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의 큰며느리 안미생 (安美生, 1914-2004(?))
백범과 안중근의 집안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진압에 동원된 관군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만큼 농민군에 부정적이었으나,
'애기접주' 김구가 피신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었다.
훗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은 백범의 큰며느리가 된다,
김인과 연애 끝에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쿤밍의 서남연합대학(칭화대·베이징대·난카이대의 전시연합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다.
둘 사이에서는 딸 효자(孝子, 1941)도 태어났다.
백범 김구선생의 큰며느리이자 맏아들 김인선생의 부인이었던 안미생 선생은 1940년대 중국 중경에서 한국독립당 당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동생인 안정근 선생(1987 독립장)의 딸이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1962 대한민국장)의 맏며느리로, 외국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아 중경 임시정부의 비서로 활약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때 중간 경유지인 상해 공항에서 밝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사진 촬영에 임해 남다른 성격과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독립운동 명문가로 잘 알려진 안중근 가문과 김구 가문의 만남으로도 기억된다. 부친인 안정근 선생은 물론 오빠 안원생 선생(1990 애족장), 남편 김인 선생(1990 애족장)이 이미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어 대를 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손꼽힌다.
선생은 안타깝게도 1960년대 미국 이주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에서야 선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다 2008년 쓸쓸히 사망한 사실이 알려져 세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1940년 9월에 임시정부는 치장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충칭은 중국 서부의 분지도시로 그 여름은 난징·우한과 함께
양쯔 강 연안의 '3대 화로(火爐)' 중 한 곳으로 알려질 만큼 무덥기로 유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갑자기 도시 규모가 열 배 이상 커지면서 충칭의 공기는 더 나빠졌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잦았다.
김인도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공기가 나쁘기도 했지만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긴장감이 병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김인이 중태에 빠지자 안미생은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페니실린을 구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동지에게도 약을 못 구해주었는데, 어찌 아들에게 약을 쓰겠느냐’
하지만 백범은 아들이라고 특별히 손을 쓸 수 없다며 거절했다.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우리 동포 300~400명이 6~7년 거주하는 동안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80명에 달하였다.
이는 중경에 거주하는 전체 한인의 1~2할에 해당하는 숫자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 '백범일지' 中 -
어버이로서 자식의 목숨을 근심해야 마땅했지만 백범은 그 위급한 순간에도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그게 그 시대의 지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었겠지만,남편의 친부로부터 구원을 거절당한 며느리와
이를 전해들은 아들은 그것을 어떻게 갈무리했을까.
병이 깊어져 김인은 결국 1945년 3월 29일, 일흔을 앞둔 부친과 젊은 아내, 어린 딸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았다.
21년 전 어머니 최준례가 시모와 남편,어린 두 아들을 두고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은 것처럼
그 역시 가족과 조국에 대한 강렬한 미련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다.
남편 사후 안미생은 백범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11월 임정 환국 제1진이 귀국할 때 백범, 김규식 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경교장에서 살림을 도맡으면서 비서관으로 김구를 수행했다.
'안 스산나'라고도 불린 그녀는 외부 강연과 함께
반탁운동에도 행동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지식인으로서 꽤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48년께 안미생은 딸 효자도 떼어놓은 채 돌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 없는 이 나라에 살기 싫다'는 말만 풍문처럼 남긴 채.
1949년 6월, 시아버지 김구가 경교장에서 급서했을 때에도
그는 뉴욕에서 조전만 보냈을 뿐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안미생은 대학에 진학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0년 이후 그녀의 소식도 두절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까닭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딸 효자도 1960년대 중반, 어머니의 제안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