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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정신과학" 제21권 제1호, 한국동서정신과학지, 2018.8.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상대론자인가
이태호
통청아카데미
이번 논문에서 논자는 노자와 화이트헤드가 상대론자임을 보다 정확하게 알기위해서 상대와 절대의 개념을 일반적, 사전적, 전문적 의미로 분석했다. 이때의 전문적 의미는 철학적 의미로 상대성과 절대성을 말한다. 이 철학적 의미인 상대성과 절대성을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의미로 다시 분석하였다. 상대성의 개념은 두 개의 대등한 존재자가 상호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절대성 개념은 두 개 중 한 쪽이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까울 정도라서 상대자와의 상호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때의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까워서 대등한 상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를 절대자라고 한다. 노자에게 두 상대자는 무와 유이며, 화이트헤드에게 두 상대자는 신과 세계이다. 노자에게 무와 유는 상호 대등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상대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신과 세계도 상호 대등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상대자이다. 그러므로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둘 다 상대론자이다. 왜냐하면 둘 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고, 우주의 근원을 상대자로 보기 때문이다.
주제어 : 상대, 절대, 상대자, 절대자, 상대론, 절대론, 노자, 화이트헤드,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Ⅰ. 시작하는 말
우리는 일상에서도 절대와 상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든지, “그것은 상대적이야” 등으로 말한다. “절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 처해져도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없이’라는 단어이다. 이것에 비해 “상대적이야”라고 말할 때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상황이 관계있다’는 말이다. 시험평가를 할 때 절대평가와 상대평가가 있다. 절대평가는 나의 시험 점수가 같이 시험 친 학생들의 점수와 ‘관계없다’는 것이고, 상대평가는 그들과 ‘관계있다’는 말이다.
절대와 상대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어로 absolute가 절대이다. absolute는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깝기 때문에 상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상대자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어(漢字語)로 번역할 때 상대자와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의미로 절대(絶對)이다. 영어로 relative가 상대이다. relative는 관계하다, 관련이 있다, 상대가 있다는 단어인 relate의 변형이다. 즉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고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자어로 번역할 때 상대자와 마주쳐 있어야 자신도 존재한다는 의미로 상대(相對)이다.
이제 일상적 용법과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보다 깊은 전문적 언어의 정의(definition)로 들어가 보자. 절대와 상대라는 용어를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가치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해야 절대론자와 상대론자의 구분을 확실히 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노자와 화이트헤드를 상대론자라 할 수 있는지, 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Ⅱ. 상대론자(相對論者)는 어떤 사람인가?
상대론자는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은 대등한 두 개 이상의 관계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것에 비해 절대론자는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은 대등하지 않은 두 개 이상의 관계항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으나, 이들 중에 우월한 쪽이 완전하기 때문에 열등한 쪽으로 영향을 주기만 하고 영향을 받지는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때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지는 않는 자를 절대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절대론자들은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자이다. 여기에 비해 상대론자들은 이러한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1. 상대(相對)와 절대(絶對)는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하는가?
