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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 - Shanz 3 - Elsen tsul | 몽골 대중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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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전주가 마치,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란 곡의 전주같다.
어쨋든지 몽골은 민요도 그렇고 현대곡도 그렇고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
군중 선동연설과 군가등은 북한 아나운서류나 북한군가와 판박이다.
한반도나 동북삼성에서 나오는 고구려벽화(?)에 늘 나오는 악기인 비파(만도린)와 완함(키타)...
이 완함의 유래는...서역(신장위그루지역)이라는데...
정확힌 신장성"구자(龜玆,쿠차)"..즉, 타클라마칸의 비파를 위(魏)&진(晉)시기 완함(阮咸)이란 인물이 개량한 악기라 한다.
그럼, 목이 긴 완함(키타)은...역사가 말한 중국의 악기란 거고...
목이 짧은 비파(만도린류)는...서역(신장성,타클라마칸유역)악기란 얘기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비파나 완함은...본시 호(胡)들이...말 위에서 타던 악기라 한다.
역사가 말한 호(胡)는 대개 중앙아나 중국 서북지역을 말하긴 하나...크겐 중국의 상대개념인 동이조선의 북쪽까지도 다 호(胡)라 호칭하며...
고구려가 흉노(훈루)나...호(胡)의 우두머리라 했으니....
통상 유라시아 북방 기마 유목민족들의 대명사라 하겠다.
서유럽의 키타란 악기의 유례가 어떤진 자세힌 모르겠으나...
고구려시기 한반도나 동북삼성의 무덤벽화에서도 이 악기를 치는 고구려인(?)들이 나오는 고로...
꼭히, 파미르(총령)의 서역에서 위그루지역으로 들어온게 비파나 완함의 유례라고 확정할 순 없다.
그러나, 완함의 조선 명칭이 윌금(月琴)이고 보면...
현 신장성을 포함한 파미르 서역 전체가 통상적인 윌지(月支)이고 보면...완함(키타)의 기원은 파미르 서역일 확률도 많다.
그럼, 북방 흉노등...호(胡)들의 기마악기인 "비파"를 같이 사용하던 서방 월지인들에게서 비파를 들여와 목이 긴 완함을 개발했단게
역사가 말한 중국(中國)왕조의 위(魏),진(晉)등이고...그 악기를 현재도 가장 많이 전통악기로 사용하는 지역이 신장성지역이니...
역사가 말한 중국의 중심은 현 신장성과 그 서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상대적 동쪽인 돈황 유역부터는 조선과의 경계인 요동벌이라 하겠다.
비파(키타)의 어원이 한자와 무관하게 비파를 내리 칠때는" 비"요...당겨 올릴때를 "파"라 한다니...
비파"는...비파(기타)를 긁적이는 소리를 일컷는 악기명일까 싶다.
그럼, 서구라파인들도 비파를 "피파"정도로 발음해야 하는데...왜 "키타"라 했을까란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키타이(요나라,금나라,중국=신장성?)의 악기란 소리로 해석해 본다.
참고로...러시아는 아직도 중국을 키당(키탄,요나라,거란)이라 부른다.
카자흐스탄등은 엄연히 카라(黑)키탄(키타이)라 명기한다.
어쨋든지...
완함(키타)를 타며 율동하는 고구려 미녀들의 율동과 가락은...
위 동영상에서 활약하는 몽골 여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묘한 감흥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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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태 교수
“일반적으로 교외라고 한다. 재주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날 서커스라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교외라 이야기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재주 장면은 보통 여러 가지 문화요소가 혼합되어서 나타난다. 그래서 고구려의 재주 장면도 자세히 보면 그 기원이 중앙아시아나 이란 쪽에 있는 것들이 보인다. 당시 문화교류의 양상을 알아내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쪽 벽에 있는 행렬도에선 악기가 보인다.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있는 큰 북, 기다란 뿔나팔도 있다. 고구려의 악기는 다양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만도 38종에 달한다. 악기는 자체 개발한 것도 있지만, 교역의 산물이기도 하다. 비파 모양의 완함이 대표적이다.(이미지 2)
전호태
"완함이라는 악기는 원래 기원은 중앙아시아 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앙아시아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가면 그 악기와 똑같은 형상의 모습을 가진 악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돼서 서쪽으로 러시아까지 동쪽으로는 고구려까지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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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함(阮咸, ? ~ ?)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문인으로, 자는 중용(仲容)이다. 진류군(陳留郡) 위씨현(尉氏縣) 사람이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위나라의 무도태수(武都太守)였던 완희(阮熙)의 아들이자 죽림칠현의 다른 한 사람인 완적의 조카이다. 죽림칠현 중에서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가장 없으며, 《세설신어》나 《진서》(晉書)등 당나라나 송나라 대의 저서에서 일부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생몰년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왕융보다는 나이가 많고 죽림칠현 중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술을 잘 마셨으며 종종 완적과 함께 음주를 즐겼는데, 이러한 점으로 인해 당대의 선비들에게 질시를 받았다. 이후 산도(山濤)에 의해 이부랑(吏部郞)에 추천되었으나, 다소 대충대충인 성격에 예법에 구속받지 않는 행동거지와 술을 즐기는 성격으로 인하여 무제(武帝) 사마염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후 순욱에게 계속 배척을 받다가 결국 외지인 시평태수(始平太守)가 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은 이 일화를 바탕으로 완시평(阮始平)이라는 시를 지었다. 이후 늙어 죽었다.
그는 비파를 잘 다루고 음률을 잘 이해했으며, 귀현(亀玆)을 가져와 비파로 개량했다는 설이 생겨나 이후 그 비파를 완함(阮咸)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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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의궤 제1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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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의 등가와 헌가 악기 도설 《오례의》 |

