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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은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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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의 여유 스크랩 이면우 시집
오강식 추천 0 조회 134 08.10.15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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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
조회(391)
시집 | 2006/10/07 (토)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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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젖은 단풍나무 - 이면우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은 포풀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소중하다 - 이면우

그 시오리 강변길 혼자 가다가 어쩌다 사람 하나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구비구비 도는 길 저 멀리 보이다 말다 때론 잔솔가지 틈새로 흰옷자락만 퍼뜩, 어느 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곤 잠시 스친다 뒤돌아보면 그 사람은 언제나 집착보다 아득히 멀어져갔다 나는 등을 보인 사람은 참 빨리도 내게서 멀어지는구나, 했다 나도 등대고 함께 멀어져갔음을 알지 못할 때다.

산 속에서 길 잃고 능선을 휘돌아 또 그 자리에 저물던 날, 거기 어디쯤 추적추적 봄비 젖으며 비탈밭 돌 하나씩 들어내던 노인의 굽은 등을 그냥 지나쳤다 소리쳐 묻기엔 멀고 비탈길 올라 다가서기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다만 마음 속 지름길 따라 눈 먼 소, 터벅터벅 가던 거였다.

등 보인 이가 돌아서도록 내가 부르지 않는 것, 그게 부끄러움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등이나 부끄러움은 왜 또 지나고 난 뒤에야 보이는 건가 가슴 깊이 새겨가기로 한다.


*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 이면우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이 확 넓어졌다
그만큼 내가 작아진 게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쪽문을 닫고
눈에 띄게 하루가 길어졌다
이게 바로 고독의 힘일 게다

함께 껄껄대던 날들도 좋았다
그 때는 섞이지 못하면 뒤꼭지가 가려웠다
그러니 애초에 나는
훌륭한 사람으로 글러먹은 거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슬픔이 찾아왔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빙긋이 웃는다
그렇다 슬픔의 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노동과 목욕, 가끔 설겆이, 우는 애 얼르기,
좋은 책 쓰기, 쓰레기 적게 만들기, 사는 속도 줄이기, 작은 적선,
지금 나는 유산상속을 받은 듯 장래가 넉넉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도 괜찮다
여름 황혼 하루살이보다 더 작아져도 괜찮다
그리되면 그 작은 에너지로도
언젠가 우주의 중심에 가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꼬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 앉아 한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줄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기러기 - 이면우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지어 가는 거냐고 아이가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가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며 올려다 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교신 - 이면우

동짓날 저녁 십오층 북쪽 베란다 캄캄한 데서 담뱃불 반짝

같은 동 삼층 북창 드르륵 열리고 조금 있다가 또 반짝

군청색 하늘 속 별들 한꺼번에 반짝반짝
 
 
* 어젯밤 아무 일 없었다 - 이면우

물탱크 점검차 올라간 옥상 난간 아래 꽁초 소복하다
간밤 누군가 여기 서서 한갑 담배 다 피워낸 거다
나는 그이가 무슨 마음을 짓고 허물며
연기를 들이켜고 뱉었는진 몰라도 바로 여기 서서
십오층 난간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을 아주 오래 지켜보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끝내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트 타고
땅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잠그는 일
그날 저녁부터 새로 늘어났다.

 
* 여름은 끝났다 - 이면우

대청호 본댐과 보조댐 새 조정지엔 다슬기 무진장이라
그걸 숙주로 하는 반딧불이 함께 무진장
구절초 는개 오시는 밤
대전 동남쪽과 꼬불꼬불 이어진 골짜기 포장도로 따라
캄캄한 길 혼자 걸어 올라가노라면 반딧불이
수십백천만 반딧불이 골짜기 가득 메워
마지막 혼례여행을 준비중일 겁니다 그걸 깨닫기까지
당신은 한참 혼란스러워야 합니다 세상이
밤이, 삶이 이토록 아름답던가

그걸 처음 본 길 위에서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 여우비 - 이면우

구두 베고 한 사내 잠든 간이역 벤치
은행나무는 푸른 하늘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여우비 지나는 역사驛舍 추녀 아래 몇몇 이들
일어나라 일어나라는 눈짓도 그 사내 못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곧 기차에 실려 꿈꾸듯 먼 길 떠날 게다
은행나무 우산 쓴 사내가 맨발로 구름 위 걷는 동안
머리에 인 구두는 세상에 젖지 않을 게다.

