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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전번개
광활한 만주벌판 가기전 옥수수 환각에 걸리기 전에
주신개마대분들 댓글 달아주세요!!
목적: 날씨도 덥고/ 사전에 얼굴도 익히고/공부도하고/부족한 준비물도 미리 챙겨보고......
(고구려 못가시는 분들은 나오셔서 쇼핑리스트 요청하시구요 ㅋㅋ)
(전년 고구려 갔다오신분들은 남은 위안화 갖고 오세요 환율 좋게 처드립니다.)
대상: 2010 고구려5차 인원
과거고구려 답사 갔다오신분들 앞으로 고구려답사 가실분들도 봅시다.
일시: 2010-07-22(목) 19:00
장소: 강남역 6번출구 뉴욕제과 뒷골목
(중국요리) 초만원 02-3481-8585
(메세지연락처 : KGB 016-이사사-육삼구육)
혹 항상 열공하시는 열하일기님께서 읽으셨으면 요점정리해주시구요
사전공부(라피오님 추천서적)
1. 고구려유적의 어제와오늘 1. 2 (동북아역사재단)
2. 서길수교수의 고구려역사우적답사 홀본,국내성편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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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 <- 이책은 고구려 산성에 관심이 있는 분만 ...ㅋㅋ
KBS 역사스페셜(역사추적)
20100515 35 고구려성, 만리장성으로 둔갑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압록강변 호산까지
연장하겠다고 선언한 중국.
호산산성 !
그러나 그곳에는 고구려의 성이 있다
고구려 성벽의 흔적을 누르고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중국
지금 요동의 고구려사가 위험하다
신만리장성의 동쪽 끝 호산산성, 그곳은 고구려 박작성이었다.
▲중국이 발표한 새로운 동단기점 표지판
▲새로운 동단기점을 발표했다는 내용의 중국신문
-만리장성의 새로운 동단 발표
2009년 4월 중국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 산해관에서 약 2500KM 떨어진 압록강변 호산성으로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남북방향으로 1600M의 성벽을 신축했다. 그런데 중국이 새로 쌓은 성벽 아래 동북방향으로 고구려식 석축이 있다.
▲‘品’ 형태로 쌓는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
-선명하게 남아있는 고구려 성의 흔적
쐐기 모양의 돌을 ‘品’ 형태로 쌓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성법, 성벽과 같은 방법으로 조성한 직경 4미터의 유물은 중국학자가 쓴 발굴기록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단동시는 이 모든 기록을 무시한 채 90년대 초반부터 호산에 장성 신축을 시작,
원래 있었던 고구려 관련 표식을 모두 철거하고 호산에 ‘호산장성’ 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구당서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찾아낸 이 성의 이름은 고구려 박작성. 이곳은 고구려 해양방어체계의 핵심적 거점이었다.
만리장성은 정말 압록강변에 이르렀나?
▲호산산성
-만리장성의 석축은 어디 있는가?
호산에서 만리장성의 석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중국. 그러나 제대로 된 발굴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만약 중국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호산엔 성과 성을 연결하는 석축의 연결점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성곽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조사한 결과, 신축한 성벽 부근 어디에서도 석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목책과 토담까지 만리장성에 편입시키다.
명대 초, 북방의 여진과 몽골을 방어하기 위해 산해관에서 압록강변까지 구축했던 방어선 요동변장을 만리장성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목책과 토담, 석책까지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다.
변조되는 동북공정, 고구려의 심장까지 치고 들어오다.
▲고구려 발흥의 중심지까지 연결된 만리장성
-한대 만리장성이 통화현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하다
작년 4월에 이어 12월 중국은 또다시 통화현에서 한 대 만리장성의 유적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통화현은 집안 환인과 함께 고구려의 대표적 발흥지. 만리장성의 하나로 지목된 남대자성은 고구려 유적과 한 대 유물이 복합해 출토된 곳으로 일대 주민들은 이곳을 ‘고구려성’이라고 부른다.
-중국성으로 변한 고구려성. 지금 요동의 고구려사가 위험하다
취재진은 비사성, 성산산성, 백암성, 봉황성 등 요동지역 고구려 성들의 현재를 긴급 진단했다. 그 결과 대다수 고구려 성은 중국식으로 변형돼있었고 그 이름조차 중국식으로 개명된 경우도 많았다.
20100116 23 2010 탐사보고 동명(東明) 루트를 찾아서
우리는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을 동명왕이라 알고 있다.
그런데 주몽 이전에 또 다른 동명왕이 존재했다?
동명왕, 그는 누구인가?
동방을 밝힌 성스러운 임금, 동명왕
- 주몽은 동명왕인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 삼국사기는 그를 동명성왕이라 칭하고 있다. 지금껏 우리는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주몽과 동명왕을 동일인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고구려 당대의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고구려 시조 주몽을 추모성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몽은 과연 동명왕일까?
- 동명왕, 부여의 건국시조다.
위략과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고대 역사서에는 모두 동명왕을 부여의 건국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과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은 별개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주몽이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으로 불리게 됐을까?
부여! 감춰져있던 700년의 역사를 밝힌다.