《문헌통고》
〈소서(小胥)〉에 “대체로 종과 경(磬)을 다는 것은, 반(半)을 도(堵)라고 하고 전부를 사(肆)라고 한다.” 하였는데, 주에 이르기를, “종과 경을 엮어서 달 때, 두 층에 각각 8매(枚)씩 16매를 한 틀〔簴〕에 단 것을 도라고 하고, 종 1도와 경 1도를 사라고 한다.” 하였다. 지금의 대성악(大晟樂)이 전대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여 역시 16매를 쓰는데, 12매는 정성(正聲)의 종이고, 4매는 청성(淸聲)의 종이다.
《주례도》
《예서》에, “종을 다는 틀의 세로로 세운 것을 거(簴)라고 하고, 가로로 댄 것을 순(簨)이라고 한다. 순 위에 숭아(崇牙)를 두고, 거 위에 업(業)을 설치한다. 업 위에 깃〔羽〕을 꽂고, 양쪽 끝에 벽삽(璧翣)을 둔다. 종을 다는 틀은 맹수〔臝〕 따위로 장식하니, 두꺼운 입술에 꽉 다문 입, 튀어나온 눈에 짧은 귀, 큰 가슴에 화려한 꽁무니, 큰 몸체에 짧은 목과 같은 모습이다. 그 소리가 크고 웅장하니, 종에 알맞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편경(編磬) 현재 사용한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주례도》
“경을 다는 틀은 날짐승〔羽〕 따위로 장식하니, 날카로운 부리에 갈라진 입술, 작고 가는 눈에 긴 목, 작은 몸체에 납작한 배와 같은 모습이다. 그 소리가 맑고 높아 멀리까지 들리니, 경에 알맞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특종(特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 지금 특종은 등가(登歌)에 사용하고, 그 가종(歌鐘)으로는 편종을 사용한다. -
특경(特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 지금 특경은 등가에 사용하고, 그 가경(歌磬)으로는 편경을 사용한다. -
노고(路鼓)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진씨(陳氏)의 《악서》
〈고인(鼓人)〉을 보면 뇌고(雷鼓)는 천신(天神)의 제사인 신사(神祀)에 치고, 영고(靈鼓)는 사직의 제사인 사제(社祭)에 치며, 노고는 종묘의 제사인 귀향(鬼享)에 친다. 뇌(雷)는 하늘의 소리이고, 영(靈)은 땅의 덕이고, 노(路)는 사람의 도이다. 천신(天神)의 음악은 여섯 번 변하여 뇌고와 뇌도(雷鼗)가 6면(面)이고, 지기(地祇)의 음악은 여덟 번 변하여 영고와 영도(靈鼗)가 8면이다. 인귀(人鬼)의 음악은 아홉 번 변하는데 노고와 노도(路鼗)는 4면이다. 금(金)이라는 물체는 화(化)하기는 해도 변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귀신도 이와 같은데, 금은 토(土)가 아니면 생성되지 않으므로 토를 상징하는 숫자 5로 금을 상징하는 숫자 4에 더한다. 이것이 아홉 번 변하는 까닭인가 보다.
주에는 “뇌고는 말가죽을 사용하니, 건(乾)의 덕은 말이 되기 때문이고, 영고는 소가죽을 사용하니, 곤(坤)의 덕은 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노도(路鼗) 현재 사용한다.