여우비는 장난꾼처럼
맑은 물방울 조루로 휙휙 뿌리며 지나갔다
구두, 은행나무, 산 뚫고 오는 기차도 다 잊어버리라고

간이역에서 기차표 만지작대며 서성이는 동안
여우비, 이 모두를 단 한번에 꿈꿔버리라고.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 이면우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 술병 빗돌 - 이면우

그 주정뱅이 간경화로 죽었다 살아 다 마셔버렸으니 남은 건 고만고만한 아이 셋. 시립공동묘지 비탈에 끌어 묻고 돌아 나오는데 코훌쩍이 여섯살 사내애가 붉은 무덤 발치에 소주병을 묻는다 그것도 거꾸로 세워 묻는다

그거 왜 묻느냐니까 울어 퉁퉁 분 누나들 사이에서
뽀송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안 잊어버릴라구요




 
*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 이면우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 공중정원 - 이면우

거기 등나무 그늘 지우며 저녁이 갔다
콩새떼 등나무 이파리 깔고 덮고 자러 왔다고
한참 조잘댔다 거기 등나무 아래 남은 이들 지우며
밤이 왔다 안 보여 벌레만큼 작아진 이들
등나무 줄기 길 따라 올라가고 흰 대접달 밤 새
말갛게 씻긴 밥풀떼기별 듬성한 하늘길 지나 아침은
아주 잠깐 세상을 반짝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 아래 나 내려앉을 만큼 자리 남았느냐고
그럼 지금 당장 뛰어내리겠다고
콩새떼 첫 노래를 시작한다
 
* 매미들 - 이면우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컨 켜놓고 TV 보며
울어도 소리없이 우니까

요렇게 우는 거라고
목숨이 울 때는 한데 모여
숨 끊어질락 말락 질펀히 울어젖히는 거라고

옛날옛적 초상집 마당처럼 가로등 환한 벚나무에 매달려
여름치 일력 한꺼번에 찌익, 찍, 찢어내듯 매미들 울었다
낮 밤 새벽 가리잖고 틈만 나면




 
* 봄밤 - 이면우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하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 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 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 나무 베기 - 이면우

종산 낙엽송 처음 벨 때
가슴 급히 뛰고 톱 잡은 손 덜덜 떨렸다
대지 깊숙이 뿌리 박은 나무 나이 삼십년
신전 기둥처럼 그 키 우뚝 솟았다 오층 높이
숲을 꽉 채운 신비한 힘이 첫 톱질을 더디게 한다
사실 껍질은 톱날을 받자 붉은 피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마른나무 톱질은 상쾌하기도 한 것이다
이건 나무야 단순히 나무일 뿐이라구, 다짐해도
먼저 넘어뜨려야 할 건 두려움
그리고 나무들 하늘 떠받든 숲에서 나는 혼자
버섯막 선반 맬 쭉 뻗은 나무가 절박한 사내, 끝내
강철 섬광은 눈을, 마음을 찌르며 나무의 살 속으로 파고들고
거대한 정적과의 길고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된다.

이윽고 나무는 다른 나무들 사이로 쿵 나가떨어졌다
바로 그 자리, 최초의 강렬한 송진 냄새 흩어지고
흰 단면 공기와 접촉하며 나이테 갈색 뚜렷해질 때
으깨진 풀숲과 여전히 대지에 뿌리 박은 둥치 주변에는
쓸쓸함이 긴 휘파람 끝처럼 떠돈다 그렇게
숲 바닥에 나둥그러진 건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이듯 날카로운 새 울음을 들었다.

마지막 세 그루째는 물도 한모금씩 마셔가며
산 너머 호숫가 버섯막까지 운반할 궁리도 톱질과 함께 하며
산림감시원이 나타날지도 모를 숲 저쪽
인적 끊긴 길을 쏘아보기도 했다.


* 노천시장 - 이면우

나무 되고 싶은 날은
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
거기 나무 되어 서성대는 이들 많다
팔 길게 가지 뻗어 좌판 할머니 귤탑 쓰러뜨리고
젊은 아저씨 얼음 풀린 동태도 꿰어 올리는
노천시장에선 구겨진 천원권도 한몫이다 그리고
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
깍아라, 말아라, 에이 덤이다
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은, 저녁 숲
바람에 언뜻 포개지는 나무 그림자 닮았다
새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지저귀고 포르르릉 날다가
장바구니에, 검정 비닐봉지에 깃들면
가지 끝에 매달고 총총 돌아오는 길
사람의 그림자, 나무처럼 길다.
 
