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함과 가멸함이 한결같지 않거니
어찌 빌려 쓰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오직 제기는 선영을 위하는 일에 쓰는 기물이니
제복을 빌리지 말고 제기를 빌리지 말라.
빌려쓰는 사람도 잘못이요, 빌려주는 사람도 잘못이니라.
'차급(借給)'이란 물건을 빌려주는 것을 일컫는다.
남에게 물건을 빌려 줄 때엔 생색(生色)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게 옛 어른들의 경계였다.
이덕무도 「사전(士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에게 재물을 빌려 줄 때에는 조금도 인색하지 말라.
오직 내가 전에 남에게 빌릴 때 어떠했던가를 생각하고,
또 내가 앞날에 남에게 빌릴 때 어떻겠는가를 생각하라.
남에게 물건을 빌려 주거나 남을 급박한 형편에서 구해주었다고 덕색(德色)을 나타내지 말라.
내가 그를 돕지 않았으면 누가 그를 도왔겠는가 하고 속으로 보람을 느끼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 절대로 빌려 주어서도 안 되고 빌려 써서도 안 된다는 물품이 있다.
바로 제기와 제복이었다.
제기란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을, 제복이란 제사 지낼 때 입는 옷을 말한다.
특히 유가에서 제기에 대한 생각은 까다로웠다.
『곡례(曲禮)』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군자는 가난할지라도 제기를 일상 생활에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남에게 빌려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제기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일상 생활에 쓸 그릇부터 먼저 장만해서는 안 된다.
못쓰게 된 제기는 땅에 파묻어야지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된다.
군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제기를 팔지 않으며
아무리 추워도 제사 때가 아니면 제복을 입지 않는다.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도 제기에 관한 부분이 보인다.
수재나 화재를 만났거나 도둑이 들었을 때에는
맨 먼저 사당부터 구원하여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고
조상이 써놓으신 글이 있으면 이런 것을 옮겨 놓은 다음에 제기를 옮겨놓는다.
그 밖의 집안 재물은 그 다음에 옮긴다.
옛날에 집안에 사당을 모셨을 때는 제기, 제복과 유서는
그 사당 안에 보관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사당이 없는 오늘날에도 제기만은 따로 보관하는 가정도 적지 않다.
그 시절에는 민가에 서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제기에 크신 관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제기도감(祭器都監)이라는 관청을 두어
나라의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를 관장하게 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민가에서 사용하던 제기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수를 차리기 전에 제상, 향안(香案), 축판(祝板),
그리고 신위 앞에 올렸다가 물린 술을 담는 퇴주기(退酒器)를 챙겨야 하고,
제상에 올릴 제기로는 메(신위 앞에 올리는 밥)를 담을 반기(飯器),
국 대접인 갱기(羹器), 수저, 술잔, 잔대, 편틀, 적틀, 촛대, 창기, 종지,
과기(果器), 포기(脯器), 젓갈을 담은 해기( 器)가 필요하다.
제물을 담아 올리는 이러한 일습의 제기에는 나무그릇, 사기그릇, 놋쇠그릇의 종류가 있다.
목기는 주로 묘제(墓祭)에 사용하였고,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에는 사기와 유기를 사용함이 통례였다.
특히 유기는 부유한 가정에서 많이 썼다.
송시열(宋時烈) 선생께 한 제자가
"집에서 올리는 제사에 목기를 사용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사기는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가기 쉽고,
유기는 닦아서 간수하기가 어려운 점에 생각이 미친 제자의 질문이었다.
선생은 "검소하고 값이 비싸지 않으니 무방하다."고 대답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묘제가 아닌 집안 제사에
목기를 사용하였던 것을 뒷날의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일제 말기에는 이른바 놋쇠그릇 공출로 하여 유기로 된 제기마저 빼앗김을 당해야 했다.
그 뒤에 새로 등장한 것이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제기로,
오늘날엔 이것을 흔히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기를 예기(禮器)라고도 일컬어 중요시하였던 것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생각에서 돌아가신 어른들께도 효를 다하자는 것이었다.
효야 어떠한 형식보다도 양지(養志)가 으뜸가는 것,
제기야 일상 생활의 그릇으로 대신한들 어떠랴.
여기서 퇴계 선생이 특히 제기를 들어 말씀하신 것도
그 본뜻은 효의 마음을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全北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巨岩] 崔 勝 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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