《주례》 〈태사악(太司樂)〉
뇌고에는 곧 뇌도가 있고, 영고에는 곧 영도가 있으며, 노고에는 곧 노도가 있다.
《악서》
고(鼓)로 음악을 절주(節奏)하고 도(鼗)로 음악을 시작하니, 음악을 연주하는 도이다. 도(鞉)는 연주를 시작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다. - 도(鞉)는 도(鼗)와 같다. -
《문헌통고》
도는 작은 북이다. 나무로 꿰었으며, 두 귀가 있어 돌리면 저절로 쳐진다. 뇌도는 북이 3개이고, 영도는 북이 4개이며, 노도는 북이 2개이다.
절고(節鼓)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강좌(江左)의 청악(淸樂)에 절고가 있는데, 모양은 바둑판 같고, 붉은 칠을 한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받침대 가운데에 둥근 구멍을 터서 북을 넣기에 적당하게 하였다. 이 북을 쳐서 음악을 조절한다. 당나라 이후로 아악(雅樂)의 성가(聲歌)에 사용하였으니, 등가의 음악을 시작하고 그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진고(晉鼓)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진고는 그 제도가 크면서 짧으니, 대개 금주(金奏)를 연주하기 위한 것이다. 종사(鐘師)는 종과 북으로 구하(九夏)를 연주하고, 박사(鎛師)는 금주의 북을 관장하니, 아마도 진고일 것이다.
주에 “나무 기둥으로 북을 꿰고, 아래에는 받침〔趺〕을 만들며, 위에는 가로로 댄 순(筍)을 만든다.” 하였다.
축(柷)과 지(止) 현재 사용한다.

《악서》
축이라는 악기는 사방 2자 4치이고 깊이는 1자 8치인데, 한가운데에 바닥에 연결된 ‘몽치 자루〔椎柄〕’가 있어 그것을 두드려서 좌우를 치게 한다. 음(陰)은 2와 4에서 시작하여 8과 10에서 마치니, 음의 수는 4와 8인데 양의 수 1로 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연주하게 되면 모든 악기 중에서 가장 먼저 연주할 따름이고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형(兄)의 도리가 있다. 이것이 축이 궁현(宮縣)의 동쪽에 위치하여 봄이 만물의 처음을 이루는 것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이아(爾雅)》
축을 치는 도구를 ‘지(止)’라고 한다. 축으로써 음악을 합주하여 시작한다. 반드시 연주를 지로 하는 것은 처음에 경계하려는 것이다.
어(敔)와 진(籈) 현재 사용한다.