 


 
* 미인 - 이면우

나이 마흔 넘어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비껴 선 건 아니나 무언가 쑥스러움 먼저 내달려와 멀리 산이나 나무를 함께 보고서야 담담해지던 거다.

한때는 선, 색, 몸집이 먼저 눈 속에 들어오더니 호숫가에 살며 만나는 이여 목소리, 미소가 깊이 와닿는다 이건 외로워진 탓일 게다 속짐작으로 덮고도 여인의 따뜻함 오래 남는다

또 하나,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 생의 북쪽 - 이면우

일구구팔년 일월 팔일 경유보일러 끄다 중국산 무쇠난로 거실에 놓고 가족들 거기 함께 잠자리 펴다 혼자 잠들기, 아직은 두렵던가 열살 사내애 자주 탄성을 내지르다 잠들기 기다려 이력서 펜으로 쓰고, 고쳐 쓰고 이른 아침 시내로 가 세 군데 봉투 넣고 허리 깊히 숙여 절했다 다시 눈 쌓인 가로에서 여기저기 부탁 전화, 한곳 방문하고 느지막히 돌아와 임간도로 주변, 포크레인에 뿌리째 뽑혀 한껏 가벼워진 나무들 한뼘씩 톱질, 배낭 가득 담아 하낫, 두울, 점등하는 마을 향해 산을 내려왔다 타닥, 타다닥, 갈참나무 샛노란 불길 위에 캐나다산 괴탄 한삽 덮으면 마음도 따라 어둑해지다 난로 속처럼 천천히 붉어졌다 여러 날째 등 대고 자는 중인 여편네보다 먼저 눈뜨는 깊은 밤, 화격자 숨죽여 흔들면 불꽃은 식은 재 떨고 말짱히 되살아나기도했다 그렇다 이스탄불, 베이징, 신의주, 상 파울로에도 잠 못 이루는 사내들이 있어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중일 거다 어둠 속에서 잠든 가족의 얼굴을 오래오래 응시할 거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상의 북쪽이 아니라 생의 북쪽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누구라도 자기 안에 북쪽을 지니고 간다 좀 더디지만 북쪽에 쌓인 눈도 때 되면 녹고 꽃은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 터뜨리기도 했다.


* 쓸쓸한 길 - 이면우

왕벚나무 아래 젊은 남녀 공부하러 오가는 길
나는 손공구 쥐고 일 다녔다 먼저
흰 피 같은 꽃 피고 살점 뚝뚝 패이듯 꽃 진다 그 위로
자동차 달리면 꽃잎들 솟구쳐 되풀이되는 생
음미하듯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알 수 없는 힘이
세상은 참 아름답다고 혼자 중얼대게 하는 봄
바람 불던 밤, 꽃잎들 한꺼번에 곤두박질치던 길
다투는 기척 중에 여자 목소리 날카롭게
그래 니가 내 인생에 뭐 하나 해준 거 있어, 하고 울린다
순간 휘청하고 벚꽃 흰빛 쓸쓸해지며 가지에
간절히 매달아둔 쉰살 봄 일시에 다 떨어져내려버렸다
나는 산 너머 집 쪽 밤하늘에 대고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보일러 스위치 넣고 삼십분 뒤 책 겉장 갈아댄
박용래시선집을 펼쳤다.
 


 
 
* 산 - 이면우

아내와 처음 맺어진 곳 산이다 돈 안 드는 꼬불꼬불 산길 가다가 그예 일 저질렀다 세월 한참 흘러 아내와 깊이 맺어진 곳 산이다 느타리 버섯막 세울 리기다송 열 댓 그루 산림감시원 피해 달 밝은 봄밤 마을로 들여가는데 아내는 낭창낭창 우듬지 메 앞서고 밑동 내 어깨에 얹어 소쩍새 우는 종산 등고선 따라 뒤엣 것 맨 앞에 두고 다시 뒤엣 것 맨 앞에 두며 밤새도록 먼 마을로 들여가는데 철쭉은 뭉텅뭉텅 붉고 송진은 온 몸에 찐득찐득 으깨진 풀냄새 가득한 어디쯤 나란히 앉아 땀 훔칠 때 골짜기 저 아래 외로운 불빛 깜박깜박 나는 마을이 생겨난 아득한 옛날부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깊은 밤 여기서 내려다보았을까 가슴에 불빛 같은 게 깜박였을까 그리고 지금 사내 계집 나란히 산에 죄 짓는 중이다! 그렇게 한꺼번에 뜨거워지며 달빛 가득한 골짜기 향해 짐승의 외마디를 내지르던 거였다.