상대와 절대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절대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깝기 때문에 마주하고 있는 상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로서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열등한 지위를 가진 상대로부터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자이다. 예를 들어 절대군주는 우월한 지위를 지닌 자신이 열등한 지위를 지닌 백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까치기는 하지만 백성들에 의해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절대군주는 자신의 이러한 절대 권력을 완전한 존재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불완전한 백성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론적 관점을 가진 선각자들은 절대군주라는 사고방식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민심을 잃어버리면 천심을 잃게 되고, 천심을 잃게 되면 왕으로서의 권위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민심을 투표라는 현실적 행위로 드러낸 것이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는 절대군주를 부정한다. 상대론적 관점에서 보면 군주나 백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등한 자들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지닌 부모가 열등한 지위를 지닌 자식에게 절대자의 지위에서 절대 권력을 일방적으로 휘두른다면 자식은 처참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 중 현명한 자는 자식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결합된 대등한 지위를 지닌 상대적인 관계로 인식해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다. 그러나 부모 중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에 실패한 경우도 많다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부모와 지식의 관계는 세월이 흐르면 역전된다, 자식은 장성해지고 부모는 늙는다. 그러면 자식이 강자가 되고, 부모는 약자가 된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보면 평형을 이룬다. 이러한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보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절대자로서 행사하면 문제가정이 발생된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가지는 상대론적 관점에서 보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등한 자들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갑을관계도 부모와 자식관계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폭을 넓히면 상대적인 관계이다. 즉 갑을관계는 일시적이며 지엽적이다. 그런데도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절대강자인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소위 갑질을 하고 있으면 나중에 몰락하게 된다.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우 중 하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종교 특히 크리스트교에서는 창조주가 피조물에 비해 절대 우위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창조주의 능력에다 완전성(完全性)을 부여하면서 생긴 일이다. 완전성을 부여받은 유일신은 이제 진지전능(全知全能)하게 되었다. 완전성을 부여받기 전(前)의 신(神)들은 영원성(永遠性)만 지니고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은 영원하지도 않으며, 완전하지도 않다. 크리스트교 신은 완전성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자(The Absolute)이다. 이러한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크리스트교는 절대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god)은 절대자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신학을 과정신학(過程神學)이라고 부르는데 신도 세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창조의 과정을 밟고 있다. 상세한 것은 ‘화이트헤드는 상대론자인가?’에 가서 논의하겠다. 이와 함께 노자의 사상에도 절대자는 없다. 노자의 사상에 왜 절대자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노자는 상대론자인가?’에서 하겠다. 이들의 논의를 돕기 위해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의 상대론을 좀 더 깊이 검토하고자 한다.
2. 상대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상대론은 상대성 이론의 약자이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은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먼 조상 아마도 인류발생 이전부터 물려받아 왔으며, 우리들 모두가 어릴 적에 배운 심상(心像)의 변화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절대론의 심상을 갖고 있어 이것의 타파 없이는 상대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팡리지는 “과학은 믿되 유아시절부터 품어 온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절대성의 오류를 타파해 가는 과정을 자신의 저서 『뉴턴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까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둥글다(地球)는 사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하좌우라는 방향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절대론이 타파되어야 한다. 위와 아래라는 방향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배를 타고 멀리 나갔을 때, 어느 지점을 넘으면 아래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이 둥글어서 어느 지점에 가더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위와 아래의 방향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대론적 발상을 한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열어왔다.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상대성 이론,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문화상대주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상대주의, 교육학에서 말하는 상대주의 교육설 등도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면에서 상대론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을 상대론자라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대론은 개별 학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니라 상대성(相對性, relativity)에 해당하는 일반용어를 말한다. 굳이 한 학문으로 지칭해야 한다면 철학에서 말하는 상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 분야에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은 시간과 공간이 사물의 크기나 움직임(속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성질(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사물의 크기와 움직임(속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상대성)이 밝혀지게 되었다,
문화상대주의도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데 어느 것이 열등한 문화이며, 어느 것이 우수한 문화인지를 결정할 기준, 혹은 잣대가 되는 절대성이 없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그 성과를 일찍 흡수한 백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백인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백인우월주의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화상대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서 사고의 깊이가 약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윤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상대주의도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을 찾기 어렵고,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그 당시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 기준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도덕에 있어 가장 큰 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분야이든 그 분야에서 절대적 기준, 절대적 잣대, 절대자를 인정하는 것이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상대성이다. 어떤 한정된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상대성의 입장에 서서 보는 자를 상대론자라 한다. 이렇게 어떤 한정된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상대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그 영역 안에서 궁극적 존재자인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존재론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같은 맥락에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인식론과 가치론을 함께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대론자들의 주장을 자세히 밝히기 위해서, 역으로 절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을 먼저 알아보고 이들의 문제점도 살펴보고자 한다.