《악서》
어라는 악기는 형상이 엎드린 호랑이 모습과 같으니, 호랑이는 서방(西方)의 음(陰)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모두 27개의 톱니〔鉏鋙〕가 있으니 3과 9를 곱한 수이고, 채〔櫟〕의 길이는 1자이니 10의 수이다. 양(陽)은 3에서 이루어지고 9에서 변하여 음의 수 10으로 이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그치게 되면 능히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니, 단지 흘러가 버려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족히 지나침을 금함이 있다. 이것이 어가 궁현의 서쪽에 위치하여 가을이 만물의 이루어 마침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이아》
어를 치는 도구를 진이라고 한다. 어로써 음악을 조절하여 그친다. 반드시 연주를 진으로 하는 것은 뒤를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생(笙)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예서》
생은 죽관〔管〕을 박통〔匏〕 안에 열 지어 세우고 죽관 끝에 황(簧)을 설치한다. 큰 것은 황이 19개이고 작은 것은 황이 13개이다. 우(竽)는 황이 36개이다. 생의 길이는 4자이고, 우의 길이는 4자 2치이다. 황은 쇳조각〔金鐷〕으로 만든다. 대개 많은 죽관이 박통 안에 들어 있어 ‘새 둥지〔巢〕’와 같은 형상이 있기 때문에 대생(大笙)을 소(巢)라고 하며, 큰 것이 선창(先唱)하면 작은 것이 화답하기 때문에 소생(小笙)을 화(和)라고 한다.
《문헌통고》
송나라 왕조의 대성악에서 전해지는 생은 모두 황이 17개이다. 옛날에는 17개의 죽관 외에 2개의 죽관을 설치하여 일정하게 두지 않았으니, 이것을 의관(義管)이라고 한다.
《대성악보(大晟樂譜)》에 생은 대나무를 모아 만든다고 하였는데, 17개의 죽관을 사용하되, 앞에 8개의 황, 뒤에 9개의 황이다. 높고 낮은 것은 차서가 있는 것이다. 죽관이 긴 것은 9치 5푼이고 밑바닥의 높이는 2치 5푼이니, 전체의 높이는 1자 5치이다.
관(管)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주례도》
6개의 구멍은 12개월의 음(音)이니, 관 두 개를 나란히 합하여 분다.
《악서》
선왕이 관을 만든 것은 음양의 소리를 통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양은 홀수이면서 혼자이고 음은 짝수이면서 무리를 이루며, 양은 크면서 적고 음은 작으면서 많으며, 양은 드러나서 밝고 음은 그윽하여 어둡다. 고죽(孤竹)으로 만든 고죽관은 천신(天神)을 강신하게 하니, 양의 홀수이면서 혼자인 점을 취한 것이고, 손죽(孫竹)으로 만든 손죽관은 지기(地祇)를 나오게 하니, 음의 작으면서 많은 점을 취한 것이며, 음죽(陰竹)으로 만든 음죽관은 인귀(人鬼)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니, 음의 그윽하여 어두운 점을 취한 것이다. 《역(易)》에 “향방은 부류로써 모이고, 사물은 무리로써 나뉜다.”라고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우(竽)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화(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지(篪) 현재 사용한다.

《주례도》
《대성악서(大晟樂書)》에 “훈(塤)과 지는 모두 구멍이 6개인데, 다섯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 하였는데, 이 두 악기는 구멍을 모두 막으면 황종(黃鐘)이 되고, 구멍을 모두 열면 응종(應鐘)이 된다. 이것이 훈과 지가 서로 화응하는 까닭이다. 나머지 악기도 모두 그렇다.
훈(塤) 현재 사용한다.

《주례도》
훈의 모양은 저울추와 같고, 흙으로 만든다.
《시경》에는 ‘훈(壎)’으로 되어 있다.
《악서》
훈이라는 악기는 입추(立秋)의 음이다. 바닥이 평평하고 구멍이 6개이니 물의 수이고, 속은 비고 위는 뾰족하니 불의 형상이다. 훈은 물과 불이 서로 합한 뒤에 악기가 완성되니, 또한 물과 불이 서로 어울린 이후에 소리를 이룬다. 그러므로 큰 것은 소리가 황종과 대려(大呂)에 맞고, 작은 것은 소리가 태주(太簇)와 협종(夾鐘)에 맞으니, 요컨대 중성(中聲)의 조화에 있을 따름이다.
주에는 “훈의 여섯 구멍은 위에 하나, 앞에 셋, 뒤에 둘이다.” 하였다.
둑(纛) 현재 사용한다.

《악서》
〈군자양양(君子陽陽)〉 시에 이르기를, “왼손에 깃일산을 잡고〔左執翿〕”라고 하였고, 〈완구(宛丘)〉 시에 “백로 깃을 꽂고 있도다.〔値其鷺翿〕”라고 하였는데, 《이아》에 이르기를, “도(翿)는 둑이다.” 하였고, 곽박(郭璞)은 말하기를, “지금의 우보당(羽葆幢)이다.” 하였으니, 대개 춤추는 자가 세워 두어 의용(儀容)으로 삼는 것이지 손에 들고 추는 물건이 아니다.
성조(聖朝 송나라)의 태악(太樂)에서 쓰는 것은, 높이가 7자이고, 깃대 머리에 나무 봉황을 앉혔으며, 드리운 깃대 장식은 한 겹이고 승천하는 용을 그린 훈백(纁帛)을 매달았다. 두 명의 공인이 이것을 들고 좌우로 나뉘어 서서 문무(文舞)를 인도하니, 또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제도를 얻은 것이다.
휘(麾) 현재 사용한다.