* 부전자전 - 이면우

일찍이 성욕 때문에 참 고생 많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고 올라와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꼬집어 죽여줘야 했다

나이 쉰 되며 비로소 피가 맑아졌다 속으로 휴우, 한숨 쉬며 안도한다 이젠 여자를 무심히 볼 수 있게 된 거다 그런데

열두살 된 아이, 제 고추가 너무 자주 빳빳해져 고민이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밤, 나는 꼼짝없이 한방 꽝 맞아버렸다

아내는 십년농사 헛농사라며 방바닥을 친다 신부님 되라고, 눈 비 뚫고 업고 걸려 읍내 성당에 다녔는데 그래서야 어떻게 그 먼 길 가겠느냐며

그러더니 어느새 깔깔대며 부전자전, 하고 외치는 것이다.


* 메이드 인 차이나 - 이면우

이 주머니칼은 국경을 넘어왔다 나는 금 천 원의 주머니칼을 몇 번 펴고 접으며 낮은 추녀 끝 연통이 흰 연기 퐁퐁 내뿜는 낯선 거리로 넘어갔다 말채찍마냥 쌩쌩한 북서풍 안고 무악재 너머 개성 평양 신의주 지나 바다 같은 강 건너 연탄난로 벌겋게 단 작업장까지 갔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 프레스는 풍풍딱 연마기는 쌩쌩 숫돌카터 연달아 샛노란 산화철꽃 피워올리는 거기, 누군가 싸구려 주머니칼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게 꼭 자기라는 듯 마스크로 반쯤 가린 완강한 얼굴들 사이에 잠깐 머물렀다 나는 이이들이 꾸는 꿈을 안다 낯선 이방의 말로 꿈꾸더라도 안다 나도 아주 오래 모국어로 같은 꿈을 꾸어냈기 때문이다 깊은 숨 내뿜듯 산화철 묵직한 휘장 쳐들고 나오자 문득 일구칠공년대 대림산업 양식기 공장이 있던 대전 성남동이다 성문 밖 텅 빈 지붕에 땅에 북서풍에 실려온 눈 지금 무차별로 쌓인다 나는 그 위에 발자국 도장 찍어본다 메이드 인 차이나




 
* 버찌들 - 이면우

아이는 아홉 살 팔 개월이 됐다 화장실 문 안 닫고 오줌발 쏴 십 팔 평 아파트 아침 가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로 채워 놓는다 무어든 뒤집어 벗기 거실에서 제 방까지 대여섯 발짝 풍풍 내닫기 방문 잠그고 랩 흥얼대는 통에 자주 소란해졌다 그런 아이에게 봉투 열면 강아지 불쑥 솟아 고개 까딱대는 편지가 왔다 거기 커다랗게 단 두 마디 너 나 좋아하지? 나 너 찍었어 삼층 바닥까지 솟은 벚나무 무성한 잎 새로 연초록 버찌들 언뜻언뜻 비치더니 어느새 붉고 검은 마침표 찍는 오월 손가락 새에 눌러 보면 영 안 지워질 듯 진보라로 물들였다 그 벚나무 아래 철 이른 수박 실은 포터 머물다 가고 산보 나온 신혼부부 나란히 고개 젖혀 올려다보는 저녁 강아지 편지 발송인에 대해 묻자 아이는 노래하듯 버얼써 끝났어요 걘 바람둥이예요 지금은 내 동무하고 좋아하는 중인 걸요 점점 뜨거워지는 밤 먼저 잠든 아이 이마에 맺힌 맑은 버찌들 손바닥으로 훔쳐 주었다.

 
* 화염경배 - 이면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 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임금인상 - 이면우

여섯 자리 자동차 번호판 중 어떤 건
등 서늘해지도록 몇년째 내 임금과 닮았다 그러나
체념을 모르는 나는 스스로 임금인상을 결행한다
아침 일찍 출발해 산길 십리쯤 걸어 출근하고 건강관리비 십만원
돌아와 초등학교 오학년 아이 학습 도와주고 자녀교육비 십만원
구내식당 보일러 손봐주고 점심 제공 받으니 식대 오만원
누가 일년 단위 계약직 보일러공의 임금을 물어오면 짐짓 그렇게
상기의 금액을 덧붙여보기도 하는 것이다.

