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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 : 1 - 12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관심있게 보아야 합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가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3절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쎄’라는 말씀에서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그 집의 종들이든지 아니면 친구나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구원은 자신의 믿음으로 받는 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앞장 40절에 한 나병환자는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하여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눅8:48). 그런데 중풍병자에게는 자신을 메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까지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헌신예배로 드리는 남전도회 회원들에게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였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로 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고쳐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가 죄 용서를 빌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오게 한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같은 스스로 예수님께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들처럼 스스로 예수님께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혼자로서는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조직적인 연합기관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은 어떻게 보면 오늘의 전도회 기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전도회 연합회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사람을 남전도회원이 연합해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서 그를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들의 믿음을 매우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어떤 사람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의 병도 고치고 구원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게 한 사람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였습니까?
그들은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겨 그를 고침 받을 수 있도록 네 사람이 함께 노력한 믿음이였습니다.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그들은 중풍병자를 보고 매우 불쌍히 여겼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께 그를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중풍병자는 참으로 불쌍합니다. 중풍은 한 쭉 팔, 다리의 힘이 약해지거나 저리며 마비가 되고, 입이 비틀어지고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족 중에 중풍병자가 있으면 온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합니다. 가정에 기쁨이 없는 한 숨만 쉽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풍병자의 고통을 알고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중풍병자는 대부분이 죽을 때까지 누워 고생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메고 예수님이 계시는 집에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에 오면 곧 바로 예수님 앞에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예수님 앞에까지 들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들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메고 온 중풍병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한 분을 모시고 교회에 왔을 때 교회와 성도들이 진심으로 환영하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느냐는 것입니다. 큰마음 먹고 교회에 나왔던 사람이 실망하고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사람은 없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무리들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사정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해서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시는 집까지 메고 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게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고 했습니다(눅5:19). 침상째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은 상당히 큰 구멍일 것입니다.
지금 지붕 아래는 예수님이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때 지붕에 기와를 벗기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째 달아 내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쉽게 뜯을 수 있는 지붕이라 할지라도 지붕 밑에는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째 달아 내리는 것도 역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닌 달리 생각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그대로 우리는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가 누운 째 달아 내린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고 장애물이 있을 때 쉽게 포기합니다.
지붕을 뚫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는 것은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창조적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침상째 달아 내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말씀도 없습니다.
지붕을 뜯고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것은 순전히 그들이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생각해 낸 것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러한 일은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시 주어진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창조적인 믿음’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전혀 생각지 않은 장애물이 있을 때 창조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창조적인 방법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주어진 상황에서 생각해 내는 방법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일 수 있는 기발한 창조적인 믿음으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네 사람이 함께 하는 믿음입니다. 구멍으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리는 것은 네 사람의 마음이 같아야만이 가능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느리게 내리거나 조금이라도 빨리 내리면 중풍병자는 떨어집니다. 네 사람이 수평을 맞추어 똑 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합회란 회원 모두가 한 목표를 위해서 한 마음이 되어야 가능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달리한다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보다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전도회원 여러분! 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면 회원 여러분은 그 계획을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획했던 모든 것을 해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침상을 메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가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좀 서운한 것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한 마디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네 사람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중풍병자는 고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네 사람들을 돌이켜 보시고 수고했다든지 무어라고 한 마디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네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하신 말씀이 없습니다.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면 중풍병자를 고친 후에라도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시고 그에 따른 축복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 때문에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하며 너희들의 믿음이 참 좋았다’라고 한 마디라만이라도 하셨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도들이 이런데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는 한 사람을 어렵게 전도해 오면 온 교회 앞에 전도해 온 그 사람에게 칭찬을 하든지 금반지를 상으로 주기도 하고 축복기도를 만 배나 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칭찬을 받으면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더 이상 바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신바 되어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칭찬이 없고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축복이 없다면 그 자손들에게 반드시 축복을 하십니다. 나아가 하늘에서 더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11).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누웠던 상을 가지고 사람들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풍병자의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도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중풍병자는 그 말씀을 믿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상을 가지고 사람들 앞으로 나갔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언제부터 믿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는 자신을 고쳐주고자 하는 네 사람의 창조적인 믿음과 네 사람의 마음을 같이 하여 자신을 예수님께로 달아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중풍병자의 마음에 감동을 받고 믿음이 생겼다고 봅니다. 믿음 좋은 분을 보면 믿음이 없던 사람도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생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자신의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중풍병자도 믿음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중풍병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일찍 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중풍병자에게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네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물이 있어도 전도해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았던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