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님이 인용한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반론을 고평석님의 글을 빌어 쓰겠습니다. 글에 앞서 우선 몇마디 개인적인 의견을 적겠습니다.
그시대에 직접 살아서 그사건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면 모를까,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글을 100%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필자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100% 믿지 못하며, 사기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단고기, 규원사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역사서에는 사실과 역사서를 서술한 사람의 사관 그리고 여기에 어느정도의 가필이 섞여있다고 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본모습이지만 지금 눈앞에 과거가 있지않기에 우리는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역사서에서 과거의 진면목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우리역사에 관한 모든 유물과 역사서를 통독하고 파악한 상태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면서 협력 한다면 우리역사의 진면목은 아마 빠른 시일내에 우리에게 달려오리라 생각합니다.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습니다.
"..그렇다면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 된다. [규원사화]가 1928년에 나온 김광의 [대동사강]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며,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않은 시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의 곳곳에서 환웅과 단군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저자는 단군신앙을 가진 근대 민족주의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약 1910년 이전에 발행된 규원사화가 있다면 조교수의 논리는 희박해지리라 봅니다. 하물며 원본 규원사화가 있다면....
참고로 조인성교수의 글이 게제된 책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1988년) 71p-88p] 이며, 동잡지는 이병도교수의 1회 제자인 이기백교수가 책임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인용시작합니다.........
규원사화 북애노인 친필본
고평석 -스님이면서 홍익사상,고대사연구가이다.
머리말 북애노인 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조작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기본학계에서는 실증사학을 기본으로 하여주기 바란다. 실증사학의 단절된 역사논리는 쓸모없는 휴지조각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1989년 10월 20일 10시 정각, 경상남도 마산시 경남대학교(전화연락:(0551)45-5000) 조인성 교수님 연구실에 전화를 걸어서 규원사화에 대해서 5분간 문의하였다. 문의내용은 지금도 규원사화를 위서(僞書)로 보고 계십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으며 규원사화가 1920년 후반에 민족종교 내지 구국충정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위서(僞書)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필자는 다시 문의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중분 629(고2105-1)책자는 본신 적이 있습니까?
문의하자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말은 들은 순간 필자의 마음이 괴로웠다. 이럴수 있느냐 하는 안타까운 심정과 서글픔뿐이었다.
있는 자료도 확인 아니하고 속단하면서 몇년 동안이나 규원사화 위서론(僞書論)을 폈던가. 국사(國史)가 이처럼 엉터리식으로 진행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혹과 분노 속에서 이해하는 것도 한계점에 이르러, 필자 자신 스스로 결심하고 다짐하였다. 붓을 들어 알려야겠다. 국민 전체가 알 수 있도록 하자. 국민 모두가 알게 하여 사대주의, 식민사관 뿌리를 뽑아 발붙이고 의지할 곳이 없게 하자, 굳게 다짐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머리글을 장식하노라.
북애노인 규원사화(揆園史話) 친필 원본
1. 소장 장소 : 국립중앙도서관
2. 도서열람번호 : 귀 629(고2105-1) 1책
3. 제작년도:1675년 조선조 숙종1년 3월 상순
4. 크기 :24.7*16.6cm
* 내용
1) 단군 47대 임금 기록
2) 당시 시대의 시국정세
3) 사대사관 타파 간절히 갈망
4) 불타는 충정 구국 애국정
5) 만주 옛 조국땅 회복 간절히 희망
6) 사료 수집을 위해 많은 고생
7) 민족주체사상 회복 운동
5.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을묘)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함.