 
 
 
* 스와니 강 건너기 - 이면우

강 건너는 송전선에 대고 저기다 흰 빨래 푸지게 해 널면 단박에 마르겠다던 여자와 강 건너 외딴 오두막 살림 십 년 못 채웠습니다 남자는 강 건너는 송전선을 보며 저기다 도르래 걸고 두 손 꽉 움켜잡고 단숨에 미끄러지면 좋겠다며 흰 구름 푸른 하늘 아래 가끔 쪽배 저어 마중 나오는 여자를 기다렸습니다 한 나절 강 때리며 지나가는 빗방울 세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 함께 부르다 웬 물비릿내가 이리 지독하냐며 방문 닫고 떨리는 손 문고리도 걸었겠지요 바람 불면 먼저 출렁거려 준 강 세상이 허락한 물 위의 날들


* 물에 잠긴 스와니 강 - 이면우

내 쪽배는 초등학교 운동장 삼십 미터 상공을 지난다
그 날의 풍금소리는 배 지나간 자리 물결무늬로 올라온다
스와니 강, 아름다운 남자 포스터는 강마을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몰래 다녀갔다 나는 빈 운동장가에서
열린 창으로, 붉은 커튼 사이로 흘러나오는
선율 따라 산 넘고 강 건너
한없이 갔다.

생을 축음기에 얹어 되돌린다면
바늘이 가볍게 긁어내는 슬픔이 강처럼 흘러올 것이다.

 
*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 바다와 뻘 - 이면우

밤게 짱망둥어 갯지렁이가 목숨을 괴발새발 뻘 위에 쓴다
온몸 밀려 끌며 쓴다 그러면 바다가 밀려와 말끔히 지운다
왜 하루 두 번 바다가 뻘을 지워버리는지
나이 쉰에 겨우 알았다 새로 살아라
목숨 흔적 열심히 남겨라
그러면, 그러면 또 지워주겠다 아아아 외치며 바다
막무가내 밀고 들어왔다




 
* 시가 찾아와야 쓰지 - 오마이뉴스

<저 석양> <그 저녁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등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한 이면우 시인의 직업은 보일러공이다.

처음 이면우 시인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글을 쓰고 있던 <장작불의 불땀처럼>에서였다. 시인은 가끔 그 사이트에 있는 시 쓰기의 옛 도반을 찾아오곤 했다. 그의 필명은 어린 시절 별명을 딴 '돌부처'였다.

지난 주 금요일 나는 그가 근무하고 있는 대전 정주 3청사 근처에 있는 기술신용기금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내 아이디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내 뜻밖의 전화에 매우 반가워했다. 시인과 나는 그가 근무하는 기술신용기금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화요일 11시경에 만나기로 했다.

화요일 오전 11시 이면우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방문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시인은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답했다. 난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근무처인 기술신용기금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보일러실은 지하 주차장과 함께 있었다. 키가 땅딸막한 시인과 시인 보다 5cm쯤 하늘에 가까운 나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장작불의 불땀처럼> 사이트에서 짤막한 댓글을 나누기 시작한 지 1년 반만의 만남이었다. 먼저 그를 보일러실 중앙에 세워놓고 셔터를 눌렀다.

그의 최종 학력인 중학교 생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일장 대회에 나가서 상 타던 이야기, 그리고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를 왜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이문재 시인이 <문학동네>라는 문에지에 쓴 <내핍의 시학, 그 따뜻하고 서늘한>이란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자, 시인 이면우씨는 대뜸 새 칫솔을 꺼내주며 양치질을 하라고 했다. 이씨는 외출을 할 때도 반드시 칫솔을 챙겨,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무언가 먹고 나면 기어코 이를 닦아야 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지만 자기집 손님에게까지 이를 닦으라고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오래 된 주공 아파트 욕실에서 푸카푸카 양치를 한 다음 자리를 올겼다."

내가 그 얘기를 꺼냈더니 시인은 "내가 그 건 너무 했지요?"라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뭘요? 좋은 습관인데요"라고 나는 그를 안돈시켰다.

이윽고 점심 시간이 됐다.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근무처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중국집이었다. 그는 잡채밥을 시키며 "밥이 맛 있어요"라고 밥 예찬을 시작했다.

"얼마나 드시는데요?"
"냉면 같은 경우는 두 그릇 먹어요."

점심을 끝내고 그의 일터로 되돌아가는 길에 그는 중학생인 아들을 위해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신발 한 켤레를 샀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단다. 공부하면 경쟁해야 하고 그러면 삶이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그 대신 몸의 감각을 이용해 노동을 하면 생이 행복할 수 있다고 얘기한단다.