-광활한 만주를 무대로 700년간 존속한 나라 부여.
잘 알려지지 않은 부여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고구려)유리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침범하다가
삼국사기 유리명왕 14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과 연합하여 현토성을 공격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 병사를 주어 현토성을 구원..
삼국사기 태조왕 69년
부여는 전성기 때 인구 8만호에 사방 2천리의 강역을 가진 나라로, 같은 시기 인구 3만호에 불과한 고구려보다 훨씬 큰 나라였다. 특히 한반도는 청동기 유물인 세형동검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부여는 철제무기와 마구, 찰갑 등이 출토돼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상당한 군사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 답사! 동명의 남하루트를 찾는 대장정.
- 부여 동명왕의 실체를 밝혀라.
동명왕에 대한 유일한 단서인 건국신화에는 동명의 출발지로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한다.
그가 탁리국에서 남하해 엄호수를 지나 부여를 세웠다
논형 길험편
그렇다면 탁리국과 엄호수는 어디인가?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동명이 출발했다는 탁리국과 그의 남하 루트를 찾아 대탐사에 나섰다.
중국 흑룡강성 부유현에서 송화강을 건너 길림까지 약 3천KM. 방송사상 최초로 부여를 세우기 위해 동명이 걸었던 길을 밝힌다.
고대 국가들의 원류, 부여의 재발견
- 고구려 주몽의 건국신화는 부여 동명의 건국신화를 차용하여 부여계승 의식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으며 가야, 나아가 발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을 부여에서 나왔으며, 동명왕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부여는 우리 고대 국가 형성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50610 제6편 위성으로 본 국내성, 그곳에 고구려가 있다
고구려역사를 가로채려는 중국의 동북공정프로젝트.
그러나 그들 논리론 미처 풀지 못한 의문을 남겼는데...
초정밀 위성사진과 중국현지답사,
실물크기 그래픽복원으로 선명해지는 우리역사, 고구려!
700년 고구려역사 가운데
- 융성했던 국내성 시대 400여년 역사를 찾아간다.
위성카메라가 포착한 고구려유적, 스튜디오에서 입체화!
최근 제작된 0.6m급 초정밀 위성사진을 입수, 중국 지안지역에 넓게 분포한 고구려 유적 - 태왕릉,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환도산성, 산성하고분군 등의 자취를 한눈에 살펴본다. 여기에 그래픽 작업을 가미, 실물크기로 입체화된 고구려 유적에서 150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건재 하는 고구려의 힘을 느낀다.
환도산성 최초 본격 취재! 수도(왕궁)는 왜 두개인가?
수도인 국내성 근방 ‘환도산성’에서 왕궁터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가 발견됐다. 2003년 중국이 <고구려 4대유적 발굴보고서>를 펴낸 후, HD역사스페셜 제작진이 최초로 현장을 확인한다. 평소엔 평지성에, 유사시엔 산성에 올라갔던 고구려인들, 고구려는 왜 동시에 두 개의 서울을 유지했나? 발굴 결과 공격용 무기수만 456점이 나오는 등 당시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시사하는데... 이러한 고구려를 과연 중국지방정권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고구려인은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했다?
초기 고구려 땅이었던 곳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적석묘. 거대한 돌을 쌓아올린 이 무덤 양식은 국내성, 현 지안(집안) 곳곳에 무려 12,000기나 남아있다. 규모를 보면 작다는 것도 집채만 하며, 가장 큰 것은 한 변 85미터, 높이 15미터에 달한다. 특히 당시 주변국은 토광묘계 묘제가 대세를 이룬데 비해, 고구려만 유독 적석묘라는 독특한 묘제를 발전시켰다는데... 고구려인들이 남긴 세계최대무덤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국학자들을 당혹케 한 고구려인들의 발명품 - 국내성의 어긋문!!!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방치됐던 국내성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제 말끔하게 개축, 단장돼 있다. 그런데 발굴 중에 국내성 서남문 벽이 두개 벽으로 나뉜 이유를 찾지 못해 중국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이는 어긋문으로 일종의 옹성 형태였다. 웬만해선 적이 문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고구려인들이 고안한 것이다. 현지답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고구려의 독창적인 성벽 구조를 밝힌다.
20050701 9편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
광개토대왕비 1775자중 약 1/3이상이 능지기에 관한 기록이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인가??
광개토대왕비문 1775자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비문에는 한면 가득히 대대로 왕릉을 지킬 수묘인이 새겨져있다.
왕릉을 지킨 사람들은 330호, 약 1500명이라는 엄청난 규모!!
그것도 모두가 요동, 한강유역등의 정복지 출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데..
제국 고구려의 체계적인 국가통합시스템을 보여주는 키워드!
수묘인제도를 집중취재한다!
1.광개토대왕의 유언! 330호의 수묘인으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라!
기록에 의하면 당시엔 도굴이 성행해 왕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도록 숨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광개토대왕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힘든 거대한 비석을 세워 자신의 묘를 알리고 지키도록 했다. 광개토대왕이 무덤이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거대한 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비문엔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여 선조왕의 왕릉을 지키기 위함이라 기록하고 있다. 330가구라는 엄청난 규모. 거기다 모두가 요동, 한강지역의 정복지 출신의 새로 편입된 백성들로 구성된 수묘인...그는 왜 왕릉을 지키는 중대한 사업을 정복지역출신의 사람들에게 맡겼는가?
