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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318 이지현교우님의 솔성요론 1~5조 강연
-김제원교무님 설법
지난 주까지는 계문에 대해서 3주에 걸쳐서 하였습니다. 계문 상당히 도움이 되셨습니까? 원불교 교리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활용해서 쓸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솔성요론입니다. 솔성요론은 총 16조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하자는 조목 16조, 말자는 조목 30조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먼저 솔성이라는 것은 견성(見性), 양성(養性), 솔성(率性) 중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원불교에서 솔성이라는 것은 작업 취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품을 거느린다, 혹은 성품을 쓴다는 것입니다. 성품을 보고 성품을 기르고, 기르고 난 후 그것을 써먹는 다는 것입니다. 솔성요론은 취사의 취(取)에 해당되며, 하자는 조목입니다. 지난주에 했던 계문은 취사의 사에 해당되며 말자는 조목에 해당됩니다. 솔성이라는 것은 나타나기 이전의 근원인 것입니다. 만물은 알아서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은 그것을 쓰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이 들어서 쓰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엇이 들어서 쓰는 것일까요? 분별(分別)은 무분별이 들어서 분별을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분별이라는 것이 자기 혼자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솔성이라는 것은 실행만 잘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그것, 무분별이 분별을 잘 조절해서 은혜를 다투어 내자라는 것입니다. 무분별을 성품이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견성(見性)- 연구 소(小)자리 양성(養性)- 수양 대(大)자리 솔성(率性)- 취사 유(有)자리 제대로 된 솔성은 무시선과연결이 됩니다. 무시선이라는 것은 똑같이 교수님이 강의를 하고, 똑같이 택시기사를 하고, 똑같이 밥을 합니다. 그런데 뭔 차이가 나는가 하면요? 원불교인은 무분별이 분별을 운용해서 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분별이 분별로서 대체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솟아나오기 이전 자리를 바탕으로 그 마음을 잘 조절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이 육근을 조절해서 쓰듯이, 그 마음은 다시 성품을 조절해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품을 쓰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는 것이냐?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이 필요하고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도대체 성품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 성품을 잘 길러내야 그것을 잘 활용해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혹은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잘살고 싶습니다. 누구나 다 시험에 붙고 싶습니다. 하지만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신을 잘 쓰고 싶지만, 수양과 연구라는 사전 관문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수양을 잘하기 위해서는 연구와 취사가 필요하고, 연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수양과 취사가 필요합니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양은 수양대로 독립되지 않고, 연구는 연구대로 각각이 독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대소유무가 한통속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학 자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위력에 대해서 받들어 모시기만 하지, 그 위력의 내면 구성의 속성, 나와의 관계, 참 실재가 무엇인가, 그것을 실제로 써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주까지의 계문은 말라는 조목으로서의 솔성인데요. 그 계문을 잘 지키면서 연구가 잘 되고, 수양이 잘 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솔성도 잘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부터 할 솔성을 잘 함으로써 수양과 연구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첫 조항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고, 두 번째 조항에도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원기 26년(즉 대종사님 열반 2년 전) 1월 28일 게송을 발표하십니다. 죽기 전에 하신 게송이 아니라 2년 전부터 공전(公傳)으로 발표하셨습니다. 게송을 발표하고 나서 그 전부터 있었던 솔성요론 중에 지금 현재 있는 3조, 사생 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 솔성요론의 1조였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이 원기 26년 게송 발표 이후에 3조와 1조를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유학자셨던 분이 “무슨 소리이십니까? 이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배워야 믿음도 나오고 사람이 클 것 아닌가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 “좀 기다려 보거라. 조금만 있으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돌아가실 것을 염두해 두셔서 나는 멀리 수양길을 떠난다라고 말씀하셨고, 게송도 미리 발표하신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솔성요론 1조에 나오는 사람(대종사님)이 법을 내 놓았습니다. 만약에 사람만 믿는다면 법으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면 원불교는 문 닫게 될 것입니다. 즉, 인격 신앙에 멈춰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 실례는 굉장히 많습니다. 