《악서》
주관(周官)의 건거(巾車)는 목로(木路)를 관장하는데, 목로에 대휘(大麾)를 세워 사냥을 하고 번국(藩國)을 봉하는 데에 사용한다.
《서경(書經)》에 “왼손에 황월을 쥐고, 오른손에 백모를 잡고서 깃발을 휘두른다.〔左仗黃鉞 右秉白旄以麾〕” 하였으니, 휘(麾)는 주(周)나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후세에서는 협률랑(協律郞)이 이것을 잡고서 악공(樂工)을 호령하였다. 대개 그 제도는 높이가 7자이고, 깃대 장식은 용머리로 하였으며, 훈백을 매달고 그 위에 승천하는 용을 그렸다. 음악이 시작될 때 이것을 들고 음악이 그치면 이것을 누인다. 당 위에서는 서계(西階)에 세우고, 당 아래에서는 악현(樂懸)의 앞쪽에서 조금 서쪽에 세운다. 《당악록(唐樂錄)》에서 ‘훈간(暈干)’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대성악보》
기폭〔幡〕은 위에 매단 검붉은 색이 5치이고, 가운데의 비견(緋絹)이 3자 6치이며, 아래의 황색이 5치이다. 받침이 있다.
우(羽)와 약(籥)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약사(籥師)는 제사 때에 고동시켜 우와 약을 들고 추는 춤을 추게 한다.
《시경》
왼손에 약을 잡고 오른손에 적을 들었네.〔左手執籥 右手秉翟〕
대개 약은 소리를 위한 것이고, 적은 의용(儀容)을 위한 것이다.
조촉(照燭) 현재 사용한다.

《시경》
조촉의 제도는 장대로 그 끝에 강라(絳羅)로 만든 등롱을 달고, 그 가운데에 촛불을 켠다. 밤에 어둡고 휘가 멀어 분변하기 어려우므로 이것을 들어서 음악을 시작하고 뉘어서 음악을 그친다.
방향(方響) 현재 사용한다.

《악서》
방향의 제도는 대개 양(梁)나라의 동경(銅磬)에서 나왔다. 모양은 길이가 9치이고 폭이 2치이며, 위는 원형이고 아래는 방형이다. 그 수는 16개로 두 줄로 엮으며, 업(業)은 설치하지 않고 틀 위에 의지하여 종(鐘)과 경(磬)을 대신한다. 모두 16성(聲)이니, 12율에 배열하고 나머지 4성은 청성(淸聲)뿐이다. 후세에서는 혹 철로 만들기도 하였다. 교방(敎坊)의 연악(燕樂)에 사용하고, 지금 민간에서 사용되는 것은 겨우 3, 4치일 뿐이다.
교방고(敎坊鼓)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통고》
제도는 큰북과 같다. 반룡(蟠龍)의 무늬가 북통에 빙 둘러 있으며, 횃대〔架〕가 있고 받침이 있다. - 지금 교방에서 사용하는 북의 제도가 이와 같다. -
장고(杖鼓)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갈고(羯鼓), 장고, 요고(腰鼓)는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에서 사용하였다. 큰 것은 질〔瓦〕로 만들고,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이런 부류는 모두 머리 부분이 넓고 배 부분이 가느니, 송나라 사람 소사(蕭史)가 말한 세요고(細腰鼓)가 이것이다. 오른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두드린다. 후세에서는 그것을 장고라고 하였다. 그 소리는 조화롭고 웅장하여 절도가 있다.
박(拍)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박판(拍板)의 길이와 너비는 손을 겹친 것과 같다. 큰 것은 판이 9개이고 작은 것은 판이 6개인데, 가죽 끈으로 엮는다. 호부(胡部)에서 음악의 박자로 삼았으니, 대개 손뼉〔抃〕을 대신한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간혹 이것을 써서 악곡의 일정한 박자를 만들었다. 송나라 왕조의 교방에서 사용한 것은 판이 6개이고 길이는 1치이며, 위는 뾰족하고 얇으며 아래는 둥글고 두껍다. 박달나무〔檀〕나 뽕나무〔桑〕로 만들었으니, 축(柷)과 어(敔)의 변형인 듯하다.
월금(月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통고》
월금은 형태가 둥글고 목이 길다. 위에 4현(絃)과 13품주(品柱)를 안배하였으니, 금휘(琴徽)를 본뜬 것이다. 현의 축(軸)을 돌려서 율을 맞춘다. 진(晉)나라 사람 완함(阮咸)이 만들었다. 당 태종(唐太宗)이 다시 1현을 더하여 그 현에 금, 목, 수, 화, 토라고 이름 붙였고, 개원(開元) 연간부터 아악(雅樂)에 편입하여 사용하였으니, 아마 순 임금의 유제(遺制)를 얻은 것인 듯하다.
해금(奚琴)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해금은 호중(胡中)의 해부족(奚部族)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현도(絃鼗)에서 나와 모양도 유사하다. 제도는 두 현 사이에 죽편(竹片)을 넣어 퉁기는 것이다. 민간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현금(玄琴) 현재 사용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현금은 중국 악부(樂部)의 금(琴)을 본떠 만들었다.
《신라고기(新羅古記)》
처음에 진(晉)나라에서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내왔다. 당시에 제2상(第二相)인 왕산악(王山岳)이 그 법제를 고쳐 제작하고, 겸하여 악곡을 지어 연주하였는데, 이에 현학(玄鶴)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이라고 하였다.
가야금(伽倻琴) 현재 사용한다.