그의 부인은 두어달 전부터 간병인 일을 하고 있는데 24시간 근무하고 하루 쉬고 또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고된 일이다. 보수래야 이것 저것 제하고 나면 80∼90만원에 지나지 않지만 호스피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그의 아내에겐 돈보다 더 큰 기쁨과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했다. 딱 1년만 간병인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단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녁밥을 짓는 일이라든가 가사일은 자연스레 그의 차지가 돼버렸다.

다시 그의 일터에 도착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내게 칫솔을 주며 양치질을 권했다. 보일러실 한 켠에 있는 세면장에서 양치질을 하고 나서 5층에 있는 체력단련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했다. 삶에 대한 성실성,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결코 자기 분수를 벗어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므로써 안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치밀한 전략적 사고였다.

중학교 때 백일장 대회를 휩쓸던 그는 시가 가진 관념이 싫었다. 구체적인 것, 생계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의미 있는 거라고 믿었던 그는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詩)를 버렸다. 그렇게 시를 버린 그가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는 어느 소설가로 부터 부추김을 받은 끝에 나이 40세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 3편을 쓰게 됐다.

편당 4만원씩 모두 12만원의 원고료가 생겼다. 그 당시 그 돈은 쌀 한 가마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어릴 적 조상들이 살아 있다면 "야, 면우야. 어떻게 그런 걸 써주고 쌀 한 가마니를 얻을 수 있냐?"라고 놀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아무튼 그는 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내내 삶에 대한 구체성과 자기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시는 도처에 삶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시의 단점에 대해 얘기헀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슬픔이 없다는 게 그의 시의 단점이라고 말해주었다. 삶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그의 시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슬픔을 제거해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장 여섯 시간의 대화 중 세 시간만 녹음하고 세 시간은 신변잡담으로 허비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그는 내게 평범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누히 강조했다.

중심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와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아늑한 것인가를 말했다. 그에게 있어 한 재벌회장의 죽음은 세상의 중심부에 진입한 삶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깨우쳐주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시인은 주변부 생을 사는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가를 강조했다. 나는 시인에게 스트레스를 두려워 말고 좀더 열심히 시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시인은 시가 찾아와야 쓰는 것이지 자기가 시를 찾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오후 5시 그의 일터를 나섰다. 그는 아내가 집에 없어서 집으로 모셔서 대접하지 못한다며 못내 미안해했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절룩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그는 거의 7800m쯤 되는 먼 거리를 배웅했다. 작별의 악수를 하고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시인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그에게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슈퍼에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솔직히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여편네는 장보기
상차림이 수월해서 좋고 아이들은 여전히 심드렁하지만
나는 내용이 빈약한 수입을 빈 깡통 속에 숨길 수 있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 상상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
때때로 나는 저녁 식탁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믿지 말라
통조림 속에는 그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맹독이 있음
언제 뛰쳐나와 우리를 일시에 거꾸러뜨릴지 몰라
마늘과 고춧가루를 뿌려 펄펄 끓여먹도록, 일순 마음의 조리개가
열리고 가벼운 탄식처럼, 깊고 따듯한 저녁식사는 끝났다
모두 평온하고 통조림처럼 무사한 저녁이 슈퍼에 많다
아직 삶에 지치지 않은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이면우 시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전문

"모든 시인은 유태인이다"라고 한 유태인 시인 파울 첼란의 말이 떠오른다. 이면우 시인, 그도 예외없이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운명을 슬퍼할 줄 모른다. 그가 지닌 절제와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덕목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를 삶에서 지치지 않게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던 것이다.

난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삶이 행복하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행복을 지켜나가는 방식에 대해 절로 터져나오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삶의 이면을 더듬고 생의 비밀을 드러내는데 인터뷰만큼 유효적절한 수단이 있을까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시인의 진면목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했을까. 여기 그와 6시간에 걸쳐 나눈 설익은 언어들을 조심스레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비록 그가 세상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부디 그의 진실된 육성(肉聲)만은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하기를 바랄 뿐이다.
/안병기 기자 [오마이뉴스 2003-08-15]


* 갈무리된 분노 - 마른 미역과 뿔(이면우) - 김정란의 현대시 쉽게 읽기


뿔 / 이면우

몇 몇 타고 더 많은 이들 남겨진 눈 속 버스 정류장
낡은 짐짝처럼 귀퉁이에 잊혀졌던 그 노파
하늘 땅 새 폭설 혼자 걸어나갔다
이 아침 무엇이 그녀를 눈발 헤치며 시내로 가게 하는지
남은 이들 서성대며 눈길 주다 눈보라에 녹아들고
먼저 떠난 버스, 고갯길에서 부르르릉 자꾸 미끄러진다
이윽고 그 노파 멈춰선 버스 앞질러 올라갈 때
굽은 등에 뿔 하나 솟아 끄덕끄덕댄다
초만원 보스에 갇힌 한 남자, 불쑥
장감 낀 손 유리창에 문질러 선명해진 세상 속
그녀 등허리에 솟아 걸음 따라 흔들리는 그건
마른 미역 몇 오라기였다