대종사님이 열반하시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대종사님을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분이 돌아가셨으니 불법 연구회는 끝났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종사님은 정산 종사님을 열반 전에 교육을 다 시켜서 자신이 돌아가시고 난 후 정산종사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교당에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 솔성요론 1조를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들어오자 마자 일원상 보지 않고, 교무님 역시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기들만 쳐다보는 사람들은 솔성요론 1조를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 보러 왔고, 분위기 보러 온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색신(色身)=화신(化身)으로 법신(法身)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법신불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의 법신을 쳐다보지 않고 사람만 쳐다보는 이런 학생은 결국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나하면 사람은 유무(有無) 즉, 있어졌다 없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로병사, 즉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있다가 부처님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처님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데 죽게 되어있습니다. 1월달에 교단에 단이 바뀌면 꼭 나오기 싫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전 단이 지금 단보다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교당에 교무님이 바뀌게 되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바뀌고 법으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 중에 기쁨의 믿음에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승을 만났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그 스승이 내 놓은 법을 알아갈 때입니다. 세 번째는 내 안의 불성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상근기의 기쁨이요, 이 3가지가 조화가 되었을 때, 대단한 낙생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공부가 일취월장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한양대 교수로 계신 분께서 “교무님 제가 원남 교당에 예쁜 아가씨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처음에 발을 들였다가 우리 교당과 사회를 위해서 소중한 불자로서 있으면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둘이 만나서 결혼 한 후에 둘 다 교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원불교 교리도를 보면, 일원상이 있고, 왼쪽에는 사은사요가 있고 가운데는 일원상의 설명과 게송이 있고 오른쪽에는 진공묘유의 수행문이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리의 출발은 바로 사은입니다. 인과에 대한 믿음입니다. 현상적인 것이며 피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신, 분, 의, 성의 신입니다. 정신 수양도 사리 연구도, 작업 취사도 신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그 신이 분으로, 그 분이 의로, 의가 성으로써 연결되어질 때, 그 삼대력을 빨리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작업취사가 사은사요의 실행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은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으로 천치라도 알 것입니다. 사은의 은혜를 바탕으로 인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조,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불공하는 법에서도 ~만자가 나오는데, ‘불상에게만’ 여기에서도 만자가 나옵니다. 제가 외국에서 나가서 무슨 일을 할 때는 “제가 어릴 때 학생회를 했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누구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는데, 사람만 연결되어 있을 뿐, 법과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의 추억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화를 해도 인정교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개척 교화에서도 인정교화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불교에서는 인정교화를 넘어 설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법으로, 법연으로 승화되어야만 합니다. 대종사님께 “인격신앙과 교조신앙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말씀 드리자, “나를 가운데다가 모실 필요는 없다. 유공인을 기념하고 대우할 필요는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보면 모든 종교의 신앙의 대상은 인격화 되어있습니다. 원불교는 법신 자체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기가 약하시거나, 지혜가 어두우신 분들은 아직은 조금 어렵습니다. 인격화된 종교는 친근화된 경우가 있습니다. 원불교는 인격체를 배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신의 육신과 스승님과 더불어 법신까지 즉, 형체와 심체를 같이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잘 믿을려면 법을 잘 믿어야 하고 법을 잘 믿을려면 사람을 잘 믿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성자가 없으시면 공 즉 빈 껍데기라고 하셨습니다. 부분신앙을 아울러 전체 신앙으로 돌린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부분신앙을 더 넘어서서 법신, 법으로 끌어주는 것입니다 즉 전체신앙, 사실신앙으로 끌어 주는 것이 바로 솔성요론의 1조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실신앙인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특성이라는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대종사님 다르시고요, 정산종사님 다르십니다. 그러나 그 근원의 진리의 깨달음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재생의세의 대종사님의 개교동기를 향한 그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표현방식이나 습관, 형식이 다른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지시형입니다. 정산 종사님은 지시형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정이 너무 떨어지면 안됩니다. 반드시 인정에만 너무 떨어지면 법이 멀어질 수 있습니다. 법으로 승화된 인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정과 함께하는 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국한되어질 수 있습니다. 편착심이 일어날 수 있고, 법연이 한정될 수 있습니다. 인연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연이 너무 많은 것이 나중에 곤란해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한정되어도 안됩니다.