《삼국사기》
가야금은 쟁(箏)의 제도와 조금 다르지만 대개는 비슷하다.
《신라고기》
가야국(伽倻國)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제작하였다.
당비파(唐琵琶) 현재 사용한다.

《악서》
비파의 제도가 가운데는 비고 겉이 실한 것은 천지의 형상이고, 반(盤)이 둥글고 자루가 곧은 것은 음양의 순서이다. 기러기발〔柱〕이 12개인 것은 율려(律呂)에 맞춘 것이고, 4개의 현(絃)은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며, 길이가 3자 5치인 것은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을 본뜬 것이다. 진(秦)나라 말에 백성들이 장성(長城)을 쌓는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이 악기를 만들어 근심을 풀었다.
《석명(釋名)》
비파는 본래 호중에서 말 위에서 타던 악기이다. 손을 밀어 전진하는 것을 비(琵)라고 하고 손을 당겨 물리는 것을 파(琶)라고 하니, 이것을 인하여 악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문헌통고》
당악(唐樂)에 대비파(大琵琶)와 소비파(小琵琶)의 제도가 있다. 지금 교방에서 사용하는 것은 바로 목이 굽은 것이고, 목이 곧은 것은 아니다.
향비파(鄕琵琶) 현재 사용한다.

《삼국사기》
향비파는 당나라의 제도와 대동소이하니,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제작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대쟁(大箏)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통고》
쟁은 진(秦)나라 지역의 음악이다. 부현(傅玄)의 〈쟁부서(箏賦序)〉에 “위가 높은 것은 하늘과 같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과 같다.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六合)에 준하였고, 현주(絃柱)는 열두 달에 비겼다. 설치하면 사상(四象)이 있고, 연주하면 오음(五音)이 발하니, 이야말로 인(仁)과 지(智)의 악기이다.” 하였다.
《석명》
쟁은 현을 타면 높아서 소리가 쟁쟁(箏箏)하다. 하였으니, 병주(幷州)와 양주(梁州)의 쟁은 모양이 슬(瑟)과 같다.
《풍속통(風俗通)》
쟁은 본래 5현이었으나 지금은 13현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수서(隋書)》 〈음악지(音樂志)〉
쟁은 13현이고, 몽염(蒙恬)이 만들었다.
아쟁(牙箏) 현재 사용한다.

《악서》
당나라에 알쟁(軋箏)이 있으니, 편죽(片竹)으로 그 현을 매끄럽게 하여 퉁긴다.
당적(唐笛)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풍속통》에 이르기를, “적(笛)은 씻어 낸다〔滌〕는 의미이니,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을 씻어 내고 고상하고 바른 기운을 들이는 것이다. 길이는 1자 4치이고, 7개의 구멍이 있다.” 하였다.
《악서》
적이 씻어 낸다는 것은 사악한 기운을 씻어 없애고 바른 소리를 내어 드날린다는 것이다.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笒)의 제도도 같다. 현재 사용한다.

《삼국사기》
삼죽(三竹)이란 첫째는 대금, 둘째는 중금, 셋째는 소금이니, 역시 당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이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퉁소(洞簫) 현재 사용한다.