-[뿔],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작과 비평, 서울, 2001

저는 이면우 시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1951년 대전 출생. 한 권의 시집을 무명 출판사에서 내었고, 그 시집이 눈밝은 이들의 눈에 띄어 최근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집을 내게 되었다는 것. 현직 아파트 보일러공이라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평소에 저는 창작과 비평사의 진보상업주의를 비판해 왔습니다만, 이면우 시인의 발굴은 평가받을만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시인들에게 창작과 비평사가 좀더 많은 비평적 투자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면우 시인의 시는 겉으로 보면, 그 동안 민중시 계열에서 쓰여져 온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그의 시는 단순한 로포르타쥬가 아닙니다. 이면우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거나, 또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우화로 바꾸어 교훈을 끌어내지 않습니다. 그의 시에 우화나 교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정교하게 시의 회로를 거쳐 언어화되어 있습니다. 그 정교함은 이 시인이 시의 정수라고 할만한 것에 정확하게 다가가 있음으로써 얻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중앙문단의 손때를 타지 않고, 혼자서 외롭게 작업하면서, 대지와 한몸이 되어 육화시킨 신성함의 직관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오랫동안의 고독은 그의 영광입니다. 만일 그가 <근원으로의 회귀>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너무나 세속적인 생의 태도를 지닌 다른 시인들처럼 휘황한 조명을 받았더라면, 도저히 그런 자연스러운 장치를 개발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베트셀러시인들은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함으로써 시를 희생시켜 버립니다. 그들의 시는 초월의 허망한 포즈를 보여줍니다. 이면우 시인은 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 그의 시는 언어를 도구화시키지 않습니다. 리얼리즘 계열의 시들이 현실적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적으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대체로 그들의 언어가 메시지에 언어를 종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들 안에서 언어는 독립성을 잃고,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프로퍼갠더에 사용되는 구호가 되어 버립니다. 언어는 언어 자체의 신화적 환기력을 박탈당하고 정치적 구호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예들을 사회주의의 경향 문학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면우 시인의 등장으로 인해서, 우리는 대한민국 시 안에 서서히 리얼리즘의 즉자적 언어를 극복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이 시작되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아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인은 아주 느슨한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어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사색해온 한 시인의 문학적 사유가 꽉꽉 쟁여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을 읽어볼까요?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입동]에서

이 한 구절 안에는 자연과 인간과 시간과 노동이 꽉 차있습니다. 특히 언어가 꽉 차 있습니다. 엄마가 끓여주시는 된장국 한 그릇은 바로 이런 <기호적 충만>으로 인하여 시적 먹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이 시에 사용된 무우는 자연의 무우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냥 무우가 아니라, 시적 행위로 인하여 무우의 안으로부터 언어의 결을 가지게 됨으로써, 詩化된 무우, 보송보송해진 다른 물질인 무우입니다. 이런 시적 장치들이 이 이 시집 안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워 그냥 지나치게 되는, 그러나 시라는 영혼의 숟가락을 들고 삶이라는 밥을 오래 먹어보지 않은 자는 만들어낼 수 없는 어떤 섬세한 말의 얼개(아마 시적 지성의 얼개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가 보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기쁨은 각별합니다.