신(信)이라는 한자를 보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씀을 드리냐 하면 사람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법강항마위 이상의 스승이거나 아니면, 그런 스승의 말씀을 전하는 스승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과 불변, 주와 종, 본과 말 이것을 다 믿게 만들도록 쓴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나만 받들지 마라. 너희가 나 같은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만 받들지 말고, 나를 닮아 나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가 깨친 말을 깨쳐라 거기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2조,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 10사람=원수(元數), 무정수(無定數) 10사람이라는 것은 최종 수, 여러 대중, 많은 숫자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정수라고도 합니다. 즉 정할 수 없는 숫자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니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기도만 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90%가 기도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큰 마트에 가서 무언가를 사려고 해도 한참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듯, 물건을 잘 고르는데 묘하게도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잘 고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즉 하나를 다니게 되고 믿게 되면 다른 것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예비교역자가 출가 서원을 세우고 출가 했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나가고자, 종법사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데, 종법사님은 귀에 대고 “그래 잘가라, 가서 여기보다 좋은 곳 있으면 나에게 말해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법의 총설을 보면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라고 나와있습니다. 원불교는 원불교의 색채가 있는 것은 원불교가 아닙니다. 원불교가 아닌 원불교가 참 원불교인 것입니다. 즉, 성자들은 우주의 천도를 모아서 인도적인 기를 내 놓습니다. 이런 기를 내 놓을 때, 세도의 인심을 보고 그곳에 가장 필요한 것을 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하나했으니깐 그것만 한다라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거기에 맞춰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종교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입니다. 의견, 방법, 교법, 주장 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것만 고집한다는 것은 그건 아닙니다. 간택이라고 하고 선택이라고 합니다. 좋은 법을 선택해서 믿어라고 하는 합니다. 박학다식이라고 하는데 한번 선택해서 믿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에 불법연구회의 2대 회장이 조송광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원래 기독교 장로셨는데 대종사님과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목을 뻣뻣히 세우고 왔다가 2시간도 되지 않아서 조송광께서 대종사님께 졌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씀이 “선생님의 법은 광대하십니다. ”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 그래, 너의 이름은 조송광이다. 광대하다고 계속 말하는 것을 보니 읋을 송자에 넓을광”말씀하셨습니다. 조송광은 대종사님의 법을 알아보시고 원불교에 회개하고 딸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원불교 공부를 하면 일과 이치에 대한 원리를 알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원리를 알면 기독교의 교육, 천주교, 증산도의 교리를 들어도 알수 있습니다. 원불교는 민주(民主)주의요, 공화(共和)주의를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는 좋은 것은 전부 옮길 것이다. 그러면 원불교는 무엇이냐? 원불교가 아닌 것이 원불교인 것이다. 3조, 사생(四生) 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요, 법으로 승화시키는 믿음, 전체신앙의 믿음을 가지고 여러 가지 법 중에 제일 좋은 법을 믿어라 그 다음에 배우라는 것입니다. 사생(四生)이라는 것은 출생방식이 4가지 라는 것입니다. 사생은 모두 유정물(有情物)입니다. 태-사족 란-조류,어류 습-충 화-화(化) 이중에 사람은 사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 사람 만이 영혼 중에도 깨달을 각자가 있습니다. 태 중에는 사람말고도 축생이 있습니다. 사생 앞에는 육도가 있어서 사생은 6가지의 길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축원을 할 적에 악도에 떨어지지 말고 선도에서 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세생생 사람의 몸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수양에 보면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을 하게 되었느냐? 사람은 최령하다 욕심이 굉장하게 많다. 사람은 배울 때 과학(科學)을 우선적으로 배우려고 하는데 도학(道學)까지 같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연사조 삼학팔조를 다 배워야 일상수행 요법을 다 배워라. 왜냐하면 과학만 배우면 전쟁이 난무하고, 재판하고 끝납니다. 도학만 배우면 가난해 진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모두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학의 뿌리에 과학의 잎과 뿌리로 꽃을 피워야 합니다. 만약에 도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 물질문명, 지식, 명예에 다 걸려 들어갑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 80% 이상이 배움에 있습니다. 배움에 기쁨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잘 배운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가장 잘 사는 사람 잘 배운 사람입니다. 못 배운 사람이 잘 사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격향상의 원동력이 배움이요, 인생의 가치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배움인 것입니다. 범부와 중생도 결국은 배움과 깨달음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진급과 강급도 배움에 있습니다. 그 배움이라는 것은 삼학을 통째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춘천에 갔을 때 옥을 기가 막히게 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옥을 잘 갈아야지 멋진 불상이 되는 것입니다. 돌맹이도 잘 갈아야지 명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명인이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잘 갈고 닦아야만 합니다. 그냥 천연석으로 놓으면 안됩니다. 천연 지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여지 영생이 학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한편의 집착, 한편의 편착에서 넓게 배우지 못하고, 때로는 나는 모르는 것이 좋다는 등 배우기 싫어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배우기 싫어하는 사람의 특징은 스승이 없는 사람, 큰 목표가 없는 사람, 책이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 일 것입니다. 지식은 한량이 없습니다. 