《석명》
퉁소는 밑이 없는 소(簫)이다.
왕자연(王子淵)의 〈퉁소부(洞簫賦)〉
통(洞)은 통(通)이니, 밑이 없음을 말한다. 위와 아래가 서로 통하므로 퉁소라 한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퉁소의 구멍은 8개이다.
필률(觱篥) 현재 사용한다.

《악서》
필률은 일명 비율(悲篥)이라고도 하고, 일명 가관(笳管)이라고도 하니, 강호(羌胡) 구자(龜玆) 지역의 음악이다. 대나무로 관(管)을 만들고, 갈대로 머리〔首〕를 만든다. 모양은 호가(胡笳)와 유사하고, 9개의 구멍이 있다. - 당필률(唐觱篥)은 9개의 구멍이 있고, 향필률(鄕觱篥)은 8개의 구멍이 있다. -
태평소(太平簫) 현재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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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오랫만에 비파 음악을 들어봅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이 비파연주 소리를 아주 좋아합니다.
비파를 갖고 조선사와 연계하는 님의 순발력은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새하곡이나 새상곡 또는 변새곡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어여쁜 호녀들의 비파 연주 소리가 나옵니다. 고구려 역시 '호국'이라고 기록한 것이 수경주입니다. 오랫만에 듣기 좋은 비파연주를 감상합니다. 두번, 세번 들어도 지루하지 않네요.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한반도와 현재의 만주,그리고 신강성등지에 나타나는 완함의 모습을 보건데, 현 중국 중원의 서, 북, 동 에 넓게 퍼진 문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중원이 고구려(대륙)의 핵심강역임을 생각한다면 이곳(중원지방)에도 남아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 중국 주요부에 고려와 조선의 문화(가령 판소리나 윷놀이, 아리랑, 한복(韓服)....등)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역사의 왜곡과 문화대혁명동안에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군요...
아마 라후족의 언어와 문화가 우리와 비슷한 것이, 혹은 저번에 들었던 티벳음악(얄리 얄리 얄라셩~~~하는)이 고려가요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것 등등이, 고려와 조선의 문화가 중원에서 지워지고 아주 변방이나 산간 오지에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안의 피라미드나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중원의 지하 유물에는 조선의 문화 유산이 남아 있겠죠...? 가령 한글로 된 편지라든가..
중국에서 동이족문화(?)가 발굴되면 옛날에는 그냥 묻어 버렸다는 말도 있더군요...
위의 종묘의궤에 답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완함은 지금(근세조선시대)은 사용하지 않는다 했으니...종전까진 완함을 전통악기로 사용치 않았던 현 중원 남부가 근세조선의 주 강역이고 삼한(三韓)이자 진단(震旦)이란 말이 되는 이치입니다.
또한 완함은 월금(月琴)이라 하여...중앙아시아의 비파를 이름함이고...목이 긴 완함은 고대 중국이 개조한 악기라는데...그걸 신장 위그루인들이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니...고대 중국의 위치는 타클라마칸 일대가 중심이란 증거입니다.
정작 단군이 개국한 고조선의 강역은 근세조선이 일부만 갸오 회복했던 것이고...호(胡)라 일컬어 졌던 발해와 거란 금나라등의 강역이 오히려 고구려의 주 강역이자 고조선의 주 강역이란 반증입니다.
근세조선의 문화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나라?)는 현재 우리나라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근세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라 하기에는(대륙조선사관(?) 입장에서 보면...) 무리수입니다. 신강성 위그루인들이 전통악기를 가장 잘 보존했다하여 그곳이 고대 중국이란 증거다라는 것은 쫌 비약이 아닐까요...지금 중국의 주요부인 황하와 양자강사이에 조선의 문화는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중국 남부의 문화가 치고 올라왔다고 말씀하신줄 알고 있는데요...