그럼 이제 인용시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시적 정황을 살펴볼까요? 폭설이 내린 겨울입니다. 만원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그 버스에서 노파 한 사람이 내려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 노파의 등 뒤에 마른 미역 몇 쪼가리가 흔들립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이 간단한 에피소드는 주어진 정황 안에서 몇 차례의 변형을 겪습니다. 우선, 노파는 <타자>의 전형입니다. 만원버스에 실려 흔들려야 하는 서민들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낡은 짐짝처럼 귀퉁이에 잊혀졌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타자 중의 타자입니다. 그 못난 여성이 제일 먼저 버스를 떠납니다. 시인은 한 마디도 않고 있지만, 거의 쫓겨나는 형국이었겠지요. 그녀는 짐짝 중의 짐짝이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시인은 그녀가 <하늘 땅 새 폭설 속 혼자 걸어나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노파는 버스라는 문명의 이기에 개신개신 달라붙어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혼자 자연속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단순히 폭설이 내린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하늘 땅 새 폭설>인 것입니다. <버스>라고 하는, 자연과의 단절을 명하는 문명의 利器를 내려서자마자, 곧, 대번에, 당장, 노파의 존재로 인하여, 자연과의 연속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늘 땅 새>라는 표현 단 한 줄로, 우리는 이 노파에게 전혀 다른 위대성의 차원이 부여된 것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그냥 단순한 노파가 아니라, <하늘 땅 새>의 존재, 즉 혼자의 몸으로 우주와의 연속성을 회복시킨 대모여신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그녀가 <미역>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딸의 산관을 하러 가는 가난뱅이 촌부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 지수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미 이 대목에서 출산을 관장하는 삼신할미의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이니까요.
그렇게 읽고 보니, 이 巨女 앞에서 버스는 대번에 짜부라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버스가 <짐짝같이> 구박해서 쫓아낸 가난뱅이 노파가 오히려 버스를 버려버린 꼴이 됩니다. 버스는 이제 안이 아니라 바깥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버스는 고갯길을 못 올라가서 <부르르릉> 못난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지만, 노파는 자연의 도전 앞에서 무력하게 <멈춰 선> 버스를 썩썩 앞질러갑니다. 그녀가 버스를 이겨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굽은 등에 <뿔>이 하나 솟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시인은 급하게 김서린 유리창을 닦습니다. 그렇지요, 시인은 보려는 자, 알려는 자입니다. 시인은, 김승희 시인의 재미있는 공식에 따르면, 詩人은 視人이기도 하니까요. 어떤 궁극의 메시지의 도래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자, 그가 바로 詩人-視人인 것이지요. 그는 그것이 미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즉, 그는 노파의 늙은 몸이 미역으 상징되는 재생의 드라마가 집전되는 聖所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깨달음의 순간 아닌가요.

그런데 왜 시인은 <미역>을 <뿔>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왜 이면우는 대지모신에게 이런 공격적인 이미지를 부여해 주었을까요? 정신분석학적으로 대지모신과 <뿔>의 연접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대지모신의 원형인 이시스 여신은 암소였거든요. 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렇게 멀리까지 에둘러갈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저는 가장 무력한 것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이면우의 상상력에 더 관심이 갑니다. 이것이 이면우적 상상력의 본질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무력하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의 시 안에는 본질적 층위에서 소환된 분노가 있습니다. 또는 에너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여느 운명론자나 초월주의자들과 달리 쉽게 초월을 말하거나 자연에 귀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몫을 언제나 남겨둡니다. 이점에 관해서 그는 이른 바 정신주의자들이 보이는 태도에서 훨씬더 진전된 인식을 보여줍니다. 여느 시인 같았다면, 아마 이 대목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어머니 대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면우는 다릅니다. 그는 긴장하고, 숨겨진 에너지를 끌어모아, 아주 좁은 공간으로 관통시킵니다. <뿔>은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삶이라는 아주 좁은 통로를 빠른 속도로 관통하면서, 자연의 힘은 불쑥 일직선으로 솟아오릅니다.

이 말라비틀어진, 가난한 노파의 미역줄거리는 그녀의 <굽은 등>이 상징하는 바, 현실의 억압과 신산함을 나타내는 늙은 몸 위에 매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력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공격으로, 뿔로 매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를 유린하고 괴롭혔을 가부장적 팔루스에 대한 상징적 복수일런지도 모르지요. 잘난 팔루스 한 개 남겨놓고 나머지 팔루스들을 거세시켜버리는 자본주의라는 팔루스.

어쩌면, 이면우 시인의 직업이 <보일러공>이라는 것도 이렇게 잘 숨겨져 있다가, 갈무리되어 터져나오는 분노의 이미지들과도 무관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의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는 특히 분노를 잘 갈무리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형태가 얻어질 때까지, 이 헤파이스토스가 자신의 영혼이라는 용광로를 얼마나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을지 우리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런 표현을 보십시오. 제 짐작이 틀림없습니다.

지는 해 따라 숨가쁘게 달려갔지요 거기
세상에서 제일 큰 붉은 마침표
아무렇지도 않게 품어버리는 서쪽 바다 처음 보며
일천 와트 플럭에 등 꽂혀 덜덜덜 오래 그냥 떨었지요 -[서쪽 바다]에서

 
* 이면우

1951년 대전 출생.
2002년 제2회 노작문학상 수상. 홍사용문학상 수상.
시집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박수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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