2.가상 전쟁상황실에서 재현해보는 고구려군과 로마군의 전력비교!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정열적으로 수행했던 숱한 정복전쟁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중국 대륙 시라무렌강에서 한반도 남단 종발성에까지 이르는 광개토대왕의 대제국..끊임없은 영토확장의 뒤에는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당대 최고의 군대가 있었다. 최강 고구려의 수준은 어느정도였을까. 가상 전쟁상황실에서 재현해보는 최강군대 로마병사와의 무기류등의 전력비교!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더불어 천하의 중심이라는 신념하에 동서남북 전방으로 뻗어나간 고구려군의 진격루트를 추적해본다.
3.넓어진 영토, 다양한 종족 - 제국 고구려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라!
광개토대왕비에는 국가체제정비와 영토확장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다양한 종족과 문화의 통합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고구려의 모습이 담겨있다.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직접 통치하기보다 제후국으로 거느렸던 고구려! 또한 그 복속민들을 왕릉 수묘인으로 지정하여 점차 고구려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과 자신감! 제국 고구려의 천하관과 국가통합시스템을 살펴본다.
20050729 제13편 장수왕의 승부수 - 고구려 남진 프로젝트
◈ 방송일 : 2005. 7. 29 (금) 밤 10:00-11:00 (KBS 1TV)
◈ MC : 고두심 ◈ 연출 : 장성주 PD ◈ 작가 : 빈선화
장수왕이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낸 까닭은?
광개토대왕기의 활발한 대륙 진출이 벽에 부딪혔다
5호16국의 난립기를 마감하고 북위가 북중국을 통합한 것!
장수왕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과의 외교를 적극 활용한다
바다를 건너 말 800필의 대량수송을 단행했다는 기록을 실마리로,
광개토대왕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최전성기 고구려 역사의 주인공!
장수왕이 펼친 화려한 외교전략의 이면을 파헤쳐본다
1.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에 닥친 위기, 장수왕의 해법은?
장수왕 즉위 즈음, 중국 대륙의 판도는 광개토대왕 때와는 급격히 달라진다. 광개토대왕은 북중국의 혼란을 틈타 영토를 확장했지만, 장수왕은 즉위하자마자 북중국을 통합한 북위와 맞서게 된다. 이에 장수왕은 남쪽의 송, 몽골 초원의 유연과 외교관계를 구축, 북위를 사방에서 견제하도록 유도했다. 송에 보낸 말 800필도 그러한 외교 수완의 일환이었다. 국제관에 마련된 대형 지도를 통해 당시 국제정세를 한 눈에 살펴보고, 장수왕의 해법을 분석한다. 경국대전의 기록 등을 통해 당시 말의 가치를 추정하고, 바다를 건너 대량 수송을 성공시킨 고구려의 해양 운송 능력까지 가늠해 봤다.
2. 즉위 초부터 치밀하게 기획한 장수왕의 장기 프로젝트
장수왕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평양천도. 이때 죽임을 당한 귀족들도 상당수다. 천도는 남진 프로젝트의 신호탄이었던 것. 고구려의 남진에 가장 큰 적은 백제였다. 당시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던 백제와의 빈번한 전쟁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한성을 함락하고, 웅진 목전까지 밀고 내려오며 고구려는 백제를 강하게 위협했다. 평양부터 대전까지 이어지는 장수왕의 남진 루트를 추적, 각지에 남은 고구려 유물, 유적을 확인했다.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파헤친다.
3. ‘한강’ 동북아 네트워크의 핵!
장수왕의 남진정책엔 해상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평양 천도 역시 대동강 하구를 통해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이 컸고, 계속해서 남으로 진출해 한강유역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4, 500 미터 간격으로 견고하게 쌓은 아차산 보루는 한강 유역을 지키려는 장수왕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낸다. 광개토대왕이 대륙을 통해 동북아로 나아갔다면, 장수왕은 일찍이 해상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 발판으로 한강 유역 확보가 절실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한강의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해봤다.
첫댓글 고구려 가기전 꼭 보고 가야겠어요...감사합니다~!! ^^
전 어제 3방향 썬캡하나사고 썬크림 추가로 사고 아 또 몰 사야하나.. 님들 알려주세요..
강남역 6번 뉴욕제과뒷편 초만원 룸으로 예약 완료 / 이따 뵙지요
이제봤어요 ㅠ-ㅠ;
늦은 후기: 참가자 - 8명 목만치/KGB/대장님/마고지나/일탈의 미학/이수이수/기린의 아들/ Love501
사전 준비물과 학습자료등에 대한 간단한 토론
음식: 1차 초만원 - 중국음식 국가대표 총출동 (탕수육/팔보채/유산슬/...짜장/짬뽕)
만주부터~사천요리까지 다 먹고자 했으나 ~~ 중국에서
2차 (구)에어포트 / 삿뽀로비어 --- 예전 강남역 노시던 분들은 잘 아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