3. 절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체를 우주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원인을 말할 때, 그 원인이 되는 것은 생성 소멸하지 않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것조차 생성과 소멸을 한다면 지속적인 생성과 소멸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표면화시킨 사람 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 不動의 原動子)’라는 말을 하였다. 이 부동의 원동자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타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자’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자신이 타자들을 움직이게 하지만, 자신이 타자에 의해 움직여지지는 않는 자이다. 따라서 이 부동의 원동자는 절대자이다. 이러한 그리스의 사상은 후대에 히브리 사상에 접목되어 크리스트교의 절대신을 표현하는 수단중 하나가 된다.
(1) 절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
절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궁극적 존재자인 궁극자의 ‘완전함’이다. 즉 궁극자가 불완전하면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궁극자가 아닌 타자의 기준과 잣대가 되며, 타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이 절대성이 확보된다. 다른 하나는 궁극자가 지닌 불변의 ‘영원함’이다. 궁극자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거나 소멸된다면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 모든 타자를 변화시키는 변화의 근원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 궁극자가 영원하다는 것은, 궁극자는 궁극자가 아닌 타자와 같은 시간 안의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시간 밖의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 안의 존재자의 원인은 될 수 있지만 결과는 되지 않는다. 즉 시간 안의 존재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원인에 의해 작동한다. 여기서 작동한다는 것의 의미는 궁극자가 단순히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적인 존재자라(실재한다)는 것이다.
절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의 근저(根底)에는 궁극자를 궁극자가 아닌 존재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는 존재론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인 창조신도 피조물보다 우월하며, 절대군주도 백성보다 우월하다. 절대평가를 하는 시험 채점자는 수험자에 비해 우월하다. 관료제는 이런 우월한 힘을 이용하여 조직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조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물론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상대성을 인정하)는 존재론은 절대자의 우월적인 존재론적 지위가 없고 대등하게 마주쳐(상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 절대성을 인정하는 인식론
서구에서는 고대로부터 시작한 인식론이 근대 이후 활발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동서고금과 관계없이 절대성과 관련된 인식론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식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인식구조를 알아야 한다. 첫째, 인식하는 주체가 누구냐(who)이다. 둘째, 인식되는 대상이 무엇인가(What)이다. 셋째, 그 주체가 그 대상을 어떻게(how) 인식하는가이다.
절대성과 관련해서 인식하는 주체를 살펴보았을 때, 도대체 누가(who)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완전하게 인식(全知)할 수 있는가? 이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바르게 인식하는데 있어 오류가 없는 절대자이다. 히브리 사상에서 보면 이 자는 유일절대신이며, 크리스트교에서는 그 신의 독생자인 예수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석가이며, 석가를 깨달은 자(覺者)라고 하면서 부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무함마드, 유교의 공자, 도교의 노자 등도 그의 신도들은 모두 인식론상의 절대자라고 말한다.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존경하면서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인식은 진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성인의 반열에 진리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넣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인들이 모두 정확하고 완전하게 인식한 것이 동일한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성과 관련하여 인식되는 대상을 살펴보았을 때, 무엇이(what) 정확하고 완전하게 인식되었다는 말인가? 궁극적 존재인 진정한 실재(實在, reality, res vera)이다. 그리고 이 진정한 실재를 드러낸 현상(現象, appearance)과 실재와 현상의 관계까지 제대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실재는 우리의 감각기관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것은 현상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앞에서 말한 성인들은 진정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들이 인식한 것을 어떻게 참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각 종교의 교도들이나 학파의 추종자들은 교주나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겠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학자나 일반대중들은 냉담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성인들이 인식했다고 말하는 궁극적 존재인 진정한 실재가 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실재가 동일할진데, 각각 다르게 인식했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바르게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자들은 잘못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절대성과 관련하여 인식되는 방법(how)을 살펴보았을 때, 어떤 방법이 제대로 궁극적 존재인 진정한 실재를 인간에게 알도록 하는가? 인식하는 절대자를 성인이라 하더라도, 성인들은 감각적 경험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정한 실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통해 신의 게시를 받거나 명상을 통한 직관을 사용했고, 학파에서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든지, 진정한 실재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신이 아닌 인간도 알 수 있으며, 알아낸 진리가 올바르다면 그것은 절대적 진리이며, 어떤 방법으로 도달했든지 제대로 앎에 이른 것은 동일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인식방법은 그것이 게시든, 명상이든, 이성적 추리이든 언어를 통해 인식되고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절대자의 인식을 믿을 수 없고, 더군다나 후대로 가면서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 인식방법에는 언어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것에 비해 상대론자들은 진정한 실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고, 설사 실재가 있다고 해도 알 수 없으며, 혹시 누군가 실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알리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국 인식방법은 언어를 통해 알아내고 전달되어야 하는데, 상대론자들은 언어가 진정한 실재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상대론은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다. 만약에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인식한 진리가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후대에 가면 자신보다 더 깊고 큰 진리를 알아가는 자가 나올 수 있다는 열린 사고를 지녀야 한다.
