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예단문제로 예식장까지 정한 상태에서 혼사가 없던 걸로 하는 경우를 봅니다.
결혼이란 중대사를 혼수문제로 파탄 낸다면,그 혼사는 아예 일찌감치 안하기가 두 사람을 위해서도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0년전 결혼을 앞두고, 양가의 물밑작전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지방마다 풍습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신부집에서 신랑집안 친척들에게 바치는 선물인,예단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예단의 정도에 따라 그 신부의 시집살이 무게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니까요.
시어머니께서 내놓으시는 시아버님 형제분 여덟분과 그 배우자와 직계의 명단표...
외동이신 친정 아버지와 두 분 고모님만 계신 우리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너른 집안인 시댁의 예단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른채,포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친정 어머니의 고민은 말할 수없이 깊어만 갔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성향은 한 가지를 하더라도 고급품을 선택하시는데,넉넉지 못한 비용으로 그 많은 분들의 예단을 장만하시자니,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겪으셨겠습니까?
제가 맏이라, 우리집에선 개혼인데,어머니의 시름이 많이 깊으셨다는 걸,그 당시는 제가 잘 몰랐습니다.
결혼 후,바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어,남편 출근 하고나면 하루 종일 시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루한 강의도 50분이면 10분 정도는 쉬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시어머님의 말씀은 휴식시간도 없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매일처럼 하시는 이야기 레파토리가 매일처럼 다를 수가 없으니,하셨던 이야기의 계속 반복이었습니다.
어 떤 때는 아침 밥상머리에서 이야기 시작하셔서 점심 때까지 계속하시다가,
'야야,배고프다,이 상 물리고 점심상 차려 오너라.'라고 하실 때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혼수예단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지요.
시부모님 한복은 최고급실크(본견)로 해드렸는데,어머님은 드라이크리닝을 줘야할 한복을 무명옷 빨듯이 양잿물에 담가 빠셨던 모양입니다.물에 닿자마자 오그라들며 줄고, 독한 잿물에 옷이 상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입을 수 없어 부엌 아궁이에다 쳐넣었다.'고 몹씨 불쾌하신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실수는 전혀 인지 못하시고, 무조건 나쁜 걸로 해와서 그렇다는 쪽으로 혼자 결론을 지으셨지만,저는 아무말도 못하고 죄인인양 고개를 떨군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성품이 불같이 급하신 시어머님께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말댓구를 했다가는, 더 크게 화를 내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숙님과 시동생 몫으로는 고급 양복지를 예단으로 드렸는데,시숙님이 양복점에 맞추러 갔더니 수공비가 너무 비싸다며 또 화를 내셨다고 어머님께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그 많은 사촌들에게는 고급 양모양말을 드렸는데,고무신을 신으시는 농부이신 분들이 하루이틀 신었더니 양말에 구멍이 났다며,뭐 이런 힘없이 떨어지는 싸구려 양말을 예단으로 보냈느냐고 시어머님께 불만을 토로하셨다는 말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날마다 반복해서 들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엔,정말 너무나 죄송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친정 어머니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지만,너무나 불쾌하신 표정의 시어머님 말씀에 잔뜩 주눅이 들어 친정 어머니를 의심까지 하게 되었더랬습니다.
나중에 친정 어머니께 그 이야길 했더니,깜짝 놀라시며 최고급 순모양말을 비싸게 산 건데...
매우 안타까워 하셨지요.
결혼 후 첫 명절이 되어 시댁에 갈 때,저는 평화시장에 가서 가장 질긴 나일론 100% 양말을 잔뜩 사서 시어머님께 나눠 드리라고 했습니다.그 후로는 더 이상 양말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지요.
요즘은 신부집에서만 일방적으로 혼수예단을 다 장만하지는 않습니다.