6. 구입날짜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사이
7. 등록일자:1946년 5월 25일
8. 구입장소 및 가격100원에 책방에서 구입(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별도 특별관리목록 대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1989년 11월 11일)9. 귀629(고2105-1) 1책을 북애노인 저자가 직접 쓴 친필로 필자는 단정한다. 이에 대해 반론들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중요 줄거리 내용
1. 단군(檀君) 47대 1195년 임검님의 재위(在位)년수와 치적 기록
2.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유학자들을 통박
3.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유리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4. 임진왜란[1592년(선조25)~1598(선조31)] 병자호란[1636(인조14)~1637(인조15)]을 겪은 어려웠던 당시 사회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만주 옛 고토(古土)를 찾으려고 북별 출병계획에 민중 모두가 하나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규원사화 역사서를 실증사학으로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였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북애노인 규원사화(揆園史話)필사본 현황
1.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 :2121.3 1책 * 필사년대 미상
2.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2105.1 1책
3.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상노 소장본을 필사
4.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방종현 소장본을 등사
5.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 이선근 소장본을 등사
번역주해된 규원사화(揆園史話)
1. 신학균 단기 4301(1968)10월 3일에 번역 주해 발행. 21년전[4322년(1989년 10월3일)]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을 원본으로 . 발행처:대동문화사(대동문화사)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2105-81-0.2
. 신학균 선생님의 본적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 117번지 1967년 4월부터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신학균 선생님의 규원사화 역자서문(譯者序文)에서 북애자가 규원사화를 지으면서 피나는 노력이 역역히 엿보이고 있다고 하였으며, 규원사화 저자의 교훈을 거울삼아 국사 광복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단기고사(檀紀古史)와 함께 규원사화는 우리의 상고사를 재정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고증하고 있다.
2. 고동영 1986년 5.20일 번역 발행 . 발행처:도서출판 자유문고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911-021 북728 2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대해 위서(僞書)라고 논리를 펴는 학자
1. 조인성(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논문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2. 이병도(현재 고인). 1986년 12월 '이병도 박사의 9순기념 한국사논총',[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3. 송찬식(송찬식):국민대학교 교수. [월간중앙](1977년 9월호)에 [위서변]이란 논문 기고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공통된 의견 내용
1. 성서에 나오는 천주라는 용어가 효종.숙종시대에 없었다.
2. 1920~1930년대에 단군 교도들에 의해 제작 편집되었다고 뜻을 같이하고 있다.
*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위서(僞書)라고 하는 논리에 답하는 글 *
답변자:고평석(홍익인간사상.고대사연구가)
1. 천주라는 문자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과 같이 들어온 서양신부들에 의해 선조[1586(인조1637)] 당시 이미 천주(천주)라는 용어는 선비학자들 사이에는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규원사화에 기록된 용어가 지금 것과 비슷한 것이 몇 가지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고어를 참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가 잘못 제기되고 있다.
음이라는 것은 변해 전해진 것도 있고 지금이나 옛이나 고유명사로 그대로 원형을 위하는 것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예) 경주, 쌍놈, 종, 상감, 산 등등
* 고어(古語)사전 참고 바람
& 가리온 주: 위의 고평석님께서 주석한 바와 같이 천주(天主)란 용어는 본래 불교와 도교에서 전래된 단어입니다. 이미 중국과 한국의 한자문화권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전승되면서 널리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불교의 미륵상생경과 하생경(불교문화사 출판)에 보면 석가부처의 사후를 기준으로 정법시대 500년 상법시대 1500년 말법시대 3000년을 기점으로 하여 미륵의 출세를 이야기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중요한 몇가지 용어가 있는데 석가세존이 자신의 수석제자인 아난성자에게 전한 유언과 같은 내용을 기술한 서적입니다. 이 내용이 한자문화권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단어가 천주(天主)란 단어입니다. 하늘에 9천이 있으며 그 9천에 도솔천(途率天) 이 있고 그곳의 주인되는 "미륵이 언젠가 강세하여 세상을 용화낙원으로 만들 것이니 아난성자야 너는 지금 해탈에 들지 말고 윤회를 거듭하여 훗일 미륵이 출세하거든 그분을 따라 도를 받아 해탈에 들도록 하라." 라고 전하면서 하늘의 주인이란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불교사상에서도 역시 33천과 수직으로 9천을 말합니다