(3) 절대성을 인정하는 가치론
절대성을 인정하는 가치론의 입장에서는 절대자가 우주만물의 가치서열을 매기며, 그렇게 가치서열을 매긴 순서대로 우주가 질서 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면서 각자의 생각대로 가치서열을 매기(가치평가 하)면서 자신이 결정한대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풍토에 영향을 받으면서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나 남을 평가한다. 평가해서 자신이 좋지 않으면 위축되고, 남이 좋지 않으면 멸시할 수 있다. 평가해서 자신이 좋으면 우쭐되고, 남이 좋으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가치평가의 기준이 과연 있으며, 기준을 세워서 가치평가 하는 주제는 어떤 것인가이다.
가치론의 주제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윤리학에서 다루는 선과 악의 문제, 경제학에서 다루는 이익과 손해 문제, 예술학(미학)에서 다루는 미와 추의 문제이다. 선과 악의 문제 있어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추론은 이해(利害)와 미추(美醜)에도 해당한다. 만약에 절대선(絶對善), 절대이(絶對利), 절대미(絶對美) 혹은 절대악(絶對惡), 절대해(絶對害), 절대추(絶對醜)가 있다면, 그것들은 시대와 장소와 관계없고 평가주체와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런데 판단의 상당수는 가치와 관련된 판단이다.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주어질 여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해야만, 그것을 수용할지 배척할지를 결정할 수 있고, 다른 여건과 비교하여 중요도에 따른 우선순위를 매겨야 선택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인생은 이러한 선택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좋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내린 가치판단에 대해 자신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인생경험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원천적인 한계는 가치평가에 대한 절대기준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다.
가치평가의 기준에 대해 회의적인 상대론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대화를 통해 상대보다 비교적 좋은 기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기준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미래에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해 절대론자들은 가치평가의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기준을 아는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정의(正義)이며, 따르지 않는 것은 불의(不義)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게 되면 그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 세상의 가치서열을 동반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데올로기를 지닌 사람이 다른 가치서열을 동반한 가치평가를 지닌 사람과 만났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이데올로기를 지닌 사람은 그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일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가치서열을 믿게 된다. 그래서 탈이데올로기 시대가 오기 전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상대진영을 적으로 여기면서 극심한 열전(熱戰)이나 냉전(冷戰)을 겪었다. 그리고 종교전쟁은 절대론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지금도 원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다.
Ⅲ.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상대론자인가?
노자와 화이트헤드를 상대론자라고 하려면 우선 그들은 절대자 혹은 절대 우월자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시각에서 생긴 절대 우월적 인식을 부정해야 한다. 나아가 절대 우월적 인식 중 절대자가 평가한 가치서열과 기준을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부정이 이루어진 결과로 쌍방이 대등한 근원적 존재자들로 우주가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쌍방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인식될 수 없어야 한다. 즉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등한 쌍방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쌍방에 대한 가치평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한다. 즉 쌍방 중 어느 하나를 높이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연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자.