양가에서 서로 해주기,또는 똑 같은 비중으로 현금으로 주고 받기 등,40년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큰 아들 혼사때,주고받는 것 없이,지극히 형식적인 모든 과정을 다 생략 하자고 사돈께 의논해 동의를 얻어 결혼식만 했습니다.
요즘 젊은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그런 이해가 안되는 일방적인 야단을 가만히 듣고 있지도 않을뿐더러,그런 무지한 시어머니도 안계실 것입니다.
시어머님의 말씀에는 오로지 '예'만 있었던 저의 시집살이 결과로,체내 홀르몬 불균형이라는 큰 병을 얻게 되어 바로 불임으로 이어졌습니다.이 또한 시어머님께선 '시집 오기 전부터 병이 있어서겠지.'라는 누명을 씌워 제 잘못으로 돌리셨습니다.
병원에선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는데도,아들에겐 손자가 급하다며 새로 장가 보낼 궁리까지 하셨지요. 만약에,남편이 어머님 말씀에 따랐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가슴 한켠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이런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이렇게 하고나면 얼마쯤은 속이 시원하거든요.
새아가를 보고난 후부터 옛날 시집살이 당시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새아가에게는 행복한 나날만 계속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옥덕씨의 힘들었던 시집살이는 블로그와 재경홈에서 가끔씩 맛보기로 보아왔지만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 시키신 이어른께서 결국 둘째며느리의 제사진지 드시고
큰댁 조카며느리가 말없이 순종하신 숙모님을 하늘같이 받드는 효성이 힘들었던
시집살이의 열매인줄 압니다.오죽하여 몸에 병이 생겼겠어요?잘 참았읍니다.
좀더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한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미련스럽게 참기만한 태도보다는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때늦은 반성을 해봅니다.
아우야 아무리 옛날이라도 특한 시어머니시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더러 시어머니 이야기들을 하지만 반면에 친정 어머니는 얼마나 속을 석이셨을까 모두들 양반이라 정말 잘 참어셨고 오늘의 영광을 주셨는것 같아요. 결과가 좋으니까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하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옥덕아우야 이제 털어 버리자
시어머님은 동네에서 소문난() 분이셨지요. 안하는 착실한 공무원인 사윗감이 마음에 드신,친정어머니가 우겨서 한 혼사라 친정 어머니가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미련스레 참고만 있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술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텐데,그 땐 왜그리 바보스러웠는지요.
시집살이가 고로웠네요, 바보같이 잘 참은 덕에 좋은 아들 좋은 자부 보고 행복하잖아요.옥덕 아우야 속 시원하게 글로서 잘 풀고 있습니다. 건강해야 되요. 우리 노후에 아름답게 살아가요
속으로만 삭여야했던 옛날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속이 좀 후련했을까요
바보처럼 미련하게 참고 또 참고만 살았더니 병이 다 생기더군요.
요즘에야 이런 경우 없겠지요.
이번에 형을 재끼고 작은아들이 장가를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지않아도 혼수를 어찌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큰아드님 때 혼수는 어떻게 상의를 하셨나요
시집살이를 자청을 하는데 내가 싫습니다.
살림이 서툴러서 어른노릇을 잘 할 자신이 없어요.
우리는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신부쪽 아버지 정년퇴직 전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해서...
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절차를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상견례 후,결혼식,폐백만 했습니다.
혼수예단은 일절 없었고,돈봉투가 오가는 것도 없이 참 간편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나니,잘했니,못했니 라는 뒷얘기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던데요.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보는 시대라 함께 사는 것은
함 보내는것도 생략하셨나요?
함을 보내자면 신부예물이 준비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이 살 집이며 살림살이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함 보내기도 생략했습니다.
로 필요도 없는 혼수예단을 받아도 자리만 차지하더란 친구 조언에 따라,일절 다 생략하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전셋집 비용으로 충당했습니다.
패물은 둘이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라고 했고요.
결혼식 당일 비용,신혼여행비용,가전제품비용,전셋집 비용... 모든 비용을 똑같이 이등분해서 부담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