불가에서 말하기를 석가부처께서 열반에 드신후 서방극락정토를 다시리는 분이 되었다 하니 서방극락이라면 동방과 남방 북방도 존재한다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도교에서는 도가서적(옥추경, 참동계,태을금화종지,금선증론등)에 하늘의 구조가 33천으로 되어 있으며 도가에서도 옥경의 상제라 하여 옥황상제가 거주하며 또다른 서적에는 북두칠성의 자미원(紫薇垣)이 곧 그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도교에서 가장먼저 천주(天主)란 나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옥추경의 각 신장의 이름을 보면 @@천존신장, ~~~신장 등과 같이 북두칠성의 천시원에 존재하는 각 신장들의 이름을 기록한 도가 서적입니다. 각층에 각기 천주가 존재하며 이로인해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엘리야를 천주로 사용하게 되면서 천주교란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테오리치신부와 9인 총 10인의 예수회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중국황제에게 까지 서양문물과 성경이 알려지게 되고 많은 서적이 번역되게 되는데 번역과정에서 엘리야를 천주로 번역하여 [천주실의]란 서적이 나오게 됩니다. 리치신부의 번역과정에서 마테오리치 신부는 중국에서 말하는 상제와 성경에 수록된 엘리야를 동일한 존재로 보고 동일하게 기록하여 처음 번역시에 천주로 번역합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상제또는 천주 또는 하느님신앙과 같이 타문화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신앙에 접목하여 전교를 하고자 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우리나라에 전도되는 과정과 번역과정에서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하느님, 하나님의 용어가 크리스트교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다 하더라도 강단사학에서 지적하는 오류란 것 역시 근거 없는 추정에 불과할뿐 도리어 아니라는 증거는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도서가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전문위원의 심의과정으로 숙종2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 이상 1920~1930년도에 제작 발행되었다는 논리는 다양한 자료를 폭넓게 참고하지 않은 결과라 단정하며 연대미상의 필사본만 접하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본을 직접 접해 보지 못한결과로 단정한다.
3. 1675년에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을 위서(僞書)라는 선입감을 전제하고 대강 검토하다 보니 규원사화에 담긴 금쪽같은 옛 문헌을 한 부분도 확인못하고 있다. 때놈(중국인) 사마천이 지은 규원사화가 있었더라면 아무 군소리 아니하고 문제 제기도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 스스로가 사대주의, 식민사관, 왜놈사관임을 자청하여 고증하여 주고있다. 이에 대한 실증학적 근거를 제시하겠다.
규원사화 서문(序文) 저자의 말 가운데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사당을 세운다고 하였다. 장군은 수나라 군사 백여만을 무지른 고구려 대신(대신)이다...운운하고 있다. 만에 하나 후래에 어느 누구에 의해 조작된 위서(僞書)라 한다면 평양에 을지문덕 사당을 세운다는 기록은 "숙종실록" 6권(숙종3년 정사11년 을유)에 기록된 내용을 무슨 재주로 1920년이 지나서 조작하면서 서문에 기록할 수 있었느냐가 의문시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어느 때에 공개되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들 하다.
왕들도 보지 못한 실록을 무슨 재주로 일반 서민이 찾아내어 숙종시대에 맞추어 놓느냐 하는 문제이다.
8.15광복 이전에 조선왕조실록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아니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및 고서전문연구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 1920~1930년도 에는 조선왕조실록은 전문연구가 몇 사람이외는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맞추려고 계획하였으면 맞추기 쉬운 문헌을 골라 철저히 쉽게 맞출 일이지, 한마디로 돌머리들이다.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에 의해 민족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왜곡의 근원이 분명한 지금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를 비판한 글은 한 글자도 보지 못했다.
민족사를 망치는 일은 한두가지에 끝나지 않고 있다. 그대들의 마음 다시 한번살피노라, 왜놈들 손자인가, 때놈들 아들인가. 사마천 사기를 번역주해하면서 공자세가조에 기록된 안씨 여인과 야합 불륜에 의해 낳은 자식이 공자라는 사실을 번역주해한 학자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국조이신 단제 천자님께서 세째 여인 첩의 불륜야합자식이었다면 지금쯤 국조님(시조할아버지) 이름도 사용 못하게 온갖 잡소리를 늘어 놓았을 것이다.