1. 노자의 상대론적 관점
노자의 상대론적 관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도덕경』 2장이다. 2장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하고 있다. 유무상생은 유와 무가 서로 생기게 한다는 의미로 모든 유는 무로 돌아가고, 무는 다시 유로 생겨나온다는 말이다. 노자에 있어서 유의 시작은 천지(天地)이며, 천지는 만물(萬物)을 생기게 한다. 그런데 만물은 다시 무로 돌아간다, 이 이치를 억지로 이름 붙인다면 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도는 다시 억지로 해설하면 대(大)라 할 수 있고, 대는 서,원,반(逝,遠,反)이다. 이때 서(逝)는 멈춰 있지 않고 움직여 간다는 의미이다. 원(遠)은 멀리 끝까지 움직여 간다는 의미이다. 반(反)은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서원반을 전체적으로 보면, 무에서 유로 움직여 가는데 유는 끝까지 가면 다시 무로 되돌아간다. 노자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렇게 움직여 가기에 이것을 도라고 했고, 이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는 의미에서 대(大)라고 표현했다.
노자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도이다. 그러나 그 도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실재(實在, reality)이긴 하지만, 실체(實體, substance)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노자에 있어서 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무와 유의 상호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자이다. 따라서 도는 절대자가 아니라, 상대자들인 쌍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노자에 있어서 무와 유는 쌍방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한쪽의 우월한 위치가 아니라 대등하다. 흔히 노자의 존재론을 말할 때 무가 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해설가는 무와 유가 쌍으로 묶인 경우를 상대무(相對無)라고 하고, 묶여 있지 않는 우월한 무를 절대무(絶對無)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노자의 존재론에 절대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부동(不動)의 원동자로서의 존재자를 인정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제40장에 나오는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는 말에 의거하는 것 같다. 생성되는 순서대로 하면 무 → 유 → 만물이 되고, 근원이 되는 순서대로 하면 만물 → 유 → 무가 된다. 즉 무가 가장 근원적인 존재이고, 그 다음이 유이며, 만물이 가장 근원에서 먼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 무가 제일 높으며, 그 다음이 유이고, 마지막이 만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존재에 있어 노자의 무는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2장의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정합성(整合性, coherence)에 문제가 발생한다. 2장에서는 유무가 서로 생긴다고 하였고, 40장에서는 유가 무에서 생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자의 도(道)를 살펴보아야 한다. 40장의 첫구절에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고 했다. 노자의 존재론적 방향은 일직선이 아니다. 반드시 되돌아간다. 즉 원을 그리고 있다. 원에는 존재론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다. 제42장의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하늘과 땅 둘을 낳고 하늘과 땅은 충기를 낳아 셋이 되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끌어안으며 충기로 조화를 이룬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말과 25장의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말에서 도(道)는 존재론적 지위가 가장 높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5장에서 만물은 음기와 양기라는 유(有)와 충기라는 무(無)가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말하며, 도는 결국 저절로 이루어지는(自然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유와 무의 조화는 유무상생이며, 유무상생의 움직임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유무의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 상대론적 입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쌍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표와 소리는 서로 화합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든지 관념적으로 존재하든지 모두 쌍을 이루어야만 우리에게 인식됨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되는 쌍들로 이루어진 대상들 중 어느 한쪽을 우리들이 좋다거나 싫다고 말하면서 가치 우열을 가리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이미 (자신들이 싫어하는) 추함이 전제(前提)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좋은 행위인) 인위적인 착함을 착함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착함은 이미 (자신들에게 좋지 못한 행위인) 착하지 못함(악함)이 전제되어 있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자연에는 차별이 없다. 고슴도치가 못났고 공작이 잘났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된다. 존재자들을 가치평가해서 차별을 두는 것을 인위적이라고 말하면서 노자는 무위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위(無爲)의 일에 머물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말을 하게 되면 이분법에 빠지게 되며 가치평가를 하기 쉽다. 말은 의미를 한정해야만 그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데, 실재 세계는 그렇게 분명하게 한정되지 않는다. ‘하늘’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하늘이 아닌 것하고 구분이 되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이 아닌 것은 ‘땅’이다. 하늘과 땅은 쌍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우리는 편의적으로 하늘과 땅을 경계지우면서 이분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하늘을 높게 평가하고 땅을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 혹은 남성과 양지(陽地)를 높게 여성과 음지(陰地)를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원래 구분되지 않으며 평가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물이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섞여 있을 뿐이다. 이것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긴 유물혼성(有物混成, 뒤섞여 있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 언어로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하늘을 다시 구름과 별로 땅을 바다와 육지 등으로 분리해서 이름을 계속 붙여 가면 만물이 생기게 된다. 유물혼성 상태나 만물로 구분된 상태나 사실은 동일하다. 이름 붙이고 붙이지 않은 차이뿐이다. 이름 붙인 상태가 유이며, 이름 붙이지 않은 상태가 무이다. 바로 유무상생이다. 따라서 노자는 상대론적 관점을 지닌 상대론자이다.