왕건고려와 근세조선의 강역은 현 중원에서 살짝 동쪽으로 치우친 중남부로...역사가 말한 고조선의 남쪽에 있었단 삼한(진단)의 땅이 맞을듯합니다...근세조선이 완함을 사용치 않았듯...현 중원 남부도 완함을 잘 사용치 않다가 요즘에야나 민속악기로 등장시키는 것인데...이는 현 중원의 원조 조선강역을 근세에 치고 들어온 서남아 짱께족들도 마찬가지 풍속이겠으나...애초부터 원 주인인 중원조선의 풍속에서도 사라진 악기이기에...청나라 (胡)의 강역였던 신장성과 내외몽골등지가 가장 잘 보존시킨 이치라고 전 보는겁니다.
고구려의 강역이 어디까지였는지 알기는 어려우나, 현 서안 낙양의 선은 고구려의 강역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고대 중국의 위치가 어디였는가는 님과의 생각이 조금은 다릅니다. 신강성이나 중앙아는 고구려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역사의 주 강역에서 조금은 벗어난 변방이란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변방이나 산간오지에 고구려나 혹은 근세 조선의 문화가 그 명맥을 유지해 오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를 한것입니다.
그 변방이 바로 연행사들이 말한 연경은 황무지에 성체만 두른 하잘것 없는 성이라 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기원전후 상고대엔 엄연히 요해(타클라마칸 저지대)의 풍부한 수량과 강줄기들로 번성한 지역였다 생각합니다.
조선은 황제국이었습니다. 황제국에서 현 천산산맥 부근 어디쯤(중앙아..?)에 있었다는 청(淸)나라에 연행록에 나오는 사신을 보냈을리 없습니다. 연행록의 사신들은 조선의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중국...경기)로 갔다고 밖에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중앙정부인 중국의 패권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북쪽 사람들(여진족이라 하는..)이 잡게 되면서 정통 조선사람들(황하이남의 현 중국대부분..)이 웬수처럼 여겨 격멸하였던 것이죠.. 조선의 정치체계는 이원적이었다 생각합니다. 황제의 직할통치 지역인 중국(대략 사방 천리)이 있고, 그 외의 사방에는 황제의 아들들이나 친인척, 혹은 공신들이 나누어 다스렸을 것입니다.(제 생각임니다)
그 중앙정부의 패권이 북방족의 손에 넘어간 후에(병자호란) 조천에서 연행(燕行)으로 바뀌게 되고(북쪽 오랑케라 비하한 의미로..) 지방정부(한양으로 추정되는 현 서안, 혹 낙양 무한...? )에서 연경이라는 북경(태원..?)으로 연행사들은 여행을 하고 그 북경(태원?)과 한양(서안?)사이에 그 유명한 요동벌이(유주)있는 것입니다. 기주는 천하의 중주(中州 )이자 중국(中國)입니다. 고대 중국(하 은 주)은 기주에 있고 그 기주가 현 산서성일대라는 기존의 설(說)은 맞다 생각합니다.
이 산서성 일대가 기주(冀州)이자 중국(中國)이고 경기(京畿)이고 이런 구도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생각합니다. 이 중국내에 있던 수 많은 크고 작은 지명(地名)등이 현 중국대륙 사방으로 이동되고(그래야 중국이 큰나라로 보이므로..) 중국을 포함한 조선 천지는 반도로 왜곡 이동되고(반도내에 경기(京畿)가 것이 대륙에서의 중국(中國)입니다...) 반도와 대륙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기주의 일부였던 유주가 현 뻬이징부터 만주와 심지어 한반도 북한의 평양까지 고무줄 늘어지듯 늘어저 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청(淸)이라는 나라가 신강성이나 혹은 중앙아 어디쯤에 있었다면 신강성 동쪽의 조선(이도 상당히 큰 세력입니다..)을 제압할 더 큰 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어떤 세력이었을까요...?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조선과 청은 1910년과 1911년에 거의 동시에 망하게 한 또다른 더큰 세력은 누구이고 연행사들이 갔던 연경의 여정중에 보이는 수 많은 문화와 유적들이 현 산서성에도 있는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지요... 또 남북으로 흘러야 할 요하는 어디에 있는지요..
참 싱싱하네요.
여자는 본시 북방쪽 여자들이 갑이고 남자는 저처럼 남방계 남자가 실하다고 하잖아요...^^!
근거는 없습니다.... 근데 비파는 왜 당비파라고 부르게 된 걸까요?
당나귀 타고 온 여악사가 비파를 타고 와서 전파해서 당비파라고 한 것일까요?
비파는 유일하게 악보가 없다고 하네요. 즉 궁중에서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누군가 외국에서 기증한 악기라는 건데요. 즉 외국의 사신이 기증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 여인들과 우리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