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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무림에는 유독 많은 미녀들이 등장한다. 우연히 마주치면 마음이 혹해 시선을 잠시 빼앗기는 그런 수준이 아닌,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약에 취한 듯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멎을 정도의 초절정 미녀, 원한다면 심장이라도 꺼내 바칠 수 있는 그런 완전한 미모의 여인들이 강호의 미녀들이다.
미색(美色) 하나로 나라를 뒤흔들고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경국지색의 미녀들. 지금까지 회자되는 미녀들 가운데 으뜸은 천하 사대미녀라 불리는 여인들이다.
물에 비친 모습을 물고기조차 넋을 잃고 바라보다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沈漁)라 불린 서시(西施).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미색에 놀라 떨어졌다는 낙안(落雁)의 일화가 전해지는 왕소군(王昭君). 그 아름다운 모습에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여 폐월(閉月)이라 불리는 초선(貂蟬). 꽃이 부끄러워 시들어버렸다는 수화(睡花)의 전설을 지닌 양귀비(楊貴妃).
이들 사대미녀 외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절세미녀는 한나라의 조비연 정도이다.
하늘이 시샘할 정도의 완벽한 미를 소유한 미녀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처럼 이들 미녀들의 운명은 불우하기 짝이 없었다. 월나라 미녀 서시는 미인계의 도구로 이용되어 오나라 부차에게 바쳐졌고, 천하를 움직이는 실력자 동탁과 여포 사이에서 희생양이 된 초선, 양귀비는 미모에 혹한 현종의 어리석음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오명을 여전히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네 미녀 가운데 가장 불우한 삶을 살다간 여인은 왕소군이었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집안이 가난한 탓에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에게 뇌물을 줄 돈이 없었던 여인, 화공은 왕소군을 여러 후궁 중에서 가장 못생긴 여인으로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때마침 흉노의 강압에 견디지 못한 황제는 후궁들 중 하나를 골라 흉노의 왕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처지였었다. 그 결과 선택된 여인이 바로 왕소군이었다. 물론 선택하는 방법은 실물이 아닌 후궁들의 초상화였다.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 천하제일의 미녀를 못생기게 그린 화공은 사형에 처해졌으나 왕소군은 머나먼 흉노의 땅에 끌려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모든 여자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고, 모든 남자들의 욕망을 끝없이 타오르게 하는 절세의 미. 타고난 미모는 천행이 아닌 형벌이었다. 미녀들 자신 뿐 아니라 가까이 하는 남자들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으니. 고대의 미녀 말희, 달기, 파사 역시 같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에서 초선과 그녀의 딸 영저로 분한 유역비의 모습. <출처: 네이버 영화> |
드라마 [대당부용원]에서 양귀비로 분한 배우 판빙빙. |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미색을 ‘우물(尤物)’이라 부른다. 우물은 뛰어난 물건이나 사람을 뜻하는 말로 ‘좌구명’이 지은 ‘좌씨춘추전’에 나오는 용어이다. 미녀 중 최고로 불리는 우물. 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사람이 가질 때 반드시 큰 화가 닥치는 법이다.
천하 사대미녀가 타의에 의해 원치 않은 삶을 살다갔으나 무협의 미인들은 다르다. 그녀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다.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며,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쟁취한다. 또한 그녀들은 모든 남성들이 꿈꿔왔던 완벽한 여인상이다.
강호무림의 여인들은 선택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나서는 용맹한 여인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남자가 부족한 것을 메워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황금이 필요하면 황금을, 무공이 필요하면 무공을, 세력이 필요하면 세력을 만들어 준다. 심지어 자신을 미인계의 도구로 이용하여 남자를 도와준다.
어쩌면 천하제일의 미녀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연이 아닐까.
천하제일미녀도 화장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하얀 피부는 미모의 기본이다. 강호의 미녀들 역시 눈처럼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화장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예전의 미녀들이 주로 애용하던 화장품은 자연에서 채취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석고와 활석, 펄조개의 가루인 방분(蚌紛), 밀랍을 끓여 정제한 기름 납지(蠟脂)를 개어 만든 ‘옥녀화장분’이 미녀들의 전용화장품이었다. 말리화에 진주가루를 섞어 만든 ‘진주분’이나 옥잠화에 호분(胡粉)을 섞어 만든 ‘옥잠분’도 강호의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분이다. 항주에서 생산하는 항주분과 계림에서 만드는 계분이 가장 고가에 팔리던 화장분이다.