2. 화이트헤드의 상대론적 관점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주저(主著)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상대성의 견해를 채택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기묘하게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조차 현대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은 중요한 영향을 준다. … 나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성의 견해를 채택할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것이 유기체 철학에 전제되어 있는 일반적인 철학적 상대성 이론과 더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간혹 예외가 있긴 하지만 고전적 이론이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며, ‘고전적 이론’은 뉴턴의 절대 시공간 이론이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뉴턴의 절대 시공간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뉴턴은 바둑판의 줄처럼 반듯하게 잘 그어진 절대공간과 정확하고도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안에 각각의 사물은 단순하게 정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단순정위(單純定位, simple location)의 오류임을 지적했다.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는 모두 사물이 우선적으로 존재하며 시공간은 파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 순서가 뒤바뀌면서 시공간이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성을 갖게 되어 절대시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절대시공간은 각각의 사물이 만들어내는 시공간 중 특수한 한 시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화이트헤드는 나아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이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빛과 중력의 절대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절대성을 지닌 아인슈타인의 빛과 중력도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 간주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이 절대성을 부여한 빛과 중력은 사물의 절대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의 절대성이란 각각의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자인 것이다. 이것은 개별실체가 존재자의 중심에 있고, 이것에 여러 속성들이 결합되어 사물을 이룬다는 실체철학의 관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는 이렇게 존재하는데 있어 중심역할을 하면서 지속되는 실체가 없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존재하는데 있어 중심역할을 하는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물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현실적 존재자(現實的 存在者, actual entity)이다. 이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적 삶을 마치자마자 새롭게 일어나는 주체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주체와 대상을 쌍방으로 본다. 주체가 중심이고 대상이 주변인 관계가 아니고 대등한 관계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내적 관계(내적 관계, internal relation)라 하고, 모든 현실적인 존재자들은 이러한 내적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원리를 ‘보편적 상대성 원리’로 명명하고 있다.
“보편적 상대성 원리(principle of universal relativity)는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정면에서 파기한다. 그와는 반대로 이 이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 사실 우리가 다양한 정도의 관련성 및 무시할 수 있는 관련성을 참작한다면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기체 철학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pr, p.130)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는 주변 대상들을 자신의 존재 속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완성하자마자 초월적 존재자가 되어 다른 주체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이다. 현실적 존재자는 개별실체처럼 존속되지 않고, 생성되자마자 소멸하는 존재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실체들은 다른 개별실체에 내재할 수 없지만,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에는 대상으로 주어진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이 내재한다. 내재하기 때문에 한 현실적 존재자 속에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이 정도 차이는 있어도 함께 존재(공재, togetherness)한다.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서로 간에 공재(共在)하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라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공재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를 떠나서 더 이상의 근원적인 존재자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존재론적 원리라 하였다.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는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y)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비존재(non- entity)가 있을 뿐이며, 남아 있는 것은 침묵뿐일 것이기 때문이다.”(pr, p.116)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공재는 공통세계(common world)라는 관념을 갖게 한다.