사람은 배움이 딱 끊어지면 맥이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강급의 길, 병의 길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생생한 기운을 받는 다는 것은 배울 때 가장 생생한 것입니다. 배울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본래 근본 자리인 참 자기에 대한 배움, 마음에 대한 배움, 우주 진리에 대한 배움이라는 것은 엄청난 법연 세계에 끌여 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슴으로 우셔보셨습니까? 저는 출가하기 전에 법문을 듣는데 가슴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과학은 일생에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학은 영생까지도 필요한 것입니다. 안으로도 배우고 밖으로도 배워야 합니다. 지식과 지혜가 같이 병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채우는 배움과 비우는 배움이 두가지가 다 있습니다. 분별로 채우는 배움과 분별을 놓아버리는 배움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空)과 원(圓)입니다. 공(空)세계라는 것은 비움의 세계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일생이 자기와의 투쟁입니다. 자신의 육신과 정신과의 투쟁, 자기의 욕심과 양심과의 투쟁입니다. 항상 자기라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상한다면 상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한테 자기가 속아서 헛된 자기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圓)자리는 철저한 분별의 세계이며, 과학의 세계입니다. 공자리와 원자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비움 마음에 채울 줄 알고 채운 마음에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얼마나 어렵다는 것 아시죠? 그런데 부처님의 상자리를 만나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4조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이 있다 함으로써 그 배움을 놓지 말 것이요, 소크라테스께서 불식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컵에 물을 많이 담아도 바다 같이 부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그릇이 크면 한량없는 서원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서원도 크면 클 수록 좋습니다. 신 역시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 수록 더 많은 것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배움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중간하게 생긴 것은 넘쳐버립니다. 교당에 어느 정도 다니게 되면 교무님 설법 다 알거 같습니다. 그러면 다니다가 맙니다. 중근병 걸려서 떨어지고, 어려워서 떨어지고, 자만자족해서 떨어지게 됩니다. 4조에 보면, 지식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배움이라는 것이 무한세계를 배우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학벌 좋고, 인물 좋고, 머리 좋고, 돈 많고는 필요 없습니다. 도가에서는 서원의 크기가 크고 신의 크기가 커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중근병에 걸렸다가도 쉽게 올라섭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서 모두 도망갑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을 뭐라고 가장 표현하자면 힘이 없는 병자다, 눈 멀은 소경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인생의 길을 소경이 되어서 찾을 것이며, 진리의 세계를 어떻게 찾을 것이며, 행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눈과 같은 것입니다. 교당에서 보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빨리 진급합니다. 화요일 날 화요공부방에 나오는 분이 있는가하면, 토요일 날에 나오는 분도 있는데 화요일 날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은 토요일 날 나오다가 서서히 정체 됩니다. 삶의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5조 주색 낭유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진리를 연구할 것이요, 주색이라는 것은 알죠? 주색 뒤에 잡기가 들어가는 거죠. 시간이라는 것은 평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은, 1. 그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2.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썼느냐 3. 그 사람의 힘을 어떻게 썼느냐 이 3가지로 그 사람의 삶은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이 차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고 쓰는 것에 애를 씁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잘 활용해 볼까? 하지만 한편에서는 어떻게 하면 죄 짓는 것에 바쁘냐? 합니다. 또 한편은 어떻게 하면 사은의 은혜에 보답하느라 바쁘냐? 이것을 보면 시간 활용을 어디에 쓰느냐가 다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신앙이나 생각이나 사상이 다른 세상에 흐르지 않는다고 기본적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특신이 되어야 최소한 일반인이 바라보는 행복의 세계(좋은 차, 좋은 여자)에서 벗어나서 대종사님의 진리적 가치관, 천상락에 에너지와 시간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간 계산을 해 보니 80년에 살아도 약 62만 시간이였습니다. 하루 만 24시간인데 내가 사은의 은혜에 보은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빅토리 위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색잡기에 방탕한 사람이였는데 딸이 강물에 뛰어들어 죽으면서 유서 한 장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딸이 죽어버리자 주색잡기에 방탕한 빅토리 위고가 내 삶이 딸을 죽였구나 생각하였습니다.그리고 나서 후생국에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분은 그 후 프랑스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방탕한 사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가장 존경받는 사람과 가장 존경받지 못한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어디에 활용했는지에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조에서는 우리가 진리를 연구할 것이요했습니다. 진리 속에 살면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우리입니다. 붕어가 물에 고마움을 모르며 살듯이. 우리는 진리의 바다 속에 살지만, 우리는 진리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우리는 주색낭유 속에 살지 말고 그 시간에 진리를 연구해라.
마지막으로 솔성요론은 가장 그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기초입니다. 좋은 법을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배움을 놓지 말고, 진리를 연구하는 것이 가장 나를 행복하게 하고 영생의 행복자, 영생의 진급자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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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상과 함께 보는 후기 넘 좋아요~~ ^^
먼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정리잘 해주셔서 꼼꼼이 읽어보았습니다. 이연교우님~ 화이팅~!!!!
우선 제가 지금 다시 동영상을 볼 수 없어서... 확인이 안되는 관계로 잠깐 수정했는데... 동영상 보고 다시 올릴께요 ^^
항상 감사 합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