피부 다음으로 주요한 부위는 눈썹. 석대(石黛), 동대, 선자대 등이 눈썹화장에 주로 이용되던 재료였다. 눈썹화장이 주요한 까닭은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단장하고, 검푸른 색으로 칠하는 ‘아미청대’가 미녀의 기준이었기에 때문이다.
화려한 장신구는 기본품목. 모든 단장을 마치면 향수를 뿌린다. 그리고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향낭을 소지하였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눈길을 주지 않으면 유혹하는 부적을 구입하여 몸에 지니고 다녔다. 신통술을 지닌 도사가 기거하는 도관이 부적의 주된 구입처라 하였다.
꽃무늬가 예쁜 당혜(唐鞋)나 비단 천에 가죽을 덧대고 그 위 꽃을 수놓은 수화혜(繡花鞋)를 신으면 미녀들의 강호나들이 준비는 끝난다. 화려한 보검을 등에 메고 잡털 한 올 섞이지 않는 백마를 타고 강호로 나서면 모든 시선이 강호미녀에 향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젊은 영웅들 숨을 죽인다. 무예가 출중한 신랑감을 구하기 위한 비무대회가 어쩌다 벌어지는데 그 향풍에 천하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게 변한다.
처음 무협에 등장하는 미녀들은 영웅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영웅이면 의당 전리품처럼 미녀들을 거느렸다. ‘영웅은 호색(好色)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대며 7처8첩도 당연한 일처럼 여겼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어찌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으며, 거느린다 하여도 아마 그 등살에 슈퍼맨이라도 제명대로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호의 여인들은 꼭꼭 숨겨놓은 규중아씨와는 다르다. 실로 다양한 직업군에서 활약하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오문의 첩자, 녹림맹의 살수(煞手), 북해 빙궁의 빙녀(氷女), 신비도관의 여도사나 비구니, 거상의 딸, 독문의 독술사, 기녀, 근거 없이 떠도는 유녀의 무리들… 강호무림의 모든 영역에 여인들의 체취가 묻어있다.
강호의 미녀들 가운데에는 짙은 화장으로 용모를 드러내는 여인도 있으나 애써 용모를 감추는 여인들도 있다. 미색이 부담스러운 여인들은 몽면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남장을 하여 그 존재감을 지운다.
강호의 미녀들은 위험하다. 미색에 혹해 준비 없이 다가서면 미모 뒤에 숨겨진 그 날카로운 칼날에 베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운 좋게 절세가인의 짝이 된다면 끝이 아닌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다. 적당한 미녀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그 여인이 천하의 미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 여자의 남자로 선택되는 순간 천하 모든 무사가 적으로 돌변한다. 경국지색의 미녀는 축복이 아닌 하늘의 저주라 하였다. 천하의 보물을 곁에 두었으니 언제 어느 곳에서 보물을 노리는 자의 암수가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 아름다운 향기에 취해 세상을 잊는 순간, 비수가 소리없이 다가와 심장을 찔러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절세미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은 오직 하나, 천하의 모든 무사들 머리 위에 군림하는 자리에 올라야 어울리는 한 쌍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시대와 함께 모든 것은 변한다. 강호의 미녀들은 이제 선택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도도한 여왕벌로 군림하는 추세이다. 특히 연적(戀敵)을 제거할 때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고조 유방의 처 여태후는 연적인 척부인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사지를 자른 다음 돼지굴에 처넣어 인돈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기 것을 빼앗아 갔다는 그 복수심이 잔혹한 형벌로 표출된 것이지만, 강호의 여인들 중에는 여태후를 능가하는 독심의 여장부도 꽤 많이 존재한다. 여인의 정을 배신하는 자에겐 그보다 혹독한 형벌이 가해지는 형국이다.
한 드라마에서 조비연으로 분한 배우 동려아의 모습.