맺는말
국사 광복 및 국정교과서 개편과정에 있어서 자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분들께 알려드린다.
(1) 국립중앙도서관
(2)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3) 정신문화원 도서관
(4)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5) 고려대학교 도서관
(6)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
전국 각 대학 도서관 자료만 착실히 조사하면 자료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민족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자료가 절대 부족하다고 느끼신 분께서는 도서관을 찾아주기 바란다. 규원사화 고증부터 하여주기 바란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직접 찾아가서 귀629(고2105-1) 1책자를 확인하고 1946년 5월 25일 등록일자가 찍혀있는 2쪽을 확인하면서 규원사화 고서가 과연 얼마나 오래된 고서인가 스스로 스스로 감정하고 고증하면 되는 것이다. 조작이 되었더라도 300년 전에 된것임이 분명하다고 필자는 단정하며 확신하면서 끝을 맺노라.
(이하 P195-P206 까지는 규원사화 원문 복사 게재됨)
*[한배달] 6호 1989년 겨울호,사단법인 한배달(02-738-6198),P190-194에서 전체 인용끝입니다........
물론 저도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규원사화의 원본을 직접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 100년이 넘은 책이 몇 권 있기 때문에 고서를 찾아본 사람은 책의 나이(?)를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책은 고평석 개인이 감정한 것이 아니라 이가원,손보기,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책이니 쓰인 연대의 근거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상욱님의 글 중에서 ".. 만약 그 지명이 장춘이라 불리기 이전에 상춘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면 조인성님께서 절대 그러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그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연구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라고 한 대목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없는지 궁금하군요.
단기 4326년 8월 22일 송원길
가리온주:새는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듯이 사회도 역사도 두 개의 날개로 날개 됩니다. 국가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으로 움직이듯이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도 세가지 형태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진보사학과 강단사학그리고 객관적 시각을 필요로 하는 국사편찬위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양상에서 진보사학계의 행동과 의식에 대해 지나친 폄하와 모독적 발언은 이미 기본적인 자세를 잃은 바라 할 수 있습니다. 동호회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분들은 직접적인 사학계가 아니라 그 기존 사학계의 입장을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진보사학계로써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고조선의 고대사를 새로이 정명하고 밝혀내는 노력을 하시는분들 중에서는 이병도씨로부터 내려온 주류사학계의 학자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병도씨 사후 수많은 시도를 하는 것인데 시도와 노력 자체를 깍아내리고 비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병도씨만 하더라도 자신의 칼럼에서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수많은 사료와 기록들을 누락시켰음을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습니다. 그 내용을 언급한것이 강단사학에 대한 무분별한 감정적 공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까페에서 현재의 역사학계에서 입장으로 기준을 이야기 해주고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이부분이 더 보완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언급할 수 있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새는 한쪽날개 만으로 날 수 없으되 그렇게 양날개로 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헌데 그런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주장이 미흡하다 라고만 말한다면 과연 무엇에 비해 미흡하다고 할 수 있는지요? 또한 애초에 하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저역시 전문 역사학자도 재야사학자도 아닙니다) 또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파괴되고 약탈된 문화 유적속에서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아서 밝혀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게 과연 기존 사학계에 대한 폄하와 모욕으로 받아들여져서야 되겠습니까?
일반적인 국민의 시각은 단연코 이런 역사를 파헤치고자 노력하시는 진보사학자분들과 재야사학자 분들께 박수와 성원을 보낼 것입니다. 앉아서 일본인들이 너희들 역사다. 라고 던져준 서적쪼가리나 뒤지고 있으면서 존경하는 이병도박사님의 업적이 어떻고 하며 떠드는 사람들은 이미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써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사학계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병도란 사람과 그 학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여러까페 회원분들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역사학도라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 깃들어야 합니다. "쟁기 많이 깨는 소가 일 잘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100의 시행착오속에서 1이나 3,4의 결과물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도 그 자체에 대해 폄하하고 깍아 낸다면 올바른 역사의 미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