“공통세계(common world)라는 관념은, 분석을 위해 그 자체만을 취한 각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예증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자는 공통세계가 그 존재자 자신의 구조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 공통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를 포함하여 우주의 온갖 사항(item)들이,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자자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결론은 이미 <상대성 원리>라는 명칭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 상대성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가 극단적인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공리이다.”(pr, p.286)
존재론적 원리는 대상들을 내재시키는 주체로서의 한 현실적 존재자에게 초점이 맞추어 있어 일원론적 시각을 갖게 된다. 여기에 비해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주체로서 대상들을 내재시켜 완성된 현실적 존재자들은 모두 새롭게 일어나는 현실적 존재자들에게 대상이 되는 구성요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원리이다. 어떠한 현실적 존재자도 타자의 내적 구조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다원론적 시각을 갖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유기체 철학이 일원론과 다원론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사물인 현실적 존재자까지도 상대성으로 보려고 한다. 즉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일원성을 확보하면 절대자의 지위에 오를까봐 현실적 존재자의 대상성을 강조하면서 존재론에 있어서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신(God)은 절대자가 아니다. 신은 세계와 더불어 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신도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도 신을 받아들인다. 즉 신과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대자이다. 신과 세계는 이러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過程, process)에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신학을 과정신학이라고 한다.
신은 항구적이고 세계는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는 항구적이고 신은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은 일자(一者, one)이고, 세계는 다자(多者, many)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는 일자이고 신은 다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세계와 비교할 때 신이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과 비교할 때 세계가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세계가 신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과 세계는 대비된 대립자이다.(pr, pp.597~598)
화이트헤드는 근원적 존재자와 관련하여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환원주의를 반대하면서 점진적으로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을 택한다. 가치판단에 있어서도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상대론자임이 분명하다.
Ⅴ. 맺는 말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상대론자이다. 둘 다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노자에게 있어서 도는 실체가 아니다. 무와 유의 상호작용과정을 지칭했을 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은 실체가 아니다. 세계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상대자이다.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둘 다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노자는 서원반의 과정을 도라고 했고, 화이트헤드는 신도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겪는다고 말했다. 동양의 고대철학인 노자와 서양의 현대철학인 화이트헤드가 지닌 큰 공통점은 둘 다 우주의 근원에 상대성이 놓여 있음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천 몇 백 년 전의 노자철학이 현대에 와서 많이 읽히는 것은 노자철학 속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절대성이 많이 타파되었기 때문이다. 키튼이라는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려면 25세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절대성이 타파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철학자의 상대론을 검토하면서 절대성이 조금이라도 더 타파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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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is paper, the writer analyzed the concept of "relation" and "absolute" in general, dictionary, and technical meaning to find out more accurately that "Laotse" and "whithead" are relativists. The technical meaning of this time refers to relativity and absoluteness of philosophical meaning. Relativity and absoluteness meaning of this philosophical meaning were analyzed in the sense of ontological, epistemological and axiological. The concept of relativity is that a relationship mutually effected on between two equal beings is necessary. The concept of absoluteness is that a relationship mutually effected on between two beings is not necessary. Because one of them is complete or proximity to perfection, it be not affected by the other one. Those who do not need an equal opponent because of their perfection or proximity to perfection at this time are called the absolute. To Laotse, the two partners are Nothing and Being ; to Whitehead, the two are God and the World. To Laotse, Nothing and Being are counterparts who are equal and affect on each other. To Whitehead, God and World are counterparts who are equal and affect on each other. Laotse and Whitehead are therefore both relationists. This is because both do not accept the absolute person and see the origin of the universe as a counterpart.
Key Words : relation, absolute, a counterpart. the absolute, relativism, absolutism, Laotse, Whitenhead, ontology, epistemology, ax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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