하지만, 철화(鐵花)라 불리는 강호의 여인들이 닮고 싶은 여인상은 따로 있다. 바람에 날아 갈 것 같은 조비연과 병약해 보이는 미녀 홍루몽의 임대옥, 이 두 여인이 강호여인들이 갈망하는 여인상으로 자리 잡은 까닭은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무림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강호의 고수들이다. 여인천하를 꿈꾸는 고수들도 있고, 미색으로 천하를 조롱하며 사는 여인들도 존재한다. 이들 강호의 여고수들이 사문에 상관없이 원하는 무공이 있다. 천하를 장악하는 절세무공보다 필요한 무공은 바로 주안공(朱顔功). 영원한 청춘을 간직하는 주안공은 여고수들의 꿈을 이뤄주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지만 내공이 일정 경지를 넘어서야 펼칠 수 있기에 만년 소녀로 살아가는 여고수들은 흔치 않다. 주안공과 더불어 익혀야 하는 무공이 있다면 바로 마음을 훔치는 섭안공(攝眼功). 바라만보면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늪과 같은 눈. 오직 시선만으로 원하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공을 익혔다면 천하를 치마폭으로 휘어감을 준비는 끝난 것이다.
미녀의 조건은 시대마다 다르다. 강호에서 말하는 미녀의 조건은 열 가지라 하였다. 아래 열거하는 열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다면 감히 천하제일 미녀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오발선빈(烏髮蟬鬢):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미녀가 갖춰야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쪽을 진 머리에 귀 앞쪽으로 매미 날개처럼 윤기있는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흘러내려야 미녀라 불릴 수 있다.
운계무환(雲髻雾鬟): 틀어 올린 머리가 피어오르는 구름이나 안개마냥 아름다워야 한다. 주로 선녀들을 그린 그림에서 나오는 머리 모양. 강호의 여인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조비연이 주로 이 같은 머리모양을 하였다 한다.
아미청대(娥眉青黛): 미인의 눈썹을 아미라고 부른다. 강호의 미녀들은 눈썹을 밀고 청흑색이 나는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 같은 눈썹을 그렸다. 서주시대부터 전해진 이와 같은 눈썹 화장술은 강호미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명모유반(明眸流盼): 눈은 그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창이라 하였다. 맑은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듯 촉촉한 눈자위를 지녀야 미녀라 불린다.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눈이 부시도록 하얀 치아.
옥지소비(玉指素臂): 옥으로 깎아 만든 듯 아름다운 손가락과 희고 윤기가 흐르는 탄력 있는 팔.
세요설부(细腰雪膚): 가는 허리와 눈처럼 희게 빛나는 피부.
연보소말(蓮步小襪): 연보란 미녀의 걸음걸이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미녀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전족. 중국에서는 전족을 한 여인이 엉덩이를 흔들려 아장거리며 걷는 모습을 아름답다 여긴 모양이다. ‘소말’은 작은 버선 즉 작은 발을 뜻한다. 남북조 시대의 황제 ‘소보권’은 전족을 한 애첩 ‘반비(潘妃)’가 금으로 만든 연꽃 위를 걷는 모습을 즐겨 보았다 한다. 반비의 발은 고작 3촌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전족을 한 발을 금련(金蓮)이라 하였고, ‘삼촌금련(三寸金蓮)’은 전족을 한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요부 반금련의 이름 역시 전족을 뜻하는 금련에서 나온 것이다.
홍장분식(红粧粉飾): 뺨에 연지를 발라 붉게 칠하고 얼굴에 백분을 발라 하얗게 만든다. 홍장이란 다 자란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뺨에 연지를 바르는 의식은 흉노에게 유래되었으며, 궁중의 여인들이 바르며 강호에 퍼졌다고 한다.
지체투향(肢體透香): 여인의 살갗에는 은은한 향기가 난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그 은은한 향이 더하고, 성인이 되면 향수를 발라 체향은 더욱 진하게 발산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향낭을 소지하였으니 미인일수록 진한 향기가 난다고 하였다. 미인계의 도구로 이용된 월나라의 서시가 오나라에 가서 목욕을 하였는데, 목욕을 한 물에서 어찌나 진한 향기가 배어나던지 시중을 들던 오나라 시녀들이 남김없이 퍼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강호의 미녀들은 열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전족을 한 미녀는 없으니 강호인이 염원하는 완벽한 십전미녀는 없는 셈이다.
자료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