳을 이렇게 보니 감회가 특별하군요. 회원 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저곳 태봉산에서 20 여 분(예전엔 구불구불 한참 더 걸렸던 길..) 거리로 내려가면 제 고향마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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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님,
장군이님의 인사를 들을 때마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진정한 박사모 인으로써의 자세를 보여주시고 행동하시는 님들을 뵐 때마다 미안함으로 고개 숙여집니다.
지난 일요일엔 강남교회 앞에서 고생 하셨지요.
저희들도 함께하고 싶었으나 이미 정해진 약속된 일이라 그쪽으로 가질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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